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위로하다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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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열차.jpg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 삼등열차The Third-Class Wagon / 캔버스에 유채, 1862년, 65.4x90.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삼등열차〉 캐리커처 느낌의 인물 표현 방식과 구불구불한 선으로 그림에 생명력이 느껴진다. 강렬한 명암 대비로 삼등칸 객실의 암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여 도시 빈민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등열차.jpg

〈이등열차〉 역시 도미에가 그린 그림이다.


일등열차.jpg


〈일등열차〉 일등칸 객실 안에 두 쌍의 부부, 넷뿐이다. 모두 우아한 모습이다.



흔들리는 열차의 삼등칸 객실, 엄마 젖을 먹고서야 겨우 잠든 아기를 보듬고 있는 젊은 여인, 바구니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할머니, 그 옆에 어린 소년이 지친 듯 쓰러져 잠을 잔다. 삶의 고단함이 객실의 공기처럼 무겁기만 하다. 다른 승객들은 서로 엉겨 붙어있지만 우울한 침묵만 흐를 뿐···. 무관심하다. 삼등칸 객실 모두가 그녀들의 삶처럼 가난한 생활의 굴레 속에 서로를 위로할 여력이 없다.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가 1862년에 그린 〈삼등열차The Third-ClasWagon〉 풍경이다.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소외된 여성들에게 작가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궁핍한 생활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가난 때문에 거리의 화가로 나섰던 1830년 프랑스는 매우 혼란스러운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도미에는 당시 세태를 비판하는 정치풍자 만화를 그리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도미에가 잡지나 신문에 실은 삽화Illust들은 대부분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 부패를 가혹하게 묘사했다. 적나라한 그림들은 가진 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국왕 모독죄로 고소되어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수감 생활 후 도미에는 가난한 민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횡포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한층 더 신랄해진 풍자로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이처럼 모순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오직 민중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도미에에게 작업은 자신의 아픔을 위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뭐 때문에 제일 많이 죽는지 아니? 사람은 가난해서 죽는다. 가난해서 병이 있어도 치료를 못 받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험한 일하다 사고로 죽고, 가난이 고통스러워 지 목숨 지가 끊고···.” 

JTBC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 철거를 앞둔 동네 뒷골목에서 이주 노동자, 신용불량자와 같은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불법으로 약을 팔고 치료를 해주는 할머니의 이유 있는 대사였다.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 빈곤한 노인,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 편견 앞에 작아지는 성 소수자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자주 아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신의信義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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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jpg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1844년, 국보180호, 수묵화, 23×69.2cm,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가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의 노력과 후지쓰카 지카시 가문의 도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건져져 국내에 돌아와 국보 180호로 지정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게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라고? 정말?’  

물론 나는 문인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안목이 높지 않지만, 그림은 거칠고 메마른 붓질이 쓱쓱 지나갔을 뿐,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가 전부인 그저 싱거운 그림이다. 세련된 기법도 찾아 볼 수 없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비평서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빵점짜리라고 서술했다. 사실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림의 여백까지 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세한歲寒’이란 새해 전후로 연중 가장 추운 절기를 뜻한다. 겨울의 칼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초라한 집 한 채와 양쪽으로 잣나무와 소나무 두 그루씩 서있을 뿐 온통 여백이다. 텅 빈 공간이 더 쓸쓸하고 춥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느낀 추사의 적막감과 외로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1844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 생활하고 있던 추사 자신에게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사제지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역관으로 북경에 갈 때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준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붓을 들어 글과 그림으로 전했다.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가운데서도 그대는 이처럼 마음을 쓰고 어렵게 구한 책을 권세 있는 자들에게 주지 않고, 오히려 바다 건너 귀양살이하고 있는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구려. (··· ···) 공자께서 추운 계절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고 하셨네.” 

공자의 《논어》 한 구절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를 빌려와 이상적의 인품과 변치 않는 절개를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내용이다. 


그림의 사연을 떠올리며 다시 찬찬히 바라본다. 그림의 제목과는 달리 따뜻함이 전해진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이렇게 어우러져 있으니 문인화의 최고라는 찬사와 평가에 이제야 수긍이 간다. 

모두가 외면할 때, 내 편 하나 없이 외로울 때, 무언가 말 못할 시름이 깊어 한없이 슬플 때, 내 옆에 신의信義를 지키는 벗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런 벗에게 신의를 지키는 존재인지 되묻게 된다.


슬픔은 예술

by 센터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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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1.jpg 명화에세이2.jpg

*부서진 기둥 1944 oil on masonite
푸른 하늘과 메마른 사막에 홀로 서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온몸에는 못이 박혀있고 척추을 대신해  그리스식 기둥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그런 그녀의 몸이 갈라지지 않게 하얀색 코르셋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이는 부서진 척추의 고통을 몸에 박힌 못으로 나타내면서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보
여주고 있다. 메마른 사막은 여러 번의 수술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받은 그녀를 나타낸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생각 속의 디에고 1943 oil on masonite 
이어지는 짙은 눈썹, 당당한 눈빛과 육감적인 입술, 그리고 화려한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우아나를 입고 있는 이 자화상은 칼로의 강박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마 한복판에 디에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결국은 두 존재가 하나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47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50여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중 다수는 자기 자신을 예술적 주제로 삼은 자화상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던 칼로는 열여덟 살 때 또 하나의 불행을 맞이한다. 전차와 버스가 부딪치는 큰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몇십 번의 수술과 망가진 척추 때문에 평생 석고 지지대를 입고 사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서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자신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뜨거운 사랑을 한다. 멕시코의 최고 민중화가로 칭송받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예술가로서의 교감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스물한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정치적, 예술적 동지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세 번의 유산과 디에라의 샘솟는 바람기는 여성과의 잠자리를 커피 한 잔 마시듯 여기고, 급기야 그녀의 여동생과 애정 행각을 벌여 칼로에게 영혼이 찢겨나가는 고독감과 상실감을 평생 동안 안겨주었다. 마침내 이혼, 그리고 이듬해 재결합. 하지만 여전히 둘 사이는 삐그덕거렸다. 남편과 아이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그녀는 그림으로밖에 토해낼 수 없었다.


그녀의 그림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한 가장 정직한 이야기였다. 칼로의 삶은 줄곧 망가져가는 육체의 고통과 사랑의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예기치 못한 시련과 절망을 경험으로 자신 내면의 풍경을 치열히 그려야 했던 이유는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함이었으리라. 칼로에게 슬픔은 삶 전체를 지배한 떼버릴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것과 함께 품고 살아가야 함을 삶이 가르쳐 주었다. 인생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늘 그녀에게 찾아오는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예술이 되었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순수한 휴머니스트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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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작품 군상.jpg


이쾌대(1913~1965)의 대표작품 〈군상 4-조난〉과 마주한다. 스케일, 구도, 형상 모든 것이 한국 근대화단에 보기 드문 작품으로 생소한 울림이 느껴진다.

화폭 배경에 구름기둥이 폭발하듯 솟아오르고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벌거벗은 군상들.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과 여인 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돌로 내리치고 물어뜯으며 싸운다. 인물의 묘사와 표정이 살아있다. 울부짖다 지쳐 쓰러진 여인을 보듬어 안고 서로 의지한 채 앞서 나가는 세 명의 주인공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이 아닌 순수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구 낭만주의 형식을 담아 현실의 기운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힘’이 느껴진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와 해방 직후 이념분열로 갈등과 모순과 혼란의 어두웠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쾌대처럼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그린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않다.

월북화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이쾌대는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한국화단에서 그야말로 잊혀진 화가였다. 이렇듯 냉전 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40여 년 동안 아내 유갑봉 여사의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작품들이 1991년 신세계미술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당시 화단에선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아내의 눈물겨운 보존 노력이 우리 미술사에 큰 영광을 가져다준 셈이다.


‘한식이, 한민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1950년 11월 11일 시대의 아픔으로 국군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끌려온 이쾌대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편지를 몰래 인편으로 아내에게 전달한다. 2년 후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끝내 가족 곁으로 가지 못했다.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그가 택한 곳은 북한이었다. 가족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던 이쾌대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왜 북한으로 향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다만 존경하던 친형 이여성(독립운동가, 기자, 역사화가)이 월북하면서 따라갔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가족을 버릴만한 중요한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형제는 곧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이쾌대의 월북행을 단순히 이념 문제로만 바라보기에 어렵다. 아마도 곧 통일이 이뤄지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제자인 남경숙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46년 말 북한에 다녀오신 선생께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가 아니였을까?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 전시정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
 2015.07.22(수)~11.01(일)
 덕수궁 미술관
 관람료 무료
 www.mmca.go.kr



선택의 힘_마르셀 뒤샹 < 샘 Fountain>

by 센터 posted Ap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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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샘.jpg 

20세기 미술사를 뜨거운 논쟁으로 몰고갔던 화제작(?) 마르셀 뒤샹의 〈샘〉이다. 

작가인 뒤샹이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다. 가게에서 산 남성 소변기에 제조업자 이름인 ‘R.mutt’라는 서명을 적어 넣은 것뿐. 

출품된 변기는 운영위원들 간의 토론 끝에 결국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로 폐기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결국엔 사라져 버려 지금은 아쉽게도 실제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R.mutt의 변기는 모두 뒤샹이 1951년, 1964년에 한정판으로 재현한 레플리카replica다.


1917년 미국 독립예술가협회에서 주최하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작으로 남성 소변기 하나가 등장했다.‘이 작품을 걸 것인가? 아니면 바닥에 놓을 것인가? 그런데 과연 이런 작품을 전시해도 되는 것인가?’ 운영위원들은 난감했다. 결국 변기는 미술관에서 볼 수 없었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은 가게에서 구입한 변기에 자신의 이름 대신 변기 제조업자 이름인 리처드 머트 ‘R.Mutt1917’라고 서명을 한 후 제목 〈샘Fountain〉으로 출품했다. 출품료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였지만, 전시회에서 거절 당한 이 사건은 당시 예술계에 뜨거운 논쟁과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 오늘날의 시선으로도 미술관에서 변기를 만나는 것이 여전히 낯설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의 사건이라는 걸 감안하면 당시 미술계가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스러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전시가 끝나자 뒤샹은 반격에 나섰다.

“출품료를 낸 작가는 어떤 작품이든  전시할 권리가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리처드 머트의 작품 〈샘〉을 거부한 거죠? 누군가 그것이 비도덕적이고 상스럽다고 말하는데 〈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머트가 그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평범한 생활용품을 가져와 새로운 이름과 관점 아래 변기의 기능적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은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도 할 수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습니다.” 


뒤샹의 이 말은 20세기 미술사에 혁명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전통적인 작가들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회화나 조각이 예술품이라고 믿어왔는데, 변기 하나로 미술의 상식을 다시 재고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뒤샹은 작가가 단순히 ‘재현’하는 미술에서 더 나아가 무엇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미술로 작가의 존재를 확장시킨 것이다.


변기가 화장실이 아닌 특정 공간 ‘미술관’ 안에서 좌대 위에 예술가의 서명이 쓰인 상태로 있다면 사람들은 분명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게 된다. 사실 변기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오브제 자체로만 본다면 나름 아름답게 보인다. 변기라는 기능은 잠시 잊어버리고 그저 본질적인 형태 자체만을 충실히 보자면 매끄러운 하얀 표면,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감각적인 볼륨감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변기가 미술관 으로 진입하면서 기존의 미술 개념은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뒤샹은 제도화, 형식화된 미술 시스템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예술 경계를 무력화한 그의 발칙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낸다. 뒤샹이 천재적 상상력으로 현대 미술을 무한대로 확장시킨 위대한 예술가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새로운 얼굴

by 센터 posted Jun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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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원본 비정규노동161호 내지web_1.jpg

 

페이지 원본 비정규노동161호 내지web_1.jpg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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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서사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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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jpg

무제 Untitled, 1960~1961,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Tate Modern Museum, London

“작품에는 어떤 설명을 달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_ 마크 로스코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 방은 어둡고 적막하다. 그의 그림과 마주한다. 고요한 침묵만이 흐를 뿐. 하지만 이 침묵이 평정심을 찾아주지는 않는다. 그저 큰 화면 가득 쓱쓱 물감을 펴듯 발라 내린 색채덩어리, 단순한 면과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로스코는 자신을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에 불편해 했다. 관람자의 눈에 작품들이 ‘추상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는 단호하게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인생의 비극을 그린 서사다”라며 인간의 형상에 대한 묘사가 단순 모양과 상징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차별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안과 가난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 고통이 그의 작업 밑바닥에 깔려있는 비극적 서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 비극적 감정은 그림을 그릴 때 늘 나와 함께했다”라고 고백했다. 


로스코의 명성이 화단과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이름을 타기 시작하면서 1958년 캐나다 주류회사인 시그램은 맨해튼에 신사옥을 완공하자, 1층 ‘포시즌즈’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할 회화작품을 로스코에게 주문했다. 그림 아홉 점을 거액에 계약하고 정작 그림이 완성되었지만, 고급 레스토랑에 비싼 음식 값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며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주고받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경건한 삶으로 안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계약 철회를 함으로써 자기가 부여한 작품의 순결성과 화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후 작품을 완전 단색 처리하거나 윤곽선이 선명한 검은색 사각형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에 작업했던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로스코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이 어두운 색채 실험을 계속했다. 음울한 분위기는 그의 심각한 우울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한때 맨해튼에서 배를 굶주리며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미국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가 되었지만 1970년 2월 예순일곱이란 나이에 그만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 추상표현주의 선구자로 불리는 로스코의 생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자나 잘 나가는 자나 모두 저마다 인생의 십자가는 힘겹기만 하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곧 로스코의 슬픔이 위로가 된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부부의 선택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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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jpg
1938, 150×136.5㎝ / 유화 / 조르주 퐁피두 센터(파리) 
초현실주의 작가인 마르크 샤갈은 빛의 마술사로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동화적 분위기의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
신랑 신부를 태운 수탉이 에덴동산을 향해 날아가려는 것일까? 
염소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축하 연주를 들으며 부케를 받은 친구는 천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샤갈은 사물을 비논리적으로 꾸며 서사를 전개해 나간다. 
아마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어려움이 작가의 해석일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부부가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세상살이에 무뎌진 사랑의 불만일 수도 있고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격지심 문제로 초라함에 헤어짐을 결심한다. 
그 선택에 대해선 그 누구도 뭐라 할 이유가 없다. 
부부라면 언제나 이러한 한계에 노출되기 마련이고 
누군가에겐 그 한계가 더이상 짊어질 수 없는 
태산처럼 느꼈을 테니 말이다. 
이혼, 그것은 
또 하나의 삶의 선택일 뿐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미움 대신 용서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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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jpg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년, 캔버스에  유채,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큰 아들은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품은 아버지에게 원망이 가득하다. 과연, 형의 분노는 당연한가? 소위 모범적으로 살아온 형이 피붙이인 동생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보면서 모범적인 삶이 좋은 인간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범적인 인간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일 뿐…. 큰 아들은 자기 공로에만 집중하여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배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했던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장 20절, 24절) 


작은아들은 찢어지고 해진 누더기 옷을 걸친 채 한쪽 구두는 뒷굽이 닳아 없어져 맨발을 드러내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몇 해 전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해 미리 받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다 잃고 헐벗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비난하기는 커녕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해 주지만 큰아들은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다. 용서를 구하는 아들 어깨에 다정하게 감싼 아버지의 두 손이 아주 특별하다. 한 손은 거친 남자의 손으로, 다른 한 손은 여린 여자의 손이다. 왼손은 모든 시련을 해결해주실 강한 능력의 아버지 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어머니 손으로 거룩하신 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은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로 유명한 이야기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내용이다. 


〈돌아온 탕자〉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작품으로 그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두 아들, 두 딸, 두 아내 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보냈다. 정부였던 여인에게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를 당해 결국 파산하고 빈민촌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 재산, 명예, 권력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10여 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인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처절한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두려웠는지 모른다. 마침내 생을 마치고 신 앞에 선 자신이 바로 ‘돌아온 탕자’였기 때문이다. 늙은 화가는 죽음 앞에서 ‘용서’를 깊이 묵상하며 그린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 불편하고 힘들지만 마음속에 깊이 새겨있던 ‘미움’이라는 단어를 지워내고 ‘용서’의 단어를 새겨본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모든 것이 예술이다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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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jpg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실크스크린, 1962년, 테이트 모던 뮤지움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화면에 반복적으로 찍어 놓았지만 모두 똑같지 않다. 다채로운 색상과 이미지의 윤곽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의 세계가 느껴진다. 앤디 워홀은 광고디자인에 사용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여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대량 생산으로 명성과 부를 함께 이루었다.


마릴린 먼로의 얼굴 사진 한 장을 단순한 이미지로 변환 후 반복적으로 찍어낸다. 복제된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바라보면 모두 똑같지 않다. 다채로운 색상과 이미지의 윤곽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의 세계가 느껴지는 작품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는 현대 미술 ‘팝 아트Pop Art’의 전설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사회는 대량 생산과 유통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렸고 이때 등장한 팝 아트는 상업과 예술을 혼합하고 고급 미술과 대중 미술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예술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했다.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을 내세운 팝 아트는 위인보다는 상품적 가치를 가진 스타나 유명인을 화면 속에 등장시켰다. 


워홀은 판이 완성되면 단시간에 수십 수백 장을 찍어낼 수 있는 판화 기법 중 하나인 실크스크린을 활용해 하나의 그림을 단순한 디자인으로 변조해 다양한 색상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대량 생산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 붙이거나 복사했으며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선포하고, 작품은 공장에서 동일한 상품을 기계가 찍어내듯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졌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그의 명성과 부도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그는 평생 부와 명성을 좇아다녔다. 


“돈 버는 일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잘 버는 사업이 최고의 예술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보았다. 워홀은 자본주의 구조 내에서 예술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포착한 작가로서 자본주의 속도와 호흡을 맞추며 소비사회의 보편적 이미지로 자본주의적 가치를 드러내놓고 찬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워홀은 그야말로 자수성가하여 이민 노동자의 딱지를 떼고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_키스 해링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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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빛나는 아기.jpg 아이콘 짓는 개.jpg

아이콘,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 53.5 x 63.5cm, 1990

키스 해링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빛나는 아기〉, 〈짖는 개〉. 해링이 1990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그린〈빛나는 아기〉는 불멸, 영생의 아이콘이 되었다.


editions86_p85.jpg                love keith haring.jpg

〈Love〉 하트와 연인들의 모습을 역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미국 팝아트 작가 ‘키스 해링 Keith Haring’. 그의 이름은 몰라도 작품만큼은 익숙하다.

1980년, 스무 살 재기발랄한 미대생 키스 해링은 더러운 뉴욕 지하철 빈 광고판에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만화적인 도상은 우중충한 뉴욕 지하철 분위기를 바꾸며 순식간에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링은 금세 유명세를 타면서 일약 스타작가가 되었다.


해링은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섰다. 건물 벽, 담벼락, 광고판을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마구마구 그렸다. 해링은 예술가와 소수만 누리던 기존 예술 질서를 거부하며 ‘대중을 위한 예술’, ‘모두를 위한 예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하철역뿐 아니라 도심 속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리의 예술가가 되었다. 해링에게 ‘도시’는 대중과 만나는 열린 미술관이기도 했다.


해링의 예술 속엔 분명한 외침이 있다. 인종 차별이나 약물 중독, 전쟁, 에이즈 등 시대적 화두에 비판 의식을 과감히 드러낸다. 메시지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표출되었다. 그는 대중들의 공간과 삶 속에서 만나기 때문에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택했고, 어두움보다 밝음을 택함으로써 항상 사람들과 소통하길 원했다.


해링은 작품의 제목을 짓지 않는다. 많은 작품들이 〈무제〉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작가 자신이 의미를 제시하지 않고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념이나 의미를 창조해 해석하길 바랐다. 역시나 대중과의 소통이 핵심이었다.


생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8년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진단 후 해링은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대중을 위한 예술의 열정이 꽃을 피운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감사하며 살았기에 그의 위대한 꿈을 방해할 수 없었다.


1990년 2월 16일 이른 아침, 서른한 살의 나이에 해링은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려진 컵에 커피를 마시고, 그려진 노트에 공부를 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또 다른 ‘절규’가 들린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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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jpg ◀〈절규〉1893 | 마분지에 유화 파스텔 카세인 | 91*73.5cm 배경의 물 흐르는 듯한 곡선의 형태는 평면감을 돋보이게 하는 반면 기울어진 사선으로 표현된 길은 극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 휘어진 몸은 흔들리는 형태의 배경으로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여인의 머릿결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곡선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어떤 위험의 상징(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두 번의 배신을 당한 후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혐오로 발전했다고 해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이었다.


2030 젊은 세대들이 한국의 현실을 ‘헬조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신계급론으로 대변되는 ‘수저론’이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구조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조어는 개인의 노력보다 계급이 우선이라는 우리 사회에 대한 자조와 비난 그리고 비판이 담겨 있고 이 비난과 비판 아래에는 불안과 공포가 깔려있다.


헬조선, 수저론은 우리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는 데 또 다른 키를 제공한다. 청소년들은 명문 대학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입시불안을, 청년들은 취직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취업 불안을, 중장년 세대는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고용 불안을, 그리고 노인들은 불행한 노후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빈곤 불안을 갖게···.언제부턴가 불안이라는 감정이 국민 다수의 삶을 짓누른다. 


불안과 공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The Scream, 1893)’이다. 해질녘 하늘에 걸린 구름이 붉은빛으로 너울거리며, 검푸른 대지와 바다 역시 요동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의 주인공은 두 손을 귀에 댄 채 공포에 질려 떨고 있다. 떨어져 걷는 두 친구의 무심한 듯한 모습이 불안과 공포의 느낌을 더욱 배가시킨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아버지는 심한 우울증과 강박적인 종교관으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는 누이와 동생의 죽음까지 바라보았던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트라우마가 많은 삶 때문이었을까? 그의 작품엔  자신의 상처받은 불안한, 두렵고 공포스러운 삶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 발작성 공황을 동반하는 광장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작품은 여전히 또 다른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이미 결정된, 상시적인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는 사회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by 센터 posted Dec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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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_파라솔.jpg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1875)


축소_축소_스카프.jpg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1878)


축소_죽음.jpg

임종을 맞은 까미유 모네(1879)



걸어가는 아내와 아이. 불현듯 아내 까미유를 불렀을 때 뒤돌아 본 순간을 그린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색채는 마치 붓에 태양 빛을 찍어 거칠게 빠른 속도로 발려 놓은 듯 하늘과 부인과 아이, 풀밭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휘감아 찰나와 순간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을 마주하노라면 푸르른 초원에 흩날리는 상쾌한 바람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까미유의 허망한 시선이 더 가슴깊이 아려온다. 저 강렬한 태양 빛보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빨간 스카프를 두른 여인의 모습이 몹시 슬퍼 보인다. 창밖 너머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길 위에 서서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는 까미유를 모네는 애써 외면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을 그려나갔다. 창안의 어두움과 창밖의 밝음은 공간적인 분리와 색의 대비, 그리고 엇갈린 시선이 말하듯 그림에 미안함과 안타까움, 지독한 슬픔이 전해온다. 이 작품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까미유는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를 간호하고 아이들을 돌보던 알리스는 이미 모네의 여자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고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까미유는 배신감으로 생에 대한 미련마저 쉽게 놓았는지도 모른다. 모네는 곧 알리스와 재혼을 해서 30년 동안 삶을 함께 했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 그림을 곁에 두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음을 맞는 참담한 순간에도 모네는 화가였다. 죽음의 손길이 가까워지면서 순간순간 변해가는 색채를 캔버스에 담아 나갔다. 양산을 든 까미유도 빨간 스카프를 두른 까미유도 서서히 지워지고 허망한 시선의 그녀의 눈도 감겼다. 허연 침대에 누워 하나둘 형체가 지워져 간다. 그 모든 회한도 내려놓은 듯하다. 그림 속 까미유가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바라보는 이들은 슬픔과 아픔에 젖는다. 까미유는 비록 32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위대한 화가 모네의 작품 속에 영원한 모델로 남아 있다. 〈임종을 맞는 까미유 모네〉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아내를 바라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아직 살아있는 그 순간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니 이 순간이 이대로 영원히 멈추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심정을 까미유는 느끼고 떠났으리라. 그래서 내 남자를 용서하고 내 남자의 여자도 용서했으리라. 

꽃다운 열여덟 살에 직업 모델로 모네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시댁의 냉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모네의 외도와 투병을 감내해야 했던 까미유. 두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마지막이 아프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아니면 시간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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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larger.jpg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이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가?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19세기 중엽은 땅에 떨어진 낟알조차도 함부로 줍지 못하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던 참담한 시대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은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모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던 소작농들의 피폐한 삶을 보고 느낀 대로 그린 ‘사실주의’ 그림이다. 


작품은 당대에 주목받지 않은 여성, 그리고 그들의 고된 노동과 삶의 이야기다. 그저 묵묵히 낟알을 줍는 데 몰두하고 있는 표정 없는 여인네들의 검게 탄 얼굴과 거칠고 투박한 손, 그리고 굽은 어깨는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말한다. 그러나 이 일하는 여인들에게서는 결코 비천한 모습이 아닌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이삭 줍는 여인들 너머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추수단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말 탄 지주의 모습은 이삭 줍는 여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당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왜곡된 평가를 내놓았다. 가령 〈이삭 줍는 여인들〉을 서정적이면서 드라마틱한 화면 구성으로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며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밀레를 위험한 인물(블랙리스트)로 생각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의 동지로 여겼다. 하지만 밀레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 어떤 이념도 정치도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농민의 고된 생활을 그대로, 그러나 어떤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온화한 서정과 일종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한 것이었다. 


밀레는 인간을 이상적으로 미화하지 않았다. 오직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원천으로 삼은 인간은 정직하고 존엄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인간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이 그림은 감동적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동물원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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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공원 동물원 가이드맵.jpg



코로나19 이후 생명의 다양성 상실에 대한 반성을요구하는 요즘, 제주도는 아직도 ‘동물원’ 타령을 하고 있으니···. 세계 최초 ‘람사르 습지 도시’로 선정된 조천읍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마을 선흘리에진짜 야생동물을 몰아내고 외래종들로 가득 찬 동물테마파크를 만든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다.


과연 동물원은 누구를 위한 공간일까? 분명 동물들을 위한 공간이 아닐 것이다. 광활한 땅을 누비며활보해야 할 야생동물들을 울타리에 가둬 놓고 전시하는 방식이 옳은가. 동물원은 인간을 위해 지구상 동물들을 종별로 재구성해 놓은 전시장이자 인간의 학습장일 뿐이다. 인간의 오락이 목적이 되는 동물원은 동물이 관객인 인간을 즐겁게 해주는 대가로 먹이와 거처를 ‘보장’ 받는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반경은 동물원을 벗어날 수 없으며 심지어 종족 생산의 본능조차 계획과 통제 아래 이루어지니 동물에게 동물원은 잔혹하고 우울한 공간일 뿐이다. 인류는 동물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몇 년 전 뉴저지 동물원 와일드 사파리Wild Safari에 간 적이 있다. 내가 기대했던 사파리의 풍경은 TV에서 보아온 ‘동물의 왕국’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연의 생동감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파리는 도심 속의 자연이지만 역설적으로 동물들이 살아있는 화석처럼 다가왔다. 자연과의 엄격한 차단, 통제와 규칙, 주체가 아닌 객체인 동물원의 동물들이 일률적으로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은 생명의 다양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미 살고 있는 동식물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코로나19와 비슷한 전염병에 우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 람사르 습지Ramsar wetlands :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습지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람사르협회가 지정, 등록하여 보호하는 습지를 말한다. 람사르협회에서는 ‘물새 서식지로서 중요한 습지보호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 협약에 따라 독특한 생물지리학적 특징을 가진 곳이나 희귀동식물종의 서식지, 또는 물새 서식지로 중요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람사르 습지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by 센터 posted Apr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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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jpg

“살라고 낳았는데 죽으러 가는구나”

어머니는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만 본다.

“이 어린 것이 살아올 수 있다면···.”

무사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린 지 두 달 만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1914년 10월 30일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어머니는 오열을 한다. 아들의 나이 겨우 열여덟.1차 대전과 2차 대전, 전장의 난무하는 총탄은 니편 내편을  가리지 않는다. 청춘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청년과 그 아들을 앞세운 불행한 부모들만 만들 뿐···. 시대나 개인이나 모두가 불행했다.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1867~1945년)의 작품 〈피에타 piera〉는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온 자식을 어머니는 품에 안고 놓지 못한다. 아들은 마치 따뜻하고 안전한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웅크린 채로 어머니의 무릎 사이에 기대어 있다.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슬픔은 끝이 없다. 시대의 억압과 개인의 고통으로 힘겨운 삶을 인내하여야만 하는 눈물겨운 모성애가 전해온다. 어린 자식을 가슴에 파묻은 콜비츠는 예전의 붓을 버리고 칼을 잡았다.

목판화 특유의 흑백의 단순함과 강렬한 터치감은 고통과 절망의 떨림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목판에 칼질하며 전쟁의 상흔과 개인의 아픔을 하나하나 새겼는지도 모른다. 달동네에서 평생 병든 사람들을 무료 진료하였던 의사인 남편 카를 콜비츠와 뜻을 같이하여, 가난한 노동자와 삶을 함께 나누었다. 그녀는 늘 빈곤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굳건히 그려온 사회 참여 예술가였다.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느끼며 함께 분노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라는 공동체적 감성이 작품마다 가득하다. 우리 곁에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자식을 허망하게 잃은 슬픔을 아직 보상받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적 연대감이 더욱더 절실하다. 더 이상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몰을 지켜볼 수가 없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윤아/센터 기획편집위원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by 센터 posted Oct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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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차.jpg

올여름 공모한 제23회 전국학생만화공모전 고등부 카툰 부문에서 금상(경기도지사상)을 수상한 〈윤석열차〉다. 작품은 9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제25회 부천국제만화축제 현장에 전시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부천시 소속 재단법인인 만화영상진흥원이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주최한 만화공모전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작품을 선정해 전시한 것은 학생의 만화 창작 욕구를 고취하려는 행사 취지에 지극히 어긋난다.”며 엄중히 경고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한 만화영상진흥원이 문화체육관광부 후원 명칭 사용 승인 사항을 위반했다며 승인 취소사유에 해당하고 신속히 관련 조치를 이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라님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 얼굴이 전면에 달린 열차가 질주한다. 기관실에는 김건희 여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객실 창밖으론 칼을 휘두르는 검사들이 타고 있다. 그리고 열차를 피해 달아나는 서민들이 보인다. 한 컷의 카툰에 담긴 모습이다. 이 카툰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옹졸한 대응 결과, 오히려 〈윤석열차〉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원래 카툰은 한 컷 만화로서 위트와 유머를 활용한 희화적 그림이다. 카툰 창작의기본 속성 중 하나는 풍자다. 세상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풍자의 주된 대상은 늘 왕이나 정치인과 같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윤석열차〉를 그린 학생은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가 구두를 벗지 않고 의자에 발을 올린 사건’에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고등학생의 시선에서 세상을 풍자하고 권력을 비판하고자, 만화 ‘토마스와 친구들’을 패러디하여 우스꽝스럽고 재치있게 묘사한 것이다.

 

이 정도 작품에 문체부가 나서 공모전을 주최한 만화영상진흥원을 ‘엄중 경고’ 해야하는가? 실소가 나온다. 권력자의 심기가 다소 불편하더라도 표현·창작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한다. 문체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나라님 눈치나 보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도대체 윤석열 정부의 행정 부처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고등학생 작품을 갖고 심사 기준과 선정 과정을 살피겠다느니, 후원 명단에서 이름을 빼겠다느니 난리법석을 떨어댄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도 모르게 지나갈 일을 긁어 부스럼 만든 꼴이다.

 

평소 ‘자유’를 입에 달고 다니는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 후보 시절, ‘멸공 챌린지’의 선봉에 서서, “각자가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 질서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갖는 것”이라며 챌린지를 지지한 바도 있다. 광복절 경축사 연설에서는 13분 동안 ‘자유’를 33번이나, UN총회 연설에서는 20번이나 외쳤다. 문체부의 ‘엄중 경고’ 조치는 윤 대통령이 강조한 ‘자유’ 의지에 반하는 거 아닌가? 질문해 본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사상과 종교, 표현, 창작, 그리고 언론의 자유인 것을···. 윤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단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자유’를 부여하겠다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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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 대한 숭고한 시선_조나단 브로프스키 <해머링 맨>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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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링맨.jpg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1942~  해머링 맨Hammering Man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걷다 보면 흥국생명 빌딩 앞 광장,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망치질하는 한 거인을 만난다. 무려 50톤이 넘는 몸무게와 22미터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거인은 완강한 힘으로 느리지만 끊임없이 망치질을 반복한다.

거인의 정체는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다. 측면에서 포착한 인체의 실루엣은 철재 패널로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망치를 든 거대한 팔이 전기장치인 모터에 의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설치조각이다. 


〈해머링 맨〉은 미국작가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연작 중 하나다. 처음에는 〈노동자Worker〉라는 제목의 작품이었으나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작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스위스 바젤, 미국 시애틀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서울 한복판에 설치되었다. 작품 크기와 더불어 움직이는 망치질이 주목받으며 서울을 대표하는 공공미술 작품으로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머링 맨은 노동자다. 평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10시간, 35초에 한 번씩 망치질하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 그리고 노동자의 날에는 가동을 멈춘다. 점심시간도 없이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있으니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해 매일 연장근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큰 해머링 맨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간다. 해머링 맨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노동에 대한 숭고한 시선으로 삶의 가치를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망치질은 노곤한 육체를 쓰다듬는 듯 하루의 고된 노동을 위로하는 듯하다.


물끄러미 서서 가만히 해머링 맨을 바라본다. 그의 망치질이 참 고독해 보인다. 저항이나 분노보다는 눈물겨울 정도로 엄숙해보여 노동의 숭고함마저 전해진다. 생각의 꼬리에 꼬리가 딴지를 건다.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노동자인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들이 임금을 더 받아야 하는 사회적 통념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돈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당연한 걸까? 괜히 푸른 하늘에게 시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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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미인도.jpg 천경자 슬픈전설.jpg

위작 논란의 그림 < 미인도>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미인도〉 그림 속 여인인 나는 무척 슬프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이 나에 어머니라고 하는데 그 분은 나를 강하게 부정하신다. 유전자 검사결과 친모라고 판정을 받았는데도 “자기가 낳은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냐”며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항거로 절필선언까지 하셨다. 국내 미술계 최대 위작 시비의 주인공인 나는 그녀의 슬픈  그림자가 되었다.  위작 논란이 있은지 8년이 지난 1999년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한 장본인이라며 내 출생의 비밀을 밝혀주신 분이 나타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다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지만 ‘진품’이라는 감정이 번복되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작품이 아니다”라며 그녀는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나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슬픈 전설로 따라 다닌다.


위작 스캔들로 심신이 지친 그녀는 1991년 훌쩍 큰딸이 있는 뉴욕으로 떠난 후 8년 만에 잠시 귀국해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며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통크게 기증하고 다시 떠났다. 이후 노년에 불어닥친 병마 때문인지 한국과는 연락을 완전히 끊은 채 칩거 생활을 했다.


올 가을 천 화백의 미스터리한 때늦은 부고 소식 역시 한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의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91페이지로 결말을 맺었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인생에 어울리는 엔딩인지도 모르겠다. 1977년에 그린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0대인 그녀가 22세를 기억해낸 자화상이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던 스물두 살의 천경자 홀로 아이를 낳고 단칸방에서 탱탱 부어오른 젖가슴을 부여잡고 몸 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슬픔을 그림으로 토해냈으리라. 


머리 위에 뱀 네 마리가 오글거리며 가시 면류관처럼 씌워져 있고 가슴에는 가시 없는 장미 한 송이가 있다. 말문을 닫아버린 차가운 입술과 창백한 얼굴에는 한기가 돌고 움푹 패인 눈은 덤덤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림처럼 그녀는 운명에 당당히 맞선 삶을 살았다. 아니 운명에 도전하려는 섬뜩한 자의식 마저 느껴진다.


그녀의 슬픈 전설은 시대의 벽, 현실적 장애에 맞서 여성으로, 예술가로, 자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국의 또 하나의 역사였다. 그림 속 여인은 슬픈 눈길로 덤덤하게 나를 응시하며 말을 건다.

“당신의 전설은 무엇인가요?  그 전설 또한 슬픈가요?”

대답을 찾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먼저 보낸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by 센터 posted Feb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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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jpg

 

 

내가 생일 파티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케이크와 축하 노래, 생일 선물 등을 설명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케이크 꽂는 양초의 수도 하나 더 늘어난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 하죠? 축하란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건데, 나이를 먹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나이를 먹는 데는 아무 노력도 들지 않아요. 나이는 그냥 저절로 먹는 겁니다.”

내가 물었다.

“나이 먹는 걸 축하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엇을 축하하죠?”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요.”

 

- 말로 모건의 책 《무탄트 메시지 :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중에서

 

어릴 적 생일은 존재 그 자체를 축복받는 날이었다. 젊을 적 생일은 내 청춘이 장미 빛 인생으로 사랑과 행운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날이었다. 이제 ‘중년’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지금의 생일은 가족의 건강과 신의 지혜로 채워지길 기도한다.

우연히 10년 전 사진을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변해버린 내 모습, 많이 늙었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나이 불혹不惑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고 딴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를 마주했지만 여전히 삶의 무게는 버겁고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흔든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아지길···. 조금 더 괜찮아지길···.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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