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_키스 해링

by 센터 posted Feb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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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빛나는 아기.jpg 아이콘 짓는 개.jpg

아이콘,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 53.5 x 63.5cm, 1990

키스 해링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빛나는 아기〉, 〈짖는 개〉. 해링이 1990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그린〈빛나는 아기〉는 불멸, 영생의 아이콘이 되었다.


editions86_p85.jpg                love keith haring.jpg

〈Love〉 하트와 연인들의 모습을 역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미국 팝아트 작가 ‘키스 해링 Keith Haring’. 그의 이름은 몰라도 작품만큼은 익숙하다.

1980년, 스무 살 재기발랄한 미대생 키스 해링은 더러운 뉴욕 지하철 빈 광고판에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만화적인 도상은 우중충한 뉴욕 지하철 분위기를 바꾸며 순식간에 뉴욕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링은 금세 유명세를 타면서 일약 스타작가가 되었다.


해링은 본격적으로 거리로 나섰다. 건물 벽, 담벼락, 광고판을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마구마구 그렸다. 해링은 예술가와 소수만 누리던 기존 예술 질서를 거부하며 ‘대중을 위한 예술’, ‘모두를 위한 예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하철역뿐 아니라 도심 속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리의 예술가가 되었다. 해링에게 ‘도시’는 대중과 만나는 열린 미술관이기도 했다.


해링의 예술 속엔 분명한 외침이 있다. 인종 차별이나 약물 중독, 전쟁, 에이즈 등 시대적 화두에 비판 의식을 과감히 드러낸다. 메시지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표출되었다. 그는 대중들의 공간과 삶 속에서 만나기 때문에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택했고, 어두움보다 밝음을 택함으로써 항상 사람들과 소통하길 원했다.


해링은 작품의 제목을 짓지 않는다. 많은 작품들이 〈무제〉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작가 자신이 의미를 제시하지 않고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념이나 의미를 창조해 해석하길 바랐다. 역시나 대중과의 소통이 핵심이었다.


생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8년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진단 후 해링은 또 다른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대중을 위한 예술의 열정이 꽃을 피운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감사하며 살았기에 그의 위대한 꿈을 방해할 수 없었다.


1990년 2월 16일 이른 아침, 서른한 살의 나이에 해링은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려진 컵에 커피를 마시고, 그려진 노트에 공부를 한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신의信義

by 센터 posted Dec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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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jpg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1844년, 국보180호, 수묵화, 23×69.2cm,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가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의 노력과 후지쓰카 지카시 가문의 도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건져져 국내에 돌아와 국보 180호로 지정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게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라고? 정말?’  

물론 나는 문인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안목이 높지 않지만, 그림은 거칠고 메마른 붓질이 쓱쓱 지나갔을 뿐,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가 전부인 그저 싱거운 그림이다. 세련된 기법도 찾아 볼 수 없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비평서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빵점짜리라고 서술했다. 사실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와 함께 그림의 여백까지 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세한歲寒’이란 새해 전후로 연중 가장 추운 절기를 뜻한다. 겨울의 칼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초라한 집 한 채와 양쪽으로 잣나무와 소나무 두 그루씩 서있을 뿐 온통 여백이다. 텅 빈 공간이 더 쓸쓸하고 춥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느낀 추사의 적막감과 외로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1844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 생활하고 있던 추사 자신에게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사제지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역관으로 북경에 갈 때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준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붓을 들어 글과 그림으로 전했다.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가운데서도 그대는 이처럼 마음을 쓰고 어렵게 구한 책을 권세 있는 자들에게 주지 않고, 오히려 바다 건너 귀양살이하고 있는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구려. (··· ···) 공자께서 추운 계절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고 하셨네.” 

공자의 《논어》 한 구절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를 빌려와 이상적의 인품과 변치 않는 절개를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내용이다. 


그림의 사연을 떠올리며 다시 찬찬히 바라본다. 그림의 제목과는 달리 따뜻함이 전해진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이렇게 어우러져 있으니 문인화의 최고라는 찬사와 평가에 이제야 수긍이 간다. 

모두가 외면할 때, 내 편 하나 없이 외로울 때, 무언가 말 못할 시름이 깊어 한없이 슬플 때, 내 옆에 신의信義를 지키는 벗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그런 벗에게 신의를 지키는 존재인지 되묻게 된다.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by 센터 posted Nov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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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bet 돌깨는 사람들.jpg
돌 깨는 사람들 Les Casseurs de pierre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 1849, 캔버스에 유채, 165×257cm 
쿠르베의 삶과 예술의 리얼리티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상상력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들로부터 착취당하면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으로 내몰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 있었다.

황량한 채석장, 노동의 순간을 포착했다.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의 그림 〈돌 깨는 사람들〉은 열악하고 남루한 노동의 현장에서 일하는 지치고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미화하지 않았다. 보여지는 그대로 표현했다. 
사실, 이 그림은 지금 우리시대 눈으로 보면 별 감흥없이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1849년 그림이 세상에 나왔을 때 평단에서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당대에 주목받던 들라크루아나 앵그르가 표현했던 아름다운 세계는 전혀 없었다. 그 시대 예술은 아름다움이 절대 가치였고, 이상적인 표현을 위해 왜곡과 변형도 가능했다. 당대의 예술가들이나 부르주아들이 생각하는 이 그림은 낯설고 그야말로 ‘추한 것’이었다. 쿠르베가 화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있는 ‘사실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추한 것 역시 ‘진실’이라고 외쳤다. “내게 천사를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리는 것도, 대상을 미화하는 것도 거부하며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현실에서 보이는 것만 그렸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쿠르베는 서양미술사에서 리얼리즘Realism, 즉 사실주의로 문을 활짝 연 위대한 화가다. 그림의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린다고 무조건 리얼리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술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사회 비판적인 작품으로 사회의 어둠, 참담한 현실, 외면되는 모순 등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단지 그 시대의 모습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앎을 바탕으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사회주의 혁명에 깊숙이 관여했고 혁명이 실패하자 감옥에 갔다. 몇 달 후 병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고 재산과 그림을 몰수당하자 스위스로 망명한다. 그의 나이 54세. 그리고 4년 후 스위스 어느 호반에서 객사하고 만다. 

황망한 죽음이긴 하지만 쿠르베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올곧게 꿋꿋이 걸어갔다. 쿠르베는 자신 스스로 예술가이기 전에 인간이기를 자각했고, 지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 그림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목적은 이상화된 절대미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더 나아가 서양미술사에 있어 예술가는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사회적 현실로부터 찾으려 했던 최초의 사조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쿠르베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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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2.jpg

지옥의 문 Porte de l`Enfer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80~1917년  조각:브론즈 100×396×775cm

로댕의 〈지옥의 문〉은 서울·도쿄·파리 등 여러 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 청동 조각 브론즈는 점토로 형상을 만든 뒤 거푸집이라는 틀을 만들어 이곳에 청동주물을 부어 만든다. 그래서 틀 하나로 수십 개도 수백 개도 찍어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지옥의 문〉은 일곱 번째 에디션이다. 에디션은 틀로 찍어낸 조형물이나 판화, 사진처럼 같은 작품을 여러 개 찍어낼 때 붙이는 번호로 프랑스 정부는 열두 번째 작품까지만 로댕의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엉킨 인체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지옥 입구에서 신음하고 있다. 턱을 괴고 앉은, 생각하는 사람의 고뇌는 깊기만 하다. 그의 발밑 인물 군상들은 엿가락처럼 늘어진 육체가 소용돌이치듯 얽혀있고 붙어있다. 선명한 조형이 없다. 거친 질감과 무채색 표면에 뭉겨진 육체는 두려움이 아닌 공포심으로 다가온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품〈지옥의 문(Porte de l`Enfer)〉이다.


소멸되지 않고 악행이 거듭 반복되는 곳, 영원히 놓지 못하는 불신과 증오, 그리고 분노 속에 휩싸여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삐뚤어진 욕망으로 사랑하고 배신하고 기만하고 증오하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돈과 권력을 탐하던 죄 많은 인간들은 지옥에서도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죄로 얼룩진 육체의 사슬들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팔을 치켜 올리고 매달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혼란과 무질서가 지옥의 언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1871년 프랑스 정부는 화재로 감사원을 포함한 부속 건물이 사라진 뒤 그 자리에 국립장식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미술관 문을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한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이다. 로댕은 30여 년 동안 길고 고된 작업을 했지만 끝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사후 21년 만인 1938년에 첫 번째 에디션이 주조되면서 〈지옥의 문〉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지옥의 문〉은 로댕 필생의 걸작이다. 로댕이 평생에 걸쳐 제작한 거의 모든 인체 조각들의 원형이 총망라되어 나타난다. 〈생각하는 사람〉을 〈지옥의 문〉 중앙에 배치하며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내면적인 번뇌를 표현하고 있다. 홀로 떨어져 고독한 상념에 잠긴 그는 작가 로댕이 아닐까?

세상에 무슨 죄가 이리도 많은지···. 도대체 영원한 선과 악이 있을까? 있다면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가만히 〈지옥의 문〉 앞에 다시 서 본다. 내가 짓고 허문 마음의 지옥들을 헤아린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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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jpg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

폴 고갱Paul Gauguin , 1848~1903년, 1897년 유화 141 Ⅹ 376 cm 보스턴 미술관


반복되는 일상 속에 파묻혀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문득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작품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의 긴 제목 만큼이나 그림의 크기도 높이 139센티미터, 너비 375미터로 어마어마하다. 이 대작은 고갱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려졌다. 당시 성병으로 몸은 병들고 가난은 지속되고 사랑하던 딸의 죽음으로 정신적 고통마저 심했던 고갱은 결국 자살을 결심했고, 유언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자연과 등장인물들은 고갱이 원시의 이상향을 찾기 위해 가정과 문명을 버리고 선택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다. 배경은 전체적으로 푸르게 인물들은 햇빛에 그을려 노란 피부색을 띠고 있다. 이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인간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오른쪽에 누워있는 연약한 아기는 인간의 탄생과 출발을 의미하며, 중앙에서 열매를 따는 젊은이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는 모습이 연상되어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간의 삶을 나타냈다. 그리고 왼쪽의 웅크린 채 두 팔로 얼굴을 감싼 백발의 노인은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 고갱은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우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던진 것이다. 


고갱은 죽기 전 미친 듯이 밤낮으로 이 그림에 그렸다. 작품을 끝내고 고사리 숲으로 들어가 비소 한 통으로 자살을 감행하지만 모두 토해내고 이후로 더 고통스런 창작의 시간과 삶을 이어갔다. 

“딸 이름은 알린, 어머니와 같은 이름이었네. 알린의 무덤과 꽃들, 그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야. 그녀의 진짜 무덤은 내 곁에 있고 이 눈물이 진짜 꽃이라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나는 누구인가?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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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jpg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자화상自畵像〉

가로 20.5㎝×세로 38.5㎝│국보 제240호│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소장

당연히 있어야 할 두 귀와 목, 상체는 없고 탕건 윗부분은 잘려 나간 채 화폭 위쪽에 자리한 얼굴은 정면을 매섭게 보는 이의 시선을 따라 다닌다. 미술계에서는 화가의 의도적인 생략이라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팀에서 x-선 촬영과 적외선 및 현미경 등을 통한 과학적 분석을 실시한 결과 그림 속 숨겨진 진실이 드러났다. 생략된 것으로 여겨왔던 귀는 붉은 선으로 표현되었고, 옷깃과 옷 주름도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채색까지 완벽하게 된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그림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다.


유령처럼 허공에 얼굴만 떠있다. 부드럽게 올라간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단정하게 꽉 다문 입술, 굼실거리는 가느다란 수염은 표정에 생동감을 준다. 정면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빛은 강렬하다 못해 서늘함마저 감돈다. 이것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다. 삼백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가 내 앞에서 “너는 누구냐?” 하고 묻는 것만 같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한국 미술사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초상화에서 유일하게 국보 제240호로도 지정되었다. 윤두서는 조선시대 명문가 자손으로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 할아버지다. 열다섯 살에 혼인을 하고 스물두 살에 부인과 사별을 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했지만 당시 노론의 시대여서 남인인 그의 출사 길은 막혀 있었다.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간 형과 벗의 거듭된 죽음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꿈을 접고 마흔다섯 살 무렵 고향 해남으로 조용히 내려가 은둔하는 생활을 한다. 그래서일까 〈자화상〉에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새겨진 인생의 그늘이 엿보인다. 


자화상의 영단어인 ‘self-portrait’는 ‘발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protrahere’와 ‘자신’을 뜻하는 ‘self’를 결합한 단어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로 해석된다. 살아온 삶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얼굴로 나타난다. 그래서 얼굴에는 사람과 역사가 담겨 있다. 자신의 심연을 해부해 그림 속에 영원히 정지시킨 수많은 자화상 중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애써 외면했던 그의 시선을 다시 마주한다. ‘저 부릅뜬 눈으로 얼마나 자신을 응시했을까.’ 실제로 윤두서는 엄격한 성격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저 눈빛이 한치의 흔들임조차 없어질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마주했을까. 자신의 내면세계와 솔직하게 마주하며 윤두서는 그의 아팠던 삶을 치유했으리라. 윤두서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며 수도 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을 질문 “나는 누구인가?” 요즘 나에게 다시금 치열하게 물어야 할 가슴이 뜨거워지는 질문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해피엔딩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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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에세이.jpg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1/1653의 수산나와 두 노인Susanna and the Elders

1610년, 캔버스에  유채, 170 x 121cm, 바이센슈타인 성


여러 화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수산나와 두 노인〉을 그렸는데, 화가들의 ‘인권 감수성’에 따라 표현과 메시지가 다르다. 이탈리아 여성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겁탈’이라는 주제로 묘사했다. 그녀가 17세 때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길고 고통스러운 재판을 치러야 했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오명과 치욕감은 이후 그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산나의 얼굴에는 싫다는 빛이 가득하다. 겁에 질린 수산나의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이 돋보인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달아날 수 없음을 그림의 구도에서도 알 수 있다. 수산나의 등 뒤 꽉 막힌 벽은 출구가 없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재판관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진 두 노인은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수산나를 짓누르고 있다. 



여기 하나의 드라마가 있다.

수산나는 용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신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여인이었다. 남편 요아힘은 부유한데다 바빌론에 사는 유대인 가운데 존경을 받는 인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수산나는 정오가 되어 손님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가면 비로소 정원에 산책을 나가곤 했다. 사건이 있던 날도 수산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빈 정원에서 두 명의 하녀와 함께 산책을 했다. 그날 따라 날이 무척 무더웠던 까닭에 목욕을 하기 위해 두 명의 하녀에게 올리브 오일과 연고를 가져오라고 시키고, 정원 문을 잠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는 연못에 몸을 담갔다. 하지만 정원 안에는 이미 두 노인이 숨어 있었다. 이들은 수산나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겁탈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알몸의 수산나 앞에 갑자기 나타난 두 노인은 그녀에게 “자, 정원의 문은 닫혔고 우리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 만일 거절하면 부인이 젊은 청년과 정을 통하려고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성서 다니엘서 13장 20~21절) 이렇게 협박했다.하지만 수산나는 비명을 질러 결국 두 노인으로부터 겁탈만큼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다음날 두 노인의 모략으로 수산나는 위기에 빠진다. 재판에서 사람들은 수산나의 주장보다는 재판관이자 공동체의 존경받는 장로인 두 노인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수산나에게 사형 평결이 내려지고 가족들의 통곡 속에 수산나가 형장에 끌려가려는 순간 소년 다니엘이 나타났다. 다니엘은 두 노인의 증언에 의심을 품고 두 노인에 대한 분리 심문을 법정에 요구했다. 분리 심문에서 다니엘은 “수산나의 간통 현장을 어디에서 목격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노인은 “아카시아나무 아래서”라고, 다른 한 노인은 “떡갈나무 아래서”라고 대답했다. 서로 일치하지 않은 다른 답변으로 유대인들은 두 노인이 수산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음을 알아채고 크게 분노했다. 당연히 두 노인은 현장에서 처형됐다. 

성서 속 수산나는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여성은 드물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미움 대신 용서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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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jpg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년, 캔버스에  유채, 264.2×205.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큰 아들은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품은 아버지에게 원망이 가득하다. 과연, 형의 분노는 당연한가? 소위 모범적으로 살아온 형이 피붙이인 동생에게 보내는 싸늘한 시선을 보면서 모범적인 삶이 좋은 인간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모범적인 인간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고 모독하지 않는 소박한 방어의 삶을 사는 것일 뿐…. 큰 아들은 자기 공로에만 집중하여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배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했던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장 20절, 24절) 


작은아들은 찢어지고 해진 누더기 옷을 걸친 채 한쪽 구두는 뒷굽이 닳아 없어져 맨발을 드러내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몇 해 전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해 미리 받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모든 것을 다 잃고 헐벗은 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비난하기는 커녕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해 주지만 큰아들은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다. 용서를 구하는 아들 어깨에 다정하게 감싼 아버지의 두 손이 아주 특별하다. 한 손은 거친 남자의 손으로, 다른 한 손은 여린 여자의 손이다. 왼손은 모든 시련을 해결해주실 강한 능력의 아버지 손으로, 그리고 오른손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어머니 손으로 거룩하신 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은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로 유명한 이야기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의 내용이다. 


〈돌아온 탕자〉는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작품으로 그는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지만 사치스런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두 아들, 두 딸, 두 아내 마저 모두 저세상으로 보냈다. 정부였던 여인에게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를 당해 결국 파산하고 빈민촌에서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 재산, 명예, 권력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10여 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인 이 그림은 렘브란트 자신의 처절한 자화상이다. 아마도 그는 두려웠는지 모른다. 마침내 생을 마치고 신 앞에 선 자신이 바로 ‘돌아온 탕자’였기 때문이다. 늙은 화가는 죽음 앞에서 ‘용서’를 깊이 묵상하며 그린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 불편하고 힘들지만 마음속에 깊이 새겨있던 ‘미움’이라는 단어를 지워내고 ‘용서’의 단어를 새겨본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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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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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세 여인이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다. 목가적이고 평화로운가?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가난한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19세기 중엽은 땅에 떨어진 낟알조차도 함부로 줍지 못하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던 참담한 시대였다.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여인들Les glaneuses〉은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 모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던 소작농들의 피폐한 삶을 보고 느낀 대로 그린 ‘사실주의’ 그림이다. 


작품은 당대에 주목받지 않은 여성, 그리고 그들의 고된 노동과 삶의 이야기다. 그저 묵묵히 낟알을 줍는 데 몰두하고 있는 표정 없는 여인네들의 검게 탄 얼굴과 거칠고 투박한 손, 그리고 굽은 어깨는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말한다. 그러나 이 일하는 여인들에게서는 결코 비천한 모습이 아닌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이삭 줍는 여인들 너머 저 멀리에 추수한 곡식이 황금빛을 내며 풍요롭게 쌓여 있고 추수단을 분주히 나르는 일꾼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말 탄 지주의 모습은 이삭 줍는 여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당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프랑스의 비평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왜곡된 평가를 내놓았다. 가령 〈이삭 줍는 여인들〉을 서정적이면서 드라마틱한 화면 구성으로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며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며 밀레를 위험한 인물(블랙리스트)로 생각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의 동지로 여겼다. 하지만 밀레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듯이 그 어떤 이념도 정치도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농민의 고된 생활을 그대로, 그러나 어떤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온화한 서정과 일종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한 것이었다. 


밀레는 인간을 이상적으로 미화하지 않았다. 오직 땅은 정직하고 노동은 존엄하다는 것. 따라서 땅과 노동을 원천으로 삼은 인간은 정직하고 존엄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인간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이 그림은 감동적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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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rnica2.jpg

게르니카Guernica  1937, 캔버스에 유채, 349.3×776.6cm,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폭력에 대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MASSACRE-IN-KOREA.jpg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éee 1951, 캔버스에  유채, 109.5×209.5cm, 파리 피카소미술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지역에서 주민의 25퍼센트에 달하는 3만 5천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항할 무기 하나 없이 맨손에 알몸이다.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은 공포와 체념에 간신히 버틸 뿐이다. 얼굴을 투구로 가린 채 경직된 자세로 선 병사들은 그들을 제압하려고 총과 칼을 겨누고 있다. 감정 없는 로봇 같은 군인들의 야만적인 모습에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림의 전체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그 다음 장면에서 분명 학살을 암시한다. 이 서사는 새드 엔딩Sad Ending으로 끝날 것이다. 


20세기 현대미술의 간판스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이 작품에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e)’이라는 제목을 부쳤다. 


피카소는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지만,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피카소라면, 당연히 미군이 자행한 학살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막상 이 그림은 공산당이나 자유진영당 모두에게 혹평을 들었다. 공산당은 학살을 당하는 피해자가 한국인인지, 학살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미군인지 즉, 학살의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며 비판했고, 자유진영당에서는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처럼 그려냈다며 반미 선전물이라고 비난했다. 이 그림이 발표되고 피카소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명성에 흠집이 생겼고 미국에서는 피카소 입국을 거부해 한 번도 미국에 가지 못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피카소 자신은 “미군이나 어떤 다른 나라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모든 인류의 편에 서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보다는 전쟁 자체가 가져오는 참혹한 현실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싶어 했을 뿐이다.

에라스무스의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글귀에 다시 한 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비극적 서사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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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jpg

무제 Untitled, 1960~1961,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Tate Modern Museum, London

“작품에는 어떤 설명을 달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_ 마크 로스코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1970) 방은 어둡고 적막하다. 그의 그림과 마주한다. 고요한 침묵만이 흐를 뿐. 하지만 이 침묵이 평정심을 찾아주지는 않는다. 그저 큰 화면 가득 쓱쓱 물감을 펴듯 발라 내린 색채덩어리, 단순한 면과 색이 빚어내는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로스코는 자신을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불리는 것에 불편해 했다. 관람자의 눈에 작품들이 ‘추상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는 단호하게    “나는 추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인생의 비극을 그린 서사다”라며 인간의 형상에 대한 묘사가 단순 모양과 상징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차별에 시달리다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안과 가난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 고통이 그의 작업 밑바닥에 깔려있는 비극적 서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 슬픔, 비극적 감정은 그림을 그릴 때 늘 나와 함께했다”라고 고백했다. 


로스코의 명성이 화단과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이름을 타기 시작하면서 1958년 캐나다 주류회사인 시그램은 맨해튼에 신사옥을 완공하자, 1층 ‘포시즌즈’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할 회화작품을 로스코에게 주문했다. 그림 아홉 점을 거액에 계약하고 정작 그림이 완성되었지만, 고급 레스토랑에 비싼 음식 값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며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주고받는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경건한 삶으로 안내할 수 없음을 깨닫고 계약 철회를 함으로써 자기가 부여한 작품의 순결성과 화가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후 작품을 완전 단색 처리하거나 윤곽선이 선명한 검은색 사각형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전에 작업했던 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로스코는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이 어두운 색채 실험을 계속했다. 음울한 분위기는 그의 심각한 우울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한때 맨해튼에서 배를 굶주리며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미국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가 되었지만 1970년 2월 예순일곱이란 나이에 그만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 추상표현주의 선구자로 불리는 로스코의 생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자나 잘 나가는 자나 모두 저마다 인생의 십자가는 힘겹기만 하다. 

다시 침묵이 흐른다. 곧 로스코의 슬픔이 위로가 된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의심하라

by 센터 posted Apr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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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rahison des images1.jpg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은 단순하면서도 참 쉬운 그림이다. 캔버스 안에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한 극사실적인 짙은 갈색의 나무 파이프 하나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파이프 밑에 프랑스어로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글이 그림을 부정한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림은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던졌다.


다시 작품에 그려진 대상을 천천히 본다. 분명 파이프가 맞다. 하지만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그 자체로 파이프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실제 이 파이프에 불을 지펴 담배를 피울 수 없는, 단지 물감으로 색을 입힌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작가가 아무리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 단어 ‘파이프’ 역시 사물을 지시하는 단어일 뿐 파이프라는 본연의 존재는 아닌 것이다. 언어란 단지 A를 B로 부르기로 한 일종의 사회적 약속일 뿐 본질은 아니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진다.


그림 앞에 다가가는 순간 익숙함이 낯섦으로 바뀐다. 이미지와 텍스트 간에 생기는 모순된 어법이 마그리트 미학의 핵심이다. 당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물체를 뜻밖의 장소에 갖다 놓거나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을 조합하거나 배치하여 익숙함이 낯설음으로 바뀌는 새로운 시각언어를 만들었다. 마그리트 역시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을 예상치 않은 배경에 대치하거나 크기를 왜곡시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런 이미지 배반을 일으켜 평소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통념, 사물, 상식, 논리에 물음표를 던져 보라고 권유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각은 오감으로 전해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 별다른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과연 ‘사실’은 정말 진실일까? 마그리트는 우리가 사실로 규정해 의심하지 않았던 ‘진실’이 어쩌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의 한계일 수 있으니 한번 쯤 모든 것을 열린 시선으로 의심을 품어보란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진실이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예술인가 혐오인가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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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jpg

올랭피아/1863년/캔버스에 유채/130.5x190cm/오르세 미술관 소장

마네는 현실의 여성을 그렸다. 부끄러움 없이 도발적인 표정, 머리의 꽃 장식, 굽 높은 신발, 끈으로 장식한 목덜미. 19세기 파리의 전형적인 매춘 여성 ‘올랭피아’였다. 



더러운잠.jpg

더러운 잠/2017년/캔버스에 혼합재료

나체의 박근혜 대통령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그 옆에 흑인 하녀 대신 최순실이 주사기 꽃다발을 들고 있다. 인물들 뒤에는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와 ‘사드(THAAD)’라고 적힌 미사일도 보인다.  


명화1.jpg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작품 〈올랭피아Olympia〉의 벌거벗은 여인은 수치심이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건조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이와 당당히 마주한다. 나체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모습의 비너스가 아닌 현실 속의 여성으로 매춘부인 빅토린느 뫼랑Victorine Meurent이다. 당시 이제껏 봐 왔던 미술 작품과는 다르게 적나라하고 도발적인 누드 작품이었기에 사회적 충격과 격렬한 비난으로 대중의 분노를 샀다. 150년 지난 후 다시 이 작품을 패러디한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또한 한국 사회의 정치 논쟁 한복판에 있다. 


〈더러운 잠〉의 주인공은 비너스도 창녀도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로 세월호 참사 7시간에 대한 그녀의 부재를 풍자한 그림이다. 이 작품을 놓고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보수단체는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인격 모독 행위’라며 ‘표창원 네 아내도 벗겨주마’라는 푯말을 버젓이 들고 새누리당 여성의원들은 기자회견을 했다. 성희롱을 ‘비판’하는 건지 ‘악용’하는 건지 속내가 뻔히 보인다. 설상가상 극우 성향(박사모 회원)의 한 시민이 전시 중인 〈더러운 잠〉을 찢고, 밟고, 부수며 훼손시키고 말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구 회화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누드란 특권계급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화이다. 그림 소유자의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였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더러운 잠〉은 분명 외설적인 여성혐오의 불경스러운 표현물이 맞다. 그러나 〈더러운 잠〉을 예술로 볼 것인지, 권력자인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볼 것인지를 논하기엔 쉽지 않은 문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예술의 함의가 꼭 정의로워야 하는지, ‘외설’이나 ‘혐오’의 코드가 들어간 예술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사실 〈올랭피아〉를 통한 풍자와 패러디는 흔하디흔해 빠졌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과 총리를 발가벗겨 내놨지만 불경이니 혐오니 하는 언설이나 작가에 대한 위협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훼손이라는 야만적인 폭력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시대든 풍자화는 존재한다. 결국 그림의 예술적 잣대는 받아들이는 자들의 몫일 것이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예술은 스스로 시대를 말한다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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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y-leading-the-people.jpg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

 캔버스에 유채 / 260×325㎝1830년 / 루브르 미술관


프랑스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 Liberty Guid-ing the People〉 (부제:The 28th July)는 프랑스 민주주의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즐겨찾기로 인용되는 작품이다. 1886년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는 미국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림 속 그녀를 꼭 닮은 여인이, 이제는 깃발 대신 횃불을 밝히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했다.


이 그림은 1830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사흘간의 시민혁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시민들은 거리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맨주먹으로 절대 권력에 맞서 깃발을 들었다. 포연이 자욱한 현장에 우뚝 올라선 한 여인이 유독 눈에 띈다. 그녀는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맨발로 한 손엔 장총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삼색기를 높이 휘날리며 시민들을 이끌고 있다. 사실 이 여인은 실제 인물이 아닌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로부터 영감을 받아 표현된 자유의 여신이다.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여신의 몸에 때가 많이 끼어 품위가 없다는 둥 겨드랑이에 털까지 보여 상스럽다는 둥 비난을 위한 비난마저 제기되었지만 자유를 얻고자 하는 싸움에 외적인 아름다움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들라크루아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자유를 향한 의지를 드러내려고 했다.


여인의 주위에는 다양한 계층의 남자들이 그녀를 따르고 있다. 여인의 왼쪽 실트모자에 정장을 입고 총을 움켜진 신사는 부르주아 계급으로 들라크루아 자신이라는 말도 있다. 신사 뒤에 셔츠를 풀어헤치고 멜빵바지를 입은 남자는 노동자다. 바로 그 밑에는 군인도 보인다. 그리고 여인의 오른쪽 양손에 총을 들고 따르고 있는 모자 쓴 꼬마도 역시 하층민이다. 후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구두닦이 소년은 이 꼬마로부터 영감을 받아 등장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을 등장시켜 혁명이 민중의 뜻이고 혁명이 역사의 순리라고 들라크루아는 말한다.


민중은 수많은 시체들을 넘고 넘어 진격하고 있다.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시민군과 정부군의 시체를 그려 혁명의 참담함과 그리고 이들의 희생 위에 혁명이 세워졌음을 강조하고 애도하고 있다.


2016년 11월 서울은 촛불로 장악되었다. 광장은 분노와 심판이라는 두 감정밖에 없다. 촛불은 혁명의 시간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씩 당당히 걸어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230만이 든 촛불은 세계 유례없는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중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연인의 변심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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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angelo Pieta1.jpg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피에타〉

1499 | 높이174cm | 성 베드로성당, 바티칸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그림 또는 조각상으로 청년 미켈란젤로의 1499년 작품 피에타는 신의 손길인 듯 정확한 인체 비례와 대칭구도로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Michelangelo Pieta2.JPG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론다니니의 피에타〉

1564 | 높이 195cm ㅣ스포르체스코 성, 밀라노
미완성으로 남겨진 〈론다니니의 피에타〉 앞에서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과 신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평생을 줄다리기 하며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1564년 2월 16일, 대리석을 조각하던 망치 소리가 멈췄다. 〈론다니니의 피에타Pietà Rondanini〉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가 죽기 전날까지 매달렸던 최후의 미완성 작품이다. 이때 그의 나이 ‘아흔’. 누구의 의뢰도 받지 않은 작품으로 오로지 자신의 무덤에 놓고 싶었던 열망 때문이었다.전통적인 피에타의 도상은 성모의 무릎 위에 누워있는 죽은 예수의 구도가 대부분인데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방금 숨을 거둔 채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와 자식의 시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리아의 모습이 마치 한 몸처럼 포개져 수직적으로 배치한 낯선 피에타다. 작품은 미완성이라 예수와 마리아 옆에 예전에 다른 조각을 하다가 내버려둔 다른 이의 팔부분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수의 다리만 제대로 된 형태로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을 뿐, 다른 부분은 형체조차 불분명하고 대리석 표면에 거친 정과 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구세주이나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잃은 마리아의 형체는 아직 돌 속에 머물러 있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못한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래서 슬픔은 돌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슬픔의 감정은 오히려 처절하게 다가온다.당시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시대 역시 동성애는 불경스러운 행위로 만약 성 행위가 발각되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과 신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그는 평생 줄다리기를 하며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임종을 끝까지 지킨 그의 연인 톰마소에게 사랑의 고백 대신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켜 달라”는 기독교적 믿음만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미적 시선을 거두고···. 연인의 변심이었다. 그 변심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바라보는 톰마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또 다른 ‘절규’가 들린다

by 센터 posted Aug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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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jpg ◀〈절규〉1893 | 마분지에 유화 파스텔 카세인 | 91*73.5cm 배경의 물 흐르는 듯한 곡선의 형태는 평면감을 돋보이게 하는 반면 기울어진 사선으로 표현된 길은 극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 휘어진 몸은 흔들리는 형태의 배경으로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여인의 머릿결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곡선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어떤 위험의 상징(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두 번의 배신을 당한 후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혐오로 발전했다고 해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이었다.


2030 젊은 세대들이 한국의 현실을 ‘헬조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이 신계급론으로 대변되는 ‘수저론’이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구조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조어는 개인의 노력보다 계급이 우선이라는 우리 사회에 대한 자조와 비난 그리고 비판이 담겨 있고 이 비난과 비판 아래에는 불안과 공포가 깔려있다.


헬조선, 수저론은 우리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는 데 또 다른 키를 제공한다. 청소년들은 명문 대학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입시불안을, 청년들은 취직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취업 불안을, 중장년 세대는 직장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고용 불안을, 그리고 노인들은 불행한 노후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빈곤 불안을 갖게···.언제부턴가 불안이라는 감정이 국민 다수의 삶을 짓누른다. 


불안과 공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절규(The Scream, 1893)’이다. 해질녘 하늘에 걸린 구름이 붉은빛으로 너울거리며, 검푸른 대지와 바다 역시 요동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의 주인공은 두 손을 귀에 댄 채 공포에 질려 떨고 있다. 떨어져 걷는 두 친구의 무심한 듯한 모습이 불안과 공포의 느낌을 더욱 배가시킨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아버지는 심한 우울증과 강박적인 종교관으로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는 누이와 동생의 죽음까지 바라보았던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트라우마가 많은 삶 때문이었을까? 그의 작품엔  자신의 상처받은 불안한, 두렵고 공포스러운 삶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실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 발작성 공황을 동반하는 광장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작품은 여전히 또 다른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이미 결정된, 상시적인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는 사회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화가’가 아닌 ‘배우’가 죽었다

by 센터 posted Jun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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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jpg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이미지는 커다랗게 부릅뜬 눈에서는 오만과 자신감이 엿보이며

둥그렇게 꼬아 올린 우스꽝스런 콧수염의 익살맞은 표정은 마치 코미디언 같은 달리의 모습이다. 


명화1.jpg

마치 피자 반죽 판이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시계들과 죽은 말인지, 아님 사람의 반쪽 얼굴인지 모를 도상,

1931년 작품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그의 대표적 이미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하면 제일 처음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마치 피자 반죽 판이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시계들과 죽은 말인지, 아님 사람의 반쪽 얼굴인지 모를 도상, 1931년 작품인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은 그의 대표적 이미지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70~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대개 이 이미지가 미술교과서에 실려서 시험문제 출제용으로 외우곤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만약 우등생이었다면, 달리는 ‘초현실주의’이며, ‘프로이드’의 열렬한 추종자로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화하면서 천재성을 발현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달리의 회화 작품은 아연할 만큼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사물들의 정확한 표현, 재현된 내용 안에서의 일반적인 경험, 그리고 상식으로는 전혀 감지하기 어려운 비현실성의 혼합 등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달리가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한 기간은 고작 5년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초현실주의의 대표주자로 생각한다. 1939년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대장격인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제명당하고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된다. 이는 그가 히틀러와 파시즘을 지지한 것 (달리는 항상 이를 부정했다고 한다)과 그칠 줄 모르는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달러에 굶주린’ 화가로 비아냥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달리를 가장 싫어했던 큰 이유는 아마도 그가 값싼 인기와 부를 얻기 위해 벌였던 괴상한 자기선전과 갖가지 기행과 엉뚱한 스캔들에 기인했을 것이다.


화가였던 달리는 머리의 꽃장식과 귀걸이, 엽기적인 콧수염 등 얼굴 치장에 공들인 모습만 보더라도 자신이 곧 ‘예술’이자 ‘달리’임을 온몸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가 있다. 말년에 자신을 모델로 찍은 여러 사진 작품들을 고가의 로열티를 받기도 했는데 그의 몸으로 한 예술은 또 다른 창작 작품이었던 셈이다.

사실 달리가 죽자 많은 예술가들은 ‘화가’가 아닌 ‘배우’가 죽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예술가들의 질투 섞인 말이겠지만 진정한 예술가의 생애를 달리는 제대로 살았던 것 아닐까?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그가 그립다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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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황소.jpg

황소/종이에유채/32.3*49.5cm/1953년무렵


길 떠나는 가족.jpg

길 떠나는 가족/종이에 유채/29.5*64.5cm/1954년


이중섭 그림.jpg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종이에 잉크와 유채/20.3*32.8cm


외딴섬 외롭게 버려진 누추하고 작은 집, 세상 절벽 끝에 몰린 가족이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방 한 칸에는 궁핍과 고독 그리고 애틋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이 집 안주인은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 여인으로 한국 이름은 ‘이남덕’이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편 이중섭이 아내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화가 이중섭을 기억할 것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작가로서 초중고 미술 교과서에 붉은 색감의 대담하고 거친 선묘가 특징인 그의 작품 <황소>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시대는 어둡기만 했지만 청년 이중섭에게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일본 유학 중 숙명처럼 한 여인을 만나 열애를 하고, 그의 연인 마사코 또한 ‘사랑’이란 두 글자만 품고 겁도 없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의 아내 남덕이로 살아간다. 이들은 아주 잠시 행복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들의 행복을 불행으로 바꿔버렸다.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혼돈 속에 전쟁과 대면하면서 부산과 제주도를 오가며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다. 남덕은 폐결핵에 걸리고 아이들마저 병이 들어 결국 일본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중섭은 궁핍과 고독에 맞서 가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리움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창작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결국 4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쓸쓸히 갈무리했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은 남루하기 짝이 없는데 그림의 정서는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으로 경쾌하고 해학적이다. 종이 한 장 살 수 없어 담뱃갑의 은색 속지에 그릴 수밖에 없었던 옹색함과 비루함 속에서도 그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오롯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애달픔과 그리운 가족에 대한 향수, 부재의 갈구가 바로 화가 이중섭에게 창작 활동의 원천을 제공해 주었으리라. 그림의 어원이 바로 그리움이니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그의 안타까운 삶과 사랑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작품은 세월의 무게만큼 고스란히 감동으로 다가온다. 더할 나위 없이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그리고 못 견디게 자식을 보고파했던 아버지 이중섭. 

나 또한 오늘, 그가 그립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편견

by 센터 posted Ma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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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과 페로.jpg

시몬과 페로 Cimon and Pero(daughter breastfeeding her father in prison) 1630 / oil on canvas / 155 × 190 cm


작품은 페테르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시몬과 페로 Cimon and Pero>이다. 그림은 우리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감옥 안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죄수인 늙은 남자는 새하얗고 풍만한 가슴을 가진 젊은 여자의 품안에 안겨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젖을 빨고 있다. 설상가상 철창 바깥에선 간수 둘이 놀란 표정으로 망측한(?) 상황을 훔쳐보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의 관계는 뜻밖에도 연인 사이가 아닌 부녀지간이다. 로마시대에 ‘시몬’이란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감옥에 갇혔다. 시몬은 굶어 죽게 하는 형벌인 아사형을 받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딸 페로는 감옥으로 면회를 갔다가 너무나 굶주린 탓에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를 보고서 자신의 젖을 물려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시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 당국은 페로의 효심에 감동받아 시몬을 풀어준다는 것이 그림 속 숨은 사연이다. 사실 이 그림의 내력과 의미에 대해서는 별별 설이 나돌고 있지만···.

로마의 역사가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책 《기념할 만한 행위와 격언들》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여러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고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이다.

보기에 따라, 해석하기에 따라 또는 생각하기에 따라 남녀의 애정행각이나 불편한 근친상간으로 비화할 수도 있고 가족 간의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는 이 그림을 사전 정보 없이 처음 접했다면 과연 우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 마냥 이상야릇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림은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눈으로 본 것만이 귀로 들은 것만이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살면서 이 진리를 자주 잊는다. 그래서 우리네 삶에 종종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이윤아 | 센터 기획편집위원


 전시정보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전 2015.12.12~2016.04.10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성인(만24세 이상) 13,000원 대학생/청소년 11,000원
http://www.rubens2016.com


기적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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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The Census at Bethlehem.jpg

베들레헴의 인구조사The Census at Bethlehem 1566년, 목판에 유채, 116×164㎝, 안트웨르펜 왕립미술관


그림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5경∼1569)의 대표작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인구 조사의 명을 내리자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등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에 입성한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날 베들레헴의 성경 속 풍경입니다. 그럼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그림 속 요셉과 마리아를 찾아볼까요?


낡은 오두막집 앞 창가의 한 남자는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고 인파가 무리 지어 있습니다. 아마도 세금을 내는 사람들 같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봇짐을 지고 걷는 고단한 사람들,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땔감을 나르는 사람들, 불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 군데군데 존재감 없는 군상들은 거칠고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추위에 떨고 삶에 지친 어른들 밑에서도 아이들은 마냥 겨울을 즐기고 있습니다.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얼음판에서 팽이를 치는 아이들, 바구니를 썰매 삼아 타는 아이들. 역시 아이들은 새로운 희망입니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조연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는 놀라운 기적이 숨어 있었습니다. 전경 중앙에 푸른 망토 차림에 나귀를 탄 만삭의 여인과 그 앞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그들은 묵을 숙소를 찾지 못해 결국 마구간에 여장을 풀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곳 말구유 속에 아기 예수를 낳았던 것입니다. 사실 성모 마리아 또한 왕도 공주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나사렛 처녀일 뿐. 오히려 병든 노인의 딸이고, 고단한 목수의 약혼자이며, 자신의 몸 하나 의지할 곳 없어 마구간에서 새 생명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여인의 몸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은 군중 속에 묻혀 아무도 마리아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거룩하신 역사가 이 땅 낮은 곳에서 아기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놀라운 기적을 우리는 어쩌면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지도 모릅니다.


이윤아 센터 기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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