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하여 ‘녹색정치’에 매료되었나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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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정치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의 정체가 몹시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일었던 80년대 중후반 청소년기를 통과하며 바라본 세상은 요지경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언니·오빠가, 저토록 많은 ‘보통 사람’이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지 혹은 죽음을 ‘선택’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니 민주화니 하는 말들을 품고서 죽어가는 것 같았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아님에도 그 죽음들은 퍽이나 가깝게 느껴졌고, 하여 혼란스럽고 슬펐다. 80년대가 저물어가던 무렵부터 서점을 하는 부모님을 둔 고등학교 단짝 친구를 통해 《말》이니 <한겨레신문> 같은 간행물을 구해 읽기 시작했고, 90년대 초반 청년이 되면서는 이른바 지하신문이며 금서들을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가 되었다. 기백 평은 되어 보이는 작업장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성들이 컨베이어 벨트 앞에 촘촘하게 앉아 볼륨이니 헤드니 하는 전자부품을 조립하고 있었다. 어용노조이긴 하나 직선제를 통해 구성된 노조가 있는 대기업 공장이었다. 


세상은 변함없이 부박하고 부조리해 보였다. 이제는 또래에 가까워진 학생이거나 노동자인 언니·오빠들이 여전히 죽어갔다. 민주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과 빛깔의 옷을 차려입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었다. 사업장 내 풍물패에 가입하고 공장 밖 학습조직에 발을 들이며 무시로 고개를 쳐드는 분노와 혼란을 단련시켜 갔다. 세상은 바뀌어야 했다. 단단한 새장에 갇혀 있는 파랑새 정치를 세상에 풀어놓아야 했다. 세상이 바뀌어야 나를 비롯한 평범한 이들의 삶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체적인 평등과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와 정치와 내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어 보였다. 공장에서 조립 노동자로 사는 약 5년간 풍물패 동료 몇몇과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 운동을 벌여 나갔다.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고, 한 번도 민주노조를 세워 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IMF’ 국면이 되었고, 공장을 나오게 되었다. 다수 여성 조합원을 쥐락펴락하는 소수 남성으로 구성된 어용노조의 벽은 높고 두터웠으며, 공장 밖 남성 중심 운동사회에 대한 크고 작은 회의도 일었다. 이후 몇 년간은 시위나 집회 현장의 ‘구경꾼’으로 살았다. 서른 살이 가까워오고 있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으나 어떤 정치/조직에도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학교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진득하니 학과 공부에 몰두했다. 공부가 가지를 치는 새,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에 매료되었다. 운동에서 한 발을 뺀 채로 수년 만에 뒤늦은 졸업을 하고 사회단체 활동가,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펴내는 작은 출판사의 편집자 등으로 일했다. 그렇게 또 몇 년. 문득 이 복잡한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 벌고, 덜 쓰며 살리라. 줄기차게 쫓아오는 듯한 속도에 쫓기지 않으리라. 더 늦기 전에 자유로이 떠돌리라. 결혼제도 따위에 영원히 묶이지 않으리라. ‘비주류, 소수자’로 살아가리라. 이편이 내게 맞는 옷일 테니 이것이 나의 정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 구현해 나갈 일상 정치의 의연한 얼굴이 되게 하리라···. 이렇게 하여 10대 때 그 모순에 눈을 떠 20년간을 나름대로 맞서온 이 사회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정치를 거슬러 살아가볼 구체적인 몇 가지 삶의 지침을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떠돌았다. 배낭을 둘러매고 나라 안팎을 가난한 여행자로 헤매 다녔다. 마음 맞는 친구랑 전기 없이 산골에 처박혀 작은 밭을 일구기도 하고, 홀로 이방인의 나라에 있는 한 여성공동체를 찾아가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노동을 하며 몇 달을 살기도 했다. 이 나라 저 나라, 도시와 시골 곳곳을 다녔다. 나고 자란 곳에서 멀리 떠난다고 떠나왔건만 도처에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폐해며 부조리가 공기처럼 떠다녔다. 그렇게 헤매고 부딪치며 다양한 삶을 만났고, 그 삶들이 빚어내는 닮은 듯 참 많이 다른 수많은 일상과 의식의 출구에 주목했다. 그/녀가 품고 일궈온 생애가 주류 질서에 반하는 것일 때 더 이끌렸다. 주머니는 점점 더 비어갔으나 별반 불안하지도 쫓기는 심정이 일지도 않았다. 이편이 내게 맞는 삶이려니 싶었다. 그러면서 또 수년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녹색정치’를 만났다. 다양성 옹호, 생태적 지혜, 비폭력 평화, 사회정의, 직접·참여·풀뿌리민주주의, 페미니즘, 탈핵/반핵, 동물권, 기본소득··· 지향하는 가치들 속에 자본주의/개발주의와 가부장제를 반대하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선언이 스며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 중심이 아니어서 좋았다. ‘적색정치’도 인간질서 속 평등 구현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끌리기는 했지만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기보다는 갖가지 존재의 맨 앞줄에 세운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에 비해 녹색정치는 공생의 그물 속에 있는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온갖 숨탄것들, 사물들과 엮이고 이어져 있는 인간존재를 성찰하고, 존재들 간의 진정한 평등을 위한 조화와 조율의 실천을 전면에 두며, 인간들 -이 가운데서도 ‘약자/소수자’의 권리와 정치적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다양성의 정치, 여러 가지 입장이 무지갯빛으로 어우러지는 민주주의가 아닌가 싶었다. 이 정치 선언은 진보와 변화를 말하면서도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지도자’ 중심적 정치구도를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자칭 진보 성향의 남성들 사이에서 ‘터무니없는 장난’쯤으로 회자되기도 하는 듯했으나 내게는 최선에 가까운 정치적 대안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정치체 속엔 가부장의 그늘에서 일찌감치 독립한 ‘반짝이는’ 여성들이 많았고, 여성/자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치를 현실화하기 위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지형을 그녀들 스스로 일궈가는 것 같았다. 남성/인간의 역사가 오랫동안 다수 남성의 것인 양 치부해온 모험과 도전이 여성들의 것이기도 함을 발 딛게 되는 곳곳에서 할 수 있는 한 힘껏 세상에 알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총선과 지방선거를 치러내며 일상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이 과정에 서투르게나마 함께하기도 하며 이 목소리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녹색정치가 이렇게 하여 내게로 왔던 것이다. 


의회정치가 갖는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변이 없다면 앞으로도 대략 2년에 한 번꼴로 각종 선거가 치러질 것이다. 2020년, 우리는 지난 지방선거 때처럼 또 거리에 나부끼고 나뒹구는 현수막이며 명함을 비롯한 온갖 선전물과 방송차량의 소음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정치가 공해가 되지 않도록 더 많은 이가 녹색정치에 눈과 마음과 발길을 돌릴 수 있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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