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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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The Census at Bethlehem.jpg

베들레헴의 인구조사The Census at Bethlehem 1566년, 목판에 유채, 116×164㎝, 안트웨르펜 왕립미술관


그림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5경∼1569)의 대표작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인구 조사의 명을 내리자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에 입성한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날 베들레헴의 성경 속 풍경입니다. 그럼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그림 속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볼까요?


낡은 오두막집 앞 창가의 한 남자는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고 인파가 무리 지어 있습니다. 아마도 세금을 내는 사람들 같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봇짐을 지고 걷는 고단한 사람들,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땔감을 나르는 사람들, 불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 군데군데 존재감 없는 군상들은 거칠고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추위에 떨고 삶에 지친 어른들 밑에서도 아이들은 마냥 겨울을 즐기고 있습니다.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는 아이들, 바구니를 썰매 삼아 타는 아이들. 역시 아이들은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조연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는 놀라운 기적이 숨어 있었습니다. 전경 중앙에 푸른 망토 차림에 나귀를 탄 만삭의 여인과 그 앞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그들은 묵을 숙소를 찾지 못해 결국 마구간에 여장을 풀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곳 말구유 속에 아기 예수를 낳았던 것입니다. 사실 성모 마리아 또한 왕도 공주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나사렛 처녀일 뿐. 오히려 병든 노인의 딸이고, 고단한 목수의 약혼자이며, 자신의 몸 하나 의지할 곳 없어 마구간에서 새 생명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여인의 몸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은 군중 속에 묻혀 아무도 마리아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거룩하신 역사가 이 땅 낮은 곳에서 아기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놀라운 기적을 우리는 어쩌면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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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미인도.jpg 천경자 슬픈전설.jpg

위작 논란의 그림 < 미인도>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미인도〉 그림 속 여인인 나는 무척 슬프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이 나에 어머니라고 하는데 그 분은 나를 강하게 부정하신다. 유전자 검사결과 친모라고 판정을 받았는데도 “자기가 낳은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냐”며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항거로 절필선언까지 하셨다. 국내 미술계 최대 위작 시비의 주인공인 나는 그녀의 슬픈  그림자가 되었다.  위작 논란이 있은지 8년이 지난 1999년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한 장본인이라며 내 출생의 비밀을 밝혀주신 분이 나타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다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지만 ‘진품’이라는 감정이 번복되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작품이 아니다”라며 그녀는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나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슬픈 전설로 따라 다닌다.


위작 스캔들로 심신이 지친 그녀는 1991년 훌쩍 큰딸이 있는 뉴욕으로 떠난 후 8년 만에 잠시 귀국해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며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통크게 기증하고 다시 떠났다. 이후 노년에 불어닥친 병마 때문인지 한국과는 연락을 완전히 끊은 채 칩거 생활을 했다.


올 가을 천 화백의 미스터리한 때늦은 부고 소식 역시 한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의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91페이지로 결말을 맺었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인생에 어울리는 엔딩인지도 모르겠다. 1977년에 그린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0대인 그녀가 22세를 기억해낸 자화상이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던 스물두 살의 천경자 홀로 아이를 낳고 단칸방에서 탱탱 부어오른 젖가슴을 부여잡고 몸 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슬픔을 그림으로 토해냈으리라. 


머리 위에 뱀 네 마리가 오글거리며 가시 면류관처럼 씌워져 있고 가슴에는 가시 없는 장미 한 송이가 있다. 말문을 닫아버린 차가운 입술과 창백한 얼굴에는 한기가 돌고 움푹 패인 눈은 덤덤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림처럼 그녀는 운명에 당당히 맞선 삶을 살았다. 아니 운명에 도전하려는 섬뜩한 자의식 마저 느껴진다.


그녀의 슬픈 전설은 시대의 벽, 현실적 장애에 맞서 여성으로, 예술가로, 자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국의 또 하나의 역사였다. 그림 속 여인은 슬픈 눈길로 덤덤하게 나를 응시하며 말을 건다.

“당신의 전설은 무엇인가요?  그 전설 또한 슬픈가요?”

대답을 찾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먼저 보낸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순수한 휴머니스트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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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작품 군상.jpg


이쾌대(1913~1965)의 대표작품 〈군상 4-조난〉과 마주한다. 스케일, 구도, 형상 모든 것이 한국 근대화단에 보기 드문 작품으로 생소한 울림이 느껴진다.

화폭 배경에 구름기둥이 폭발하듯 솟아오르고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벌거벗은 군상들.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과 여인 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돌로 내리치고 물어뜯으며 싸운다. 인물의 묘사와 표정이 살아있다. 울부짖다 지쳐 쓰러진 여인을 보듬어 안고 서로 의지한 채 앞서 나가는 세 명의 주인공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이 아닌 순수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구 낭만주의 형식을 담아 현실의 기운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힘’이 느껴진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와 해방 직후 이념분열로 갈등과 모순과 혼란의 어두웠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쾌대처럼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그린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않다.

월북화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이쾌대는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한국화단에서 그야말로 잊혀진 화가였다. 이렇듯 냉전 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40여 년 동안 아내 유갑봉 여사의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작품들이 1991년 신세계미술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당시 화단에선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아내의 눈물겨운 보존 노력이 우리 미술사에 큰 영광을 가져다준 셈이다.


‘한식이, 한민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1950년 11월 11일 시대의 아픔으로 국군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끌려온 이쾌대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편지를 몰래 인편으로 아내에게 전달한다. 2년 후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끝내 가족 곁으로 가지 못했다.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그가 택한 곳은 북한이었다. 가족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던 이쾌대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왜 북한으로 향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다만 존경하던 친형 이여성(독립운동가, 기자, 역사화가)이 월북하면서 따라갔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가족을 버릴만한 중요한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형제는 곧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이쾌대의 월북행을 단순히 이념 문제로만 바라보기에 어렵다. 아마도 곧 통일이 이뤄지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제자인 남경숙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46년 말 북한에 다녀오신 선생께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가 아니였을까?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 전시정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
 2015.07.22(수)~11.01(일)
 덕수궁 미술관
 관람료 무료
 www.mmca.go.kr



슬픔은 예술

by 센터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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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1.jpg 명화에세이2.jpg

*부서진 기둥 1944 oil on masonite
푸른 하늘과 메마른 사막에 홀로 서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온몸에는 못이 박혀있고 척추을 대신해  그리스식 기둥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그런 그녀의 몸이 갈라지지 않게 하얀색 코르셋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이는 부서진 척추의 고통을 몸에 박힌 못으로 나타내면서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보
여주고 있다. 메마른 사막은 여러 번의 수술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받은 그녀를 나타낸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생각 속의 디에고 1943 oil on masonite 
이어지는 짙은 눈썹, 당당한 눈빛과 육감적인 입술, 그리고 화려한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우아나를 입고 있는 이 자화상은 칼로의 강박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마 한복판에 디에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결국은 두 존재가 하나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47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50여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중 다수는 자기 자신을 예술적 주제로 삼은 자화상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던 칼로는 열여덟 살 때 또 하나의 불행을 맞이한다. 전차와 버스가 부딪치는 큰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몇십 번의 수술과 망가진 척추 때문에 평생 석고 지지대를 입고 사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서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자신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뜨거운 사랑을 한다. 멕시코의 최고 민중화가로 칭송받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예술가로서의 교감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스물한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정치적, 예술적 동지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세 번의 유산과 디에라의 샘솟는 바람기는 여성과의 잠자리를 커피 한 잔 마시듯 여기고, 급기야 그녀의 여동생과 애정 행각을 벌여 칼로에게 영혼이 찢겨나가는 고독감과 상실감을 평생 동안 안겨주었다. 마침내 이혼, 그리고 이듬해 재결합. 하지만 여전히 둘 사이는 삐그덕거렸다. 남편과 아이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그녀는 그림으로밖에 토해낼 수 없었다.


그녀의 그림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한 가장 정직한 이야기였다. 칼로의 삶은 줄곧 망가져가는 육체의 고통과 사랑의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예기치 못한 시련과 절망을 경험으로 자신 내면의 풍경을 치열히 그려야 했던 이유는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함이었으리라. 칼로에게 슬픔은 삶 전체를 지배한 떼버릴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것과 함께 품고 살아가야 함을 삶이 가르쳐 주었다. 인생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늘 그녀에게 찾아오는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예술이 되었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by 센터 posted Apr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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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jpg

“살라고 낳았는데 죽으러 가는구나”

어머니는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만 본다.

“이 어린 것이 살아올 수 있다면···.”

무사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린 지 두 달 만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1914년 10월 30일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어머니는 오열을 한다. 아들의 나이 겨우 열여덟.1차 대전과 2차 대전, 전장의 난무하는 총탄은 니편 내편을  가리지 않는다. 청춘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청년과 그 아들을 앞세운 불행한 부모들만 만들 뿐···. 시대나 개인이나 모두가 불행했다.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1867~1945년)의 작품 〈피에타 piera〉는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온 자식을 어머니는 품에 안고 놓지 못한다. 아들은 마치 따뜻하고 안전한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웅크린 채로 어머니의 무릎 사이에 기대어 있다.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슬픔은 끝이 없다. 시대의 억압과 개인의 고통으로 힘겨운 삶을 인내하여야만 하는 눈물겨운 모성애가 전해온다. 어린 자식을 가슴에 파묻은 콜비츠는 예전의 붓을 버리고 칼을 잡았다.

목판화 특유의 흑백의 단순함과 강렬한 터치감은 고통과 절망의 떨림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목판에 칼질하며 전쟁의 상흔과 개인의 아픔을 하나하나 새겼는지도 모른다. 달동네에서 평생 병든 사람들을 무료 진료하였던 의사인 남편 카를 콜비츠와 뜻을 같이하여, 가난한 노동자와 삶을 함께 나누었다. 그녀는 늘 빈곤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굳건히 그려온 사회 참여 예술가였다.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느끼며 함께 분노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라는 공동체적 감성이 작품마다 가득하다. 우리 곁에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자식을 허망하게 잃은 슬픔을 아직 보상받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적 연대감이 더욱더 절실하다. 더 이상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몰을 지켜볼 수가 없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윤아/센터 기획편집위원


꽃이 없어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by 센터 posted Mar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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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jpg

                                                *구스타프 클림트가 에밀리 플뢰게에게 보낸 엽서 1908.7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검은 줄기의 나무에 꽃과 열매를 대신해 빨간 하트를 가득 담은 아름다운 엽서를 에밀리 플뢰게에게 전했다. 클림트가 그림에 쏟은 열정만큼이나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정열적이었음이 느껴진다.클림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키스〉이다. 한 남자의 입맞춤과 강렬한 포옹, 이를 품고 달콤함에 취해 있는 듯한 여자.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 선, 그리고 패턴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은 그림을 보는 순간 몽환적인 남녀의 키스에 빠져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클림트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주변에는 창작의 뮤즈가 되고픈 허영기 가득한 여자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성부터 관능적인 모델, 그리고 귀족 부인까지…. 그는 어떤 여성이든 상관없이 오로지 욕망에 몸을 맡겼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도 여럿 있었지만 어느 누구와도 진지한 연인 관계를 지속하거나 동거도 하지 않은 나쁜 남자였다.하지만 이 나쁜 남자를 진짜 사랑 앞에서 주저하도록 만든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에밀리 플뢰게. 그녀와의 완벽한 사랑을 꿈꾼 탓일까? 그녀의 청혼도 거부한 채 20여 년 동안 정신적인 사랑만 나누며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도 그녀를 곁에 두었다.클림트에게는 두 우주의 여인이 있었다. 한 우주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며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던 여러 여인들과 다른 우주는 정신적 사랑을 나누며 이상주의에 빠지게 만든 단 한 여자, 에밀리였다.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실제로는 불완전한 반쪽짜리 사랑을 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지만 글쎄. 플라토닉 러브가 그가 이루고 싶었던 완전한 사랑의 또 다른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윤아/센터 기획편집위원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by 센터 posted Dec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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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_파라솔.jpg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1875)


축소_축소_스카프.jpg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1878)


축소_죽음.jpg

임종을 맞은 까미유 모네(1879)



걸어가는 아내와 아이. 불현듯 아내 까미유를 불렀을 때 뒤돌아 본 순간을 그린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색채는 마치 붓에 태양 빛을 찍어 거칠게 빠른 속도로 발려 놓은 듯 하늘과 부인과 아이, 풀밭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휘감아 찰나와 순간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을 마주하노라면 푸르른 초원에 흩날리는 상쾌한 바람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까미유의 허망한 시선이 더 가슴깊이 아려온다. 저 강렬한 태양 빛보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빨간 스카프를 두른 여인의 모습이 몹시 슬퍼 보인다. 창밖 너머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길 위에 서서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는 까미유를 모네는 애써 외면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을 그려나갔다. 창안의 어두움과 창밖의 밝음은 공간적인 분리와 색의 대비, 그리고 엇갈린 시선이 말하듯 그림에 미안함과 안타까움, 지독한 슬픔이 전해온다. 이 작품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까미유는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를 간호하고 아이들을 돌보던 알리스는 이미 모네의 여자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고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까미유는 배신감으로 생에 대한 미련마저 쉽게 놓았는지도 모른다. 모네는 곧 알리스와 재혼을 해서 30년 동안 삶을 함께 했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 그림을 곁에 두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음을 맞는 참담한 순간에도 모네는 화가였다. 죽음의 손길이 가까워지면서 순간순간 변해가는 색채를 캔버스에 담아 나갔다. 양산을 든 까미유도 빨간 스카프를 두른 까미유도 서서히 지워지고 허망한 시선의 그녀의 눈도 감겼다. 허연 침대에 누워 하나둘 형체가 지워져 간다. 그 모든 회한도 내려놓은 듯하다. 그림 속 까미유가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바라보는 이들은 슬픔과 아픔에 젖는다. 까미유는 비록 32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위대한 화가 모네의 작품 속에 영원한 모델로 남아 있다. 〈임종을 맞는 까미유 모네〉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아내를 바라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아직 살아있는 그 순간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니 이 순간이 이대로 영원히 멈추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심정을 까미유는 느끼고 떠났으리라. 그래서 내 남자를 용서하고 내 남자의 여자도 용서했으리라. 

꽃다운 열여덟 살에 직업 모델로 모네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시댁의 냉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모네의 외도와 투병을 감내해야 했던 까미유. 두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마지막이 아프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아니면 시간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슬픔〉은 작은 시작이다

by 센터 posted Oct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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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ow.jpg


“지난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됐다.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하루 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Sien)이다.”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해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것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것 같은 이 여인이 바로 고흐가 사랑한 여자 시엔이다. 1995년 나 홀로 유럽 여행 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이 여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 ‘슬픔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2년 후 1997년 다시 시엔을 찾아갔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흐는 불행한 시엔의 아픔까지도 사랑했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실루엣은 나올 수가 없다. 그 후 한참이 지나 2007년 다시 그녀와 마주했다. 궁금해졌다. “당신은 저 착한 남자의 따스한 사랑이 얼마만큼 위로가 되었나요?” 이렇게 묻곤 울컥했다.
시엔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고단한 인생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밑바닥, 혹독한 운명의 굴레 속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이 착한 남자의 사랑만이 살아가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림 속 시엔이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알게 되었다. 힘겨운 삶에 지쳐 버린, 슬픔이 가득한 엄마의 몸에 기대어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한 생명이 꿈틀대고 있었다. 시엔에게는 이미 아이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한 생명을 또 품었다는 것이 시엔에게 살아가야 하는 힘이 되었을까, 아니면 신마저 원망하고 있었을까.
고흐는 시엔을 모델로 6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슬픔〉이란 작품은 고흐가 그린 최초이자 최후의 누드화이다. 고흐는 시엔을 대상으로 한 이 작품 외에는 어떠한 누드화도 그리지 않았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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