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며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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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지금 쓰고 있는 서른 번째 이 글로 ‘女性여성女聲’ 연재는 끝이 날 것이다. 《비정규노동》 2015년 3·4월호에 처음 글이 실렸으니 꼭 5년 만이다. 길어도 4천 자가 채 안 되는 짧은 글을 두 달을 주기로 써서 보내면 되었으므로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았을 법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원고 마감일을 넘기곤 했다. 그렇게 겨우 글을 마무리하여 떠나보내고 난 후에는 어지간해서는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갖가지 주장이며 사유며 감상을 실은 하고많은 매체들 속에서 그 글들이 어디로 흘러 들어가 몇 사람에게나 읽힐까에 관해서는 가끔씩이나마 궁금해 했던 것도 같다. 이따금 담당 편집자나 인터뷰에 응해 준 이들로부터 글에 대한 간단한 피드백을 받긴 했지만, 그밖에는 그동안 그 글들을 누가 어떻게 읽었는지 전혀 모른다. 알 수도 없었고, 애써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글들을 써 보내면서 그 글들을 접하게 될 뭇 여성들이며 소수자들이 행여나 그 글들로 인해 불편해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글을 쓰기 위해 그동안 만난 여성은 스무 명이 채 못 된다. 농촌, 소도시, 대도시 등지에 살고 있는 20대부터 70대까지의 농민, 장애인, 성소수자, 결혼이주민, 예술가, 교사, 환경운동가, 비정규 노동자, 학생, 싱글맘, 프리랜서, 백수, 비혼인, 페미니스트··· 이런 가지가지 정체성을 겹쳐 입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다양한 세대의 그들은 가까이에서 살건 멀리서 살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 왔거나 그동안 적어도 한두 번은 본 적이 있는 평범해 보이는 나의 지인들이었다. 그래도 제법 오래전부터 보아 온 사이니 그에 관해 꽤 알고 있다고 여겨 왔는데도 막상 만나서 긴 시간, 속 깊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마주할 때가 잦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든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든 제각각 직조되어 온 저마다의 삶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얘기를 듣고 있자면 ‘힘껏’ 살아오면서 품어 간직하게 된 빛과 온기가 그들의 표정을 통해 지펴지곤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내겐 다 소중하고 특별했다. 


누군가를 직접 만나지 않을 때에는 젠더 이슈와 중첩되어 있는 정치나 문화 관련 내용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페미니즘, 미투 운동, 여성 혐오, ‘위안부’로 통칭되어온 성노예 문제, 녹색정치, 여성의 슬픔과 고통과 가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쓰고 배운다는 것, 여성들이 자주 꾸는 두려운 꿈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연장선상에서 차이가 차별로 치환되어 온 부조리한 인간사라든가 ‘타자’의 시각으로 세상 바라보기와 같은 얘깃거리들을 끄집어내어 나눠 보려 했고, 그러는 동안 앞서 언급한 내용들에 관해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힘이 생겨나기도 했다. 


여차저차하여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그동안 이 나라 안팎에서는 참으로 많은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겠으나 우선 떠오르는 ‘사건’은 촛불 혁명에 의한 정권 교체와 들불처럼 일어났던 미투 운동이다. 유감스럽게도 촛불의 정의에 힘입어 세워진 문재인 정부의 한계가 정권 교체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드러났고,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 가던 미투 운동이 어느 틈엔가 사그러들어 버리긴 했지만 분명 5년 전 그때와는 달라진 우리가, 달라진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의 영향이기도 했을 텐데, 페미니즘이 지난 몇 해 동안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자주 언급되고 회자된 적이 없었다. 꽤나 고무적인 현상이었고, 덕분에 인터뷰하기 위해 만났던 여성들과 더 많은 살가움이며 용기를 주고받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듯도 싶다.


집과 일터와 학교와··· 딛고 선 어디에선가 맞닥뜨려온 문제들에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그것들과 동무하며 현재에 이른 여성들을 만나오면서 그들이 들려주는, 그들 각자 안에 깃들여 있는 수십 가지 목소리의 아주 일부라도 글 속에 좀 잘 담아내고 싶었다. 더 많은 ‘평범한’ 여성들의 진정성 어린 목소리가 더욱 크게 자라나고 잘 울려가길 오랫동안 바라왔고, 묻히어 왔거나 주눅 든 채 떠돌아 온 소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골고루 세상 속에 뒤섞일 때 조금이라도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진화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성스럽다’느니 ‘남성스럽다’느니 하는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차츰 힘을 잃어가고, 다양한 성 정체성을 지닌 이들도 그 모습 그대로, 그 성향 그대로 어디서건 어우러질 수 있는 억압적이지 않은 사회를 꿈꿨다. 돌아보면 그들의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내가 정치적 약자로서의 여성들/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더 적극적이고 섬세하게 글과 행동에 담아내는 인류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지구생태계가 위기에 처하고 인류문명이 점점 더 빠르고 무모하게 파멸을 향해 치닫게 된 것은 오랜 세월 거침없이 이어져온 이른바 ‘남성성’의 완고하고 몽매한 역사적 발걸음 때문이다. 망가짐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라도 공존과 공생, 자율과 자치, 평등과 자유를 향해 변화를 도모하는 생성의 몸짓이 지구 이편저편에서 여성들/‘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더 활발하게 조직되고 무성하게 발화하길 바라며 연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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