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이미 우리 곁에 찾아온 이웃입니다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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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 난민네트워크 의장



난민은 누구인가


난민. 그 생소한 이름이 올 봄과 여름 한국 사회에 뜨겁게 회자되었다. 올 4월부터 제주도에 도착했던 예멘 국적 500여 난민들의 존재는 한국 사회에 보이지 않았던 ‘난민’이란 존재들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유난했던 올 여름의 불볕더위만 아니었다면 이 논쟁이 더 길게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1994년부터 난민 제도를 시작하여 ‘돌려보내면 박해를 받을 난민’들을 강제 송환하지 않기로 국제 사회에 약속했다. 간단히 말해 한국은 마치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했던 것과 같이, 한국을 찾아온 난민들을 강제로 송환해왔던 것을 멈추고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로 2017년 말까지 3만 2,733명의 외국인들이 박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며 한국 정부에 요청했고 그 중 792명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점증하는 세계 분쟁과 붕괴하는 각국의 보호체계로 인해 난민들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국에서도 매해 증가하고 있다. 2017년 한해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한 외국인이 9,942명에 이른다. 예멘 난민들이 ‘전쟁터에서 온 난민’이 아닌 ‘생소한 무슬림 남성’으로 읽히며 한국 사회 내 문제들과 얽혀 기이한 방식으로 이슈화가 되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 그들은 한국에 보호를 요청한 수많은 난민들 중 일부일 뿐이다.  


그럼 난민은 누구인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변경된 국경과 국적으로 생겨난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를 통해 탄생한 인권규약인 1951년 난민협약에서 규정한 사람들이 난민이다. 난민 제도는 무엇인가. 난민협약에 가입한 피난국에 도착하여 보호해달라고 신청한 외국인을 심사하여, 그/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경우 난민협약에서 정한 다섯 가지의 사유 ‘정치적 의견,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 구성원’으로 인하여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를 받을 합리적인 가능성이 있다면 그/그녀를 송환하지 않고 피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하며 일정한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국민이라면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국가가 ‘의도적’으로 박해하거나, ‘전쟁 등으로 보호의 능력을 상실’하여 보호할 수 없어 제3국으로 피난한 외국인들을 일정한 기준 하에 제3국이 대신 보호하는 제도다. 


난민은 사회의 동심원 가장 바깥에 있는 취약한 타자다. 근대국가가 형성되며 인권은 국적에 기반을 두고 정초되는 어떤 것이 되었다. 탈북자들이 여권이 만료되었다고 주중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여권을 갱신할 수 없는 당연한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라. 국적이 있더라도 난민들은 국적국, 즉 자기 나라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어 그러한 이익을 누릴 수 없다. 그런 그들이 도착한 피난국에서는 정부는 물론 사회에서도 본질적으로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민들은 경계에 껴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소수자다. 누군가는 여성이고, 노인이며, 아동이고, 장애인이며, 성소수자다. 심지어 이에 더해 언어도, 문화도 다르다. 따라서 소수자 중 가장 취약한 그룹이 바로 난민들이다. 우리도 이미 보지 않았던가? 정파와 상관없이 예멘 난민들을 잔인하게 배척했던 우리 사회의 인종주의적 목소리를.


기자회견.jpg

지난 7월 12일, 이주·인권·노동단체들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제주 예멘 난민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의 난민 정책 문제는 무엇인가


한국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난민협약을 더 잘 지키기 위해 난민법이란 독자적인 법률을 제정한 선진국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 실상은 매우 다르다. 한국이 유명한 것은 ‘매우 낮은 난민 인정률’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난민 신청을 하여 보호를 요청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대다수의 신청을 거절하고 강제로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4년부터 2017년까지 통계를 놓고 보면 4퍼센트 정도만이 보호를 받는다. 심지어 이 수치는 점차 낮아져 2017년 한 해만 놓고 보면 1.51퍼센트까지로 낮아진다. 다시 말해 작년의 경우 한국에선 100명 중 1.51명만 보호를 받고 나머지는 강제 송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수치인가? 유엔난민기구는 난민 심사를 하는 나라들의 통계를 수집하여 통계를 내는데, 대략 평균이 30퍼센트 초반에 이른다. 아직도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보수적인 이민 정책으로 알려진 미국의 경우도, 난민 인정률은 약 40퍼센트에 이른다. 한국이 얼마나 잔인한 곳인가를 알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이민 정책은 특정 기술, 전문직의 유입을 제외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단기 순환 정책, 즉 고용허가제를 중심으로 한 사람을 쓰고 버리는 형태의 정책인데 그마저 난민 정책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는 난민이 이미 있지만 역설적으로 없기도 하다. 국민 수 대비 난민 수를 추산할 경우 OECD 국가 37개국 중 34위 정도, 전 세계 국가 중 130위 정도로 난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인도적 위기로 일컬어질 정도인 7,000만 명 이상의 난민 및 인접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현재의 상황에 한국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얼마나 책임질지의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오로지 법적으로만 판단해야 할, 이미 도착하여 보호를 구하는 난민들마저도 가혹하게 송환해버리는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 관한 최근 논쟁이 지나치게 과열되었던 책임도 사실 바로 정부의 무책임 때문이다. 애초에 정부가 아무런 공적 이유 없이–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동의 자유를 제한할 정당한 법적 근거는 없다– 이들의 체류지를 제주도로 제한하여 마치 난민들을  ‘통제해야 하는 이례적인 존재’로 낙인 찍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들은 이미 국내 이주민, 난민 커뮤니티와 시스템 속으로 흡수되어 한국 사회에서 잘 살았을 것이다. 정부의 이 같은 무책임은, 제주도 내에 난민들을 보호하는 대책, 이들의 생계를 지원할 대책에도 무대책으로 일관되었다. 이들을 돕고 지원했던 것은 모두 제주도 내 시민사회, 이들과 연대한 난민 인권 단체들, 그리고 난민 곁에 선 국민들뿐이었다. 가장 취약한 인간들이 보호를 호소할 때 대한민국 정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난민들에 대한 불확실한 정보와 이에 근거를 둔 혐오 발언, 증오 선동이 난무하고,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는데도, 구체적인 난민 피해자들이 점차 발생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맨몸인 인간’들의 연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난민이 누구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목소리가 없는, 말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난민들을 팔아 이념적으로 활용하려는 정치, 종교 세력을 경계하며, 난민에 대한 허위정보와 오해를 교정하고, 이들에 대해 쏟아지는 혐오에 대해 ‘아니’라고 선언하며 난민들을 사회구성원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과연 복지 무임 승차론이나, 일자리 위협론이 가리키는 문제가, 또는 한국 사회 내 폭로된 취약한 여성의 안전이란 문제가 과연 몇 달 전에 들어온 난민 때문인가? 아니면 한국 사회 자체의 문제 때문인가. ‘난민은 존재하는 사회의 불안을 대리’한다고 한다. 이들이 문제가 아닌데, 사회 문제를 난민에게 투사한다는 뜻이다. 히틀러가 유대인들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고 투사한 것과 같다. 동경대지진 때 재일조선인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투사한 것과 같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축적한 우리들은 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난민들은 ‘전쟁과 테러, 박해로부터 피해온’, ‘가족과도 찢어지고’, ‘온갖 상흔과 두려움’을 몸에 새긴 취약한 인간들이다. 이들은 점차 늘어나고, 한국 사회 속 난민들도 이미 그렇듯,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난민의 존재에 대하여 시작된 질문을 통해 차별, 혐오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싸워나갈 계기 앞에 섰다. 난민은 괴물도 범죄자도 아니다. 그들은 평범하지 못한 삶을 경험하고, 우리 곁에 이미 찾아온 평범한 이웃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말할, 존재할 권리를 가지며 함께 공존해야 할, 그리고 함께 연대하며 투쟁해나갈 구성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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