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노동] 사회정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by 센터 posted Apr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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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공장제 노동, 그리고 디지털 플랫폼 노동


1987년에 노동부가 작성한 〈1987년도 노동 정책의 방향〉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동정책은 역사적으로 산업혁명 이후 성립한 공장제 노동을 매개로 하여 파생되기 시작한 고용, 임금, 근로시간, 산업재해, 노사관계 등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임.’ 왜 이렇게 썼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후로 3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 사회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했다. 서비스업이 큰 규모로 성장했고, IMF 구제금융 위기를 겪었으며,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었다. ‘공장제 노동’을 모델로 삼기에는 너무도 이질적인 노동 환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공장제 노동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1987년에도 사무실 노동은 있었고, 지금도 공장제 노동은 있다. 그러나 무엇을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법과 제도가 그 모델에 따라 구성되고, 학설과 판례가 그렇게 구성된 법과 제도의 영향을 받고, 기업의 경영과 노동운동이 또 그 모든 것의 영향을 받는다. 최근의 탄력적 노동시간제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가 아직도 얼마나 이 공장제 노동 모델에 사로잡혀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전체 노동자의 7할 이상을 차지하는 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한 고려가 얼마나 그 논쟁에 반영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최근에 가장 뜨거운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이른바 디지털 플랫폼 노동이 이 공장제 노동 모델에서 얼마나 고려될 수 있겠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하겠다. 플랫폼 노동이 공장제 노동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네트워크 모델이라는 점이다. 


재검토해야 할 노동법 


지금의 노동법은 기본적으로 피라미드형 법인을 모델로 삼는다. 법인은 기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법인 모델에서는 법인이 곧 사용자가 된다. 그러므로 사용자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법인은 노동자를 직접 고용한다. 노동자들은 법인 단위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했다. 법인은 사용자로서 노동법상의 책임을 부담한다. 모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노동자는 사전에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노동을 하면 된다. 정해진 시간을 벗어나면 연장노동이 되고 가산임금이 생긴다. 정해진 장소를 벗어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사용자의 지시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디지털 플랫폼 네트워크는 다르다. 플랫폼은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다. 플랫폼이 노동자에게 직접 작업 지시를 하지도 않는다. 플랫폼은 작업 내용이 담긴 디지털 정보를 전달할 뿐이고, 노동자는 이 정보에 반응하면서 미션을 수행할 뿐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인터넷 네트워크를 타고 언제 어디에나 두루 존재한다. 반대로 노동자는 항상적인 종속 상태에 놓인다. 물론 스마트폰을 꺼버리면 된다. 마치 공장 노동자가 사표를 던질 수 있었듯이. 플랫폼은 사용자가 아니라 정보 매개체에 불과해 보이고, 노동자는 자영업자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관계가 아니라 상사거래관계라고 치부해 버리면 간단할 수도 있다. 복잡한 노동법적 문제를 회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 노동하고 있는 것이 우리 눈앞에 선명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상법을 핑계로 현실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 노동법을 재검토해야 한다. 크게 세 가지를 재검토해야 한다.


첫째, 사업의 개념을 재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법은 기본적으로 사업을 적용 범위로 삼기 때문이다. 공장제 노동 모델에서 사업은 기업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사업과 기업은 다른 것이다. 사업의 형식은 다양하다. 사업주는 사업 형식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 기업(법인)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밖에도 외부 노동력을 기업에 결합하는 것(특수고용, 프랜차이즈), 외부 기업을 본사에 결합하는 것(원·하청, 재벌) 등 다양한 사업 형태가 가능하다. 노동법의 정신은 권한과 책임을 조응시키는 데 있고, 그래서 사업주가 선택한 사업 형식을 곧이곧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업은 언제나 법의 목적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정의된다. 사실 사업의 개념을 이렇게 상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미 실정법에도 있다. 예를 들어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가 임금 차별을 목적으로 설립한 별개의 사업은 동일한 사업으로 본다.’(제8조)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은 노동법 정신을 잘 보여준다. 사업주는 각각의 법인으로 나누어 놓았지만, 그것이 법의 목적을 위반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이라면 각각의 법인 전체를 하나의 사업으로 간주하여 법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서로 다른 사업들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사업을 구성한다는 이유로 제3자에 대한 구상권을 제한하고 있는 산재보험법 제87조도 있다. 그러므로 사업의 개념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이미 실정법으로 여기저기에 흩어져 존재하고 있는 규정과 취지를 한군데로 모아 일반화시킨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반화할 때 필요한 법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업(본사)이 다른 사업(자회사, 하청기업, 가맹점, 특수고용)을 기획, 관리, 감독하는 등 둘 이상의 사업이 하나의 사업 목적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경제 활동의 동질성이 같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전체가 하나의 사업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이 법리는 대법원 2016. 7. 29. 선고 2013두22703 판결의 요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 상대적 사업 개념을 플랫폼 노동에 적용하면, 플랫폼 자체가 하나의 사업이 될 수도 있지만, 플랫폼과 플랫폼 노동자 전체를 (나아가 어떤 경우에는 소비자까지도 포함하여) 연결하는 사업네트워크 자체가 하나의 사업이 될 수도 있다. 


둘째, 그렇다면 사용자 책임도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장제 노동 모델에서는 사용자 책임을 법인의 자기 책임으로 한정했다. 자기 책임은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개체 중심의 법리이다. 그러나 네트워크 사업 모델에서도 그렇게 하면 책임 회피가 가능해진다. 사업주는 네트워크에 종속되어 있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쉽게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업네트워크 자체가 상대적 사업 개념에 따라 하나의 사업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우에는,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자가 사업주로서 사용자 책임을 부담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네트워크 사업주로서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자기 책임을 확대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네트워크에 결합된 다른 사업주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연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연대 책임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실정법 여기저기에는 연대 책임을 인정하는 규정들이 꽤 있다. 도급인의 귀책사유로 인하여 수급인이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한 경우에 도급인이 연대 책임을 지도록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44조, 업무 집행 지시자 등(예를 들면 재벌 총수)의 연대 책임을 규정한 상법 제401조, 환경 오염 피해에 대한 무과실 책임과 연대 책임을 규정한 환경정책기본법 제44조 등이 좋은 사례이다. 오히려 노동법에서 사업주의 연대 책임을 인정하는 데 옹색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환경정책기본법 제44조에서 ‘환경 오염’과  ‘환경 훼손’을 ‘노동 오염’과 ‘노동 훼손’으로 고쳐 쓰면 이렇게 된다. ‘노동 오염 또는 노동 훼손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해당 노동 오염 또는 노동 훼손의 원인자가 그 피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노동 오염 또는 노동 훼손의 원인자가 둘 이상인 경우에 어느 원인자에 의하여 피해가 발생한 것인지를 알 수 없을 때에는 각 원인자가 연대하여 배상하여야 한다.’ 국회의 상임위원회도 환경과 노동이 결합되어 있는데, 노동법에 위와 같은 규정을 도입하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칼 폴라니가 지적했듯이 노동과 환경(토지, 자연)은 자본주의에서 상품으로 의제되는 대표적인 비상품이라는 점에서 깊은 동질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셋째, 위에서 한 얘기들은 결국 노동법상 종속성의 개념을 재검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공장제 노동 모델에서 종속성은 자율성과 반대말이다. 이 모델에서 노동자는 거대한 바퀴가 돌아가면 그것에 맞물려 수동적으로 따라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네트워크 모델에서 노동자는 디지털 정보 네트워크에 의하여 제어되는 자율주행 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는 네트워크에 종속되어 있지만, 또는 네트워크에 의하여 제어되고 있지만, 공장 노동자와 달리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는다. 물론 이 자율성은 노동자가 자신의 사유를 행위 속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표를 최대의 성과로 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현대의 경영기법은 타인에 의한 착취, 타율적 착취보다 자기에 의한 착취, 자율적 착취가 훨씬 성과가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네트워크 모델에서 노동자는 작업 수행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갖는다. 그 대신 작업의 결과에 대해서도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 건당 보수는 전형적인 방식이며, 성과급의 확산은 네트워크 사업 모델의 파장이다. 물론 이 자율성은 온전한 자율성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의하여 제어되는 자율성이다. 그러므로 네트워크 모델에서 종속성은 더 이상 자율성의 반대말이 아니다. 종속은 자율과 섞여 있다. 이것을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제어’라고 할 수 있다. 공장제 모델이 네트워크 모델로 이행하면서, 종속은 제어로 모습을 바꾼다. 이 새로운 종속성은 과거처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은유적이며, 포괄적이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종속성을 계속해서 노동법 적용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법을 직업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이른바 ‘징표’를 둘러싸고 있는 맥락에 좀 더 예민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밀려난 사회정의의 가치


앞에서 인용한 〈1987년도 노동 정책의 방향〉에서 드러나고 있는 기본 입장을 폐기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책자에 따르면, 노동 정책의 주요 임무는 ‘생산성 향상과 산업사회의 발전’을 기하는 데 있는데, 노동 문제가 ‘사회 안정, 국가안보에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여 전 사회에 파급되면서 ‘사회 불안’을 조성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노동 정책이 어느 분야보다도 중요하다고 한다. 이 생산성 지상주의는 ‘전 근로자가 생산 활동에 의욕적으로 참여하여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게 하는 것’이 노동 정책의 주요 과제라고 선언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물론 이런 구절도 있기는 하다. ‘한편 근로자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함.’


그러나 ‘한편’으로 밀려난 사회정의의 가치는 전 노동자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전체주의적 노동관에 최소한의 균형을 확보하는 데에도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사회정의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ILO 헌장)를 뿌리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와 행위의 결합이라고 하는 인간 노동의 본질적 특징을 노동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선언(1944)의 구절을 빌리자면, ‘물질적 진보와 정신적 발전’을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를 경제 성장의 에너지원으로 취급하는 관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노동법은 ‘경제 성장’이나 ‘국가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정의의 가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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