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국정화(?) 이상할 것도 없다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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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남수 센터 기획편집위원



예상했던,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나 결국 정부와 여당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기로 확정한 후 교과서 개발에 착수했다. 시간이 꽤 흘러 이제 완연한 ‘전직’ 역사 교과서 편집자이긴 하지만 현재 중·고등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2009년 개정 교육 과정에 따른 교과서까지 만들고 나왔으니 아직 ‘감’은 남아 있는 셈인데, 다른 논란은 다 제쳐두고 국정 교과서 개발 실무만 놓고 봐도 단연코 저건 미친 짓이다. 2년 전에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와 관련해 타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교과서가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요약하자면 2009년 개정 교육 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경우 2009년 말에 개정 교육 과정이 공포되었고 2011년 말에 집필기준이 마련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과서 심사본을 개발하여 2013년 초에 심사본을 검정 담당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제출해야 했는데,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개발하는 출판사의 경우 중학교 역사 교과서도 함께 개발하는 게 대부분이라 각 교과서 개발 실무에 집중할 수 있는 기간은 짧게는 5개월에서 길게는 8개월밖에 확보되지 않는다.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해대며 만들어 낸 심사본이 검정을 통과하면 국편은 검정 과정에서 지적된 내용상의 오류나 검토해야 할 부분, 표기나 표현이 잘못된 부분을 정리한 「수정 보완 권고서」라는 문서를 보내는데 그 양 역시 상당하다. 당연한 귀결인 것이 심사본 제출이 임박하면 편집자들의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어서 스무 번 이상 교정을 거친 게 무색하게 단순한 오류들도 잡아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내 경우 마지막 PDF를 검수하는 과정에서 꽤 큰 이미지가 엑박[웹상에서 그래픽 파일이 뜨지 않을 때 나타나는 표시인 엑스박스(정사각형 모양 안에 X표시가 그려져 있음)를 줄여서 부르는 말]으로 들어가 있는 것마저 놓치기도 했다. 엑박이 들어간 심사본을 제출했단 얘기다. 검정에 통과한 게 천만다행이었지만.


축소한국사 교과서.jpg

국정 역사 교과서 개발에 따라 사라질 현행 검정 역사 교과서


‘비정상의 정상’에 서 있는 국정 교과서 개발 과정


위의 내용을 잘 톺아보자. 현재 정부가 극비리에 개발 중인 국정 교과서는 2017년부터 일선에서 가르치게 된다. 이조차도 국정화 확정 전에는 2018년부터 적용 예정이었던 것을 정부 멋대로 강행한 것이다. 이에 따라 2015년 9월 23일 발표된 2015년 개정 교육 과정을 43일만인 11월 5일에 재개정하는 수정고시를 했다. 졸속이든 사기질이든 일단 교육 과정은 마련됐다. 다음 단계로 교육 과정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편찬기준1)’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2016년 1월 3일 현재 편찬기준은 확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편찬기준이 확정되지도 않은 채 국정 교과서 집필진이 꾸려져 집필에 착수했다. 불판도 마련되지 않았는데 고기를 굽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편찬기준은 1월 7일 있을 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끝난 이후에나 발표될 예정이라 하니 빨라도 1월 중순쯤에나 확정되지 않을까 싶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역시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자. 검토와 수정보완, 현장 적용 기간을 확보하기 위해 보통 1년 정도의 시간을 확보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 3월까진 검정 심사본에 해당하는 1차 완성물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부는 11월까지 개발을 마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다. 언제 1차 완성본이 나오고 어떠한 절차를 거쳐 검토와 수정보완을 거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모든 게 밀실에서 진행될 것임은 비공개 원칙을 천명하는 교육부의 태도로 보았을 때 자명하다. 본격적인 교과서 개발 실무에 착수하기 전 몇 개월에 걸쳐 기획회의를 하고 이후 수개월에 걸쳐 심사본을 만들어 낸 다음 약 1년간 검정 및 수정보완, 현장 적용을 거치는 기존의 검정 교과서 개발과는 달리 이 모든 과정을 올해 11월까지 완료하겠다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계획이다. 개발 과정에 있어서 거쳐야 할 흐름과 원칙을 무시해 가면서 말이다.    


국정화 강행 추진에 대한 배경을 제쳐두고 단순히 진행 과정만 살펴보아도 이렇듯 문제가 산적해 있다. 교과서가 무슨 계간지라도 되나? 다루어야 할 내용과 쟁점이 방대하여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기획과 서술 방향을 논의하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과 체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게 교과서 개발 작업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주도하여 이토록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는 건 상식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할 세대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거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던 윤동주의 시구처럼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데 교과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어째서 그들은 외면할까. 확신하건대 국정 교과서가 개발되면 교학사 교과서 사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논란이 일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검정 교과서는 좌편향? 아니, 정권 종속적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사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명희 교수와 권희영 교수가 공동 대표 저자로 참여하여 만들어진 것이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다. 이들은 뉴라이트 계열인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식민지 근대화론2)’에 기반한 역사 인식을 대내외에 유감없이 드러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쓴 교학사 교과서도 당시 국편의 검정에 통과했고, 나머지 출판사의 저자들이 쓴 교과서들 역시 국편 검정에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심사본이 교육부의 교육 과정과 집필기준에 어긋남 없이 기술했다고 인정받았다는 거다. 그럼에도 이를 두고 여당 대표란 자는 “좌파적 세계관에 입각해 학생들에게 민중혁명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여진”단다. 그렇다면 교육 과정과 집필기준을 좌경화된 세력들이 마련했고, 그에 따라 좌파 학자와 교사들이 교과서를 저술했으며, 좌파들이 잠입해 있는 국편에서 이를 다 통과시킨 셈인데, 이건 가히 박홍 총장에 버금가는 정신세계3)다.


교과서 개발 실무로 들어가면 편집자와 저자들은 집필기준을 그야말로 닳아 없어지도록 본다. 집필기준에 사용된 용어, 내용 모두 빠뜨림 없이 교과서에 녹여 내기 위해 주말, 공휴일 다 바쳐 가며 장시간 회의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의 일부분이다.


③ 4·19 혁명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자유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과 남겨진 과제를 살펴본다.

4·19 혁명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발전 과정을 5·16 군사정변 등 정치변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 운동, 헌법상의 체제 변화와 그 특징 등 중요한 흐름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를 기본 바탕으로 발전해 왔으며, 4·19 혁명 이후 전개된 여러 민주화 운동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이 신장되었음을 서술한다.

민주화 운동이 국민 스스로의 자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주지하며, 민주화 과정이 장기 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를 극복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정착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유의한다.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자유 민주주의’라는 용어 사용으로 큰 논란이 벌어졌던 부분이기도 하다. 우선 집필기준 자체만 놓고 보자. ③ 이하 첫 문장의 내용은 중단원 제목으로 반드시 다뤄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중단원 제목이 ‘자유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 기본권의 성장’이다. 두 번째 문장의 내용들은 중단원 아래 소단원 제목으로 배치된다. 그렇게 하여 ‘자유의 종이 울리다, 5·16 군사 정변과 유신 체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다, 6월 민주 항쟁과 민주화의 진전’이라 이름 붙인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이 또한 치열한 논의 과정에서 결정된 것들이다. 이를 토대로 각 내용들을 집필해 나가게 된다. 그 내용들 역시 집필기준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검토해야 한다. 철저하게 정부의 방침을 따르는 셈이다. ‘자유 민주주의’ 용어와 관련해서는 집필 회의 과정에서 논란이 많은 이 용어를 사용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관해 우리끼리도 이견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용어가 2009년 교육 과정 개정안 공청회 이후 고시된 개정안에 난데없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교과부 산하 상설기구인 ‘교육과정심의회’의 심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교육 과정 개발 정책 실무와 이에 대한 검토 자문를 수행하였던 다수의 위원들도 모르는 사이에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가 ‘자유 민주주의’와 동의어임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 한국현대사학회의 주장을 교육부 자체적으로 끼워 넣은 거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제 아무리 졸속으로 처리된 교육 과정이라 한들 따르지 않고선 수억 투자한 교과서 개발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에.


일부만 예로 들어 보았다.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가 포함되었던 부분도 이러할진대 다른 부분들이야 말해 무엇 하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들어가며 만들어 낸 게 현행 검인정 역사 교과서다. 게다가 타 출판사와 경쟁을 해야 하니 기획과 디자인에 열성을 다하고, 좋은 자료 확보에 없는 시간 쪼개가며 씨름하여 만들어 낸다. 국정으로 돌아간다면 이보다 더 나아질 게 있을까? 이 또한 확신하지만 단연코 나아질 거 없다. 국정 국사 교과서 세대라면 잘 알 것이다. 외관부터 얼마나 구렸는지. 현재 개발하는 국정 교과서는 그동안 검인정 교과서들이 쌓아 온 형식을 베껴오는 수준에서 고중세사를 ‘위대한 민족의 역사’의 기조에서 서술하고, 비중이 40퍼센트로 줄어들 근현대사 부분은 수구 세력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놓을 거다. 그나마도 기획에서 편집 실무에 이르는 기간이 턱없이 짧으니 엉망진창이 될 공산이 크다. 뭘 어쩌자는 건지.


축소기자회견.jpg

학부모들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주장하며 지난 9월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한결같기에 이상할 것도 없는


“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 뜻 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


우리 박통께서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5년,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워진 ‘교과서포럼’에서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 기념회에서 한 말이다. 박통은 한결같다. MB는 제 이익이나 챙겨 먹을 캐릭터라지만 박통은 그 한결같음으로 시침을 거꾸로 돌려놓으려는 캐릭터다. 그리고 포문을 열었다. 이미 곳곳에는 촌스러워 눈길도 잘 가지 않는 새마을 기가 다시 나부끼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 유관순보다 전태일을 다루는 비중이 크다며 어깃장을 놓기도 한다. 소위 ‘3대 역사기관’이라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역사재단의 기관장들은 뉴라이트 계열이거나 정권 친화적인 이들로 다 채워져 있다. 질 좋은 교과서 개발이라는 본질적인 고민은, 최소한 이 정권에는 없다. 다만 시민을 동원 대상으로, 호구로나 여기는 저 천박한 권력욕만 있을 뿐. 국정화 강행, 이상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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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교과서 ‘편찬기준’은 교과서 집필진이 반드시 따라야 할 집필 원칙이자 기본 방향이다. 편찬기준은 교육 과정에 맞게 교과서를 집필하고 사실과 달리 기술되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검정 교과서 발행 체계에선 ‘집필기준’이지만 국정 교과서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편찬한다는 의미에서 ‘편찬기준’으로 부른다.

2)   식민지 근대화론은 ‘대한민국의 경제는 성장했고 그에 따라 제반 제도 및 생활 수준도 높아졌으며, 식민지 시기의  경험은 해방 후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의미로 요약된다.

3)   1994년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총장은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학생운동권 배후에는 사노맹이, 그 뒤에는 사노청이, 또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얘기를 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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