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인간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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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글이, 평범한 내가 이렇게 끼적이듯 써내는 글이 사소하게라도 ‘무기’가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이런 실개천 같은 사유가 장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에 이를 수 있을까를 묻곤 한다. 쓰는 행위가 정치적 실천일 수 있음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때, 불 밝힌 한 자루의 초 같고 한 ‘꼬집’의 소금 같은 글 한 줄이 절실한 시절을 통과 중이다.


토요일 저녁이면 광장으로 향했다. 환하던 저녁이었다. 눈물겹던 밤이었다. 추위를 저만치 밀어내던 함성이었다. 자취를 감췄나 싶었던 민주주의라는 아고라가 노래로 되살아나던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역사를 온몸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여성들을 만났다. 그녀들을 마주하며 지치지 않고 다시 맞설 힘을 얻고는 했다.


저 푸른 지붕을 인 ‘복마전’에서 저들이 우리의 일상을 난도질할 협잡을 조직 중일 때, 겨우겨우 살아내지도 못하여 ‘보통 인간’의 삶이 점점 더 비루해지고 있을 때, 역사적으로 겪은 고통으로 인해 누군가의 생애사가 비통하다 못해 비참하게 쓰이도록 굴욕적인 협상을 일삼으며 왜곡한 현대사와 미화한 가족사를 버젓이 실은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 들 때, 자국민들의 일상을 위협할 게 빤한 무기들을 들여와 이 나라에 배치할 음모를 안보라는 이름으로 뻔뻔하게 공포할 때, 국가라는 폭력적인 권력을 앞세워 무고한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후에도 사과는커녕 그 주검과 죽음을 ‘관리’하려 들면서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탐욕의 수위에서는 서로 절대 뒤지지 않을 재벌들 편에 서서 노동자들의 목숨 줄을 놓고 ‘거래’ 중일 때, 송전탑이며 핵발전소를 무분별하게 세우고 지어대며 산야와 바다와 우리의 존재방식을 엉망으로 몰고 갈 때, 무엇보다 결코 그렇게는 죽을 수 없었던 아이들과 우리의 이웃들이 저 깊고 어두운 맹골수도로 가라앉아 일부는 천 일이 가까워오도록 차디찬 물속에서 헤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때 우리 대다수는 참담한 심정으로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억압과 고통의 진원지를 똑똑히 목격하게 되었다. 부패의 아수라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다. 팽팽한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로봇처럼 인형처럼 자신들이 내놓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며 국민들에게 ‘따르라’ 명령하고 있었다. 그 발걸음은 참으로 오만하고 거침없었다. 상식과 영혼을 복마전 저 깊숙한 구석으로 한데 몰아 처박아놓고는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더 큰 도둑질을 도모하다 걸려든 저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고 마침내 거리로 나왔다.


친구의 손을 잡고 아기를 등에 업고 어머니와 딸과 애인과 이웃과 동생과 언니와 선생님과 제자와 할머니와 손녀와 조카와 이모와 고모와 숙모와 직장동료와 올케와 시누이와 후배와 선배와 그렇게 같이 또는 홀로 광장으로 나와 섰거나 앉거나 걸으면서 외치고 노래하며, 더러는 침묵으로 새로운 역사를 직조 중이던 여성들. 그 정치적 광장의 밤이 그리도 환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수많은 그녀들이 함께했던 까닭이었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11월 들어 처음 광화문으로 향하던 날, 터미널에서 내려 맨 먼저 찾아갔던 ‘강남역 10번 출구’. 하고많은 여성 혐오 범죄 사건의 상징적 공간이 된 그곳에서는 사건이 있었던 지난 5월 17일 이후 약 5일간, 천여 장의 ‘포스트잇’이 나부꼈다고 한다. 많은 여성의 손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 펜과 종이에 가 닿았을 것이다. 애도하고 분노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장 한 장 포스트잇을 채워갔을 것이다. 어떤 여성들은 엉엉 울면서 떨면서 손끝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써내려갔을 것이다. 쓰면서 이 부조리한 체제를 돌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기필코 바꾸리라’ 마음을 다지기도 했을 것이다. 한 해가 저무는 지금, 그 절절한 발화의 흔적은 강남역에서 서울시청으로 자리를 옮기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겉으로 봤을 때 강남역 10번 출구는 사건 이전의 장소로 돌아간 듯도 싶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예전의 그곳이 아니다. 그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던 성차별 없는, 여성 멸시와 혐오가 사라진 사회를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적이고 공적인 영역 도처에서 변화를 불러오는 중이고,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무수한 촛불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쓰는’ 많은 여성이 인간의 역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추동해나갈 것이다.


이 시간에도 변화를 열망하는 여성들이 이 시대를, 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자신을 쓰는 중이리라. 일기장에, 피켓에, 신문과 잡지에, 에스엔에스SNS에, 길거리에, 칠판에, 벽과 바닥과 천장에, 땅과 하늘과 바다와 강물 위에, 가슴과 영혼에 ‘지금, 여기’를 새기는 중이리라. 이 명백한 타락과 부조리 앞의 슬픔과 분노를 딛고서 희망의 정치, 다양한 결집과 차이의 정치를 새롭게 기록하는 중이리라. ‘쓰는’ 여성들이 점점 더 늘어나기를. 여성들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발언하고 써내기를. 지치지 않기를. 저 촛불처럼 타올라 번져가기를,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되어 정치적 숨구멍을 곳곳에 뚫어내기를. 이 시대의   ‘싸움’이 누구보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승리한 싸움이었노라고 그녀 자신들이 기록해내기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즘의 주장대로 “여성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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