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의, 조화로운 거처에서의 삶

by 센터 posted Dec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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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길날 농사짓는 사람



사회·역사학적으로 1990년대 이후부터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밀어닥친 시기로 구분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현기증 나는 시대가 이 무렵부터 구체화되면서 지난 20여 년 간 세상이 급격히 ‘구조조정’되어 온 것이다. 남한사회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사업장에서 논밭에서 학교에서의 노동자들, 농민들, 학생들을 비롯한 어떤 직업군에도 속하지 못한 많은 이들의 삶과 의식 또한 급속도로 ‘망가져’ 왔다. 공유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 빠른 속도로 파괴되어 왔음은 물론이다. 무차별적인 자본 권력의 공세는 이렇듯 우리의 삶을 불안과 무기력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사회 전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자본이 버팅기고 있는 형국을 도처에서 목격하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몇 해 전 겨울, 혼자서 먼 길을 나선 적이 있다. 내겐 더없이 소중했던 한 존재를 잃은 때로부터 한 해를 훌쩍 넘기고도 그 상실감에 지긋이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던 때였다. 불안한 영혼이 이끄는 대로 불안정한 잠자리와 거친 먹을거리, 걷거나 허름한 탈것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디뎌가기로 작정하고 배낭을 꾸려 여행길에 나섰던 이유들 가운데는 자본을 비롯한 온갖 지배 권력으로부터 한발 비껴난 여성공동체를 직접 겪어보고 싶다는 ‘열망’ 또한 섞여 있었다. 국가주의며 가부장제며 자본주의의 손길이 덜 미치는 자치와 저항의 공간, 그러면서 타자들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거처를 만나 자신의 안팎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리하여 하늘과 바다를 건너 이르게 된 데가 인도 중부, 나그푸르에 있는 작은 영성공동체였다. 수행하며 노동하는 여성들 특유의 감수성과 신앙심이 일궈낸 편안한 신령함이 깃들어 있는 그곳에서 일하고 기도하며 두 달가량을 머물렀다. 새벽 5시면 고요한 종소리가 잠을 깨웠다. 싸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밖으로 나가 하루를 기도로 열었다. 매일 4시간가량 텃밭과 주방 등지에서 일을 했고, 끼니때마다 식당에 다함께 둘러앉았다가 설거지를 마친 후 저녁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하고 기도하는 게 일상의 거의 전부였다.


거기서 만난 다양한 세대의 스무 명가량 되는 수행자들 중에는 일본과 파키스탄에서 온 여성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지만 ‘시스터’라는 호칭을 즐겨 썼는데, 나처럼 밖에서 들어와 며칠이든 몇 달이든 머물게 되는 이들도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까 그 안에 머무는 동안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자매’였다. 그곳에서 오래 거주해온 시스터들은 더불어 살지만 혼자 존재하는 것이 익숙하고 온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마다의 단단한 우주,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실천하며 수십 년 간 수행해온 이들의 내공 같은 게 느껴졌다. 슬픔 없이 두려움 없이 갈망 없이 살아가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주던 그들이었다. 어떤 존재가 귀하지 않으며 어떤 인연이 소중하지 않겠냐고, 누군들 완전하며 누군들 오류를 범하지 않고 살아왔겠느냐고 가만가만 위무해주던 그들의 눈빛과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곳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몰아낸 ‘도처의 신들’이 정주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석가와 예수와 각종 힌두 신들의 이미지를 돋을새김한 석상이 곳곳에 소박하고 안온한 표정으로 어우러져 평화롭게 깃들어 있었다. 무신론자인 내게 거부감이 일절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지만, 몇몇 시스터는 내게 신을 ‘직접’ 느껴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들에겐 각자의 신(들)과 공통의 구루(스승)가 있었고 그 존재들의 위대함에 관해 내게 자주 들려주려 했다. 그럴 때마다 묘한 반감이 일어남을 느꼈고, 대꾸하곤 했다. 신은 없다고, 신이 있다면 저 먼지 속에, 이슬 속에, 햇살 속에, 바람 속에, 저 들개의 영혼 속에, 흘러가는 구름과 강물 속에, 내 속에, 당신 속에 존재 그 자체로 현현할 뿐이라고. 그것(들)은 혹은 이것(들)은 흘러가고 흩어진다고, 그러다가 모이기도 하는 것 아니겠냐고. 그뿐, 절대자니 절대 존재자는 없는 것 같다고. 그러니 자꾸 내게 당신들(만)의 신과 구루를 보라고, 느끼라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몇 해가 흐른 지금에 와서야 그 시스터들이 그토록 간절히 내게 들려주려 했던 신의 목소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보게 된다. 그 차이를 이제야 확연히 알 것 같은 것이다. 태곳적부터 이 우주 곳곳에서 말갛게 숨 쉬던 수많은 신들을 몰아낸 후 인간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구축하려 했던, 자신들만의 이해관계에 신 혹은 신성을 가두어 종교를 돈벌이 수단으로나 전락시켜 버린, 갖가지 ‘유일신’을 앞장세워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해 온 저들의 물신화된 신앙과 시스터들의 ‘그’ 신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가를. 태초에 이 땅은 신과 인간이 더불어 조화롭게 존재하던 땅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오만함이 자연을 비롯한 만물, 심지어 인간들 자신에게 깃들어 있던 신의 자리조차 밀어내고 온통 물질로 채워버린 것인지도.


그들은, 그곳은 그대로 ‘안녕’할까. 만장일치제를 소통방식의 맨 앞에 놓은 채, 일용할 양식인 차파티를 굽고 소젖을 짜서 데우고 텃밭을 일구며 오가는 뭇사람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며 기도로 하루를 열고 닫으며 왁자한 세속의 마을 한쪽에 깃들어 여전히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을까. 그곳의 모든 여성수행자에게 물어본 건 아니었으나, 일부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도 휴머니스트도 아니라고 했다. 그 너머에 있는 존재라고, 인간 중심을 넘어선 자연의 일부고 세상의 모든 만물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 했다. 그들이 자신을 정의하는 이러한 방식에 내가 온전히 동의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서 난 인간 중심의 번잡한 질서를 떠나 여성들끼리 평화를 일구며 존재하기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고작 두 달간 머물렀던 내가 보지 못한 모습 또한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곳이 특정한 종교나 위계화한 체제며 제도나 뒤틀린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놓여난 곳이었다고는 적어도 말할 수 있겠다.


그곳에서 만난 대부분의 ‘시스터’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 오롯하고 완전해 보였다. 저축거리는 삶에서 놓여나기 위해 범속한 저잣거리의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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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날_전라남도 장흥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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