아름다움을 절제하고, 추함을 마주하자
아름다움과 추함은 하나다
지인에게 해바라기 한 송이를 선물받았다. 포장지로 잘 감싸져 있었는데, 줄기 끝에 플라스틱 캡이 보였다. 물을 넣어 꽃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용도인 듯했다. 해바라기를 창가에 세워 두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 최근 살펴봤다. 꽤 시들었으나 아직 노란빛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캡 속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고인 물이 썩어 누렇게 변했고, 줄기에는 정체 모를 애벌레가 기어 다녔다. 스스로의 무심함을 반성하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도통 추함을 마주할 기회가 없다. 아름다움이 과잉됐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보면 다채로운 상품과 친절한 서비스, 힙한 라이프 스타일이 넘쳐 난다. 식사도, 여행도, 우정도, 사랑도, 육아도 화려하다. 당신 역시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어서 지갑을 열어 소비하라고 자꾸만 부추긴다. 대량생산·대량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무한한 욕망을 만족시키려면 무한한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반드시 추함이 존재한다. 유무상생인 법이다. 도시의 오물은 지하로 흐른다. 그곳엔 쥐와 바퀴벌레가 가득하다. 쓰레기는 어딘가로 옮겨져 묻히거나 소각된다. 시골에서 생산된 전기는 송전탑을 타고 도시로 흘러가 24시간을 밝힌다. 시골에 남는 건 매연과 방사성 폐기물, 오염된 물과 공기, 토양이다. 그뿐인가. 아름다움은 무수한 노동자의 피와 땀을 먹고 산다. 그들은 저임금에 시달리고, 산업재해로 스러진다. 노동기본권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딛고 소위 말하는 선진국 행세를 하고 있다.
뒤엎어야 산다
지난달 24일 서울시청 인근에서 ‘9·24 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 주최측에 따르면 400여개 단체가 함께하는 조직위원회와 2천400여 명의 추진위원이 이번 행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후 관련 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장애·여성·빈민·지역단체가 연대했다. 3만5천명에 달하는 시민이 뿜어 낸 열기는 뜨거웠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가, 이제는 내일의 문제가 아닌 오늘의 문제라는 걸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2019년 기후행진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1) 기후위기를 인정하고 비상선언을 실시하라 (2) 온실가스 배출제로 계획과 기후정의에 입각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라 (3)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독립적인 범국가기구를 구성하라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마련하며, 민주적 참여 및 의사결정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는 전방위적인 구조개혁을 전제로 하나, 현 체제의 변혁으로까지 나아간 건 아니다.
이에 반해 2022년의 요구는 체제 변혁적이다. (1) 화석연료와 생명파괴 체제를 종식해야 한다 (2) 모든 불평등을 끝내야 한다 (3)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한다는 요구였다. 실패로 끝난 2019년 기후행진에 대한 성찰과,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이 반영된 요구다. ‘불평등’을 전면에 내세운 게 눈에 띈다. 기후위기의 주범은 거대 자본이고, 최대 피해자는 비정규 노동자·장애인·빈민·지역주민·동식물 같은 사회적·생태적 약자다. 불평등한 체제는 기후위기를 낳았고, 기후위기는 불평등한 체제를 강화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기후투쟁은 곧 계급투쟁이다.
기후정의는 실존적 물음이다
본행사가 시작되고 여러 발언이 이어졌다. 연단에 선 하태성 삼척석탄화력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은 대도시 시민에게 외쳤다(있는 석탄발전소도 줄여야 할 판에 삼척에는 새 발전소가 건설되려 한다). 에너지를 아껴 쓰고, 아파트 평수와 냉장고 사이즈를 줄이라고! 그는 도시의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과잉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눈앞의 쾌락을 선사했다. 이곳을 위해 저곳을, 오늘을 위해 내일을 죽였다. 그건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불평등하다.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가 떠오른다. 시골살이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자연은 냉혹하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도시에서처럼 돈을 준다고 달려와 줄 사람은 많지 않다. 어딘가 의존해서는 안 된다. 자립해야 한다. 겐지가 시골에서 몸으로 부딪쳐 가며 깨달은 바다.
기후정의를 추구하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러울 게 뻔하다. 안락한 삶을 제법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간 우리는 아름다움에 중독된 채 살아왔다. 기후정의는 어느 순간 실현되고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실천을 요구한다. 당위적 구호가 아닌 실존적 물음이다. 낭만적으로 외치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굳은 각오와 의지가 필요하다. 행진하는 발걸음과 따라 외친 구호가 가볍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