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선택

by 센터 posted Jun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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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150×136.5㎝ / 유화 / 조르주 퐁피두 센터(파리) 
초현실주의 작가인 마르크 샤갈은 빛의 마술사로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동화적 분위기의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
신랑 신부를 태운 수탉이 에덴동산을 향해 날아가려는 것일까? 
염소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축하 연주를 들으며 부케를 받은 친구는 천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샤갈은 사물을 비논리적으로 꾸며 서사를 전개해 나간다. 
아마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어려움이 작가의 해석일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부부가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세상살이에 무뎌진 사랑의 불만일 수도 있고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격지심 문제로 초라함에 헤어짐을 결심한다. 
그 선택에 대해선 그 누구도 뭐라 할 이유가 없다. 
부부라면 언제나 이러한 한계에 노출되기 마련이고 
누군가에겐 그 한계가 더이상 짊어질 수 없는 
태산처럼 느꼈을 테니 말이다. 
이혼, 그것은 
또 하나의 삶의 선택일 뿐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전염병 의사

by 센터 posted Apr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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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의사.jpg 

중세시대에도 감염내과 전문의가 있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감싸는 망토를 입고 새의 부리를 형상화한 마스크 위에 안경, 모자, 그리고 장갑을 낀 채 진료를 봤다. 간혹 감염자들의 지나친 접근도 저지하려고 날개가 달린 모래시계를 든 지팡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복장은 의사들이 페스트 감염을 피하기 위한 보호복으로서 기괴한 마스크에 은밀한 비밀이 있었다. 새의 부리 안쪽에 면역력을 높이는 여러 가지 약초를 채워 훈증으로 자신이 감염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했다. 불행하게도 전염병 의사인 줄은 즉시 알아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질병의 세균 이론과 항생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의상이 질병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보호받지는 못했다.1630년 프랑스 의사 샤를 드 롬Charles de Lorme이 나폴리 가면 축제에서 본 의상을 착안해 페스트 마스크와 보호복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치명적인 패션은 지금까지 베니스 가면 축제에 종종 등장한다.


대유행 감염병을 뜻하는 팬데믹Pandemic

이 낯선 이름이 우리네 평범한 일상을 앗아가 버렸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지구촌이 패닉 상태에 빠져있다. 

바이러스는 뛰지도, 걷지도,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데···. 

하지만 유령처럼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병원체 미생물이지만 

세상을 뒤흔드는 위력이 아주 막강하다.

이렇듯 바이러스 감염증이 창궐할 때마다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게 된다. 

수 세기 동안 인류는 끊임없이 질병과 맞서고 극복하지만 

바이러스 또한 인간의 도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또 다른 변이된 바이러스, 

돌연변이로 새롭게 새롭게 등장한다.

바이러스도 삶이 참, 바쁘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모든 것이 예술이다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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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jpg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실크스크린, 1962년, 테이트 모던 뮤지움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화면에 반복적으로 찍어 놓았지만 모두 똑같지 않다. 다채로운 색상과 이미지의 윤곽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의 세계가 느껴진다. 앤디 워홀은 광고디자인에 사용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여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대량 생산으로 명성과 부를 함께 이루었다.


마릴린 먼로의 얼굴 사진 한 장을 단순한 이미지로 변환 후 반복적으로 찍어낸다. 복제된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바라보면 모두 똑같지 않다. 다채로운 색상과 이미지의 윤곽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의 세계가 느껴지는 작품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는 현대 미술 ‘팝 아트Pop Art’의 전설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사회는 대량 생산과 유통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렸고 이때 등장한 팝 아트는 상업과 예술을 혼합하고 고급 미술과 대중 미술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예술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했다.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을 내세운 팝 아트는 위인보다는 상품적 가치를 가진 스타나 유명인을 화면 속에 등장시켰다. 


워홀은 판이 완성되면 단시간에 수십 수백 장을 찍어낼 수 있는 판화 기법 중 하나인 실크스크린을 활용해 하나의 그림을 단순한 디자인으로 변조해 다양한 색상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대량 생산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 붙이거나 복사했으며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선포하고, 작품은 공장에서 동일한 상품을 기계가 찍어내듯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졌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그의 명성과 부도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그는 평생 부와 명성을 좇아다녔다. 


“돈 버는 일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잘 버는 사업이 최고의 예술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보았다. 워홀은 자본주의 구조 내에서 예술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포착한 작가로서 자본주의 속도와 호흡을 맞추며 소비사회의 보편적 이미지로 자본주의적 가치를 드러내놓고 찬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워홀은 그야말로 자수성가하여 이민 노동자의 딱지를 떼고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아픔을 위로하다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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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열차.jpg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 삼등열차The Third-Class Wagon / 캔버스에 유채, 1862년, 65.4x90.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삼등열차〉 캐리커처 느낌의 인물 표현 방식과 구불구불한 선으로 그림에 생명력이 느껴진다. 강렬한 명암 대비로 삼등칸 객실의 암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여 도시 빈민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등열차.jpg

〈이등열차〉 역시 도미에가 그린 그림이다.


일등열차.jpg


〈일등열차〉 일등칸 객실 안에 두 쌍의 부부, 넷뿐이다. 모두 우아한 모습이다.



흔들리는 열차의 삼등칸 객실, 엄마 젖을 먹고서야 겨우 잠든 아기를 보듬고 있는 젊은 여인, 바구니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할머니, 그 옆에 어린 소년이 지친 듯 쓰러져 잠을 잔다. 삶의 고단함이 객실의 공기처럼 무겁기만 하다. 다른 승객들은 서로 엉겨 붙어있지만 우울한 침묵만 흐를 뿐···. 무관심하다. 삼등칸 객실 모두가 그녀들의 삶처럼 가난한 생활의 굴레 속에 서로를 위로할 여력이 없다.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가 1862년에 그린 〈삼등열차The Third-ClasWagon〉 풍경이다.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소외된 여성들에게 작가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궁핍한 생활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가난 때문에 거리의 화가로 나섰던 1830년 프랑스는 매우 혼란스러운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도미에는 당시 세태를 비판하는 정치풍자 만화를 그리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도미에가 잡지나 신문에 실은 삽화Illust들은 대부분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 부패를 가혹하게 묘사했다. 적나라한 그림들은 가진 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국왕 모독죄로 고소되어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수감 생활 후 도미에는 가난한 민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횡포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한층 더 신랄해진 풍자로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이처럼 모순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오직 민중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도미에에게 작업은 자신의 아픔을 위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뭐 때문에 제일 많이 죽는지 아니? 사람은 가난해서 죽는다. 가난해서 병이 있어도 치료를 못 받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험한 일하다 사고로 죽고, 가난이 고통스러워 지 목숨 지가 끊고···.” 

JTBC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 철거를 앞둔 동네 뒷골목에서 이주 노동자, 신용불량자와 같은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불법으로 약을 팔고 치료를 해주는 할머니의 이유 있는 대사였다.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 빈곤한 노인,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 편견 앞에 작아지는 성 소수자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자주 아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절망이 가져온 희망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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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jpg

희망 Hope, 캔버스에 유채, 1886년, 142x112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안개가 낀 듯 적막하고 황량한 대기 속에 한 여인이 보인다. 흰 천으로 자신의 두 눈을 동여매고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여인은 겨우 몸을 추스르듯 구체 위에 맨발로 웅크린 채 위태롭게 앉아있다. 물은 점점 차오르고··· 여인이 보듬고 있는 낡은 악기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줄은 전부 끊어지고 단 한 줄 밖에 없다. 여인은 달래듯 줄을 뜯으며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가엽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란다. 사실 희망이라 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 음울하고 처연하다. 당시 미술 비평가들조차 제목에 의문을 제기했다. 작가는 “단 하나의 코드로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반박했다.


조지 프레드릭 와츠George Frederick Watts는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여왕시대에 활동하며 상징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가난한 피아노 수리공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그는 자신을 ‘펜 대신 붓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양딸이 사망한 직후 최고조에 이르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그린 〈희망〉은 바로 그런 상징을 응축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에서 ‘희망’ 메시지를 읽어낸 유명인사들 덕분에 그림은 더욱더 유명해졌다. 1958년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 주제로도 등장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이었던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어두운 감방 벽에 그림을 붙여놓고 수없이 바라보며 희망을 꿈꾸었다고 한다. 젊은 청년 버락 오바마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의 설교 중에 이 그림을 만나 감동을 받고, 훗날 대통령 선거에 나가 그림과 내용을 이야기하며 유권자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이 그림 한 장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민중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아있던 희망! 신화에서도 희망은 이렇게 눈을 가린 모습으로 몸부림치며 버텼다. 세상의 모든 절망은 찬란한 희망을 기억에 품은 중력의 무거움이다. 지금도 가슴이 저려오는 절망의 한 자락이 찬란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버티자!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이별에 대한 슬픔_아메데오 모딜리아니<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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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스웨터를 입은 여자.jpg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Jeanne Hébuterne with Yellow Sweater Man

캔버스에 유채, 1919~1920년, 65x100cm, 솔로몬R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길쭉한 얼굴, 가늘고 긴 목, 둥글게 늘어진 어깨, 아몬드 모양의 눈동자 없는 공허한 푸른 눈,알 듯 모를 듯 정제된 표정이 인상적이다.그림 전체에 흐르는 붓질과 단순한 색채는초상화의 격조와 품위를 높였다. 그림의주인공인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은 화가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마지막 연인이자 모델, 아내였다.


1920년 1월 25일 새벽, 6층 건물 창문 난간에 만삭의 젊은 여인이 위태롭게 서있다. 새날의 여명은 어김없이 밝아오는데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그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다’며 뱃속에 8개월된 태아와 함께 허공에 발을 내딛고 곧 추락했다. 잔의 자살은 이 드라마의 새드엔딩이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세간에 가장 슬픈 드라마로 기억되며 모딜리아니의 삶과 예술을 신화로 완성시켰다.


이탈리아 유대인 출신으로 파리의 가난한 이방인이었던 모딜리아니는 32세에 잔을 만났고, 14세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잔의 부모는 술과 마약에 중독돼 방탕한 생활을 하는 가난한 무명화가와 교제하는 것을 결사반대했지만, 잔은 가족과의 인연마저 끊고 그와 함께 살았다. 1년 뒤에는 딸도 태어났다. 가난이 그들을 춥고 배고프게 했지만 열렬히 사랑하며 서로의 모습을 그리고 새로운 희망도 만들어 갔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였다.


모딜리아니는 생애 첫 개인전을 열지만 누드화 몇 점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받게 돼 전시회는 서둘러 문을 닫고 만다. 그의 첫 전시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모딜리아니에게 허락된 운명은 잔인했다. 가난과 질병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왔음을 느낀 모딜리아니는 완전히 술을 끊을 수 없었다. 죽음으로 인한 공포보다는 잔과의 이른 이별이 더 큰 공포였으리라. 그 짧은 창작의 시간과 고통 속에 26점이 넘는 잔의 초상화를 열심히 그렸다. 이별에 대한 슬픔의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잔의 초상화는 보면 볼수록 애달픔이 전해온다. 사랑에 모든 것을 내맡겼으나 그렇다고 사랑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아니었다.


‘불멸의 연인’ 모딜리아니와 잔의 장례식은 각각 다른 곳에서 치러졌고, 다른 곳에 묻혔다. 모딜리아니 가족과 지인들이 잔의 부모에게 간청해 10년 만에야 비로소 페르라세르 묘지에 합장했다. 그들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화가.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 리보르노 출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막 영광을 움켜쥐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 ‘잔 에뷔테른. 1898년 4월 6일 파리 출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딜리아니에게 목숨까지 바친 헌신적인 동반자.’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노동에 대한 숭고한 시선_조나단 브로프스키 <해머링 맨>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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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링맨.jpg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1942~  해머링 맨Hammering Man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걷다 보면 흥국생명 빌딩 앞 광장,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망치질하는 한 거인을 만난다. 무려 50톤이 넘는 몸무게와 22미터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거인은 완강한 힘으로 느리지만 끊임없이 망치질을 반복한다.

거인의 정체는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다. 측면에서 포착한 인체의 실루엣은 철재 패널로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망치를 든 거대한 팔이 전기장치인 모터에 의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설치조각이다. 


〈해머링 맨〉은 미국작가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연작 중 하나다. 처음에는 〈노동자Worker〉라는 제목의 작품이었으나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작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스위스 바젤, 미국 시애틀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서울 한복판에 설치되었다. 작품 크기와 더불어 움직이는 망치질이 주목받으며 서울을 대표하는 공공미술 작품으로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머링 맨은 노동자다. 평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10시간, 35초에 한 번씩 망치질하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 그리고 노동자의 날에는 가동을 멈춘다. 점심시간도 없이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있으니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해 매일 연장근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큰 해머링 맨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간다. 해머링 맨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노동에 대한 숭고한 시선으로 삶의 가치를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망치질은 노곤한 육체를 쓰다듬는 듯 하루의 고된 노동을 위로하는 듯하다.


물끄러미 서서 가만히 해머링 맨을 바라본다. 그의 망치질이 참 고독해 보인다. 저항이나 분노보다는 눈물겨울 정도로 엄숙해보여 노동의 숭고함마저 전해진다. 생각의 꼬리에 꼬리가 딴지를 건다.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노동자인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들이 임금을 더 받아야 하는 사회적 통념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돈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당연한 걸까? 괜히 푸른 하늘에게 시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선택의 힘_마르셀 뒤샹 < 샘 Fountain>

by 센터 posted Ap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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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샘.jpg 

20세기 미술사를 뜨거운 논쟁으로 몰고갔던 화제작(?) 마르셀 뒤샹의 〈샘〉이다. 

작가인 뒤샹이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다. 가게에서 산 남성 소변기에 제조업자 이름인 ‘R.mutt’라는 서명을 적어 넣은 것뿐. 

출품된 변기는 운영위원들 간의 토론 끝에 결국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로 폐기된 채 방치되어 있다가 결국엔 사라져 버려 지금은 아쉽게도 실제 작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R.mutt의 변기는 모두 뒤샹이 1951년, 1964년에 한정판으로 재현한 레플리카replica다.


1917년 미국 독립예술가협회에서 주최하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작으로 남성 소변기 하나가 등장했다.‘이 작품을 걸 것인가? 아니면 바닥에 놓을 것인가? 그런데 과연 이런 작품을 전시해도 되는 것인가?’ 운영위원들은 난감했다. 결국 변기는 미술관에서 볼 수 없었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은 가게에서 구입한 변기에 자신의 이름 대신 변기 제조업자 이름인 리처드 머트 ‘R.Mutt1917’라고 서명을 한 후 제목 〈샘Fountain〉으로 출품했다. 출품료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였지만, 전시회에서 거절 당한 이 사건은 당시 예술계에 뜨거운 논쟁과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 오늘날의 시선으로도 미술관에서 변기를 만나는 것이 여전히 낯설다. 그런데 20세기 초반의 사건이라는 걸 감안하면 당시 미술계가 얼마나 황당하고 당혹스러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전시가 끝나자 뒤샹은 반격에 나섰다.

“출품료를 낸 작가는 어떤 작품이든  전시할 권리가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리처드 머트의 작품 〈샘〉을 거부한 거죠? 누군가 그것이 비도덕적이고 상스럽다고 말하는데 〈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머트가 그것을 직접 자기 손으로 제작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평범한 생활용품을 가져와 새로운 이름과 관점 아래 변기의 기능적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은 “예술품이란 색을 칠하거나 구성도 할 수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습니다.” 


뒤샹의 이 말은 20세기 미술사에 혁명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전통적인 작가들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회화나 조각이 예술품이라고 믿어왔는데, 변기 하나로 미술의 상식을 다시 재고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뒤샹은 작가가 단순히 ‘재현’하는 미술에서 더 나아가 무엇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미술로 작가의 존재를 확장시킨 것이다.


변기가 화장실이 아닌 특정 공간 ‘미술관’ 안에서 좌대 위에 예술가의 서명이 쓰인 상태로 있다면 사람들은 분명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게 된다. 사실 변기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오브제 자체로만 본다면 나름 아름답게 보인다. 변기라는 기능은 잠시 잊어버리고 그저 본질적인 형태 자체만을 충실히 보자면 매끄러운 하얀 표면,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감각적인 볼륨감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변기가 미술관 으로 진입하면서 기존의 미술 개념은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뒤샹은 제도화, 형식화된 미술 시스템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예술 경계를 무력화한 그의 발칙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낸다. 뒤샹이 천재적 상상력으로 현대 미술을 무한대로 확장시킨 위대한 예술가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_키스 해링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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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빛나는 아기.jpg 아이콘 짓는 개.jpg

아이콘,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 53.5 x 63.5cm, 1990

키스 해링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빛나는 아기〉, 〈짖는 개〉. 해링이 1990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그린〈빛나는 아기〉는 불멸, 영생의 아이콘이 되었다.


editions86_p85.jpg                love keith haring.jpg

〈Love〉 하트와 연인들의 모습을 역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미국 팝아트 작가 ‘키스 해링 Keith Haring’. 그의 이름은 몰라도 작품만큼은 익숙하다.

1980년, 스무 살 재기발랄한 미대생 키스 해링은 더러운 뉴욕 지하철 빈 광고판에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만화적인 도상은 우중충한 뉴욕 지하철 분위기를 바꾸며 순식간에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링은 금세 유명세를 타면서 일약 스타작가가 되었다.


해링은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섰다. 건물 벽, 담벼락, 광고판을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마구마구 그렸다. 해링은 예술가와 소수만 누리던 기존 예술 질서를 거부하며 ‘대중을 위한 예술’, ‘모두를 위한 예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하철역뿐 아니라 도심 속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리의 예술가가 되었다. 해링에게 ‘도시’는 대중과 만나는 열린 미술관이기도 했다.


해링의 예술 속엔 분명한 외침이 있다. 인종 차별이나 약물 중독, 전쟁, 에이즈 등 시대적 화두에 비판 의식을 과감히 드러낸다. 메시지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표출되었다. 그는 대중들의 공간과 삶 속에서 만나기 때문에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택했고, 어두움보다 밝음을 택함으로써 항상 사람들과 소통하길 원했다.


해링은 작품의 제목을 짓지 않는다. 많은 작품들이 〈무제〉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작가 자신이 의미를 제시하지 않고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념이나 의미를 창조해 해석하길 바랐다. 역시나 대중과의 소통이 핵심이었다.


생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8년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진단 후 해링은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대중을 위한 예술의 열정이 꽃을 피운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감사하며 살았기에 그의 위대한 꿈을 방해할 수 없었다.


1990년 2월 16일 이른 아침, 서른한 살의 나이에 해링은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려진 컵에 커피를 마시고, 그려진 노트에 공부를 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신의信義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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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jpg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1844년, 국보180호, 수묵화, 23×69.2cm,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가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의 노력과 후지쓰카 지카시 가문의 도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건져져 국내에 돌아와 국보 180호로 지정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게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라고? 정말?’  

물론 나는 문인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안목이 높지 않지만, 그림은 거칠고 메마른 붓질이 쓱쓱 지나갔을 뿐,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가 전부인 그저 싱거운 그림이다. 세련된 기법도 찾아 볼 수 없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비평서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빵점짜리라고 서술했다. 사실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림의 여백까지 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세한歲寒’이란 새해 전후로 연중 가장 추운 절기를 뜻한다. 겨울의 칼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초라한 집 한 채와 양쪽으로 잣나무와 소나무 두 그루씩 서있을 뿐 온통 여백이다. 텅 빈 공간이 더 쓸쓸하고 춥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느낀 추사의 적막감과 외로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1844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 생활하고 있던 추사 자신에게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사제지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역관으로 북경에 갈 때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준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붓을 들어 글과 그림으로 전했다.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가운데서도 그대는 이처럼 마음을 쓰고 어렵게 구한 책을 권세 있는 자들에게 주지 않고, 오히려 바다 건너 귀양살이하고 있는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구려. (··· ···) 공자께서 추운 계절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고 하셨네.” 

공자의 《논어》 한 구절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를 빌려와 이상적의 인품과 변치 않는 절개를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내용이다. 


그림의 사연을 떠올리며 다시 찬찬히 바라본다. 그림의 제목과는 달리 따뜻함이 전해진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이렇게 어우러져 있으니 문인화의 최고라는 찬사와 평가에 이제야 수긍이 간다. 

모두가 외면할 때, 내 편 하나 없이 외로울 때, 무언가 말 못할 시름이 깊어 한없이 슬플 때, 내 옆에 신의信義를 지키는 벗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런 벗에게 신의를 지키는 존재인지 되묻게 된다.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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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bet 돌깨는 사람들.jpg
돌 깨는 사람들 Les Casseurs de pierre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 1849, 캔버스에 유채, 165×257cm 
쿠르베의 삶과 예술의 리얼리티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력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들로부터 착취당하면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으로 내몰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 있었다.

황량한 채석장, 노동의 순간을 포착했다.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의 그림 〈돌 깨는 사람들〉은 열악하고 남루한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지치고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미화하지 않았다. 보여지는 그대로 표현했다. 
사실, 이 그림은 지금 우리시대 눈으로 보면 별 감흥없이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1849년 그림이 세상에 나왔을 때 평단에서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당대에 주목받던 들라크루아나 앵그르가 표현했던 아름다운 세계는 전혀 없었다. 그 시대 예술은 아름다움이 절대 가치였고, 이상적인 표현을 위해 왜곡과 변형도 가능했다. 당대의 예술가들이나 부르주아들이 생각하는 이 그림은 낯설고 그야말로 ‘추한 것’이었다. 쿠르베가 화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있는 ‘사실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추한 것 역시 ‘진실’이라고 외쳤다.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리는 것도, 대상을 미화하는 것도 거부하며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현실에서 보이는 것만 그렸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쿠르베는 서양미술사에서 리얼리즘Realism, 즉 사실주의로 문을 활짝 연 위대한 화가다. 그림의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린다고 무조건 리얼리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술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사회 비판적인 작품으로 사회의 어둠, 참담한 현실, 외면되는 모순 등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단지 그 시대의 모습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앎을 바탕으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사회주의 혁명에 깊숙이 관여했고 혁명이 실패하자 감옥에 갔다. 몇 달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고 재산과 그림을 몰수당하자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의 나이 54세. 그리고 4년 후 스위스 어느 호반에서 객사하고 만다. 

황망한 죽음이긴 하지만 쿠르베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올곧게 꿋꿋이 걸어갔다. 쿠르베는 자신 스스로 예술가이기 전에 인간이기를 자각했고, 지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 그림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목적은 이상화된 절대미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더 나아가 서양미술사에 있어 예술가는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사회적 현실로부터 찾으려 했던 최초의 사조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쿠르베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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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2.jpg

지옥의 문 Porte de l`Enfer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80~1917년  조각:브론즈 100×396×775cm

로댕의 〈지옥의 문〉은 서울·도쿄·파리 등 여러 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 청동 조각 브론즈는 점토로 형상을 만든 뒤 거푸집이라는 틀을 만들어 이곳에 청동주물을 부어 만든다. 그래서 틀 하나로 수십 개도 수백 개도 찍어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지옥의 문〉은 일곱 번째 에디션이다. 에디션은 틀로 찍어낸 조형물이나 판화, 사진처럼 같은 작품을 여러 개 찍어낼 때 붙이는 번호로 프랑스 정부는 열두 번째 작품까지만 로댕의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엉킨 인체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지옥 입구에서 신음하고 있다. 턱을 괴고 앉은, 생각하는 사람의 고뇌는 깊기만 하다. 그의 발밑 인물 군상들은 엿가락처럼 늘어진 육체가 소용돌이치듯 얽혀있고 붙어있다. 선명한 조형이 없다. 거친 질감과 무채색 표면에 뭉겨진 육체는 두려움이 아닌 공포심으로 다가온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지옥의 문(Porte de l`Enfer)〉이다.


소멸되지 않고 악행이 거듭 반복되는 곳, 영원히 놓지 못하는 불신과 증오, 그리고 분노 속에 휩싸여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삐뚤어진 욕망으로 사랑하고 배신하고 기만하고 증오하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던 죄 많은 인간들은 지옥에서도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죄로 얼룩진 육체의 사슬들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팔을 치켜 올리고 매달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혼란과 무질서가 지옥의 언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1871년 프랑스 정부는 화재로 감사원을 포함한 부속 건물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 국립장식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미술관 문을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한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이다. 로댕은 30여 년 동안 길고 고된 작업을 했지만 끝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사후 21년 만인 1938년에 첫 번째 에디션이 주조되면서 〈지옥의 문〉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지옥의 문〉은 로댕 필생의 걸작이다. 로댕이 평생에 걸쳐 제작한 거의 모든 인체 조각들의 원형이 총망라되어 나타난다. 〈생각하는 사람〉을 〈지옥의 문〉 중앙에 배치하며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내면적인 번뇌를 표현하고 있다. 홀로 떨어져 고독한 상념에 잠긴 그는 작가 로댕이 아닐까?

세상에 무슨 죄가 이리도 많은지···. 도대체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있다면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가만히 〈지옥의 문〉 앞에 다시 서 본다. 내가 짓고 허문 마음의 지옥들을 헤아린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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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jpg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년, 1897년 유화 141 Ⅹ 376 cm 보스턴 미술관


반복되는 일상 속에 파묻혀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문득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작품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의 긴 제목 만큼이나 그림의 크기도 높이 139센티미터, 너비 375미터로 어마어마하다. 이 대작은 고갱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려졌다. 당시 성병으로 몸은 병들고 가난은 지속되고 사랑하던 딸의 죽음으로 정신적 고통마저 심했던 고갱은 결국 자살을 결심했고, 유언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등장인물들은 고갱이 원시의 이상향을 찾기 위해 가정과 문명을 버리고 선택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다. 배경은 전체적으로 푸르게 인물들은 햇빛에 그을려 노란 피부색을 띠고 있다. 이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인간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누워있는 연약한 아기는 인간의 탄생과 출발을 의미하며, 중앙에서 열매를 따는 젊은이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는 모습이 연상되어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간의 삶을 나타냈다. 그리고 왼쪽의 웅크린 채 두 팔로 얼굴을 감싼 백발의 노인은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 고갱은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우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던진 것이다. 


고갱은 죽기 전 미친 듯이 밤낮으로 이 그림에 그렸다. 작품을 끝내고 고사리 숲으로 들어가 비소 한 통으로 자살을 감행하지만 모두 토해내고 이후로 더 고통스런 창작의 시간과 삶을 이어갔다. 

“딸 이름은 알린, 어머니와 같은 이름이었네. 알린의 무덤과 꽃들, 그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야. 그녀의 진짜 무덤은 내 곁에 있고 이 눈물이 진짜 꽃이라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나는 누구인가?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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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jpg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자화상自畵像〉

가로 20.5㎝×세로 38.5㎝│국보 제240호│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소장

당연히 있어야 할 두 귀와 목, 상체는 없고 탕건 윗부분은 잘려 나간 채 화폭 위쪽에 자리한 얼굴은 정면을 매섭게 보는 이의 시선을 따라 다닌다. 미술계에서는 화가의 의도적인 생략이라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팀에서 x-선 촬영과 적외선 및 현미경 등을 통한 과학적 분석을 실시한 결과 그림 속 숨겨진 진실이 드러났다. 생략된 것으로 여겨왔던 귀는 붉은 선으로 표현되었고, 옷깃과 옷 주름도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채색까지 완벽하게 된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그림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다.


유령처럼 허공에 얼굴만 떠있다. 부드럽게 올라간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단정하게 꽉 다문 입술, 굼실거리는 가느다란 수염은 표정에 생동감을 준다. 정면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빛은 강렬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감돈다. 이것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다. 삼백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가 내 앞에서 “너는 누구냐?” 하고 묻는 것만 같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한국 미술사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초상화에서 유일하게 국보 제240호로도 지정되었다. 윤두서는 조선시대 명문가 자손으로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 할아버지다. 열다섯 살에 혼인을 하고 스물두 살에 부인과 사별을 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지만 당시 노론의 시대여서 남인인 그의 출사 길은 막혀 있었다.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간 형과 벗의 거듭된 죽음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꿈을 접고 마흔다섯 살 무렵 고향 해남으로 조용히 내려가 은둔하는 생활을 한다. 그래서일까 〈자화상〉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새겨진 인생의 그늘이 엿보인다. 


자화상의 영단어인 ‘self-portrait’는 ‘발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protrahere’와 ‘자신’을 뜻하는 ‘self’를 결합한 단어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로 해석된다. 살아온 삶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얼굴로 나타난다. 그래서 얼굴에는 사람과 역사가 담겨 있다. 자신의 심연을 해부해 그림 속에 영원히 정지시킨 수많은 자화상 중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애써 외면했던 그의 시선을 다시 마주한다. ‘저 부릅뜬 눈으로 얼마나 자신을 응시했을까.’ 실제로 윤두서는 엄격한 성격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저 눈빛이 한치의 흔들임조차 없어질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마주했을까. 자신의 내면세계와 솔직하게 마주하며 윤두서는 그의 아팠던 삶을 치유했으리라. 윤두서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며 수도 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을 질문 “나는 누구인가?” 요즘 나에게 다시금 치열하게 물어야 할 가슴이 뜨거워지는 질문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해피엔딩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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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jpg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1/1653의 수산나와 두 노인Susanna and the Elders

1610년, 캔버스에  유채, 170 x 121cm, 바이센슈타인 성


여러 화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수산나와 두 노인〉을 그렸는데, 화가들의 ‘인권 감수성’에 따라 표현과 메시지가 다르다. 이탈리아 여성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겁탈’이라는 주제로 묘사했다. 그녀가 17세 때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오명과 치욕감은 이후 그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산나의 얼굴에는 싫다는 빛이 가득하다. 겁에 질린 수산나의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이 돋보인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달아날 수 없음을 그림의 구도에서도 알 수 있다. 수산나의 등 뒤 꽉 막힌 벽은 출구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재판관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진 두 노인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수산나를 짓누르고 있다. 



여기 하나의 드라마가 있다.

수산나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신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여인이었다. 남편 요아힘은 부유한데다 바빌론에 사는 유대인 가운데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수산나는 정오가 되어 손님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가면 비로소 정원에 산책을 나가곤 했다. 사건이 있던 날도 수산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빈 정원에서 두 명의 하녀와 함께 산책을 했다. 그날 따라 날이 무척 무더웠던 까닭에 목욕을 하기 위해 두 명의 하녀에게 올리브 오일과 연고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정원 문을 잠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는 연못에 몸을 담갔다. 하지만 정원 안에는 이미 두 노인이 숨어 있었다. 이들은 수산나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겁탈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알몸의 수산나 앞에 갑자기 나타난 두 노인은 그녀에게 “자, 정원의 문은 닫혔고 우리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 만일 거절하면 부인이 젊은 청년과 정을 통하려고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성서 다니엘서 13장 20~21절) 이렇게 협박했다.하지만 수산나는 비명을 질러 결국 두 노인으로부터 겁탈만큼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다음날 두 노인의 모략으로 수산나는 위기에 빠진다. 재판에서 사람들은 수산나의 주장보다는 재판관이자 공동체의 존경받는 장로인 두 노인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수산나에게 사형 평결이 내려지고 가족들의 통곡 속에 수산나가 형장에 끌려가려는 순간 소년 다니엘이 나타났다. 다니엘은 두 노인의 증언에 의심을 품고 두 노인에 대한 분리 심문을 법정에 요구했다. 분리 심문에서 다니엘은 “수산나의 간통 현장을 어디에서 목격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노인은 “아카시아나무 아래서”라고, 다른 한 노인은 “떡갈나무 아래서”라고 대답했다. 서로 일치하지 않은 다른 답변으로 유대인들은 두 노인이 수산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음을 알아채고 크게 분노했다. 당연히 두 노인은 현장에서 처형됐다. 

성서 속 수산나는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여성은 드물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미움 대신 용서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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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jpg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년, 캔버스에  유채,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큰 아들은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품은 아버지에게 원망이 가득하다. 과연, 형의 분노는 당연한가? 소위 모범적으로 살아온 형이 피붙이인 동생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보면서 모범적인 삶이 좋은 인간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범적인 인간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일 뿐…. 큰 아들은 자기 공로에만 집중하여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배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했던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장 20절, 24절) 


작은아들은 찢어지고 해진 누더기 옷을 걸친 채 한쪽 구두는 뒷굽이 닳아 없어져 맨발을 드러내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몇 해 전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해 미리 받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다 잃고 헐벗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비난하기는 커녕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해 주지만 큰아들은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다. 용서를 구하는 아들 어깨에 다정하게 감싼 아버지의 두 손이 아주 특별하다. 한 손은 거친 남자의 손으로, 다른 한 손은 여린 여자의 손이다. 왼손은 모든 시련을 해결해주실 강한 능력의 아버지 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어머니 손으로 거룩하신 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은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로 유명한 이야기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내용이다. 


〈돌아온 탕자〉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작품으로 그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두 아들, 두 딸, 두 아내 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보냈다. 정부였던 여인에게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를 당해 결국 파산하고 빈민촌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 재산, 명예, 권력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10여 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인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처절한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두려웠는지 모른다. 마침내 생을 마치고 신 앞에 선 자신이 바로 ‘돌아온 탕자’였기 때문이다. 늙은 화가는 죽음 앞에서 ‘용서’를 깊이 묵상하며 그린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 불편하고 힘들지만 마음속에 깊이 새겨있던 ‘미움’이라는 단어를 지워내고 ‘용서’의 단어를 새겨본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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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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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이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가?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19세기 중엽은 땅에 떨어진 낟알조차도 함부로 줍지 못하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던 참담한 시대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은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모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던 소작농들의 피폐한 삶을 보고 느낀 대로 그린 ‘사실주의’ 그림이다. 


작품은 당대에 주목받지 않은 여성, 그리고 그들의 고된 노동과 삶의 이야기다. 그저 묵묵히 낟알을 줍는 데 몰두하고 있는 표정 없는 여인네들의 검게 탄 얼굴과 거칠고 투박한 손, 그리고 굽은 어깨는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말한다. 그러나 이 일하는 여인들에게서는 결코 비천한 모습이 아닌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이삭 줍는 여인들 너머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추수단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말 탄 지주의 모습은 이삭 줍는 여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당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왜곡된 평가를 내놓았다. 가령 〈이삭 줍는 여인들〉을 서정적이면서 드라마틱한 화면 구성으로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며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밀레를 위험한 인물(블랙리스트)로 생각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의 동지로 여겼다. 하지만 밀레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 어떤 이념도 정치도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농민의 고된 생활을 그대로, 그러나 어떤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온화한 서정과 일종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한 것이었다. 


밀레는 인간을 이상적으로 미화하지 않았다. 오직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원천으로 삼은 인간은 정직하고 존엄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인간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이 그림은 감동적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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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rnica2.jpg

게르니카Guernica  1937, 캔버스에 유채, 349.3×776.6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폭력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MASSACRE-IN-KOREA.jpg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e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주민의 25퍼센트에 달하는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항할 무기 하나 없이 맨손에 알몸이다.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은 공포와 체념에 간신히 버틸 뿐이다. 얼굴을 투구로 가린 채 경직된 자세로 선 병사들은 그들을 제압하려고 총과 칼을 겨누고 있다. 감정 없는 로봇 같은 군인들의 야만적인 모습에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림의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그 다음 장면에서 분명 학살을 암시한다. 이 서사는 새드 엔딩Sad Ending으로 끝날 것이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간판스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이 작품에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e)’이라는 제목을 부쳤다.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지만,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라면, 당연히 미군이 자행한 학살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은 공산당이나 자유진영당 모두에게 혹평을 들었다. 공산당은 학살을 당하는 피해자가 한국인인지, 학살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미군인지 즉, 학살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며 비판했고, 자유진영당에서는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처럼 그려냈다며 반미 선전물이라고 비난했다. 이 그림이 발표되고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명성에 흠집이 생겼고 미국에서는 피카소 입국을 거부해 한 번도 미국에 가지 못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피카소 자신은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보다는 전쟁 자체가 가져오는 참혹한 현실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 했을 뿐이다.

에라스무스의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글귀에 다시 한 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비극적 서사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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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jpg

무제 Untitled, 1960~1961,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Tate Modern Museum, London

“작품에는 어떤 설명을 달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_ 마크 로스코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 방은 어둡고 적막하다. 그의 그림과 마주한다. 고요한 침묵만이 흐를 뿐. 하지만 이 침묵이 평정심을 찾아주지는 않는다. 그저 큰 화면 가득 쓱쓱 물감을 펴듯 발라 내린 색채덩어리, 단순한 면과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로스코는 자신을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에 불편해 했다. 관람자의 눈에 작품들이 ‘추상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는 단호하게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인생의 비극을 그린 서사다”라며 인간의 형상에 대한 묘사가 단순 모양과 상징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차별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안과 가난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 고통이 그의 작업 밑바닥에 깔려있는 비극적 서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 비극적 감정은 그림을 그릴 때 늘 나와 함께했다”라고 고백했다. 


로스코의 명성이 화단과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이름을 타기 시작하면서 1958년 캐나다 주류회사인 시그램은 맨해튼에 신사옥을 완공하자, 1층 ‘포시즌즈’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할 회화작품을 로스코에게 주문했다. 그림 아홉 점을 거액에 계약하고 정작 그림이 완성되었지만, 고급 레스토랑에 비싼 음식 값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며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주고받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경건한 삶으로 안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계약 철회를 함으로써 자기가 부여한 작품의 순결성과 화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후 작품을 완전 단색 처리하거나 윤곽선이 선명한 검은색 사각형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에 작업했던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로스코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이 어두운 색채 실험을 계속했다. 음울한 분위기는 그의 심각한 우울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한때 맨해튼에서 배를 굶주리며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미국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가 되었지만 1970년 2월 예순일곱이란 나이에 그만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 추상표현주의 선구자로 불리는 로스코의 생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자나 잘 나가는 자나 모두 저마다 인생의 십자가는 힘겹기만 하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곧 로스코의 슬픔이 위로가 된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의심하라

by 센터 posted Apr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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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rahison des images1.jpg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은 단순하면서도 참 쉬운 그림이다. 캔버스 안에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한 극사실적인 짙은 갈색의 나무 파이프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파이프 밑에 프랑스어로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글이 그림을 부정한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림은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던졌다.


다시 작품에 그려진 대상을 천천히 본다. 분명 파이프가 맞다. 하지만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그 자체로 파이프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실제 이 파이프에 불을 지펴 담배를 피울 수 없는, 단지 물감으로 색을 입힌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작가가 아무리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 단어 ‘파이프’ 역시 사물을 지시하는 단어일 뿐 파이프라는 본연의 존재는 아닌 것이다. 언어란 단지 A를 B로 부르기로 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일 뿐 본질은 아니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진다.


그림 앞에 다가가는 순간 익숙함이 낯섦으로 바뀐다. 이미지와 텍스트 간에 생기는 모순된 어법이 마그리트 미학의 핵심이다. 당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물체를 뜻밖의 장소에 갖다 놓거나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을 조합하거나 배치하여 익숙함이 낯설음으로 바뀌는 새로운 시각언어를 만들었다. 마그리트 역시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을 예상치 않은 배경에 대치하거나 크기를 왜곡시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런 이미지 배반을 일으켜 평소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통념, 사물, 상식, 논리에 물음표를 던져 보라고 권유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각은 오감으로 전해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 별다른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과연 ‘사실’은 정말 진실일까? 마그리트는 우리가 사실로 규정해 의심하지 않았던 ‘진실’이 어쩌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의 한계일 수 있으니 한번 쯤 모든 것을 열린 시선으로 의심을 품어보란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진실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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