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한 방식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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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 농사짓는 사람



사랑은 천둥이나 벼락처럼 내려치기도, 안개나 봄볕처럼 스미기도 한다. 날쌘 바람처럼 스쳐가기도 하고 묵묵한 대지마냥 언제까지라도 나를 딛고 있으라, 주억거리기도 한다. 슬픔과 혼란과 기쁨과 즐거움과 희망과 절망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사랑은 직조된다. 단단한 혼돈의 세계를 고통스럽게 사랑하는 일이 살아가는 일의 거의 전부가 되는 때가 생애에 한 번쯤은 누구나에게 찾아들기 마련이라고 하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참 많은 이들이 이 ‘사랑’이라는 것을 하며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 계급과 성별과 인종과 세대와 정치적 지향과 성적 지향 등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다수의 이성애자와 소수의 ‘퀴어-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가 이 담담한 듯 ‘버라이어티’한 사랑의 세계를 디뎌 왔고, 디디며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서 5년째 살고 있는 그녀는 5월에 태어났다며 자신의 이름을 ‘메이’로 소개했다. 우리 나이로 올해 꼭 마흔이 되었다. 등단엔 별 관심도 없지만 이따금씩 짧은 소설을 쓰고,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친다. 비혼주의자(非婚主義者)이기도 한 그녀가 타인들에게 인식/인지되어 불리거나 스스로 정체화하여 자신을 호명하는 갖가지 이름 가운데 가장 내밀하고 깊고 길게 지녀온 이름은 ‘레즈비언’이다. 열여덟 살 적, 같은 학교의 한 친구를 좋아하면서 시작된 동성애적 성향이 청년기를 거쳐 중년에 가까워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녀는 그녀가 좋았다. 잠자리에 들면 사무치게 떠올랐고 깨면 생각났다. 몸의 일부라도 맞닿게 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댔다. 그 이름이, 그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에서인 건지 가슴속에서인 건지 몸 여기저기서 내내 맴돌아 견디기 힘든 나날을 지나 드디어 사귀게 되었을 때의 환희랄까 감격이랄까 그 가슴 벅찼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전율을 느낀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줄곧 연애를 해온 것도 아니고 지금도 수년째 혼자지만, 그동안 두 명의 애인과 각각 제법 길게 사귀었으며 함께 살기도 했다. 이젠 다 ‘지나간’ 사랑이 되어버렸지만 세계가 자신과 그녀 두 사람만으로도 가득 차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그 사랑이 그녀를 살아있게 했다. 사랑이 사는 이유가 되었다고나 할까. 앓았고 아팠고 눈부셔서 눈멀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열병을 앓듯 시작된 동성을 향한 사랑이 소수자적인 가치와 삶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간 건 대학에 진학하여 페미니즘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였다고 한다. 도처에 널린 주류적인 가치 지향적 삶이 그녀를 매혹시키지 못했으므로 동성애에 더 끌렸던 것 같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시킨 일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정동과 비평의 시각으로 세계와 사회를 바라보게 되면서 이른바 ‘정상적인’ 삶, ‘좋은’ 삶이 정해져 있으며 소수자들의 삶은 이러한 삶에서 비껴나 있다는 편견 어린 시선에 저항하는 한 방식으로 동성애를   ‘선택’한 면도 있었다고 했다.


사랑했던 그녀들과 연락이 끊긴 지는 오래되었다. 각각의 그녀를 따로 혹은 다 같이 알고 지내온 친구들을 통해 그녀들에 관한 소식을 간간이 전해들을 뿐이다. 그들은 아이를 하나 혹은 둘 낳아 기르며 연하이거나 동갑내기인 배우자와 또 어딘가에서 나름의 삶을 힘껏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의 생애 어느 시기엔 동성애가 자연스러웠고, 이제는 이성애가 그들에게 더 자연스러워진 것 아니겠냐며 그녀는 웃었다. 그래서 그들을 원망하거나 그들과 함께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 같은 걸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성소수자들을 지지하는 입장을 공식화한 정당의 당원이다. 매달 소액의 당비를 낼 뿐 딱히 정당 활동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모임에 들어 있지도 않다. 주로는 일터와 집을, 가끔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서관과 시장과 공원을 오가면서 밥벌이를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산책을 한다. 이따금 그녀의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을 한둘씩 만나 밥을 먹고 가벼운 술자리를 가지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까, 사랑에 대한 특별한 열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연애의 감정이 생기는 때가 행여나 온다면 피하지는 않으리라고 이따금 생각해볼 뿐이다. 지금 이대로 나쁘지 않다. 자신은 현재 많고 많은,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1인 가구의 가구주들 가운데 한 사람일 따름인 것이다.


과거에 비해 그 정도가 미약해진 듯도 싶지만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 동성애 공포증)가 여전히 작동 중인 이 사회에 그녀가 바라는 게 있다면 ‘퀴어’를 제발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봐 달라는 것. 이 사랑은 이 사랑대로 저 사랑은 저 사랑대로 빛깔이 다 다른 법이니, 동성애 역시 하고 많은 사랑의 한 방식일 따름이고 이 속에 또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있어 왔으니 어떤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하지도 해석하지도 말아 달라는 것. 사실 성적 취향의 문제는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와 결부된 가치관의 문제, 세계관의 문제, 성 정치적 지향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므로 선택도, 선택에 따른 책임도 결국엔 당사자(들)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냐며, 이성애 속에서든 동성애 혹은 양성애 사이에서든 사랑이 구성되어온 오랜 방식들과는 또 다른 사랑의 방식이 더 다양하게 발화될 수 있다면 더 생기 있고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냐며. 그러면서 언젠가 자신이 다시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때에도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 대상은 ‘거의 100퍼센트’ 동성일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 그녀의 두 눈이 유난히 반짝였던 것도 같다.


벚꽃이 화르르 피어나는가 싶더니 마침 내린 세찬 비로 속절없이 지던 그날 밤,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는데 왜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서 며칠이 지난 요즘도 나는 종종 자신에게 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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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_전라남도 장흥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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