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여름밤의 단상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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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철 센터 이사, 안산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장 


밤마다 잠을 설치는 사상 유례가 없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인지 인간의 이기가 만들어낸 결과인지 미천한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은 뒤로하고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에 의지하며 휴식을 청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곁을 떠난 지도 벌써 두해가 넘었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해냈습니다. 온간 불통과 비리에다 꽃다운 어린 생명들을 수장시키고도 일말의 책임조차 느끼지 못하는 권력을 민民의 힘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역사를 바로잡고 내일을 위한 개혁이 이루어지길 갈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평화와 통일의 시대가 오나 했더니 수일 전 누군가는 간첩이 되어 갇히고, 공공부문으로 시작된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점점 좌표를 흐려갑니다. 최저임금 1만 원 약속은 실종되고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사회적 공방만 거세지고 있습니다. 노동 시간 단축은 아직도 먼 이야기이고 국회는 최저임금 개악법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비정규직과 여성, 청년을 포함한 새로운 사회적 대화를 진행하자는 선언은 진전이 어렵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권력이 바뀌었지만 기대와 좌절, 희망과 실망이 교차합니다. 여기저기서 저마다의 주장과 생각이 난무합니다. 올 여름 날씨만큼이나 이해하기도 가까이 하기도 힘듭니다.  

선생님!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디로 가야합니까? 길을 묻는 이에게 당신은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피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다지요. 오늘 밤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걸어온 과거와 현재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찾으려는 저의 오래된 습관과 연결합니다. 비록 선생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더라도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작은 디딤돌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까닭입니다.  

제가 살고, 활동하고 있는 안산에는 제조업 공단이 있습니다. 1만 9천 개 기업이 입주해 있고, 26만 명의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경제활동인구의 40퍼센트 가량이 여기서 생활하고 살아갑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곳은 97퍼센트가 30인 미만으로 구성된 아주 작고 영세한 기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우리나라의 수직 서열적인 산업구조처럼 노동 환경이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우리 사회 어느 누구도 이들의 노동과 삶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도, 지방자치단체도, 심지어 노동 활동가들도···.

젊은 시절 다니던 회사에서 노동조합 하나 만들어보는 것이 꿈이었던 저는 이런 현실 앞에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개별 기업에 들어가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전태일 열사가 살아가던 그 시대와 별 차이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소외된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장을 나왔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와 같은 생각으로 실천하고 있는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이 이제 10여 년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던 그날도 동지들과 광주에서 치열한 밤을 보내고 있었지요. 

우리는 지역을 기반으로 비정규 운동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10여 년의 꾸준한 활동은 쌓이고 쌓여 이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지역 비정규직 문제에 정부도, 지자체도, 노동 운동가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조금씩 확산되고 있습니다. 30여 개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만들고 예산을 투여해 비정규직지원센터를 설립하기에 이르렀고, 서울시를 필두로 노동 인권 보호를 위한 지자체 노동 정책을 청년 노동, 여성 노동, 고령 노동, 이동 노동, 감정 노동 등으로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모두 우리의 노력만으로 얻은 결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회 현상이 그러하듯 무수한 우연과 필연이 교차된 결과겠지요. 그러나 그 변화의 출발과 중심에 지역을 기반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이하 한비네)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면서 2000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된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비정규직 단체 운동의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단병호 의원과 지금은 고인이 된 이해삼 최고위원의 노력으로 2006년부터 시작된 서울, 부산, 광주, 안산, 청주, 전주 등의 지역비정규센터 설립은 비정규 운동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전국적인 민간 운동으로 올려놓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울산 북구를 시작으로 2010년 전주, 2012년 이후 안산, 부천, 울산 동구, 광주처럼 지자체가 운영하는 지자체 비정규지원센터의 등장은 비정규 운동을 정책과 대안 중심으로 전문화하고 성장시킨 계기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갈등과 고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방 정부가 관장하는 비정규노동지원센터들은 민간센터보다 사업을 한층 안정화함으로써 노동 행정의 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규모와 지역 특성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현재 지자체노동센터들은 노동 법률 상담 및 권리 구제 지원, 실태 파악과 정책 연구, 청소년 및 당사자를 위한 교육, 노동기본권 홍보, 취약한 노동 환경에 대한 감시 및 개선 활동, 노동자 네트워크 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중앙 정부가 진행해오던 조사와 처벌 중심 노동 행정을 교육과 예방을 중심으로 한 노동 행정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지방 정부는 비정규지원센터 설립을 기점으로 노동조합이나 노동단체 지원 정도에 머무르던 노동 행정을 질적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습니다. 지방 정부를 노동 행정 주체로 인식하고 청소년, 여성, 노인,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 등 취약 노동자들의 노동 인권 보호를 위한 생활밀착형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당사자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적폐 세력과 개혁 세력이 혼재되어 있고, 누가 참이고 껍데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온 비정규 활동이 새로운 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내부로부터 온 변화입니다. 이 모든 변화의 출발과 중심에는 한비네  활동가들의 노력과 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결과이고 노력해 온 방향의 반영입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탄탄해지고 그 길이 물 흐르듯이 지속되게 하는 ‘순리’의 길을 선택할 때입니다. 지금은 혼란과 주저함이 아니라 자신이 걸어온 길과 맺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저마다 실천의 언약이 필요한 때임을 깨닫는 엄중한 시간입니다.  

노염老炎에 잠 못 이루는 밤, 깨달음을 이어줄 언약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물론 오늘 밤 저의 언약은 그리 새롭거나 거창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갈 나침반은 되리라 믿습니다.  

선생님, 오늘 밤 저의 첫 번째 언약은 이 길 함께 걸어왔던 비정규 운동 동지들과 맺은 관계를 지속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동안 제가 가장 게을렀던, 함께하는 따뜻한 마음을 제 속에 담는 일에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언약은 비정규노동지원센터를 안정화하고 전국화 하는 일입니다. 지역센터들은 예산과 운영 경험도 차이가 크고 특성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함께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조직의 안정화이고 전국화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오늘 밤 마지막 언약은 시대적 변화에 맞는 지역비정규센터의 자기성장입니다. 센터는 서비스 기관으로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상담과 권리구제 지원을 넘어 취약 노동자들의 이해대변을 위한 기관으로 확장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노동조합 조직률도 낮고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내기도 어려운 조건에 있는 비정규직, 취약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이해를 대변하는 공익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노동 양극화, 사회 양극화 해소에 기여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선생님! 어느새 시간은 새벽을 향하고 있습니다. 입추가 지나더니 새벽녘 공기는 그래도 버틸만합니다. 절기로 세상을 헤아린 선인들의 지혜가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오늘 밤 저의 단상이 동지들을 만나 더 큰 강물로 흐르고 꽃처럼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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