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결단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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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센터 이사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결정적 계기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두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결단을 통하여 자기의 새로운 삶으로 승화시킬 때, 비로소 그것은 자기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지조를 지키며 산 남강 이승훈 선생의 결단


남강 이승훈 선생을 잘 아실 줄 압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교육운동으로 나라를 일으키고자 했던 분입니다. 그는 지방의 사업가였습니다. 스스로 장사꾼이라면서, 돈만 열심히 벌면 된다고 생각하며, 사업가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가던 분이었습니다.


이승훈.jpg

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 선생상


이분이 1907년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게 됩니다. 이 강연을 들은 이승훈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비록 14년이나 연하지만 안창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며, 평생 동안 그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도산은 사흘간 말미를 드릴 테니 심사숙고하시라고 했는데, 사흘 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게 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지 못했던 남강은 도산을 만나면서 비로소 실천할 방향을 찾게 된 것입니다.


남강은 도산을 만나 민족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고, 세 가지를 실행에 옮깁니다. 첫째는 상투를 자르고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둘째는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여 오산교회를 세웠습니다. 셋째는 교육입국을 위해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바치다시피 해서 세운 이 학교는 다석 유영모와 신채호, 함석헌 등 민족 지도자를 비롯한 염상섭, 김억, 김소월, 이중섭 등 문화 예술인, 주기철, 한경직 등 종교인들과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습니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을 통한 교육운동의 선구자가 된 것이지요.


독립운동으로 여러 번 옥고를 치른 남강은, 1919년 독립 선언문에 서명할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을 때 기뻐하면서, “이승훈이가 안방에서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하셨답니다.독립 선언문 서명하는데 순서를 놓고 어려움이 있었답니다. 천도교·불교·기독교 대표들이 서명 순서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지요. 나중에 도착한 남강이이를 보고, “이게 무슨 순서인줄 알고 이러느냐, 이게죽는 순서다. 우리 모두 죽을 각오로 임하자. 의암(손병희)부터 적어세요”라고 해서, 어려운 문제가 풀렸다고 합니다.


결국 기미 독립 선언문에 서명한 33인 민족대표 중에서도 많은 변절자가 있었고, 남강 이승훈은 가장 오랫동안 옥살이를 했고, 출옥 이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평생 지조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승훈 선생이야말로 자기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결정적 때를 헤아리는 눈을 가졌고, 결단을 통해 과감하게 실천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노동 운동 불씨 지핀 전태일 열사의 결단


1970년 군사독재 치하에서 노동 운동의 불씨를 지핀 전태일에게도, 결단의 때가 있었습니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가 된 젊은 전태일은, 노동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주변 노동자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허리도 펼 수 없는 다락방이라는 최악의 근무 조건 속에서, 휴일도 없이 하루 15~16시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어린 시다들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개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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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전태일 열사 동상


차비를 아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개인적 배려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쥐꼬리 만한 임금도 제때 안 주는 사업주를 찾아가 대신 받아 준다거나, 온갖 산재 등 질병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노동자들의 문제가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운동을 통해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처지와 권리를 알게 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한다거나, 그 조사를 근거로 위법 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근로 감독관을 찾아가고,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언론에 호소하고, 심지어는 대통령께 탄원서까지 쓰지만 돌아오는 건 좌절뿐이었습니다.


전태일은 그 절망의 벽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이도저도 되지 않자 직접 기업을 만들어 운영할 계획을 세웁니다. 전태일의 모범업소에 대한 구상은 근로 기준법을 지키고 노동자들에게 적정 임금을 주고도 충분히 기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초기 운영 자금을 마련할 수 없어 시작조차 할 수 없었지요. 자기의 눈을 팔아서라도 자금을 마련해 보려 했으나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또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해고였습니다. 공장에서 쫓겨난 전태일은 건설 현장의 보조 노동자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돌아볼 기회를 만든 것입니다. 삼각산 기도원 건설 현장으로 간 지 4개월가량이 지난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은 마침내 하나의 새로운 결단을 내립니다. 번민 속에서 내린 치열한 자기성찰의 결과였습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일기


전태일이 노동 운동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인 노동 현장으로, 다시 돌아갈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에서, 이 결단의 순간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돌아가야 한다”고, “꼭 돌아가야 한다”고 내린 이 결단은 20여 년 동안 그가 겪어온 그 지독한 가난과 고통과 학대와 모멸을 벗어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이 땅 밑바닥 인생이 겪고 있는 모든 가난과 고통과 학대와 모멸을 끝장내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아무 미련도, 아무 후회도, 아무 두려움도 없이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 결단을 위해 그는 얼마나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며 고뇌해 왔던가!     

   -전태일 평전


누구에게나 결단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 결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새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자본가인 남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지, 노동자로서의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삶은 변화가 없습니다. 마르거나 썩어갈 뿐입니다.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살아있는 삶만이,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그것은 치열한 자기 성찰을 통한, 희생을 각오한 결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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