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_키스 해링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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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빛나는 아기.jpg 아이콘 짓는 개.jpg

아이콘,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 53.5 x 63.5cm, 1990

키스 해링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빛나는 아기〉, 〈짖는 개〉. 해링이 1990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그린〈빛나는 아기〉는 불멸, 영생의 아이콘이 되었다.


editions86_p85.jpg                love keith haring.jpg

〈Love〉 하트와 연인들의 모습을 역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미국 팝아트 작가 ‘키스 해링 Keith Haring’. 그의 이름은 몰라도 작품만큼은 익숙하다.

1980년, 스무 살 재기발랄한 미대생 키스 해링은 더러운 뉴욕 지하철 빈 광고판에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만화적인 도상은 우중충한 뉴욕 지하철 분위기를 바꾸며 순식간에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링은 금세 유명세를 타면서 일약 스타작가가 되었다.


해링은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섰다. 건물 벽, 담벼락, 광고판을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마구마구 그렸다. 해링은 예술가와 소수만 누리던 기존 예술 질서를 거부하며 ‘대중을 위한 예술’, ‘모두를 위한 예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하철역뿐 아니라 도심 속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리의 예술가가 되었다. 해링에게 ‘도시’는 대중과 만나는 열린 미술관이기도 했다.


해링의 예술 속엔 분명한 외침이 있다. 인종 차별이나 약물 중독, 전쟁, 에이즈 등 시대적 화두에 비판 의식을 과감히 드러낸다. 메시지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표출되었다. 그는 대중들의 공간과 삶 속에서 만나기 때문에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택했고, 어두움보다 밝음을 택함으로써 항상 사람들과 소통하길 원했다.


해링은 작품의 제목을 짓지 않는다. 많은 작품들이 〈무제〉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작가 자신이 의미를 제시하지 않고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념이나 의미를 창조해 해석하길 바랐다. 역시나 대중과의 소통이 핵심이었다.


생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8년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진단 후 해링은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대중을 위한 예술의 열정이 꽃을 피운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감사하며 살았기에 그의 위대한 꿈을 방해할 수 없었다.


1990년 2월 16일 이른 아침, 서른한 살의 나이에 해링은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려진 컵에 커피를 마시고, 그려진 노트에 공부를 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선택의 힘_마르셀 뒤샹 < 샘 Fountain>

by 센터 posted Ap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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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샘.jpg 

20세기 미술사를 뜨거운 논쟁으로 몰고갔던 화제작(?) 마르셀 뒤샹의 〈샘〉이다. 

작가인 뒤샹이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다. 가게에서 산 남성 소변기에 제조업자 이름인 ‘R.mutt’라는 서명을 적어 넣은 것뿐. 

출품된 변기는 운영위원들 간의 토론 끝에 결국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로 폐기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결국엔 사라져 버려 지금은 아쉽게도 실제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R.mutt의 변기는 모두 뒤샹이 1951년, 1964년에 한정판으로 재현한 레플리카replica다.


1917년 미국 독립예술가협회에서 주최하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작으로 남성 소변기 하나가 등장했다.‘이 작품을 걸 것인가? 아니면 바닥에 놓을 것인가? 그런데 과연 이런 작품을 전시해도 되는 것인가?’ 운영위원들은 난감했다. 결국 변기는 미술관에서 볼 수 없었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은 가게에서 구입한 변기에 자신의 이름 대신 변기 제조업자 이름인 리처드 머트 ‘R.Mutt1917’라고 서명을 한 후 제목 〈샘Fountain〉으로 출품했다. 출품료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였지만, 전시회에서 거절 당한 이 사건은 당시 예술계에 뜨거운 논쟁과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 오늘날의 시선으로도 미술관에서 변기를 만나는 것이 여전히 낯설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의 사건이라는 걸 감안하면 당시 미술계가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스러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전시가 끝나자 뒤샹은 반격에 나섰다.

“출품료를 낸 작가는 어떤 작품이든  전시할 권리가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리처드 머트의 작품 〈샘〉을 거부한 거죠? 누군가 그것이 비도덕적이고 상스럽다고 말하는데 〈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머트가 그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평범한 생활용품을 가져와 새로운 이름과 관점 아래 변기의 기능적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은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도 할 수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습니다.” 


뒤샹의 이 말은 20세기 미술사에 혁명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전통적인 작가들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회화나 조각이 예술품이라고 믿어왔는데, 변기 하나로 미술의 상식을 다시 재고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뒤샹은 작가가 단순히 ‘재현’하는 미술에서 더 나아가 무엇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미술로 작가의 존재를 확장시킨 것이다.


변기가 화장실이 아닌 특정 공간 ‘미술관’ 안에서 좌대 위에 예술가의 서명이 쓰인 상태로 있다면 사람들은 분명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게 된다. 사실 변기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오브제 자체로만 본다면 나름 아름답게 보인다. 변기라는 기능은 잠시 잊어버리고 그저 본질적인 형태 자체만을 충실히 보자면 매끄러운 하얀 표면,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감각적인 볼륨감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변기가 미술관 으로 진입하면서 기존의 미술 개념은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뒤샹은 제도화, 형식화된 미술 시스템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예술 경계를 무력화한 그의 발칙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낸다. 뒤샹이 천재적 상상력으로 현대 미술을 무한대로 확장시킨 위대한 예술가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슬픔〉은 작은 시작이다

by 센터 posted Oct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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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ow.jpg


“지난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됐다.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하루 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Sien)이다.”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해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것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것 같은 이 여인이 바로 고흐가 사랑한 여자 시엔이다. 1995년 나 홀로 유럽 여행 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이 여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 ‘슬픔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2년 후 1997년 다시 시엔을 찾아갔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흐는 불행한 시엔의 아픔까지도 사랑했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실루엣은 나올 수가 없다. 그 후 한참이 지나 2007년 다시 그녀와 마주했다. 궁금해졌다. “당신은 저 착한 남자의 따스한 사랑이 얼마만큼 위로가 되었나요?” 이렇게 묻곤 울컥했다.
시엔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고단한 인생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밑바닥, 혹독한 운명의 굴레 속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이 착한 남자의 사랑만이 살아가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림 속 시엔이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알게 되었다. 힘겨운 삶에 지쳐 버린, 슬픔이 가득한 엄마의 몸에 기대어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한 생명이 꿈틀대고 있었다. 시엔에게는 이미 아이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한 생명을 또 품었다는 것이 시엔에게 살아가야 하는 힘이 되었을까, 아니면 신마저 원망하고 있었을까.
고흐는 시엔을 모델로 6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슬픔〉이란 작품은 고흐가 그린 최초이자 최후의 누드화이다. 고흐는 시엔을 대상으로 한 이 작품 외에는 어떠한 누드화도 그리지 않았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이별에 대한 슬픔_아메데오 모딜리아니<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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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스웨터를 입은 여자.jpg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Jeanne Hébuterne with Yellow Sweater Man

캔버스에 유채, 1919~1920년, 65x100cm, 솔로몬R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길쭉한 얼굴, 가늘고 긴 목, 둥글게 늘어진 어깨, 아몬드 모양의 눈동자 없는 공허한 푸른 눈,알 듯 모를 듯 정제된 표정이 인상적이다.그림 전체에 흐르는 붓질과 단순한 색채는초상화의 격조와 품위를 높였다. 그림의주인공인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은 화가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마지막 연인이자 모델, 아내였다.


1920년 1월 25일 새벽, 6층 건물 창문 난간에 만삭의 젊은 여인이 위태롭게 서있다. 새날의 여명은 어김없이 밝아오는데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그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다’며 뱃속에 8개월된 태아와 함께 허공에 발을 내딛고 곧 추락했다. 잔의 자살은 이 드라마의 새드엔딩이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세간에 가장 슬픈 드라마로 기억되며 모딜리아니의 삶과 예술을 신화로 완성시켰다.


이탈리아 유대인 출신으로 파리의 가난한 이방인이었던 모딜리아니는 32세에 잔을 만났고, 14세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잔의 부모는 술과 마약에 중독돼 방탕한 생활을 하는 가난한 무명화가와 교제하는 것을 결사반대했지만, 잔은 가족과의 인연마저 끊고 그와 함께 살았다. 1년 뒤에는 딸도 태어났다. 가난이 그들을 춥고 배고프게 했지만 열렬히 사랑하며 서로의 모습을 그리고 새로운 희망도 만들어 갔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였다.


모딜리아니는 생애 첫 개인전을 열지만 누드화 몇 점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받게 돼 전시회는 서둘러 문을 닫고 만다. 그의 첫 전시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모딜리아니에게 허락된 운명은 잔인했다. 가난과 질병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왔음을 느낀 모딜리아니는 완전히 술을 끊을 수 없었다. 죽음으로 인한 공포보다는 잔과의 이른 이별이 더 큰 공포였으리라. 그 짧은 창작의 시간과 고통 속에 26점이 넘는 잔의 초상화를 열심히 그렸다. 이별에 대한 슬픔의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잔의 초상화는 보면 볼수록 애달픔이 전해온다.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겼으나 그렇다고 사랑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아니었다.


‘불멸의 연인’ 모딜리아니와 잔의 장례식은 각각 다른 곳에서 치러졌고, 다른 곳에 묻혔다. 모딜리아니 가족과 지인들이 잔의 부모에게 간청해 10년 만에야 비로소 페르라세르 묘지에 합장했다. 그들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화가.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 리보르노 출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막 영광을 움켜쥐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 ‘잔 에뷔테른. 1898년 4월 6일 파리 출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딜리아니에게 목숨까지 바친 헌신적인 동반자.’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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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미인도.jpg 천경자 슬픈전설.jpg

위작 논란의 그림 < 미인도>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미인도〉 그림 속 여인인 나는 무척 슬프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이 나에 어머니라고 하는데 그 분은 나를 강하게 부정하신다. 유전자 검사결과 친모라고 판정을 받았는데도 “자기가 낳은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냐”며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항거로 절필선언까지 하셨다. 국내 미술계 최대 위작 시비의 주인공인 나는 그녀의 슬픈  그림자가 되었다.  위작 논란이 있은지 8년이 지난 1999년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한 장본인이라며 내 출생의 비밀을 밝혀주신 분이 나타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다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지만 ‘진품’이라는 감정이 번복되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작품이 아니다”라며 그녀는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나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슬픈 전설로 따라 다닌다.


위작 스캔들로 심신이 지친 그녀는 1991년 훌쩍 큰딸이 있는 뉴욕으로 떠난 후 8년 만에 잠시 귀국해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며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통크게 기증하고 다시 떠났다. 이후 노년에 불어닥친 병마 때문인지 한국과는 연락을 완전히 끊은 채 칩거 생활을 했다.


올 가을 천 화백의 미스터리한 때늦은 부고 소식 역시 한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의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91페이지로 결말을 맺었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인생에 어울리는 엔딩인지도 모르겠다. 1977년에 그린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0대인 그녀가 22세를 기억해낸 자화상이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던 스물두 살의 천경자 홀로 아이를 낳고 단칸방에서 탱탱 부어오른 젖가슴을 부여잡고 몸 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슬픔을 그림으로 토해냈으리라. 


머리 위에 뱀 네 마리가 오글거리며 가시 면류관처럼 씌워져 있고 가슴에는 가시 없는 장미 한 송이가 있다. 말문을 닫아버린 차가운 입술과 창백한 얼굴에는 한기가 돌고 움푹 패인 눈은 덤덤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림처럼 그녀는 운명에 당당히 맞선 삶을 살았다. 아니 운명에 도전하려는 섬뜩한 자의식 마저 느껴진다.


그녀의 슬픈 전설은 시대의 벽, 현실적 장애에 맞서 여성으로, 예술가로, 자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국의 또 하나의 역사였다. 그림 속 여인은 슬픈 눈길로 덤덤하게 나를 응시하며 말을 건다.

“당신의 전설은 무엇인가요?  그 전설 또한 슬픈가요?”

대답을 찾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먼저 보낸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by 센터 posted Dec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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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_파라솔.jpg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1875)


축소_축소_스카프.jpg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1878)


축소_죽음.jpg

임종을 맞은 까미유 모네(1879)



걸어가는 아내와 아이. 불현듯 아내 까미유를 불렀을 때 뒤돌아 본 순간을 그린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색채는 마치 붓에 태양 빛을 찍어 거칠게 빠른 속도로 발려 놓은 듯 하늘과 부인과 아이, 풀밭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휘감아 찰나와 순간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을 마주하노라면 푸르른 초원에 흩날리는 상쾌한 바람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까미유의 허망한 시선이 더 가슴깊이 아려온다. 저 강렬한 태양 빛보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빨간 스카프를 두른 여인의 모습이 몹시 슬퍼 보인다. 창밖 너머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길 위에 서서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는 까미유를 모네는 애써 외면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을 그려나갔다. 창안의 어두움과 창밖의 밝음은 공간적인 분리와 색의 대비, 그리고 엇갈린 시선이 말하듯 그림에 미안함과 안타까움, 지독한 슬픔이 전해온다. 이 작품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까미유는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를 간호하고 아이들을 돌보던 알리스는 이미 모네의 여자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고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까미유는 배신감으로 생에 대한 미련마저 쉽게 놓았는지도 모른다. 모네는 곧 알리스와 재혼을 해서 30년 동안 삶을 함께 했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 그림을 곁에 두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음을 맞는 참담한 순간에도 모네는 화가였다. 죽음의 손길이 가까워지면서 순간순간 변해가는 색채를 캔버스에 담아 나갔다. 양산을 든 까미유도 빨간 스카프를 두른 까미유도 서서히 지워지고 허망한 시선의 그녀의 눈도 감겼다. 허연 침대에 누워 하나둘 형체가 지워져 간다. 그 모든 회한도 내려놓은 듯하다. 그림 속 까미유가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바라보는 이들은 슬픔과 아픔에 젖는다. 까미유는 비록 32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위대한 화가 모네의 작품 속에 영원한 모델로 남아 있다. 〈임종을 맞는 까미유 모네〉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아내를 바라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아직 살아있는 그 순간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니 이 순간이 이대로 영원히 멈추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심정을 까미유는 느끼고 떠났으리라. 그래서 내 남자를 용서하고 내 남자의 여자도 용서했으리라. 

꽃다운 열여덟 살에 직업 모델로 모네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시댁의 냉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모네의 외도와 투병을 감내해야 했던 까미유. 두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마지막이 아프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아니면 시간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또 다른 ‘절규’가 들린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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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jpg ◀〈절규〉1893 | 마분지에 유화 파스텔 카세인 | 91*73.5cm 배경의 물 흐르는 듯한 곡선의 형태는 평면감을 돋보이게 하는 반면 기울어진 사선으로 표현된 길은 극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 휘어진 몸은 흔들리는 형태의 배경으로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여인의 머릿결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곡선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어떤 위험의 상징(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두 번의 배신을 당한 후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혐오로 발전했다고 해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이었다.


2030 젊은 세대들이 한국의 현실을 ‘헬조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신계급론으로 대변되는 ‘수저론’이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구조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조어는 개인의 노력보다 계급이 우선이라는 우리 사회에 대한 자조와 비난 그리고 비판이 담겨 있고 이 비난과 비판 아래에는 불안과 공포가 깔려있다.


헬조선, 수저론은 우리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는 데 또 다른 키를 제공한다. 청소년들은 명문 대학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입시불안을, 청년들은 취직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취업 불안을, 중장년 세대는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고용 불안을, 그리고 노인들은 불행한 노후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빈곤 불안을 갖게···.언제부턴가 불안이라는 감정이 국민 다수의 삶을 짓누른다. 


불안과 공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The Scream, 1893)’이다. 해질녘 하늘에 걸린 구름이 붉은빛으로 너울거리며, 검푸른 대지와 바다 역시 요동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의 주인공은 두 손을 귀에 댄 채 공포에 질려 떨고 있다. 떨어져 걷는 두 친구의 무심한 듯한 모습이 불안과 공포의 느낌을 더욱 배가시킨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아버지는 심한 우울증과 강박적인 종교관으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는 누이와 동생의 죽음까지 바라보았던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트라우마가 많은 삶 때문이었을까? 그의 작품엔  자신의 상처받은 불안한, 두렵고 공포스러운 삶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 발작성 공황을 동반하는 광장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작품은 여전히 또 다른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이미 결정된, 상시적인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는 사회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꽃이 없어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by 센터 posted Mar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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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jpg

                                                *구스타프 클림트가 에밀리 플뢰게에게 보낸 엽서 1908.7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검은 줄기의 나무에 꽃과 열매를 대신해 빨간 하트를 가득 담은 아름다운 엽서를 에밀리 플뢰게에게 전했다. 클림트가 그림에 쏟은 열정만큼이나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정열적이었음이 느껴진다.클림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키스〉이다. 한 남자의 입맞춤과 강렬한 포옹, 이를 품고 달콤함에 취해 있는 듯한 여자.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 선, 그리고 패턴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은 그림을 보는 순간 몽환적인 남녀의 키스에 빠져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클림트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주변에는 창작의 뮤즈가 되고픈 허영기 가득한 여자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성부터 관능적인 모델, 그리고 귀족 부인까지…. 그는 어떤 여성이든 상관없이 오로지 욕망에 몸을 맡겼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도 여럿 있었지만 어느 누구와도 진지한 연인 관계를 지속하거나 동거도 하지 않은 나쁜 남자였다.하지만 이 나쁜 남자를 진짜 사랑 앞에서 주저하도록 만든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에밀리 플뢰게. 그녀와의 완벽한 사랑을 꿈꾼 탓일까? 그녀의 청혼도 거부한 채 20여 년 동안 정신적인 사랑만 나누며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도 그녀를 곁에 두었다.클림트에게는 두 우주의 여인이 있었다. 한 우주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며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던 여러 여인들과 다른 우주는 정신적 사랑을 나누며 이상주의에 빠지게 만든 단 한 여자, 에밀리였다.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실제로는 불완전한 반쪽짜리 사랑을 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지만 글쎄. 플라토닉 러브가 그가 이루고 싶었던 완전한 사랑의 또 다른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윤아/센터 기획편집위원


예술인가 혐오인가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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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jpg

올랭피아/1863년/캔버스에 유채/130.5x190cm/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는 현실의 여성을 그렸다. 부끄러움 없이 도발적인 표정, 머리의 꽃 장식, 굽 높은 신발, 끈으로 장식한 목덜미. 19세기 파리의 전형적인 매춘 여성 ‘올랭피아’였다. 



더러운잠.jpg

더러운 잠/2017년/캔버스에 혼합재료

나체의 박근혜 대통령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그 옆에 흑인 하녀 대신 최순실이 주사기 꽃다발을 들고 있다. 인물들 뒤에는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와 ‘사드(THAAD)’라고 적힌 미사일도 보인다.  


명화1.jpg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작품 〈올랭피아Olympia〉의 벌거벗은 여인은 수치심이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건조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이와 당당히 마주한다. 나체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모습의 비너스가 아닌 현실 속의 여성으로 매춘부인 빅토린느 뫼랑Victorine Meurent이다. 당시 이제껏 봐 왔던 미술 작품과는 다르게 적나라하고 도발적인 누드 작품이었기에 사회적 충격과 격렬한 비난으로 대중의 분노를 샀다. 150년 지난 후 다시 이 작품을 패러디한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또한 한국 사회의 정치 논쟁 한복판에 있다. 


〈더러운 잠〉의 주인공은 비너스도 창녀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로 세월호 참사 7시간에 대한 그녀의 부재를 풍자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놓고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보수단체는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인격 모독 행위’라며 ‘표창원 네 아내도 벗겨주마’라는 푯말을 버젓이 들고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은 기자회견을 했다. 성희롱을 ‘비판’하는 건지 ‘악용’하는 건지 속내가 뻔히 보인다. 설상가상 극우 성향(박사모 회원)의 한 시민이 전시 중인 〈더러운 잠〉을 찢고, 밟고, 부수며 훼손시키고 말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구 회화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누드란 특권계급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화이다. 그림 소유자의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였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더러운 잠〉은 분명 외설적인 여성혐오의 불경스러운 표현물이 맞다. 그러나 〈더러운 잠〉을 예술로 볼 것인지, 권력자인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볼 것인지를 논하기엔 쉽지 않은 문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예술의 함의가 꼭 정의로워야 하는지, ‘외설’이나 ‘혐오’의 코드가 들어간 예술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사실 〈올랭피아〉를 통한 풍자와 패러디는 흔하디흔해 빠졌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과 총리를 발가벗겨 내놨지만 불경이니 혐오니 하는 언설이나 작가에 대한 위협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훼손이라는 야만적인 폭력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든 풍자화는 존재한다. 결국 그림의 예술적 잣대는 받아들이는 자들의 몫일 것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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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jpg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년, 1897년 유화 141 Ⅹ 376 cm 보스턴 미술관


반복되는 일상 속에 파묻혀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문득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작품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의 긴 제목 만큼이나 그림의 크기도 높이 139센티미터, 너비 375미터로 어마어마하다. 이 대작은 고갱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려졌다. 당시 성병으로 몸은 병들고 가난은 지속되고 사랑하던 딸의 죽음으로 정신적 고통마저 심했던 고갱은 결국 자살을 결심했고, 유언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등장인물들은 고갱이 원시의 이상향을 찾기 위해 가정과 문명을 버리고 선택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다. 배경은 전체적으로 푸르게 인물들은 햇빛에 그을려 노란 피부색을 띠고 있다. 이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인간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누워있는 연약한 아기는 인간의 탄생과 출발을 의미하며, 중앙에서 열매를 따는 젊은이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는 모습이 연상되어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간의 삶을 나타냈다. 그리고 왼쪽의 웅크린 채 두 팔로 얼굴을 감싼 백발의 노인은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 고갱은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우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던진 것이다. 


고갱은 죽기 전 미친 듯이 밤낮으로 이 그림에 그렸다. 작품을 끝내고 고사리 숲으로 들어가 비소 한 통으로 자살을 감행하지만 모두 토해내고 이후로 더 고통스런 창작의 시간과 삶을 이어갔다. 

“딸 이름은 알린, 어머니와 같은 이름이었네. 알린의 무덤과 꽃들, 그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야. 그녀의 진짜 무덤은 내 곁에 있고 이 눈물이 진짜 꽃이라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그가 그립다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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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황소.jpg

황소/종이에유채/32.3*49.5cm/1953년무렵


길 떠나는 가족.jpg

길 떠나는 가족/종이에 유채/29.5*64.5cm/1954년


이중섭 그림.jpg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종이에 잉크와 유채/20.3*32.8cm


외딴섬 외롭게 버려진 누추하고 작은 집, 세상 절벽 끝에 몰린 가족이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방 한 칸에는 궁핍과 고독 그리고 애틋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이 집 안주인은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 여인으로 한국 이름은 ‘이남덕’이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편 이중섭이 아내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화가 이중섭을 기억할 것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작가로서 초중고 미술 교과서에 붉은 색감의 대담하고 거친 선묘가 특징인 그의 작품 <황소>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시대는 어둡기만 했지만 청년 이중섭에게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일본 유학 중 숙명처럼 한 여인을 만나 열애를 하고, 그의 연인 마사코 또한 ‘사랑’이란 두 글자만 품고 겁도 없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의 아내 남덕이로 살아간다. 이들은 아주 잠시 행복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들의 행복을 불행으로 바꿔버렸다.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혼돈 속에 전쟁과 대면하면서 부산과 제주도를 오가며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다. 남덕은 폐결핵에 걸리고 아이들마저 병이 들어 결국 일본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중섭은 궁핍과 고독에 맞서 가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창작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결국 4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쓸쓸히 갈무리했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데 그림의 정서는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으로 경쾌하고 해학적이다. 종이 한 장 살 수 없어 담뱃갑의 은색 속지에 그릴 수밖에 없었던 옹색함과 비루함 속에서도 그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오롯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애달픔과 그리운 가족에 대한 향수, 부재의 갈구가 바로 화가 이중섭에게 창작 활동의 원천을 제공해 주었으리라. 그림의 어원이 바로 그리움이니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그의 안타까운 삶과 사랑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작품은 세월의 무게만큼 고스란히 감동으로 다가온다. 더할 나위 없이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그리고 못 견디게 자식을 보고파했던 아버지 이중섭. 

나 또한 오늘, 그가 그립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연인의 변심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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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angelo Pieta1.jpg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피에타〉

1499 | 높이174cm | 성 베드로성당, 바티칸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그림 또는 조각상으로 청년 미켈란젤로의 1499년 작품 피에타는 신의 손길인 듯 정확한 인체 비례와 대칭구도로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Michelangelo Pieta2.JPG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론다니니의 피에타〉

1564 | 높이 195cm ㅣ스포르체스코 성, 밀라노
미완성으로 남겨진 〈론다니니의 피에타〉 앞에서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과 신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평생을 줄다리기 하며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1564년 2월 16일, 대리석을 조각하던 망치 소리가 멈췄다. 〈론다니니의 피에타Pietà Rondanini〉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가 죽기 전날까지 매달렸던 최후의 미완성 작품이다. 이때 그의 나이 ‘아흔’. 누구의 의뢰도 받지 않은 작품으로 오로지 자신의 무덤에 놓고 싶었던 열망 때문이었다.전통적인 피에타의 도상은 성모의 무릎 위에 누워있는 죽은 예수의 구도가 대부분인데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방금 숨을 거둔 채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와 자식의 시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리아의 모습이 마치 한 몸처럼 포개져 수직적으로 배치한 낯선 피에타다. 작품은 미완성이라 예수와 마리아 옆에 예전에 다른 조각을 하다가 내버려둔 다른 이의 팔부분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의 다리만 제대로 된 형태로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을 뿐, 다른 부분은 형체조차 불분명하고 대리석 표면에 거친 정과 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구세주이나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잃은 마리아의 형체는 아직 돌 속에 머물러 있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못한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래서 슬픔은 돌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슬픔의 감정은 오히려 처절하게 다가온다.당시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시대 역시 동성애는 불경스러운 행위로 만약 성 행위가 발각되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과 신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그는 평생 줄다리기를 하며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임종을 끝까지 지킨 그의 연인 톰마소에게 사랑의 고백 대신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켜 달라”는 기독교적 믿음만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을 거두고···. 연인의 변심이었다. 그 변심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바라보는 톰마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예술은 스스로 시대를 말한다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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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y-leading-the-people.jpg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

 캔버스에 유채 / 260×325㎝1830년 / 루브르 미술관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Liberty Guid-ing the People〉 (부제:The 28th July)는 프랑스 민주주의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즐겨찾기로 인용되는 작품이다. 1886년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는 미국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 그녀를 꼭 닮은 여인이, 이제는 깃발 대신 횃불을 밝히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했다.


이 그림은 1830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사흘간의 시민혁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시민들은 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맨주먹으로 절대 권력에 맞서 깃발을 들었다. 포연이 자욱한 현장에 우뚝 올라선 한 여인이 유독 눈에 띈다. 그녀는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맨발로 한 손엔 장총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삼색기를 높이 휘날리며 시민들을 이끌고 있다. 사실 이 여인은 실제 인물이 아닌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로부터 영감을 받아 표현된 자유의 여신이다.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여신의 몸에 때가 많이 끼어 품위가 없다는 둥 겨드랑이에 털까지 보여 상스럽다는 둥 비난을 위한 비난마저 제기되었지만 자유를 얻고자 하는 싸움에 외적인 아름다움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들라크루아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자유를 향한 의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여인의 주위에는 다양한 계층의 남자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다. 여인의 왼쪽 실트모자에 정장을 입고 총을 움켜진 신사는 부르주아 계급으로 들라크루아 자신이라는 말도 있다. 신사 뒤에 셔츠를 풀어헤치고 멜빵바지를 입은 남자는 노동자다. 바로 그 밑에는 군인도 보인다. 그리고 여인의 오른쪽 양손에 총을 들고 따르고 있는 모자 쓴 꼬마도 역시 하층민이다. 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구두닦이 소년은 이 꼬마로부터 영감을 받아 등장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을 등장시켜 혁명이 민중의 뜻이고 혁명이 역사의 순리라고 들라크루아는 말한다.


민중은 수많은 시체들을 넘고 넘어 진격하고 있다.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시민군과 정부군의 시체를 그려 혁명의 참담함과 그리고 이들의 희생 위에 혁명이 세워졌음을 강조하고 애도하고 있다.


2016년 11월 서울은 촛불로 장악되었다. 광장은 분노와 심판이라는 두 감정밖에 없다. 촛불은 혁명의 시간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씩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230만이 든 촛불은 세계 유례없는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중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슬픔은 예술

by 센터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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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1.jpg 명화에세이2.jpg

*부서진 기둥 1944 oil on masonite
푸른 하늘과 메마른 사막에 홀로 서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온몸에는 못이 박혀있고 척추을 대신해  그리스식 기둥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그런 그녀의 몸이 갈라지지 않게 하얀색 코르셋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이는 부서진 척추의 고통을 몸에 박힌 못으로 나타내면서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보
여주고 있다. 메마른 사막은 여러 번의 수술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받은 그녀를 나타낸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생각 속의 디에고 1943 oil on masonite 
이어지는 짙은 눈썹, 당당한 눈빛과 육감적인 입술, 그리고 화려한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우아나를 입고 있는 이 자화상은 칼로의 강박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마 한복판에 디에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결국은 두 존재가 하나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47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50여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중 다수는 자기 자신을 예술적 주제로 삼은 자화상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던 칼로는 열여덟 살 때 또 하나의 불행을 맞이한다. 전차와 버스가 부딪치는 큰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몇십 번의 수술과 망가진 척추 때문에 평생 석고 지지대를 입고 사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서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자신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뜨거운 사랑을 한다. 멕시코의 최고 민중화가로 칭송받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예술가로서의 교감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스물한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정치적, 예술적 동지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세 번의 유산과 디에라의 샘솟는 바람기는 여성과의 잠자리를 커피 한 잔 마시듯 여기고, 급기야 그녀의 여동생과 애정 행각을 벌여 칼로에게 영혼이 찢겨나가는 고독감과 상실감을 평생 동안 안겨주었다. 마침내 이혼, 그리고 이듬해 재결합. 하지만 여전히 둘 사이는 삐그덕거렸다. 남편과 아이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그녀는 그림으로밖에 토해낼 수 없었다.


그녀의 그림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한 가장 정직한 이야기였다. 칼로의 삶은 줄곧 망가져가는 육체의 고통과 사랑의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예기치 못한 시련과 절망을 경험으로 자신 내면의 풍경을 치열히 그려야 했던 이유는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함이었으리라. 칼로에게 슬픔은 삶 전체를 지배한 떼버릴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것과 함께 품고 살아가야 함을 삶이 가르쳐 주었다. 인생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늘 그녀에게 찾아오는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예술이 되었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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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rnica2.jpg

게르니카Guernica  1937, 캔버스에 유채, 349.3×776.6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폭력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MASSACRE-IN-KOREA.jpg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e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주민의 25퍼센트에 달하는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항할 무기 하나 없이 맨손에 알몸이다.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은 공포와 체념에 간신히 버틸 뿐이다. 얼굴을 투구로 가린 채 경직된 자세로 선 병사들은 그들을 제압하려고 총과 칼을 겨누고 있다. 감정 없는 로봇 같은 군인들의 야만적인 모습에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림의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그 다음 장면에서 분명 학살을 암시한다. 이 서사는 새드 엔딩Sad Ending으로 끝날 것이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간판스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이 작품에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e)’이라는 제목을 부쳤다.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지만,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라면, 당연히 미군이 자행한 학살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은 공산당이나 자유진영당 모두에게 혹평을 들었다. 공산당은 학살을 당하는 피해자가 한국인인지, 학살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미군인지 즉, 학살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며 비판했고, 자유진영당에서는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처럼 그려냈다며 반미 선전물이라고 비난했다. 이 그림이 발표되고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명성에 흠집이 생겼고 미국에서는 피카소 입국을 거부해 한 번도 미국에 가지 못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피카소 자신은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보다는 전쟁 자체가 가져오는 참혹한 현실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 했을 뿐이다.

에라스무스의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글귀에 다시 한 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절망이 가져온 희망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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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jpg

희망 Hope, 캔버스에 유채, 1886년, 142x112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안개가 낀 듯 적막하고 황량한 대기 속에 한 여인이 보인다. 흰 천으로 자신의 두 눈을 동여매고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여인은 겨우 몸을 추스르듯 구체 위에 맨발로 웅크린 채 위태롭게 앉아있다. 물은 점점 차오르고··· 여인이 보듬고 있는 낡은 악기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줄은 전부 끊어지고 단 한 줄 밖에 없다. 여인은 달래듯 줄을 뜯으며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가엽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란다. 사실 희망이라 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 음울하고 처연하다. 당시 미술 비평가들조차 제목에 의문을 제기했다. 작가는 “단 하나의 코드로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반박했다.


조지 프레드릭 와츠George Frederick Watts는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여왕시대에 활동하며 상징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가난한 피아노 수리공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그는 자신을 ‘펜 대신 붓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양딸이 사망한 직후 최고조에 이르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그린 〈희망〉은 바로 그런 상징을 응축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에서 ‘희망’ 메시지를 읽어낸 유명인사들 덕분에 그림은 더욱더 유명해졌다. 1958년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 주제로도 등장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이었던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어두운 감방 벽에 그림을 붙여놓고 수없이 바라보며 희망을 꿈꾸었다고 한다. 젊은 청년 버락 오바마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의 설교 중에 이 그림을 만나 감동을 받고, 훗날 대통령 선거에 나가 그림과 내용을 이야기하며 유권자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이 그림 한 장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민중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아있던 희망! 신화에서도 희망은 이렇게 눈을 가린 모습으로 몸부림치며 버텼다. 세상의 모든 절망은 찬란한 희망을 기억에 품은 중력의 무거움이다. 지금도 가슴이 저려오는 절망의 한 자락이 찬란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버티자!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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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2.jpg

지옥의 문 Porte de l`Enfer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80~1917년  조각:브론즈 100×396×775cm

로댕의 〈지옥의 문〉은 서울·도쿄·파리 등 여러 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 청동 조각 브론즈는 점토로 형상을 만든 뒤 거푸집이라는 틀을 만들어 이곳에 청동주물을 부어 만든다. 그래서 틀 하나로 수십 개도 수백 개도 찍어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지옥의 문〉은 일곱 번째 에디션이다. 에디션은 틀로 찍어낸 조형물이나 판화, 사진처럼 같은 작품을 여러 개 찍어낼 때 붙이는 번호로 프랑스 정부는 열두 번째 작품까지만 로댕의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엉킨 인체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지옥 입구에서 신음하고 있다. 턱을 괴고 앉은, 생각하는 사람의 고뇌는 깊기만 하다. 그의 발밑 인물 군상들은 엿가락처럼 늘어진 육체가 소용돌이치듯 얽혀있고 붙어있다. 선명한 조형이 없다. 거친 질감과 무채색 표면에 뭉겨진 육체는 두려움이 아닌 공포심으로 다가온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지옥의 문(Porte de l`Enfer)〉이다.


소멸되지 않고 악행이 거듭 반복되는 곳, 영원히 놓지 못하는 불신과 증오, 그리고 분노 속에 휩싸여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삐뚤어진 욕망으로 사랑하고 배신하고 기만하고 증오하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던 죄 많은 인간들은 지옥에서도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죄로 얼룩진 육체의 사슬들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팔을 치켜 올리고 매달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혼란과 무질서가 지옥의 언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1871년 프랑스 정부는 화재로 감사원을 포함한 부속 건물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 국립장식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미술관 문을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한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이다. 로댕은 30여 년 동안 길고 고된 작업을 했지만 끝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사후 21년 만인 1938년에 첫 번째 에디션이 주조되면서 〈지옥의 문〉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지옥의 문〉은 로댕 필생의 걸작이다. 로댕이 평생에 걸쳐 제작한 거의 모든 인체 조각들의 원형이 총망라되어 나타난다. 〈생각하는 사람〉을 〈지옥의 문〉 중앙에 배치하며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내면적인 번뇌를 표현하고 있다. 홀로 떨어져 고독한 상념에 잠긴 그는 작가 로댕이 아닐까?

세상에 무슨 죄가 이리도 많은지···. 도대체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있다면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가만히 〈지옥의 문〉 앞에 다시 서 본다. 내가 짓고 허문 마음의 지옥들을 헤아린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신의信義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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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jpg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1844년, 국보180호, 수묵화, 23×69.2cm,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가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의 노력과 후지쓰카 지카시 가문의 도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건져져 국내에 돌아와 국보 180호로 지정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게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라고? 정말?’  

물론 나는 문인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안목이 높지 않지만, 그림은 거칠고 메마른 붓질이 쓱쓱 지나갔을 뿐,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가 전부인 그저 싱거운 그림이다. 세련된 기법도 찾아 볼 수 없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비평서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빵점짜리라고 서술했다. 사실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림의 여백까지 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세한歲寒’이란 새해 전후로 연중 가장 추운 절기를 뜻한다. 겨울의 칼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초라한 집 한 채와 양쪽으로 잣나무와 소나무 두 그루씩 서있을 뿐 온통 여백이다. 텅 빈 공간이 더 쓸쓸하고 춥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느낀 추사의 적막감과 외로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1844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 생활하고 있던 추사 자신에게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사제지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역관으로 북경에 갈 때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준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붓을 들어 글과 그림으로 전했다.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가운데서도 그대는 이처럼 마음을 쓰고 어렵게 구한 책을 권세 있는 자들에게 주지 않고, 오히려 바다 건너 귀양살이하고 있는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구려. (··· ···) 공자께서 추운 계절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고 하셨네.” 

공자의 《논어》 한 구절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를 빌려와 이상적의 인품과 변치 않는 절개를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내용이다. 


그림의 사연을 떠올리며 다시 찬찬히 바라본다. 그림의 제목과는 달리 따뜻함이 전해진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이렇게 어우러져 있으니 문인화의 최고라는 찬사와 평가에 이제야 수긍이 간다. 

모두가 외면할 때, 내 편 하나 없이 외로울 때, 무언가 말 못할 시름이 깊어 한없이 슬플 때, 내 옆에 신의信義를 지키는 벗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런 벗에게 신의를 지키는 존재인지 되묻게 된다.


순수한 휴머니스트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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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작품 군상.jpg


이쾌대(1913~1965)의 대표작품 〈군상 4-조난〉과 마주한다. 스케일, 구도, 형상 모든 것이 한국 근대화단에 보기 드문 작품으로 생소한 울림이 느껴진다.

화폭 배경에 구름기둥이 폭발하듯 솟아오르고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벌거벗은 군상들.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과 여인 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돌로 내리치고 물어뜯으며 싸운다. 인물의 묘사와 표정이 살아있다. 울부짖다 지쳐 쓰러진 여인을 보듬어 안고 서로 의지한 채 앞서 나가는 세 명의 주인공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이 아닌 순수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구 낭만주의 형식을 담아 현실의 기운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힘’이 느껴진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와 해방 직후 이념분열로 갈등과 모순과 혼란의 어두웠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쾌대처럼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그린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않다.

월북화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이쾌대는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한국화단에서 그야말로 잊혀진 화가였다. 이렇듯 냉전 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40여 년 동안 아내 유갑봉 여사의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작품들이 1991년 신세계미술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당시 화단에선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아내의 눈물겨운 보존 노력이 우리 미술사에 큰 영광을 가져다준 셈이다.


‘한식이, 한민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1950년 11월 11일 시대의 아픔으로 국군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끌려온 이쾌대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편지를 몰래 인편으로 아내에게 전달한다. 2년 후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끝내 가족 곁으로 가지 못했다.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그가 택한 곳은 북한이었다. 가족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던 이쾌대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왜 북한으로 향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다만 존경하던 친형 이여성(독립운동가, 기자, 역사화가)이 월북하면서 따라갔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가족을 버릴만한 중요한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형제는 곧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이쾌대의 월북행을 단순히 이념 문제로만 바라보기에 어렵다. 아마도 곧 통일이 이뤄지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제자인 남경숙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46년 말 북한에 다녀오신 선생께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가 아니였을까?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 전시정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
 2015.07.22(수)~11.01(일)
 덕수궁 미술관
 관람료 무료
 www.mmca.go.kr



미움 대신 용서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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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jpg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년, 캔버스에  유채,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큰 아들은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품은 아버지에게 원망이 가득하다. 과연, 형의 분노는 당연한가? 소위 모범적으로 살아온 형이 피붙이인 동생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보면서 모범적인 삶이 좋은 인간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범적인 인간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일 뿐…. 큰 아들은 자기 공로에만 집중하여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배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했던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장 20절, 24절) 


작은아들은 찢어지고 해진 누더기 옷을 걸친 채 한쪽 구두는 뒷굽이 닳아 없어져 맨발을 드러내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몇 해 전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해 미리 받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다 잃고 헐벗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비난하기는 커녕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해 주지만 큰아들은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다. 용서를 구하는 아들 어깨에 다정하게 감싼 아버지의 두 손이 아주 특별하다. 한 손은 거친 남자의 손으로, 다른 한 손은 여린 여자의 손이다. 왼손은 모든 시련을 해결해주실 강한 능력의 아버지 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어머니 손으로 거룩하신 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은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로 유명한 이야기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내용이다. 


〈돌아온 탕자〉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작품으로 그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두 아들, 두 딸, 두 아내 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보냈다. 정부였던 여인에게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를 당해 결국 파산하고 빈민촌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 재산, 명예, 권력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10여 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인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처절한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두려웠는지 모른다. 마침내 생을 마치고 신 앞에 선 자신이 바로 ‘돌아온 탕자’였기 때문이다. 늙은 화가는 죽음 앞에서 ‘용서’를 깊이 묵상하며 그린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 불편하고 힘들지만 마음속에 깊이 새겨있던 ‘미움’이라는 단어를 지워내고 ‘용서’의 단어를 새겨본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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