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코‘위안부’ 로 살고 싶지 않았다

by 센터 posted Mar 14,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글 | 길날 농사짓는 사람



한 인간의 몸에 아로새겨진 역사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오가는 동안 아는 새 모르는 새 기입된 역사의 지도를 개개인은 자신의 몸과 영혼에 문신처럼 지닌다. 그리고 어떤 문신이며 흔적은 좀체 몸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어떤 몸들은 자신에게 새겨진 그 역사의 지도를 결코 버리지도, 떠나보내지도 못한다. 그것은 기억의 다른 이름이다.


2015년 12월 28일, 대한민국 정부는 굴욕적인 협상을 ‘끝냈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피 어린 역사와 자국민의 상식과 바람을 10억 엔에 뚝딱 팔아치웠다. 이번 협상이 ‘최종적인, 돌이킬 수 없는 합의’가 될 것이라며 향후 국제 사회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비판 등을 자제하겠다고 언명했다. 그 역사를 잊지 말자고, 끝내 기억하자고 설치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철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망발도 서슴없이 ‘해냈다’. 그 순간, 오랜 역사적 고통의 당사국이 두 나라임이 선명해졌다. 욕 얻어먹겠다고 작정하고 망각의 퍼포먼스라도 펼치는 양, 피해국의 정부라는 데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이 나라 평범한 사람들의 개념과 상식이 팔짝 뛸 노릇의 협상이라는 것을 가해국의 바람과 요구에 따라 참 태연자약하게도 해버린 것이다. 몰상식과 개념 없음의 지극한 경지가 있다면 저런 모양새로 드러날까 싶은 양상의 결과였다.


2016년 1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에 관한 6차 변론이 있었다. 어느덧 평균 예순 이상의 나이에 이른 122명의 ‘미군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2014년 6월 25일,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한 이래 이어져온 여섯 번째 변론 자리였다. 이날은 스무 명가량 되는 ‘언니들’이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원고 자격으로 방청석에 앉아 원고 소송대리인단 등의 변론을 듣고 지켜보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부터 비롯된 이 나라 ‘위안부’의 역사는 대부분 10대인 어린 나이의 여성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거나 납치하여 기지촌으로 끌어들인 후,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범죄 방지’라는 명목 하에 국가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가운데 한국군, 유엔군, 미군 등이 여성들을 ‘강간’하게 하는 방식으로 줄곧 이어져 왔다. 성 노예에 다름 아닌 ‘위안부’란 명칭이 이 나라의 공식적인 문서에서 사라진 것이 1977년이다. 지금까지도 이 나라 기지촌 곳곳에서 불법적인 성매매가 버젓이 이뤄지고 있지만, 이 중에서도 국가가 대놓고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도록 ‘장려’했던 시기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있던 1960~1970년대였다. 기지촌 성 판매 여성들을 더 쉽게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역재건부녀회’라는 조직을 통해 1962년 11월 당시 국가가 ‘관리’하는 ‘미군 위안부’ 수만 해도 만 명이 훨씬 넘었다. 쿠데타를 통해 선취한 불안정한 권력을 벌충하고자 했던 박정희가 미국의 군사력을 ‘안정적으로’ 붙들어둔다는 구실 아래 기지촌의 성매매, 성 착취 문화를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주둔 중인 미군들을 위안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당신들이 애국자’라며 ‘미군 위안부’들을 대상으로 애국 교육이라는 것을 해가며 정권 유지와 국가의 외화 벌이에 여성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업소의 포주들, 대한민국 정부, 미국 정부와 미군들은 철저한 공모자들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장길수 감독의 1991년 작,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포스터 광고 문안 가운데 하나가 “이 와중에 달러 좀 만지겠다는데 뭐가 잘못이야···!”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전국 곳곳에 ‘연합군 위안소’를 설치하여 관리했던 것과 맞물려 당시 기지촌에는 성매매 집결지가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유엔군을 상대해야 했던 여성들의 심경을 영화 속 대사로 옮긴 듯한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정작 그 여성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파괴된 일상 속에서 성폭력과 인신매매를 겪으며 체념과 자책의 심정으로 술과 약물의 힘에 기대 성을 팔아야(?) 했던 대다수 기지촌 여성들은 달러를 ‘만질 수 없는’ 구조 속에 있었다. 일본의 정치, 군사 권력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버젓이 짓밟아온 역사의 현장, 가부장제와 국가 폭력과 군사주의가 협잡하여 빚어내는 부조리와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현장이 한국 전쟁 이후로도 죽 존속해온 기지촌 성매매 집결지이자 그곳에서의 성 판매 여성들의 몸이었을 따름이다.


영화전단.jpg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 전단


아프든 말든 생리를 하는 중이든 안 하는 중이든 빚과 폭력에 짓눌려 거의 매일 수(십) 번의 원치 않는 성관계를 치러내야 했던 몸, 술이며 담배며 갖가지 약물에 일상적으로 절어 있어야 했던 몸, 낙태와 자살 시도를 몇 번씩이나 감행해야 했던 몸, 온갖 질병을 매단 채 한순간도 자신의 의지를 좇아 맘 편히 살아갈 수 없었던 몸, 성매매를 위한 매트리스만 한 장 달랑 깔려 있는 골방을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던 몸···. 그 아프게 나이 먹은 몸들이, 그토록 광범위하고 지독하고 오랜 인권 유린의 현장을 방조하고 묵인하는 것을 넘어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폭력의 당사자이길 자처했던 그 국가를 상대로 더 늙기 전에, 죽기 전에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사실과 피해 사실을 밝혀 알리고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사죄를 받아내야겠다고 어둡고 오랜 침묵의 바깥으로 힘겹게 걸어 나오는 중인 것이다.


이날 나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심한 천식 때문에 법정 문을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던 한 언니 곁에 있었다.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변론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법원 로비에 앉아 있는 동안 언니는 세 종류의 약을 입안에 차례대로 털어 넣었다. 수십 년을 힘겹게 살아내었으나 예순이 넘은 나이에 남은 건 여전한 가난과 고독과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병든 몸이었다. 어느 누가 이 생애에 그건 당신이 당신 삶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결과라며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서울, 의정부, 평택, 군산, 왜관, 부산, 마산 등지의 기지촌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감금, 구타와 폭행, 착취, 미군 범죄, 강제 수용과 강제 진료 등의 폭력적인 방식에 노출된 채 자신도 모르는 빚더미에 쌓여 수십 년을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말이다.


얼핏 보면 확연해 보이는 세상의 질서, 점점 더 이분법적으로 또렷하게 나뉘어가는 듯한 세상은 좀체 선명하게 분류되는 곳이 아니다. 우리 손에 거머쥐어졌다고 착각하는 진실 너머에 세상이 있다. 국가 권력을 쥐어온 이들을 비롯하여 남성들의 성(폭력) 문화에 관대한 이 사회의 많은 이들이 ‘자발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성매매 현장에서 여성들의 성이 취급되어온 역사적 진실, 여전한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알고 싶지도, 알고 난 후 불편해지고 싶지도 않거니와, 더구나 이런 방식으로 지속되어온 구조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자신들에겐 없다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이다.‘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의 다음(7차) 변론일은 2016년 3월 18일 금요일이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제466호 법정에서 진행된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