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작은 시작이다

by 센터 posted Oct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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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ow.jpg


“지난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됐다.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하루 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Sien)이다.”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해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것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것 같은 이 여인이 바로 고흐가 사랑한 여자 시엔이다. 1995년 나 홀로 유럽 여행 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이 여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 ‘슬픔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2년 후 1997년 다시 시엔을 찾아갔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흐는 불행한 시엔의 아픔까지도 사랑했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실루엣은 나올 수가 없다. 그 후 한참이 지나 2007년 다시 그녀와 마주했다. 궁금해졌다. “당신은 저 착한 남자의 따스한 사랑이 얼마만큼 위로가 되었나요?” 이렇게 묻곤 울컥했다.
시엔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고단한 인생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밑바닥, 혹독한 운명의 굴레 속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이 착한 남자의 사랑만이 살아가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림 속 시엔이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알게 되었다. 힘겨운 삶에 지쳐 버린, 슬픔이 가득한 엄마의 몸에 기대어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한 생명이 꿈틀대고 있었다. 시엔에게는 이미 아이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한 생명을 또 품었다는 것이 시엔에게 살아가야 하는 힘이 되었을까, 아니면 신마저 원망하고 있었을까.
고흐는 시엔을 모델로 6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슬픔〉이란 작품은 고흐가 그린 최초이자 최후의 누드화이다. 고흐는 시엔을 대상으로 한 이 작품 외에는 어떠한 누드화도 그리지 않았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by 센터 posted Dec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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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_파라솔.jpg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1875)


축소_축소_스카프.jpg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1878)


축소_죽음.jpg

임종을 맞은 까미유 모네(1879)



걸어가는 아내와 아이. 불현듯 아내 까미유를 불렀을 때 뒤돌아 본 순간을 그린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색채는 마치 붓에 태양 빛을 찍어 거칠게 빠른 속도로 발려 놓은 듯 하늘과 부인과 아이, 풀밭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휘감아 찰나와 순간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을 마주하노라면 푸르른 초원에 흩날리는 상쾌한 바람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까미유의 허망한 시선이 더 가슴깊이 아려온다. 저 강렬한 태양 빛보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지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빨간 스카프를 두른 여인의 모습이 몹시 슬퍼 보인다. 창밖 너머로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길 위에 서서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는 까미유를 모네는 애써 외면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빨간 스카프를 두른 모네 부인의 초상〉을 그려나갔다. 창안의 어두움과 창밖의 밝음은 공간적인 분리와 색의 대비, 그리고 엇갈린 시선이 말하듯 그림에 미안함과 안타까움, 지독한 슬픔이 전해온다. 이 작품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까미유는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녀를 간호하고 아이들을 돌보던 알리스는 이미 모네의 여자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고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까미유는 배신감으로 생에 대한 미련마저 쉽게 놓았는지도 모른다. 모네는 곧 알리스와 재혼을 해서 30년 동안 삶을 함께 했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 그림을 곁에 두었다고 한다.


아내가 죽음을 맞는 참담한 순간에도 모네는 화가였다. 죽음의 손길이 가까워지면서 순간순간 변해가는 색채를 캔버스에 담아 나갔다. 양산을 든 까미유도 빨간 스카프를 두른 까미유도 서서히 지워지고 허망한 시선의 그녀의 눈도 감겼다. 허연 침대에 누워 하나둘 형체가 지워져 간다. 그 모든 회한도 내려놓은 듯하다. 그림 속 까미유가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바라보는 이들은 슬픔과 아픔에 젖는다. 까미유는 비록 32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위대한 화가 모네의 작품 속에 영원한 모델로 남아 있다. 〈임종을 맞는 까미유 모네〉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아내를 바라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아직 살아있는 그 순간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아니 이 순간이 이대로 영원히 멈추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심정을 까미유는 느끼고 떠났으리라. 그래서 내 남자를 용서하고 내 남자의 여자도 용서했으리라. 

꽃다운 열여덟 살에 직업 모델로 모네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시댁의 냉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모네의 외도와 투병을 감내해야 했던 까미유. 두 아이를 세상에 남기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마지막이 아프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아니면 시간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글|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꽃이 없어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by 센터 posted Mar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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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jpg

                                                *구스타프 클림트가 에밀리 플뢰게에게 보낸 엽서 1908.7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검은 줄기의 나무에 꽃과 열매를 대신해 빨간 하트를 가득 담은 아름다운 엽서를 에밀리 플뢰게에게 전했다. 클림트가 그림에 쏟은 열정만큼이나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정열적이었음이 느껴진다.클림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키스〉이다. 한 남자의 입맞춤과 강렬한 포옹, 이를 품고 달콤함에 취해 있는 듯한 여자.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 선, 그리고 패턴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은 그림을 보는 순간 몽환적인 남녀의 키스에 빠져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클림트는 여성편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주변에는 창작의 뮤즈가 되고픈 허영기 가득한 여자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몸을 파는 거리의 여성부터 관능적인 모델, 그리고 귀족 부인까지…. 그는 어떤 여성이든 상관없이 오로지 욕망에 몸을 맡겼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아이까지 낳은 여인도 여럿 있었지만 어느 누구와도 진지한 연인 관계를 지속하거나 동거도 하지 않은 나쁜 남자였다.하지만 이 나쁜 남자를 진짜 사랑 앞에서 주저하도록 만든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에밀리 플뢰게. 그녀와의 완벽한 사랑을 꿈꾼 탓일까? 그녀의 청혼도 거부한 채 20여 년 동안 정신적인 사랑만 나누며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도 그녀를 곁에 두었다.클림트에게는 두 우주의 여인이 있었다. 한 우주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며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던 여러 여인들과 다른 우주는 정신적 사랑을 나누며 이상주의에 빠지게 만든 단 한 여자, 에밀리였다.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실제로는 불완전한 반쪽짜리 사랑을 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지만 글쎄. 플라토닉 러브가 그가 이루고 싶었던 완전한 사랑의 또 다른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윤아/센터 기획편집위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by 센터 posted Apr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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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jpg

“살라고 낳았는데 죽으러 가는구나”

어머니는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만 본다.

“이 어린 것이 살아올 수 있다면···.”

무사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린 지 두 달 만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1914년 10월 30일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어머니는 오열을 한다. 아들의 나이 겨우 열여덟.1차 대전과 2차 대전, 전장의 난무하는 총탄은 니편 내편을  가리지 않는다. 청춘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청년과 그 아들을 앞세운 불행한 부모들만 만들 뿐···. 시대나 개인이나 모두가 불행했다.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1867~1945년)의 작품 〈피에타 piera〉는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온 자식을 어머니는 품에 안고 놓지 못한다. 아들은 마치 따뜻하고 안전한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웅크린 채로 어머니의 무릎 사이에 기대어 있다.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슬픔은 끝이 없다. 시대의 억압과 개인의 고통으로 힘겨운 삶을 인내하여야만 하는 눈물겨운 모성애가 전해온다. 어린 자식을 가슴에 파묻은 콜비츠는 예전의 붓을 버리고 칼을 잡았다.

목판화 특유의 흑백의 단순함과 강렬한 터치감은 고통과 절망의 떨림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목판에 칼질하며 전쟁의 상흔과 개인의 아픔을 하나하나 새겼는지도 모른다. 달동네에서 평생 병든 사람들을 무료 진료하였던 의사인 남편 카를 콜비츠와 뜻을 같이하여, 가난한 노동자와 삶을 함께 나누었다. 그녀는 늘 빈곤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굳건히 그려온 사회 참여 예술가였다.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느끼며 함께 분노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라는 공동체적 감성이 작품마다 가득하다. 우리 곁에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자식을 허망하게 잃은 슬픔을 아직 보상받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적 연대감이 더욱더 절실하다. 더 이상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몰을 지켜볼 수가 없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윤아/센터 기획편집위원


슬픔은 예술

by 센터 posted Jul 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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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1.jpg 명화에세이2.jpg

*부서진 기둥 1944 oil on masonite
푸른 하늘과 메마른 사막에 홀로 서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온몸에는 못이 박혀있고 척추을 대신해  그리스식 기둥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그런 그녀의 몸이 갈라지지 않게 하얀색 코르셋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이는 부서진 척추의 고통을 몸에 박힌 못으로 나타내면서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보
여주고 있다. 메마른 사막은 여러 번의 수술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받은 그녀를 나타낸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생각 속의 디에고 1943 oil on masonite 
이어지는 짙은 눈썹, 당당한 눈빛과 육감적인 입술, 그리고 화려한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우아나를 입고 있는 이 자화상은 칼로의 강박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마 한복판에 디에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결국은 두 존재가 하나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 47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50여점의 작품을 남겼고 그중 다수는 자기 자신을 예술적 주제로 삼은 자화상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주 외롭고 또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던 칼로는 열여덟 살 때 또 하나의 불행을 맞이한다. 전차와 버스가 부딪치는 큰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몸은 몇십 번의 수술과 망가진 척추 때문에 평생 석고 지지대를 입고 사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 서 있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자신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칼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뜨거운 사랑을 한다. 멕시코의 최고 민중화가로 칭송받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예술가로서의 교감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스물한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정치적, 예술적 동지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세 번의 유산과 디에라의 샘솟는 바람기는 여성과의 잠자리를 커피 한 잔 마시듯 여기고, 급기야 그녀의 여동생과 애정 행각을 벌여 칼로에게 영혼이 찢겨나가는 고독감과 상실감을 평생 동안 안겨주었다. 마침내 이혼, 그리고 이듬해 재결합. 하지만 여전히 둘 사이는 삐그덕거렸다. 남편과 아이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그녀는 그림으로밖에 토해낼 수 없었다.


그녀의 그림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한 가장 정직한 이야기였다. 칼로의 삶은 줄곧 망가져가는 육체의 고통과 사랑의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예기치 못한 시련과 절망을 경험으로 자신 내면의 풍경을 치열히 그려야 했던 이유는 치유의 힘을 얻기 위함이었으리라. 칼로에게 슬픔은 삶 전체를 지배한 떼버릴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것과 함께 품고 살아가야 함을 삶이 가르쳐 주었다. 인생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늘 그녀에게 찾아오는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예술이 되었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순수한 휴머니스트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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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작품 군상.jpg


이쾌대(1913~1965)의 대표작품 〈군상 4-조난〉과 마주한다. 스케일, 구도, 형상 모든 것이 한국 근대화단에 보기 드문 작품으로 생소한 울림이 느껴진다.

화폭 배경에 구름기둥이 폭발하듯 솟아오르고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벌거벗은 군상들.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과 여인 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돌로 내리치고 물어뜯으며 싸운다. 인물의 묘사와 표정이 살아있다. 울부짖다 지쳐 쓰러진 여인을 보듬어 안고 서로 의지한 채 앞서 나가는 세 명의 주인공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이 아닌 순수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구 낭만주의 형식을 담아 현실의 기운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힘’이 느껴진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와 해방 직후 이념분열로 갈등과 모순과 혼란의 어두웠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쾌대처럼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그린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않다.

월북화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이쾌대는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한국화단에서 그야말로 잊혀진 화가였다. 이렇듯 냉전 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40여 년 동안 아내 유갑봉 여사의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작품들이 1991년 신세계미술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당시 화단에선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아내의 눈물겨운 보존 노력이 우리 미술사에 큰 영광을 가져다준 셈이다.


‘한식이, 한민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1950년 11월 11일 시대의 아픔으로 국군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끌려온 이쾌대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편지를 몰래 인편으로 아내에게 전달한다. 2년 후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끝내 가족 곁으로 가지 못했다.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그가 택한 곳은 북한이었다. 가족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던 이쾌대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왜 북한으로 향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다만 존경하던 친형 이여성(독립운동가, 기자, 역사화가)이 월북하면서 따라갔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가족을 버릴만한 중요한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형제는 곧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이쾌대의 월북행을 단순히 이념 문제로만 바라보기에 어렵다. 아마도 곧 통일이 이뤄지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제자인 남경숙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46년 말 북한에 다녀오신 선생께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가 아니였을까?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 전시정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
 2015.07.22(수)~11.01(일)
 덕수궁 미술관
 관람료 무료
 www.mmca.go.kr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by 센터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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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미인도.jpg 천경자 슬픈전설.jpg

위작 논란의 그림 < 미인도>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미인도〉 그림 속 여인인 나는 무척 슬프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이 나에 어머니라고 하는데 그 분은 나를 강하게 부정하신다. 유전자 검사결과 친모라고 판정을 받았는데도 “자기가 낳은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냐”며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항거로 절필선언까지 하셨다. 국내 미술계 최대 위작 시비의 주인공인 나는 그녀의 슬픈  그림자가 되었다.  위작 논란이 있은지 8년이 지난 1999년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한 장본인이라며 내 출생의 비밀을 밝혀주신 분이 나타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다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지만 ‘진품’이라는 감정이 번복되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작품이 아니다”라며 그녀는 여전히 나를 거부하고···. 나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슬픈 전설로 따라 다닌다.


위작 스캔들로 심신이 지친 그녀는 1991년 훌쩍 큰딸이 있는 뉴욕으로 떠난 후 8년 만에 잠시 귀국해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며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통크게 기증하고 다시 떠났다. 이후 노년에 불어닥친 병마 때문인지 한국과는 연락을 완전히 끊은 채 칩거 생활을 했다.


올 가을 천 화백의 미스터리한 때늦은 부고 소식 역시 한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의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91페이지로 결말을 맺었다. 어쩌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의 인생에 어울리는 엔딩인지도 모르겠다. 1977년에 그린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0대인 그녀가 22세를 기억해낸 자화상이다.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던 스물두 살의 천경자 홀로 아이를 낳고 단칸방에서 탱탱 부어오른 젖가슴을 부여잡고 몸 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슬픔을 그림으로 토해냈으리라. 


머리 위에 뱀 네 마리가 오글거리며 가시 면류관처럼 씌워져 있고 가슴에는 가시 없는 장미 한 송이가 있다. 말문을 닫아버린 차가운 입술과 창백한 얼굴에는 한기가 돌고 움푹 패인 눈은 덤덤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림처럼 그녀는 운명에 당당히 맞선 삶을 살았다. 아니 운명에 도전하려는 섬뜩한 자의식 마저 느껴진다.


그녀의 슬픈 전설은 시대의 벽, 현실적 장애에 맞서 여성으로, 예술가로, 자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국의 또 하나의 역사였다. 그림 속 여인은 슬픈 눈길로 덤덤하게 나를 응시하며 말을 건다.

“당신의 전설은 무엇인가요?  그 전설 또한 슬픈가요?”

대답을 찾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먼저 보낸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기적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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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The Census at Bethlehem.jpg

베들레헴의 인구조사The Census at Bethlehem 1566년, 목판에 유채, 116×164㎝, 안트웨르펜 왕립미술관


그림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5경∼1569)의 대표작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인구 조사의 명을 내리자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에 입성한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날 베들레헴의 성경 속 풍경입니다. 그럼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그림 속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볼까요?


낡은 오두막집 앞 창가의 한 남자는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고 인파가 무리 지어 있습니다. 아마도 세금을 내는 사람들 같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봇짐을 지고 걷는 고단한 사람들,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땔감을 나르는 사람들, 불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 군데군데 존재감 없는 군상들은 거칠고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추위에 떨고 삶에 지친 어른들 밑에서도 아이들은 마냥 겨울을 즐기고 있습니다.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는 아이들, 바구니를 썰매 삼아 타는 아이들. 역시 아이들은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조연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는 놀라운 기적이 숨어 있었습니다. 전경 중앙에 푸른 망토 차림에 나귀를 탄 만삭의 여인과 그 앞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그들은 묵을 숙소를 찾지 못해 결국 마구간에 여장을 풀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곳 말구유 속에 아기 예수를 낳았던 것입니다. 사실 성모 마리아 또한 왕도 공주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나사렛 처녀일 뿐. 오히려 병든 노인의 딸이고, 고단한 목수의 약혼자이며, 자신의 몸 하나 의지할 곳 없어 마구간에서 새 생명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여인의 몸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은 군중 속에 묻혀 아무도 마리아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거룩하신 역사가 이 땅 낮은 곳에서 아기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놀라운 기적을 우리는 어쩌면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편견

by 센터 posted Ma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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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과 페로.jpg

시몬과 페로 Cimon and Pero(daughter breastfeeding her father in prison) 1630 / oil on canvas / 155 × 190 cm


작품은 페테르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시몬과 페로 Cimon and Pero>이다. 그림은 우리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감옥 안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죄수인 늙은 남자는 새하얗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젊은 여자의 품안에 안겨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젖을 빨고 있다. 설상가상 철창 바깥에선 간수 둘이 놀란 표정으로 망측한(?) 상황을 훔쳐보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의 관계는 뜻밖에도 연인 사이가 아닌 부녀지간이다. 로마시대에 ‘시몬’이란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혔다. 시몬은 굶어 죽게 하는 형벌인 아사형을 받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딸 페로는 감옥으로 면회를 갔다가 너무나 굶주린 탓에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를 보고서 자신의 젖을 물려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시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페로의 효심에 감동받아 시몬을 풀어준다는 것이 그림 속 숨은 사연이다. 사실 이 그림의 내력과 의미에 대해서는 별별 설이 나돌고 있지만···.

로마의 역사가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책 《기념할 만한 행위와 격언들》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여러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고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이다.

보기에 따라, 해석하기에 따라 또는 생각하기에 따라 남녀의 애정행각이나 불편한 근친상간으로 비화할 수도 있고 가족 간의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는 이 그림을 사전 정보 없이 처음 접했다면 과연 우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 마냥 이상야릇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림은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눈으로 본 것만이 귀로 들은 것만이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이 진리를 자주 잊는다. 그래서 우리네 삶에 종종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전시정보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전 2015.12.12~2016.04.10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성인(만24세 이상) 13,000원 대학생/청소년 11,000원
http://www.rubens2016.com


그가 그립다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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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황소.jpg

황소/종이에유채/32.3*49.5cm/1953년무렵


길 떠나는 가족.jpg

길 떠나는 가족/종이에 유채/29.5*64.5cm/1954년


이중섭 그림.jpg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종이에 잉크와 유채/20.3*32.8cm


외딴섬 외롭게 버려진 누추하고 작은 집, 세상 절벽 끝에 몰린 가족이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방 한 칸에는 궁핍과 고독 그리고 애틋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이 집 안주인은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 여인으로 한국 이름은 ‘이남덕’이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편 이중섭이 아내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화가 이중섭을 기억할 것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작가로서 초중고 미술 교과서에 붉은 색감의 대담하고 거친 선묘가 특징인 그의 작품 <황소>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시대는 어둡기만 했지만 청년 이중섭에게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일본 유학 중 숙명처럼 한 여인을 만나 열애를 하고, 그의 연인 마사코 또한 ‘사랑’이란 두 글자만 품고 겁도 없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의 아내 남덕이로 살아간다. 이들은 아주 잠시 행복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들의 행복을 불행으로 바꿔버렸다.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혼돈 속에 전쟁과 대면하면서 부산과 제주도를 오가며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다. 남덕은 폐결핵에 걸리고 아이들마저 병이 들어 결국 일본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중섭은 궁핍과 고독에 맞서 가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창작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결국 4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쓸쓸히 갈무리했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데 그림의 정서는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으로 경쾌하고 해학적이다. 종이 한 장 살 수 없어 담뱃갑의 은색 속지에 그릴 수밖에 없었던 옹색함과 비루함 속에서도 그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오롯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애달픔과 그리운 가족에 대한 향수, 부재의 갈구가 바로 화가 이중섭에게 창작 활동의 원천을 제공해 주었으리라. 그림의 어원이 바로 그리움이니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그의 안타까운 삶과 사랑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작품은 세월의 무게만큼 고스란히 감동으로 다가온다. 더할 나위 없이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그리고 못 견디게 자식을 보고파했던 아버지 이중섭. 

나 또한 오늘, 그가 그립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화가’가 아닌 ‘배우’가 죽었다

by 센터 posted Jun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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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jpg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이미지는 커다랗게 부릅뜬 눈에서는 오만과 자신감이 엿보이며

둥그렇게 꼬아 올린 우스꽝스런 콧수염의 익살맞은 표정은 마치 코미디언 같은 달리의 모습이다. 


명화1.jpg

마치 피자 반죽 판이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시계들과 죽은 말인지, 아님 사람의 반쪽 얼굴인지 모를 도상,

1931년 작품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그의 대표적 이미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하면 제일 처음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마치 피자 반죽 판이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시계들과 죽은 말인지, 아님 사람의 반쪽 얼굴인지 모를 도상, 1931년 작품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그의 대표적 이미지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70~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대개 이 이미지가 미술교과서에 실려서 시험문제 출제용으로 외우곤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만약 우등생이었다면, 달리는 ‘초현실주의’이며, ‘프로이드’의 열렬한 추종자로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화하면서 천재성을 발현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달리의 회화 작품은 아연할 만큼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사물들의 정확한 표현, 재현된 내용 안에서의 일반적인 경험, 그리고 상식으로는 전혀 감지하기 어려운 비현실성의 혼합 등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달리가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한 기간은 고작 5년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초현실주의의 대표주자로 생각한다. 1939년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대장격인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제명당하고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된다. 이는 그가 히틀러와 파시즘을 지지한 것 (달리는 항상 이를 부정했다고 한다)과 그칠 줄 모르는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달러에 굶주린’ 화가로 비아냥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달리를 가장 싫어했던 큰 이유는 아마도 그가 값싼 인기와 부를 얻기 위해 벌였던 괴상한 자기선전과 갖가지 기행과 엉뚱한 스캔들에 기인했을 것이다.


화가였던 달리는 머리의 꽃장식과 귀걸이, 엽기적인 콧수염 등 얼굴 치장에 공들인 모습만 보더라도 자신이 곧 ‘예술’이자 ‘달리’임을 온몸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가 있다. 말년에 자신을 모델로 찍은 여러 사진 작품들을 고가의 로열티를 받기도 했는데 그의 몸으로 한 예술은 또 다른 창작 작품이었던 셈이다.

사실 달리가 죽자 많은 예술가들은 ‘화가’가 아닌 ‘배우’가 죽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예술가들의 질투 섞인 말이겠지만 진정한 예술가의 생애를 달리는 제대로 살았던 것 아닐까?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또 다른 ‘절규’가 들린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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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jpg ◀〈절규〉1893 | 마분지에 유화 파스텔 카세인 | 91*73.5cm 배경의 물 흐르는 듯한 곡선의 형태는 평면감을 돋보이게 하는 반면 기울어진 사선으로 표현된 길은 극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 휘어진 몸은 흔들리는 형태의 배경으로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여인의 머릿결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곡선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어떤 위험의 상징(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두 번의 배신을 당한 후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혐오로 발전했다고 해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이었다.


2030 젊은 세대들이 한국의 현실을 ‘헬조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신계급론으로 대변되는 ‘수저론’이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구조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조어는 개인의 노력보다 계급이 우선이라는 우리 사회에 대한 자조와 비난 그리고 비판이 담겨 있고 이 비난과 비판 아래에는 불안과 공포가 깔려있다.


헬조선, 수저론은 우리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는 데 또 다른 키를 제공한다. 청소년들은 명문 대학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입시불안을, 청년들은 취직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취업 불안을, 중장년 세대는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고용 불안을, 그리고 노인들은 불행한 노후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빈곤 불안을 갖게···.언제부턴가 불안이라는 감정이 국민 다수의 삶을 짓누른다. 


불안과 공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The Scream, 1893)’이다. 해질녘 하늘에 걸린 구름이 붉은빛으로 너울거리며, 검푸른 대지와 바다 역시 요동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의 주인공은 두 손을 귀에 댄 채 공포에 질려 떨고 있다. 떨어져 걷는 두 친구의 무심한 듯한 모습이 불안과 공포의 느낌을 더욱 배가시킨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아버지는 심한 우울증과 강박적인 종교관으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는 누이와 동생의 죽음까지 바라보았던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트라우마가 많은 삶 때문이었을까? 그의 작품엔  자신의 상처받은 불안한, 두렵고 공포스러운 삶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 발작성 공황을 동반하는 광장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작품은 여전히 또 다른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이미 결정된, 상시적인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는 사회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연인의 변심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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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angelo Pieta1.jpg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피에타〉

1499 | 높이174cm | 성 베드로성당, 바티칸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그림 또는 조각상으로 청년 미켈란젤로의 1499년 작품 피에타는 신의 손길인 듯 정확한 인체 비례와 대칭구도로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Michelangelo Pieta2.JPG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론다니니의 피에타〉

1564 | 높이 195cm ㅣ스포르체스코 성, 밀라노
미완성으로 남겨진 〈론다니니의 피에타〉 앞에서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과 신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평생을 줄다리기 하며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1564년 2월 16일, 대리석을 조각하던 망치 소리가 멈췄다. 〈론다니니의 피에타Pietà Rondanini〉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가 죽기 전날까지 매달렸던 최후의 미완성 작품이다. 이때 그의 나이 ‘아흔’. 누구의 의뢰도 받지 않은 작품으로 오로지 자신의 무덤에 놓고 싶었던 열망 때문이었다.전통적인 피에타의 도상은 성모의 무릎 위에 누워있는 죽은 예수의 구도가 대부분인데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방금 숨을 거둔 채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와 자식의 시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리아의 모습이 마치 한 몸처럼 포개져 수직적으로 배치한 낯선 피에타다. 작품은 미완성이라 예수와 마리아 옆에 예전에 다른 조각을 하다가 내버려둔 다른 이의 팔부분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의 다리만 제대로 된 형태로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을 뿐, 다른 부분은 형체조차 불분명하고 대리석 표면에 거친 정과 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구세주이나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잃은 마리아의 형체는 아직 돌 속에 머물러 있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못한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래서 슬픔은 돌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슬픔의 감정은 오히려 처절하게 다가온다.당시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시대 역시 동성애는 불경스러운 행위로 만약 성 행위가 발각되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과 신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그는 평생 줄다리기를 하며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임종을 끝까지 지킨 그의 연인 톰마소에게 사랑의 고백 대신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켜 달라”는 기독교적 믿음만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을 거두고···. 연인의 변심이었다. 그 변심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바라보는 톰마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예술은 스스로 시대를 말한다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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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y-leading-the-people.jpg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

 캔버스에 유채 / 260×325㎝1830년 / 루브르 미술관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Liberty Guid-ing the People〉 (부제:The 28th July)는 프랑스 민주주의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즐겨찾기로 인용되는 작품이다. 1886년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는 미국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 그녀를 꼭 닮은 여인이, 이제는 깃발 대신 횃불을 밝히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했다.


이 그림은 1830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사흘간의 시민혁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시민들은 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맨주먹으로 절대 권력에 맞서 깃발을 들었다. 포연이 자욱한 현장에 우뚝 올라선 한 여인이 유독 눈에 띈다. 그녀는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맨발로 한 손엔 장총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삼색기를 높이 휘날리며 시민들을 이끌고 있다. 사실 이 여인은 실제 인물이 아닌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로부터 영감을 받아 표현된 자유의 여신이다.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여신의 몸에 때가 많이 끼어 품위가 없다는 둥 겨드랑이에 털까지 보여 상스럽다는 둥 비난을 위한 비난마저 제기되었지만 자유를 얻고자 하는 싸움에 외적인 아름다움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들라크루아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자유를 향한 의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여인의 주위에는 다양한 계층의 남자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다. 여인의 왼쪽 실트모자에 정장을 입고 총을 움켜진 신사는 부르주아 계급으로 들라크루아 자신이라는 말도 있다. 신사 뒤에 셔츠를 풀어헤치고 멜빵바지를 입은 남자는 노동자다. 바로 그 밑에는 군인도 보인다. 그리고 여인의 오른쪽 양손에 총을 들고 따르고 있는 모자 쓴 꼬마도 역시 하층민이다. 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구두닦이 소년은 이 꼬마로부터 영감을 받아 등장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을 등장시켜 혁명이 민중의 뜻이고 혁명이 역사의 순리라고 들라크루아는 말한다.


민중은 수많은 시체들을 넘고 넘어 진격하고 있다.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시민군과 정부군의 시체를 그려 혁명의 참담함과 그리고 이들의 희생 위에 혁명이 세워졌음을 강조하고 애도하고 있다.


2016년 11월 서울은 촛불로 장악되었다. 광장은 분노와 심판이라는 두 감정밖에 없다. 촛불은 혁명의 시간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씩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230만이 든 촛불은 세계 유례없는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중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예술인가 혐오인가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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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jpg

올랭피아/1863년/캔버스에 유채/130.5x190cm/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는 현실의 여성을 그렸다. 부끄러움 없이 도발적인 표정, 머리의 꽃 장식, 굽 높은 신발, 끈으로 장식한 목덜미. 19세기 파리의 전형적인 매춘 여성 ‘올랭피아’였다. 



더러운잠.jpg

더러운 잠/2017년/캔버스에 혼합재료

나체의 박근혜 대통령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그 옆에 흑인 하녀 대신 최순실이 주사기 꽃다발을 들고 있다. 인물들 뒤에는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와 ‘사드(THAAD)’라고 적힌 미사일도 보인다.  


명화1.jpg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작품 〈올랭피아Olympia〉의 벌거벗은 여인은 수치심이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건조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이와 당당히 마주한다. 나체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모습의 비너스가 아닌 현실 속의 여성으로 매춘부인 빅토린느 뫼랑Victorine Meurent이다. 당시 이제껏 봐 왔던 미술 작품과는 다르게 적나라하고 도발적인 누드 작품이었기에 사회적 충격과 격렬한 비난으로 대중의 분노를 샀다. 150년 지난 후 다시 이 작품을 패러디한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또한 한국 사회의 정치 논쟁 한복판에 있다. 


〈더러운 잠〉의 주인공은 비너스도 창녀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로 세월호 참사 7시간에 대한 그녀의 부재를 풍자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놓고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보수단체는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인격 모독 행위’라며 ‘표창원 네 아내도 벗겨주마’라는 푯말을 버젓이 들고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은 기자회견을 했다. 성희롱을 ‘비판’하는 건지 ‘악용’하는 건지 속내가 뻔히 보인다. 설상가상 극우 성향(박사모 회원)의 한 시민이 전시 중인 〈더러운 잠〉을 찢고, 밟고, 부수며 훼손시키고 말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구 회화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누드란 특권계급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화이다. 그림 소유자의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였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더러운 잠〉은 분명 외설적인 여성혐오의 불경스러운 표현물이 맞다. 그러나 〈더러운 잠〉을 예술로 볼 것인지, 권력자인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볼 것인지를 논하기엔 쉽지 않은 문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예술의 함의가 꼭 정의로워야 하는지, ‘외설’이나 ‘혐오’의 코드가 들어간 예술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사실 〈올랭피아〉를 통한 풍자와 패러디는 흔하디흔해 빠졌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과 총리를 발가벗겨 내놨지만 불경이니 혐오니 하는 언설이나 작가에 대한 위협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훼손이라는 야만적인 폭력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든 풍자화는 존재한다. 결국 그림의 예술적 잣대는 받아들이는 자들의 몫일 것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의심하라

by 센터 posted Apr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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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rahison des images1.jpg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은 단순하면서도 참 쉬운 그림이다. 캔버스 안에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한 극사실적인 짙은 갈색의 나무 파이프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파이프 밑에 프랑스어로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글이 그림을 부정한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림은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던졌다.


다시 작품에 그려진 대상을 천천히 본다. 분명 파이프가 맞다. 하지만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그 자체로 파이프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실제 이 파이프에 불을 지펴 담배를 피울 수 없는, 단지 물감으로 색을 입힌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작가가 아무리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 단어 ‘파이프’ 역시 사물을 지시하는 단어일 뿐 파이프라는 본연의 존재는 아닌 것이다. 언어란 단지 A를 B로 부르기로 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일 뿐 본질은 아니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진다.


그림 앞에 다가가는 순간 익숙함이 낯섦으로 바뀐다. 이미지와 텍스트 간에 생기는 모순된 어법이 마그리트 미학의 핵심이다. 당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물체를 뜻밖의 장소에 갖다 놓거나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을 조합하거나 배치하여 익숙함이 낯설음으로 바뀌는 새로운 시각언어를 만들었다. 마그리트 역시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을 예상치 않은 배경에 대치하거나 크기를 왜곡시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런 이미지 배반을 일으켜 평소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통념, 사물, 상식, 논리에 물음표를 던져 보라고 권유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각은 오감으로 전해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 별다른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과연 ‘사실’은 정말 진실일까? 마그리트는 우리가 사실로 규정해 의심하지 않았던 ‘진실’이 어쩌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의 한계일 수 있으니 한번 쯤 모든 것을 열린 시선으로 의심을 품어보란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진실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비극적 서사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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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jpg

무제 Untitled, 1960~1961,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Tate Modern Museum, London

“작품에는 어떤 설명을 달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_ 마크 로스코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 방은 어둡고 적막하다. 그의 그림과 마주한다. 고요한 침묵만이 흐를 뿐. 하지만 이 침묵이 평정심을 찾아주지는 않는다. 그저 큰 화면 가득 쓱쓱 물감을 펴듯 발라 내린 색채덩어리, 단순한 면과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로스코는 자신을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에 불편해 했다. 관람자의 눈에 작품들이 ‘추상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는 단호하게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인생의 비극을 그린 서사다”라며 인간의 형상에 대한 묘사가 단순 모양과 상징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차별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안과 가난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 고통이 그의 작업 밑바닥에 깔려있는 비극적 서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 비극적 감정은 그림을 그릴 때 늘 나와 함께했다”라고 고백했다. 


로스코의 명성이 화단과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이름을 타기 시작하면서 1958년 캐나다 주류회사인 시그램은 맨해튼에 신사옥을 완공하자, 1층 ‘포시즌즈’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할 회화작품을 로스코에게 주문했다. 그림 아홉 점을 거액에 계약하고 정작 그림이 완성되었지만, 고급 레스토랑에 비싼 음식 값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며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주고받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경건한 삶으로 안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계약 철회를 함으로써 자기가 부여한 작품의 순결성과 화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후 작품을 완전 단색 처리하거나 윤곽선이 선명한 검은색 사각형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에 작업했던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로스코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이 어두운 색채 실험을 계속했다. 음울한 분위기는 그의 심각한 우울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한때 맨해튼에서 배를 굶주리며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미국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가 되었지만 1970년 2월 예순일곱이란 나이에 그만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 추상표현주의 선구자로 불리는 로스코의 생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자나 잘 나가는 자나 모두 저마다 인생의 십자가는 힘겹기만 하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곧 로스코의 슬픔이 위로가 된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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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rnica2.jpg

게르니카Guernica  1937, 캔버스에 유채, 349.3×776.6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폭력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MASSACRE-IN-KOREA.jpg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e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주민의 25퍼센트에 달하는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항할 무기 하나 없이 맨손에 알몸이다.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은 공포와 체념에 간신히 버틸 뿐이다. 얼굴을 투구로 가린 채 경직된 자세로 선 병사들은 그들을 제압하려고 총과 칼을 겨누고 있다. 감정 없는 로봇 같은 군인들의 야만적인 모습에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림의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그 다음 장면에서 분명 학살을 암시한다. 이 서사는 새드 엔딩Sad Ending으로 끝날 것이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간판스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이 작품에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e)’이라는 제목을 부쳤다.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지만,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라면, 당연히 미군이 자행한 학살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은 공산당이나 자유진영당 모두에게 혹평을 들었다. 공산당은 학살을 당하는 피해자가 한국인인지, 학살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미군인지 즉, 학살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며 비판했고, 자유진영당에서는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처럼 그려냈다며 반미 선전물이라고 비난했다. 이 그림이 발표되고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명성에 흠집이 생겼고 미국에서는 피카소 입국을 거부해 한 번도 미국에 가지 못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피카소 자신은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보다는 전쟁 자체가 가져오는 참혹한 현실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 했을 뿐이다.

에라스무스의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글귀에 다시 한 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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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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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이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가?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19세기 중엽은 땅에 떨어진 낟알조차도 함부로 줍지 못하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던 참담한 시대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은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모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던 소작농들의 피폐한 삶을 보고 느낀 대로 그린 ‘사실주의’ 그림이다. 


작품은 당대에 주목받지 않은 여성, 그리고 그들의 고된 노동과 삶의 이야기다. 그저 묵묵히 낟알을 줍는 데 몰두하고 있는 표정 없는 여인네들의 검게 탄 얼굴과 거칠고 투박한 손, 그리고 굽은 어깨는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말한다. 그러나 이 일하는 여인들에게서는 결코 비천한 모습이 아닌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이삭 줍는 여인들 너머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추수단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말 탄 지주의 모습은 이삭 줍는 여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당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왜곡된 평가를 내놓았다. 가령 〈이삭 줍는 여인들〉을 서정적이면서 드라마틱한 화면 구성으로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며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밀레를 위험한 인물(블랙리스트)로 생각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의 동지로 여겼다. 하지만 밀레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 어떤 이념도 정치도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농민의 고된 생활을 그대로, 그러나 어떤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온화한 서정과 일종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한 것이었다. 


밀레는 인간을 이상적으로 미화하지 않았다. 오직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원천으로 삼은 인간은 정직하고 존엄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인간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이 그림은 감동적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미움 대신 용서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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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jpg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년, 캔버스에  유채,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큰 아들은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품은 아버지에게 원망이 가득하다. 과연, 형의 분노는 당연한가? 소위 모범적으로 살아온 형이 피붙이인 동생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보면서 모범적인 삶이 좋은 인간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범적인 인간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일 뿐…. 큰 아들은 자기 공로에만 집중하여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배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했던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장 20절, 24절) 


작은아들은 찢어지고 해진 누더기 옷을 걸친 채 한쪽 구두는 뒷굽이 닳아 없어져 맨발을 드러내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몇 해 전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해 미리 받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다 잃고 헐벗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비난하기는 커녕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해 주지만 큰아들은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다. 용서를 구하는 아들 어깨에 다정하게 감싼 아버지의 두 손이 아주 특별하다. 한 손은 거친 남자의 손으로, 다른 한 손은 여린 여자의 손이다. 왼손은 모든 시련을 해결해주실 강한 능력의 아버지 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어머니 손으로 거룩하신 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은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로 유명한 이야기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내용이다. 


〈돌아온 탕자〉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작품으로 그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두 아들, 두 딸, 두 아내 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보냈다. 정부였던 여인에게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를 당해 결국 파산하고 빈민촌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 재산, 명예, 권력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10여 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인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처절한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두려웠는지 모른다. 마침내 생을 마치고 신 앞에 선 자신이 바로 ‘돌아온 탕자’였기 때문이다. 늙은 화가는 죽음 앞에서 ‘용서’를 깊이 묵상하며 그린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 불편하고 힘들지만 마음속에 깊이 새겨있던 ‘미움’이라는 단어를 지워내고 ‘용서’의 단어를 새겨본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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