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 농부의 바랭이농장 두 번째 이야기

by 센터 posted Mar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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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복 청주노동인권센터 노무사 



약간의 수확


여름이 되자 몇 가지 수확할 거리가 생겼다. 수박은 3개, 참외는 한 10개 정도 건졌다. 맛이야 내 주관으로는 비교불가이지만 수박의 크기가 참외 두 개 합쳐놓은 것만 해서 좀 민망했다. 호박 모종도 세 포기 심었는데 호박 달리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풀 속에서 시름시름하더니 곯아터진 애호박 하나 남겨두고 누렇게 생을 마감했다. 가지도 토마토도 올핸 글러버렸다. 그나마 오이는 몇 개 건지기는 했다. 

올해 농사는 작년보다 더 꽝이다. 그런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심란하던 차에 동네 사람이 염장을 지르고 지나갔다.  

“가만 보면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어째 거두는 건 없는 것 같아요.”

7월 하순부터 고추가 발갛게 익기 시작했다. 김장할 고춧가루라도 빻아보려고 여덟 줄을 심었다. 하지만 고춧대 상태가 영 시원찮다. 비닐을 씌운 다른 밭 고추들은 9월이 넘어도 파릇파릇하건만 내 밭 고추들은 8월부터 시름시름 말라가더니 얼마 전 거의 말라버렸다. 8월 이후로 비가 거의 오지 않아 고추 말리기엔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래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고추를 따서 매주 한 번씩 사무실로 갖고 와 옥상에다 널었다가 저녁에 걷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고추가 잘 말라 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고추를 다듬는데 말린 고추의 질이 아주 좋다고 하신다.


무, 배추를 심고


풀 덮인 밭 일부를 개간해서 김장거리를 심었다. 쇠스랑과 호미로 일일이 풀을 뽑아내고 두덕을 넓게 만들어서 배추와 무를 심었다. 배추는 씨를 뿌렸다가 모종을 심지 않으면 속이 차지 않는다 해서 다시 모종을 사 심었다. 무는 씨를 뿌렸다. 옆 밭 아저씨가 쪽파 씨를 한 봉투 주어서 다시 골을 만들어 심었다. 그런데 위 밭 할머니가 또다시 쪽파를 잔뜩 주셔서 또 골을 만들어 심어 놓았다.

내 밭은 고라니의 놀이터다. 낮에도 고라니들이 내려온다. 밭을 보면 사방이 고라니 똥이다.  한 달 전인가. 밭 가장자리에 개망초 꽃들이 활짝 폈는데 그 사이에서 고라니 새끼 두 마리가 이것저것 뜯어먹고 있었다.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서 거리가 3미터 가까이 좁혀졌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뜯어먹는데 열중이다. 내가 기척을 하자 새끼 두 마리의 눈과 내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주 잠깐의 정적. 그리곤 쏜살같이 달아나는데 두 마리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아직 수확할 거리가 남아 있다. 10월 되면 땅콩과 고구마, 들깨를 거둬야 한다. 풀이 더 자라서 얼마나 거둘지 모르지만 내다 팔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 족하다. 이제 제일 큰일이 남아 있다. 마늘 밭을 일구는 일이다.


수박.jpg

수확한 수박이 참외 두 개 합친 크기만 하다.


똥이 거름이 되었다!


지난 해 늦가을, 모아놓은 똥과 음식물로 거름더미를 쌓아 놓았는데 이번에 덮개를 열어보니 거름이 다 익었다. 가끔 열어보면 파리 애벌레들이 잔뜩 기어 나와서 저것이 과연 거름이 될까 싶었는데 아주 보송보송한 것이 먹음직스럽다! 내 똥으로 거름을 만든 첫 작품이다. 이 벅찬 기분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똥이 알고 봤더니 생명을 키우는 거름이었더라, 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은 수세식 변기에 달린 레버를 눌러 똥을 치워왔던 사람들에겐 상상할 수 없는 ‘비약’이다. 나는 인류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똥을 수세식 변기에다 처박아 놓는 일부터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상상해 본다. 이 일을 그만두면 협동조합 하나를 만들어볼까? 그 협동조합 이름은 ‘똥 협동조합’으로 하리라, 내가 ‘똥 협동조합’의 이사장이 되리라, 참! 협동조합의 출자금과 조합비는? 물론 똥이다.


거름.jpg

거름 작업 중인 조광복 노무사


석과불식碩果不食


나도 안다. 내가 농사를 못 지어도 너무 못 짓는다는 것을. 사실 400평의 밭을 왕초보인 내가 1주일에 한두 번 가서 그것도 비닐과 농약과 트랙터도 없이 감당해내기는 무리다. 그저 꾸준히 가서 나절을 깨작깨작 거리다 오는 게 일이다. 그러니 내 밭을 보면 다들 한숨이 절로 나올 게 뻔하다. 그래도 걱정이 없다. 재주가 없는 내가 잘하는 딱 한 가지는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밀고 가는 것뿐이니. 보통 음력 9월(양력으로는 10월 쯤)은 한 해 농사거리를 거둬들이는 철이다. 나는 거둘 게 별로 없어 조금은 창피하기도 하다. ‘석과불식碩果不食’, 튼실한 열매(씨 과일)는 먹지 않는다. 이 말은 주역 64괘 중 산지박山地剝 괘에서 유래했다.  산지박山地剝 괘의 형상은 이렇다.

산지박山地剝 괘는 양(━)이 음(--)으로부터 대부분을 잠식당한 상태다. 계절로 치면 그늘이 볕을 잠식하여 겨울을 앞둔 시기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산지박 괘 중 제일 위 양(━)을 설명한 글이다. 음(--)이 모든 것을 잠식하기 직전 양(━)이 마치 하나 남은 열매처럼 외롭게 매달려 있다. 가장 튼실한 열매다.  이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씨 과일은 땅 아래에서 봄을 맞이할 것이다(一陽來復). 씨 과일은 거짓이 잠식한 사회에서는 양심을 일컫는 말일 수 있다. 시련을 맞이한 사람에게는 희망일 수도 있다. 사람 역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씨 과일을 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삶의 씨 과일은 무엇인가? 얼치기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며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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