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by 센터 posted Apr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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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jpg

 

내 짧은 미국 생활의 경험상 미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종주의는 나쁘다고 동의한다. 본인이 스스로 인종주의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분명 인종주의자임을 부인하지만 차별이나 혐오 표현을 거리낌 없이 하는 이들을 일상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미국에서 인종 차별 문제는 흑인 대 백인이라는 대립 구도로써 아시아인의 차별과 혐오는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다시 ‘아시아인 혐오’의 등장은 미국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코로나19를 ‘중국 우한바이러스’라 부르면서 대선에서 주요 지지층인 백인 우월주의자를 결집하려는 선동과 일부 언론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을 중국 탓으로 돌리면서 아시아인 혐오에 부채질했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 증오 범죄의 표적이 되어 폭행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길거리, 지하철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일러스트 작가 R. 키쿠오 존슨R. Kikuo Johnson이 그린 4월 5일자 《뉴요커NEWYORKER》의 표지 삽화다. 제목 ‘지연된Delayed’은 모녀 사이로 보이는 아시아계 어린 소녀와 여성이 뉴욕 지하철 플랫폼에서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초조하게 지하철을 기다린다. 엄마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는 전방을 바라보고, 어린 딸은 엄마가 놓치고 있는 다른 주변을 살핀다. 그림을 보는 내내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경계심과 두려움 사이에 놓인 모녀의 몸짓은 미국 내 아시아인을 겨냥한 증오 범죄의 공포 속에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녀가 안전하게 무사히 집에 도착하기를 기도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첫 조항은 ‘모든 인간은 존엄과 권리를 지니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명시하듯 인종 차별은 국제 범죄다. 누구도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위협을 받아선 절대 안 된다. 

너와 나, 우리 모두 존중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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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by 센터 posted Feb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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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jpg

 

 

내가 생일 파티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케이크와 축하 노래, 생일 선물 등을 설명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케이크 꽂는 양초의 수도 하나 더 늘어난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 하죠? 축하란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건데, 나이를 먹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나이를 먹는 데는 아무 노력도 들지 않아요. 나이는 그냥 저절로 먹는 겁니다.”

내가 물었다.

“나이 먹는 걸 축하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엇을 축하하죠?”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요.”

 

- 말로 모건의 책 《무탄트 메시지 :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중에서

 

어릴 적 생일은 존재 그 자체를 축복받는 날이었다. 젊을 적 생일은 내 청춘이 장미 빛 인생으로 사랑과 행운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날이었다. 이제 ‘중년’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지금의 생일은 가족의 건강과 신의 지혜로 채워지길 기도한다.

우연히 10년 전 사진을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변해버린 내 모습, 많이 늙었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나이 불혹不惑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고 딴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를 마주했지만 여전히 삶의 무게는 버겁고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흔든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아지길···. 조금 더 괜찮아지길···.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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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예술이다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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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jpg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실크스크린, 1962년, 테이트 모던 뮤지움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화면에 반복적으로 찍어 놓았지만 모두 똑같지 않다. 다채로운 색상과 이미지의 윤곽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의 세계가 느껴진다. 앤디 워홀은 광고디자인에 사용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여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대량 생산으로 명성과 부를 함께 이루었다.


마릴린 먼로의 얼굴 사진 한 장을 단순한 이미지로 변환 후 반복적으로 찍어낸다. 복제된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바라보면 모두 똑같지 않다. 다채로운 색상과 이미지의 윤곽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의 세계가 느껴지는 작품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는 현대 미술 ‘팝 아트Pop Art’의 전설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제작했다. 


1960년대 미국 사회는 대량 생산과 유통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렸고 이때 등장한 팝 아트는 상업과 예술을 혼합하고 고급 미술과 대중 미술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예술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했다.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을 내세운 팝 아트는 위인보다는 상품적 가치를 가진 스타나 유명인을 화면 속에 등장시켰다. 


워홀은 판이 완성되면 단시간에 수십 수백 장을 찍어낼 수 있는 판화 기법 중 하나인 실크스크린을 활용해 하나의 그림을 단순한 디자인으로 변조해 다양한 색상으로 동일한 이미지를 대량 생산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 붙이거나 복사했으며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선포하고, 작품은 공장에서 동일한 상품을 기계가 찍어내듯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졌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리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이미지도 그의 명성과 부도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그는 평생 부와 명성을 좇아다녔다. 


“돈 버는 일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잘 버는 사업이 최고의 예술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모든 것을 예술이라고 보았다. 워홀은 자본주의 구조 내에서 예술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포착한 작가로서 자본주의 속도와 호흡을 맞추며 소비사회의 보편적 이미지로 자본주의적 가치를 드러내놓고 찬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워홀은 그야말로 자수성가하여 이민 노동자의 딱지를 떼고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아픔을 위로하다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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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열차.jpg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 삼등열차The Third-Class Wagon / 캔버스에 유채, 1862년, 65.4x90.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삼등열차〉 캐리커처 느낌의 인물 표현 방식과 구불구불한 선으로 그림에 생명력이 느껴진다. 강렬한 명암 대비로 삼등칸 객실의 암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여 도시 빈민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등열차.jpg

〈이등열차〉 역시 도미에가 그린 그림이다.


일등열차.jpg


〈일등열차〉 일등칸 객실 안에 두 쌍의 부부, 넷뿐이다. 모두 우아한 모습이다.



흔들리는 열차의 삼등칸 객실, 엄마 젖을 먹고서야 겨우 잠든 아기를 보듬고 있는 젊은 여인, 바구니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할머니, 그 옆에 어린 소년이 지친 듯 쓰러져 잠을 잔다. 삶의 고단함이 객실의 공기처럼 무겁기만 하다. 다른 승객들은 서로 엉겨 붙어있지만 우울한 침묵만 흐를 뿐···. 무관심하다. 삼등칸 객실 모두가 그녀들의 삶처럼 가난한 생활의 굴레 속에 서로를 위로할 여력이 없다. 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가 1862년에 그린 〈삼등열차The Third-ClasWagon〉 풍경이다.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소외된 여성들에게 작가는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궁핍한 생활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가난 때문에 거리의 화가로 나섰던 1830년 프랑스는 매우 혼란스러운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도미에는 당시 세태를 비판하는 정치풍자 만화를 그리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도미에가 잡지나 신문에 실은 삽화Illust들은 대부분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 부패를 가혹하게 묘사했다. 적나라한 그림들은 가진 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국 국왕 모독죄로 고소되어 6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다. 수감 생활 후 도미에는 가난한 민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횡포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한층 더 신랄해진 풍자로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이처럼 모순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오직 민중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도미에에게 작업은 자신의 아픔을 위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뭐 때문에 제일 많이 죽는지 아니? 사람은 가난해서 죽는다. 가난해서 병이 있어도 치료를 못 받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험한 일하다 사고로 죽고, 가난이 고통스러워 지 목숨 지가 끊고···.” 

JTBC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 철거를 앞둔 동네 뒷골목에서 이주 노동자, 신용불량자와 같은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불법으로 약을 팔고 치료를 해주는 할머니의 이유 있는 대사였다.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 빈곤한 노인,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 편견 앞에 작아지는 성 소수자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자주 아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해피엔딩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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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jpg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1/1653의 수산나와 두 노인Susanna and the Elders

1610년, 캔버스에  유채, 170 x 121cm, 바이센슈타인 성


여러 화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수산나와 두 노인〉을 그렸는데, 화가들의 ‘인권 감수성’에 따라 표현과 메시지가 다르다. 이탈리아 여성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겁탈’이라는 주제로 묘사했다. 그녀가 17세 때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오명과 치욕감은 이후 그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산나의 얼굴에는 싫다는 빛이 가득하다. 겁에 질린 수산나의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이 돋보인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달아날 수 없음을 그림의 구도에서도 알 수 있다. 수산나의 등 뒤 꽉 막힌 벽은 출구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재판관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진 두 노인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수산나를 짓누르고 있다. 



여기 하나의 드라마가 있다.

수산나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신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여인이었다. 남편 요아힘은 부유한데다 바빌론에 사는 유대인 가운데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수산나는 정오가 되어 손님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가면 비로소 정원에 산책을 나가곤 했다. 사건이 있던 날도 수산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빈 정원에서 두 명의 하녀와 함께 산책을 했다. 그날 따라 날이 무척 무더웠던 까닭에 목욕을 하기 위해 두 명의 하녀에게 올리브 오일과 연고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정원 문을 잠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는 연못에 몸을 담갔다. 하지만 정원 안에는 이미 두 노인이 숨어 있었다. 이들은 수산나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겁탈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알몸의 수산나 앞에 갑자기 나타난 두 노인은 그녀에게 “자, 정원의 문은 닫혔고 우리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 만일 거절하면 부인이 젊은 청년과 정을 통하려고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성서 다니엘서 13장 20~21절) 이렇게 협박했다.하지만 수산나는 비명을 질러 결국 두 노인으로부터 겁탈만큼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다음날 두 노인의 모략으로 수산나는 위기에 빠진다. 재판에서 사람들은 수산나의 주장보다는 재판관이자 공동체의 존경받는 장로인 두 노인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수산나에게 사형 평결이 내려지고 가족들의 통곡 속에 수산나가 형장에 끌려가려는 순간 소년 다니엘이 나타났다. 다니엘은 두 노인의 증언에 의심을 품고 두 노인에 대한 분리 심문을 법정에 요구했다. 분리 심문에서 다니엘은 “수산나의 간통 현장을 어디에서 목격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노인은 “아카시아나무 아래서”라고, 다른 한 노인은 “떡갈나무 아래서”라고 대답했다. 서로 일치하지 않은 다른 답변으로 유대인들은 두 노인이 수산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음을 알아채고 크게 분노했다. 당연히 두 노인은 현장에서 처형됐다. 

성서 속 수산나는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여성은 드물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의심하라

by 센터 posted Apr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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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rahison des images1.jpg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은 단순하면서도 참 쉬운 그림이다. 캔버스 안에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한 극사실적인 짙은 갈색의 나무 파이프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파이프 밑에 프랑스어로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글이 그림을 부정한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림은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던졌다.


다시 작품에 그려진 대상을 천천히 본다. 분명 파이프가 맞다. 하지만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그 자체로 파이프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실제 이 파이프에 불을 지펴 담배를 피울 수 없는, 단지 물감으로 색을 입힌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작가가 아무리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 단어 ‘파이프’ 역시 사물을 지시하는 단어일 뿐 파이프라는 본연의 존재는 아닌 것이다. 언어란 단지 A를 B로 부르기로 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일 뿐 본질은 아니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진다.


그림 앞에 다가가는 순간 익숙함이 낯섦으로 바뀐다. 이미지와 텍스트 간에 생기는 모순된 어법이 마그리트 미학의 핵심이다. 당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물체를 뜻밖의 장소에 갖다 놓거나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을 조합하거나 배치하여 익숙함이 낯설음으로 바뀌는 새로운 시각언어를 만들었다. 마그리트 역시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을 예상치 않은 배경에 대치하거나 크기를 왜곡시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런 이미지 배반을 일으켜 평소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통념, 사물, 상식, 논리에 물음표를 던져 보라고 권유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각은 오감으로 전해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 별다른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과연 ‘사실’은 정말 진실일까? 마그리트는 우리가 사실로 규정해 의심하지 않았던 ‘진실’이 어쩌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의 한계일 수 있으니 한번 쯤 모든 것을 열린 시선으로 의심을 품어보란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진실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비극적 서사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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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jpg

무제 Untitled, 1960~1961,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Tate Modern Museum, London

“작품에는 어떤 설명을 달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_ 마크 로스코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 방은 어둡고 적막하다. 그의 그림과 마주한다. 고요한 침묵만이 흐를 뿐. 하지만 이 침묵이 평정심을 찾아주지는 않는다. 그저 큰 화면 가득 쓱쓱 물감을 펴듯 발라 내린 색채덩어리, 단순한 면과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로스코는 자신을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에 불편해 했다. 관람자의 눈에 작품들이 ‘추상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는 단호하게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인생의 비극을 그린 서사다”라며 인간의 형상에 대한 묘사가 단순 모양과 상징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차별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안과 가난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 고통이 그의 작업 밑바닥에 깔려있는 비극적 서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 비극적 감정은 그림을 그릴 때 늘 나와 함께했다”라고 고백했다. 


로스코의 명성이 화단과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이름을 타기 시작하면서 1958년 캐나다 주류회사인 시그램은 맨해튼에 신사옥을 완공하자, 1층 ‘포시즌즈’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할 회화작품을 로스코에게 주문했다. 그림 아홉 점을 거액에 계약하고 정작 그림이 완성되었지만, 고급 레스토랑에 비싼 음식 값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며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주고받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경건한 삶으로 안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계약 철회를 함으로써 자기가 부여한 작품의 순결성과 화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후 작품을 완전 단색 처리하거나 윤곽선이 선명한 검은색 사각형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에 작업했던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로스코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이 어두운 색채 실험을 계속했다. 음울한 분위기는 그의 심각한 우울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한때 맨해튼에서 배를 굶주리며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미국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가 되었지만 1970년 2월 예순일곱이란 나이에 그만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 추상표현주의 선구자로 불리는 로스코의 생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자나 잘 나가는 자나 모두 저마다 인생의 십자가는 힘겹기만 하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곧 로스코의 슬픔이 위로가 된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기적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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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The Census at Bethlehem.jpg

베들레헴의 인구조사The Census at Bethlehem 1566년, 목판에 유채, 116×164㎝, 안트웨르펜 왕립미술관


그림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5경∼1569)의 대표작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인구 조사의 명을 내리자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에 입성한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날 베들레헴의 성경 속 풍경입니다. 그럼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그림 속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볼까요?


낡은 오두막집 앞 창가의 한 남자는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고 인파가 무리 지어 있습니다. 아마도 세금을 내는 사람들 같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봇짐을 지고 걷는 고단한 사람들,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땔감을 나르는 사람들, 불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 군데군데 존재감 없는 군상들은 거칠고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추위에 떨고 삶에 지친 어른들 밑에서도 아이들은 마냥 겨울을 즐기고 있습니다.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는 아이들, 바구니를 썰매 삼아 타는 아이들. 역시 아이들은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조연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는 놀라운 기적이 숨어 있었습니다. 전경 중앙에 푸른 망토 차림에 나귀를 탄 만삭의 여인과 그 앞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그들은 묵을 숙소를 찾지 못해 결국 마구간에 여장을 풀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곳 말구유 속에 아기 예수를 낳았던 것입니다. 사실 성모 마리아 또한 왕도 공주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나사렛 처녀일 뿐. 오히려 병든 노인의 딸이고, 고단한 목수의 약혼자이며, 자신의 몸 하나 의지할 곳 없어 마구간에서 새 생명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여인의 몸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은 군중 속에 묻혀 아무도 마리아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거룩하신 역사가 이 땅 낮은 곳에서 아기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놀라운 기적을 우리는 어쩌면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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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bet 돌깨는 사람들.jpg
돌 깨는 사람들 Les Casseurs de pierre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 1849, 캔버스에 유채, 165×257cm 
쿠르베의 삶과 예술의 리얼리티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력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들로부터 착취당하면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으로 내몰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 있었다.

황량한 채석장, 노동의 순간을 포착했다.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의 그림 〈돌 깨는 사람들〉은 열악하고 남루한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지치고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미화하지 않았다. 보여지는 그대로 표현했다. 
사실, 이 그림은 지금 우리시대 눈으로 보면 별 감흥없이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1849년 그림이 세상에 나왔을 때 평단에서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당대에 주목받던 들라크루아나 앵그르가 표현했던 아름다운 세계는 전혀 없었다. 그 시대 예술은 아름다움이 절대 가치였고, 이상적인 표현을 위해 왜곡과 변형도 가능했다. 당대의 예술가들이나 부르주아들이 생각하는 이 그림은 낯설고 그야말로 ‘추한 것’이었다. 쿠르베가 화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있는 ‘사실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추한 것 역시 ‘진실’이라고 외쳤다.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리는 것도, 대상을 미화하는 것도 거부하며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현실에서 보이는 것만 그렸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쿠르베는 서양미술사에서 리얼리즘Realism, 즉 사실주의로 문을 활짝 연 위대한 화가다. 그림의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린다고 무조건 리얼리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술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사회 비판적인 작품으로 사회의 어둠, 참담한 현실, 외면되는 모순 등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단지 그 시대의 모습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앎을 바탕으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사회주의 혁명에 깊숙이 관여했고 혁명이 실패하자 감옥에 갔다. 몇 달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고 재산과 그림을 몰수당하자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의 나이 54세. 그리고 4년 후 스위스 어느 호반에서 객사하고 만다. 

황망한 죽음이긴 하지만 쿠르베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올곧게 꿋꿋이 걸어갔다. 쿠르베는 자신 스스로 예술가이기 전에 인간이기를 자각했고, 지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 그림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목적은 이상화된 절대미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더 나아가 서양미술사에 있어 예술가는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사회적 현실로부터 찾으려 했던 최초의 사조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쿠르베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by 센터 posted Apr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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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jpg

“살라고 낳았는데 죽으러 가는구나”

어머니는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만 본다.

“이 어린 것이 살아올 수 있다면···.”

무사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린 지 두 달 만에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1914년 10월 30일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어머니는 오열을 한다. 아들의 나이 겨우 열여덟.1차 대전과 2차 대전, 전장의 난무하는 총탄은 니편 내편을  가리지 않는다. 청춘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청년과 그 아들을 앞세운 불행한 부모들만 만들 뿐···. 시대나 개인이나 모두가 불행했다.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1867~1945년)의 작품 〈피에타 piera〉는 싸늘한 주검으로 되돌아온 자식을 어머니는 품에 안고 놓지 못한다. 아들은 마치 따뜻하고 안전한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웅크린 채로 어머니의 무릎 사이에 기대어 있다.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슬픔은 끝이 없다. 시대의 억압과 개인의 고통으로 힘겨운 삶을 인내하여야만 하는 눈물겨운 모성애가 전해온다. 어린 자식을 가슴에 파묻은 콜비츠는 예전의 붓을 버리고 칼을 잡았다.

목판화 특유의 흑백의 단순함과 강렬한 터치감은 고통과 절망의 떨림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목판에 칼질하며 전쟁의 상흔과 개인의 아픔을 하나하나 새겼는지도 모른다. 달동네에서 평생 병든 사람들을 무료 진료하였던 의사인 남편 카를 콜비츠와 뜻을 같이하여, 가난한 노동자와 삶을 함께 나누었다. 그녀는 늘 빈곤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굳건히 그려온 사회 참여 예술가였다.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느끼며 함께 분노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라는 공동체적 감성이 작품마다 가득하다. 우리 곁에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자식을 허망하게 잃은 슬픔을 아직 보상받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적 연대감이 더욱더 절실하다. 더 이상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몰을 지켜볼 수가 없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윤아/센터 기획편집위원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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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larger.jpg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이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가?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19세기 중엽은 땅에 떨어진 낟알조차도 함부로 줍지 못하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던 참담한 시대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은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모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던 소작농들의 피폐한 삶을 보고 느낀 대로 그린 ‘사실주의’ 그림이다. 


작품은 당대에 주목받지 않은 여성, 그리고 그들의 고된 노동과 삶의 이야기다. 그저 묵묵히 낟알을 줍는 데 몰두하고 있는 표정 없는 여인네들의 검게 탄 얼굴과 거칠고 투박한 손, 그리고 굽은 어깨는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말한다. 그러나 이 일하는 여인들에게서는 결코 비천한 모습이 아닌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이삭 줍는 여인들 너머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추수단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말 탄 지주의 모습은 이삭 줍는 여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당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왜곡된 평가를 내놓았다. 가령 〈이삭 줍는 여인들〉을 서정적이면서 드라마틱한 화면 구성으로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며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밀레를 위험한 인물(블랙리스트)로 생각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의 동지로 여겼다. 하지만 밀레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 어떤 이념도 정치도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농민의 고된 생활을 그대로, 그러나 어떤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온화한 서정과 일종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한 것이었다. 


밀레는 인간을 이상적으로 미화하지 않았다. 오직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원천으로 삼은 인간은 정직하고 존엄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인간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이 그림은 감동적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화가’가 아닌 ‘배우’가 죽었다

by 센터 posted Jun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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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jpg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이미지는 커다랗게 부릅뜬 눈에서는 오만과 자신감이 엿보이며

둥그렇게 꼬아 올린 우스꽝스런 콧수염의 익살맞은 표정은 마치 코미디언 같은 달리의 모습이다. 


명화1.jpg

마치 피자 반죽 판이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시계들과 죽은 말인지, 아님 사람의 반쪽 얼굴인지 모를 도상,

1931년 작품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그의 대표적 이미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하면 제일 처음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마치 피자 반죽 판이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시계들과 죽은 말인지, 아님 사람의 반쪽 얼굴인지 모를 도상, 1931년 작품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그의 대표적 이미지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70~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대개 이 이미지가 미술교과서에 실려서 시험문제 출제용으로 외우곤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만약 우등생이었다면, 달리는 ‘초현실주의’이며, ‘프로이드’의 열렬한 추종자로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화하면서 천재성을 발현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달리의 회화 작품은 아연할 만큼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사물들의 정확한 표현, 재현된 내용 안에서의 일반적인 경험, 그리고 상식으로는 전혀 감지하기 어려운 비현실성의 혼합 등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달리가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한 기간은 고작 5년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초현실주의의 대표주자로 생각한다. 1939년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대장격인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제명당하고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된다. 이는 그가 히틀러와 파시즘을 지지한 것 (달리는 항상 이를 부정했다고 한다)과 그칠 줄 모르는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달러에 굶주린’ 화가로 비아냥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달리를 가장 싫어했던 큰 이유는 아마도 그가 값싼 인기와 부를 얻기 위해 벌였던 괴상한 자기선전과 갖가지 기행과 엉뚱한 스캔들에 기인했을 것이다.


화가였던 달리는 머리의 꽃장식과 귀걸이, 엽기적인 콧수염 등 얼굴 치장에 공들인 모습만 보더라도 자신이 곧 ‘예술’이자 ‘달리’임을 온몸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가 있다. 말년에 자신을 모델로 찍은 여러 사진 작품들을 고가의 로열티를 받기도 했는데 그의 몸으로 한 예술은 또 다른 창작 작품이었던 셈이다.

사실 달리가 죽자 많은 예술가들은 ‘화가’가 아닌 ‘배우’가 죽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예술가들의 질투 섞인 말이겠지만 진정한 예술가의 생애를 달리는 제대로 살았던 것 아닐까?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노동에 대한 숭고한 시선_조나단 브로프스키 <해머링 맨>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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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링맨.jpg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1942~  해머링 맨Hammering Man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걷다 보면 흥국생명 빌딩 앞 광장,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망치질하는 한 거인을 만난다. 무려 50톤이 넘는 몸무게와 22미터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거인은 완강한 힘으로 느리지만 끊임없이 망치질을 반복한다.

거인의 정체는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다. 측면에서 포착한 인체의 실루엣은 철재 패널로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망치를 든 거대한 팔이 전기장치인 모터에 의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설치조각이다. 


〈해머링 맨〉은 미국작가 조나단 브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연작 중 하나다. 처음에는 〈노동자Worker〉라는 제목의 작품이었으나 〈망치질 하는 사람Hammering Man〉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작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스위스 바젤, 미국 시애틀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서울 한복판에 설치되었다. 작품 크기와 더불어 움직이는 망치질이 주목받으며 서울을 대표하는 공공미술 작품으로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해머링 맨은 노동자다. 평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10시간, 35초에 한 번씩 망치질하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 그리고 노동자의 날에는 가동을 멈춘다. 점심시간도 없이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있으니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해 매일 연장근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큰 해머링 맨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간다. 해머링 맨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노동에 대한 숭고한 시선으로 삶의 가치를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망치질은 노곤한 육체를 쓰다듬는 듯 하루의 고된 노동을 위로하는 듯하다.


물끄러미 서서 가만히 해머링 맨을 바라본다. 그의 망치질이 참 고독해 보인다. 저항이나 분노보다는 눈물겨울 정도로 엄숙해보여 노동의 숭고함마저 전해진다. 생각의 꼬리에 꼬리가 딴지를 건다.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노동자인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들이 임금을 더 받아야 하는 사회적 통념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돈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당연한 걸까? 괜히 푸른 하늘에게 시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나는 누구인가?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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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jpg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자화상自畵像〉

가로 20.5㎝×세로 38.5㎝│국보 제240호│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소장

당연히 있어야 할 두 귀와 목, 상체는 없고 탕건 윗부분은 잘려 나간 채 화폭 위쪽에 자리한 얼굴은 정면을 매섭게 보는 이의 시선을 따라 다닌다. 미술계에서는 화가의 의도적인 생략이라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팀에서 x-선 촬영과 적외선 및 현미경 등을 통한 과학적 분석을 실시한 결과 그림 속 숨겨진 진실이 드러났다. 생략된 것으로 여겨왔던 귀는 붉은 선으로 표현되었고, 옷깃과 옷 주름도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채색까지 완벽하게 된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그림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다.


유령처럼 허공에 얼굴만 떠있다. 부드럽게 올라간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단정하게 꽉 다문 입술, 굼실거리는 가느다란 수염은 표정에 생동감을 준다. 정면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빛은 강렬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감돈다. 이것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다. 삼백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가 내 앞에서 “너는 누구냐?” 하고 묻는 것만 같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한국 미술사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초상화에서 유일하게 국보 제240호로도 지정되었다. 윤두서는 조선시대 명문가 자손으로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 할아버지다. 열다섯 살에 혼인을 하고 스물두 살에 부인과 사별을 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지만 당시 노론의 시대여서 남인인 그의 출사 길은 막혀 있었다.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간 형과 벗의 거듭된 죽음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꿈을 접고 마흔다섯 살 무렵 고향 해남으로 조용히 내려가 은둔하는 생활을 한다. 그래서일까 〈자화상〉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새겨진 인생의 그늘이 엿보인다. 


자화상의 영단어인 ‘self-portrait’는 ‘발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protrahere’와 ‘자신’을 뜻하는 ‘self’를 결합한 단어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로 해석된다. 살아온 삶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얼굴로 나타난다. 그래서 얼굴에는 사람과 역사가 담겨 있다. 자신의 심연을 해부해 그림 속에 영원히 정지시킨 수많은 자화상 중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애써 외면했던 그의 시선을 다시 마주한다. ‘저 부릅뜬 눈으로 얼마나 자신을 응시했을까.’ 실제로 윤두서는 엄격한 성격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저 눈빛이 한치의 흔들임조차 없어질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마주했을까. 자신의 내면세계와 솔직하게 마주하며 윤두서는 그의 아팠던 삶을 치유했으리라. 윤두서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며 수도 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을 질문 “나는 누구인가?” 요즘 나에게 다시금 치열하게 물어야 할 가슴이 뜨거워지는 질문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편견

by 센터 posted Ma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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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과 페로.jpg

시몬과 페로 Cimon and Pero(daughter breastfeeding her father in prison) 1630 / oil on canvas / 155 × 190 cm


작품은 페테르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시몬과 페로 Cimon and Pero>이다. 그림은 우리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감옥 안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죄수인 늙은 남자는 새하얗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젊은 여자의 품안에 안겨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젖을 빨고 있다. 설상가상 철창 바깥에선 간수 둘이 놀란 표정으로 망측한(?) 상황을 훔쳐보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의 관계는 뜻밖에도 연인 사이가 아닌 부녀지간이다. 로마시대에 ‘시몬’이란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혔다. 시몬은 굶어 죽게 하는 형벌인 아사형을 받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딸 페로는 감옥으로 면회를 갔다가 너무나 굶주린 탓에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를 보고서 자신의 젖을 물려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시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페로의 효심에 감동받아 시몬을 풀어준다는 것이 그림 속 숨은 사연이다. 사실 이 그림의 내력과 의미에 대해서는 별별 설이 나돌고 있지만···.

로마의 역사가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책 《기념할 만한 행위와 격언들》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여러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고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이다.

보기에 따라, 해석하기에 따라 또는 생각하기에 따라 남녀의 애정행각이나 불편한 근친상간으로 비화할 수도 있고 가족 간의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는 이 그림을 사전 정보 없이 처음 접했다면 과연 우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 마냥 이상야릇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림은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눈으로 본 것만이 귀로 들은 것만이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이 진리를 자주 잊는다. 그래서 우리네 삶에 종종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전시정보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전 2015.12.12~2016.04.10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성인(만24세 이상) 13,000원 대학생/청소년 11,000원
http://www.rubens2016.com


미움 대신 용서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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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jpg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년, 캔버스에  유채,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큰 아들은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품은 아버지에게 원망이 가득하다. 과연, 형의 분노는 당연한가? 소위 모범적으로 살아온 형이 피붙이인 동생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보면서 모범적인 삶이 좋은 인간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범적인 인간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일 뿐…. 큰 아들은 자기 공로에만 집중하여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배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했던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장 20절, 24절) 


작은아들은 찢어지고 해진 누더기 옷을 걸친 채 한쪽 구두는 뒷굽이 닳아 없어져 맨발을 드러내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몇 해 전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해 미리 받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다 잃고 헐벗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비난하기는 커녕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해 주지만 큰아들은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다. 용서를 구하는 아들 어깨에 다정하게 감싼 아버지의 두 손이 아주 특별하다. 한 손은 거친 남자의 손으로, 다른 한 손은 여린 여자의 손이다. 왼손은 모든 시련을 해결해주실 강한 능력의 아버지 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어머니 손으로 거룩하신 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은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로 유명한 이야기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내용이다. 


〈돌아온 탕자〉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작품으로 그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두 아들, 두 딸, 두 아내 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보냈다. 정부였던 여인에게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를 당해 결국 파산하고 빈민촌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 재산, 명예, 권력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10여 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인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처절한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두려웠는지 모른다. 마침내 생을 마치고 신 앞에 선 자신이 바로 ‘돌아온 탕자’였기 때문이다. 늙은 화가는 죽음 앞에서 ‘용서’를 깊이 묵상하며 그린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 불편하고 힘들지만 마음속에 깊이 새겨있던 ‘미움’이라는 단어를 지워내고 ‘용서’의 단어를 새겨본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순수한 휴머니스트

by 센터 posted Sep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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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작품 군상.jpg


이쾌대(1913~1965)의 대표작품 〈군상 4-조난〉과 마주한다. 스케일, 구도, 형상 모든 것이 한국 근대화단에 보기 드문 작품으로 생소한 울림이 느껴진다.

화폭 배경에 구름기둥이 폭발하듯 솟아오르고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공포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벌거벗은 군상들.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과 여인 속에 어지럽게 뒤엉켜 돌로 내리치고 물어뜯으며 싸운다. 인물의 묘사와 표정이 살아있다. 울부짖다 지쳐 쓰러진 여인을 보듬어 안고 서로 의지한 채 앞서 나가는 세 명의 주인공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한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이 아닌 순수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서구 낭만주의 형식을 담아 현실의 기운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엔 ‘힘’이 느껴진다.


일제 식민지배의 상처와 해방 직후 이념분열로 갈등과 모순과 혼란의 어두웠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쾌대처럼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그린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않다.

월북화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이쾌대는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한국화단에서 그야말로 잊혀진 화가였다. 이렇듯 냉전 이데올로기에 꽁꽁 묶여 40여 년 동안 아내 유갑봉 여사의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작품들이 1991년 신세계미술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당시 화단에선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아내의 눈물겨운 보존 노력이 우리 미술사에 큰 영광을 가져다준 셈이다.


‘한식이, 한민이, 아침저녁으로 아버지께 뽀뽀하는 우리 귀여운 수생이, 그리고 꼬마 한우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1950년 11월 11일 시대의 아픔으로 국군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끌려온 이쾌대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편지를 몰래 인편으로 아내에게 전달한다. 2년 후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끝내 가족 곁으로 가지 못했다.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그가 택한 곳은 북한이었다. 가족에게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던 이쾌대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왜 북한으로 향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다만 존경하던 친형 이여성(독립운동가, 기자, 역사화가)이 월북하면서 따라갔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가족을 버릴만한 중요한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형제는 곧 북에서 숙청됐고,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이쾌대의 월북행을 단순히 이념 문제로만 바라보기에 어렵다. 아마도 곧 통일이 이뤄지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제자인 남경숙은 이쾌대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46년 말 북한에 다녀오신 선생께 사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선생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가 아니였을까?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 전시정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
 2015.07.22(수)~11.01(일)
 덕수궁 미술관
 관람료 무료
 www.mmca.go.kr



신의信義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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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jpg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1844년, 국보180호, 수묵화, 23×69.2cm,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가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의 노력과 후지쓰카 지카시 가문의 도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건져져 국내에 돌아와 국보 180호로 지정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게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라고? 정말?’  

물론 나는 문인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안목이 높지 않지만, 그림은 거칠고 메마른 붓질이 쓱쓱 지나갔을 뿐,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가 전부인 그저 싱거운 그림이다. 세련된 기법도 찾아 볼 수 없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비평서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빵점짜리라고 서술했다. 사실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림의 여백까지 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세한歲寒’이란 새해 전후로 연중 가장 추운 절기를 뜻한다. 겨울의 칼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초라한 집 한 채와 양쪽으로 잣나무와 소나무 두 그루씩 서있을 뿐 온통 여백이다. 텅 빈 공간이 더 쓸쓸하고 춥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느낀 추사의 적막감과 외로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1844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 생활하고 있던 추사 자신에게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사제지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역관으로 북경에 갈 때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준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붓을 들어 글과 그림으로 전했다.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가운데서도 그대는 이처럼 마음을 쓰고 어렵게 구한 책을 권세 있는 자들에게 주지 않고, 오히려 바다 건너 귀양살이하고 있는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구려. (··· ···) 공자께서 추운 계절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고 하셨네.” 

공자의 《논어》 한 구절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를 빌려와 이상적의 인품과 변치 않는 절개를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내용이다. 


그림의 사연을 떠올리며 다시 찬찬히 바라본다. 그림의 제목과는 달리 따뜻함이 전해진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이렇게 어우러져 있으니 문인화의 최고라는 찬사와 평가에 이제야 수긍이 간다. 

모두가 외면할 때, 내 편 하나 없이 외로울 때, 무언가 말 못할 시름이 깊어 한없이 슬플 때, 내 옆에 신의信義를 지키는 벗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런 벗에게 신의를 지키는 존재인지 되묻게 된다.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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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2.jpg

지옥의 문 Porte de l`Enfer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80~1917년  조각:브론즈 100×396×775cm

로댕의 〈지옥의 문〉은 서울·도쿄·파리 등 여러 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 청동 조각 브론즈는 점토로 형상을 만든 뒤 거푸집이라는 틀을 만들어 이곳에 청동주물을 부어 만든다. 그래서 틀 하나로 수십 개도 수백 개도 찍어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지옥의 문〉은 일곱 번째 에디션이다. 에디션은 틀로 찍어낸 조형물이나 판화, 사진처럼 같은 작품을 여러 개 찍어낼 때 붙이는 번호로 프랑스 정부는 열두 번째 작품까지만 로댕의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엉킨 인체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지옥 입구에서 신음하고 있다. 턱을 괴고 앉은, 생각하는 사람의 고뇌는 깊기만 하다. 그의 발밑 인물 군상들은 엿가락처럼 늘어진 육체가 소용돌이치듯 얽혀있고 붙어있다. 선명한 조형이 없다. 거친 질감과 무채색 표면에 뭉겨진 육체는 두려움이 아닌 공포심으로 다가온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지옥의 문(Porte de l`Enfer)〉이다.


소멸되지 않고 악행이 거듭 반복되는 곳, 영원히 놓지 못하는 불신과 증오, 그리고 분노 속에 휩싸여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삐뚤어진 욕망으로 사랑하고 배신하고 기만하고 증오하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던 죄 많은 인간들은 지옥에서도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죄로 얼룩진 육체의 사슬들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팔을 치켜 올리고 매달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혼란과 무질서가 지옥의 언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1871년 프랑스 정부는 화재로 감사원을 포함한 부속 건물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 국립장식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미술관 문을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한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이다. 로댕은 30여 년 동안 길고 고된 작업을 했지만 끝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사후 21년 만인 1938년에 첫 번째 에디션이 주조되면서 〈지옥의 문〉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지옥의 문〉은 로댕 필생의 걸작이다. 로댕이 평생에 걸쳐 제작한 거의 모든 인체 조각들의 원형이 총망라되어 나타난다. 〈생각하는 사람〉을 〈지옥의 문〉 중앙에 배치하며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내면적인 번뇌를 표현하고 있다. 홀로 떨어져 고독한 상념에 잠긴 그는 작가 로댕이 아닐까?

세상에 무슨 죄가 이리도 많은지···. 도대체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있다면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가만히 〈지옥의 문〉 앞에 다시 서 본다. 내가 짓고 허문 마음의 지옥들을 헤아린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절망이 가져온 희망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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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jpg

희망 Hope, 캔버스에 유채, 1886년, 142x112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안개가 낀 듯 적막하고 황량한 대기 속에 한 여인이 보인다. 흰 천으로 자신의 두 눈을 동여매고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여인은 겨우 몸을 추스르듯 구체 위에 맨발로 웅크린 채 위태롭게 앉아있다. 물은 점점 차오르고··· 여인이 보듬고 있는 낡은 악기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줄은 전부 끊어지고 단 한 줄 밖에 없다. 여인은 달래듯 줄을 뜯으며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가엽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이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란다. 사실 희망이라 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 음울하고 처연하다. 당시 미술 비평가들조차 제목에 의문을 제기했다. 작가는 “단 하나의 코드로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반박했다.


조지 프레드릭 와츠George Frederick Watts는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여왕시대에 활동하며 상징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가난한 피아노 수리공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 그는 자신을 ‘펜 대신 붓을 가지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양딸이 사망한 직후 최고조에 이르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며 그린 〈희망〉은 바로 그런 상징을 응축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에서 ‘희망’ 메시지를 읽어낸 유명인사들 덕분에 그림은 더욱더 유명해졌다. 1958년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 주제로도 등장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이었던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어두운 감방 벽에 그림을 붙여놓고 수없이 바라보며 희망을 꿈꾸었다고 한다. 젊은 청년 버락 오바마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의 설교 중에 이 그림을 만나 감동을 받고, 훗날 대통령 선거에 나가 그림과 내용을 이야기하며 유권자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이 그림 한 장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민중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아있던 희망! 신화에서도 희망은 이렇게 눈을 가린 모습으로 몸부림치며 버텼다. 세상의 모든 절망은 찬란한 희망을 기억에 품은 중력의 무거움이다. 지금도 가슴이 저려오는 절망의 한 자락이 찬란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버티자!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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