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농사꾼의 바랭이농장 여섯 번째 일기

by 센터 posted Dec 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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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복 청주노동인권센터 노무사



김장 배추를 거뒀다. 벌레를 열심히 잡아줘 그런지 몇 년 동안 기른 배추 가운데 가장 튼실했다. 쪽파도 뽑았다. 포대 자루에 꽉 찼다. 무는 영 싹이 시원찮더니 씨앗 값도 못 건졌다. 


내 밭농사는 마늘 심는 걸로 한 해를 마친다. 실없는 소리지만 내가 키운 마늘만큼 짱짱한 마늘을 본 적이 없다. 방에 놔둬도 지금껏 싱싱하다. 올 6월 수확한 것 중 튼실한 것들을 골라 종자로 남겨 뒀는데 양이 많이 늘어 올핸 마늘 밭을 키울 수 있게 됐다. 


처음엔 손쟁기라는 걸로 밭을 갈았는데 차츰 밭 갈기를 줄이다 올해부터 아예 멈추기로 했다. 마늘밭도 마찬가지다. 너비가 1미터 남짓한 두둑의 바랭이며, 강아지풀 따위의 마른 풀들을 베어낸 후 똥, 음식물 삭힌 거름들을 뿌려줬다. 일주일 지나 골을 타서 마늘 종자를 아홉 이랑 심고 그 위에 풀들을 덮어줬다.  


밭 갈기를 멈춘 이유는 처음부터 대단한 신념을 가져서가 아니라 밭을 안 가는 게 오히려 땅을 푹신하고 건강하게 한다는 소릴 들어서다. 내가 전업농이 아니라 좀 더 선택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동안 트랙터를 들이지 않자 밭이 아주 푹신해졌다. 


내가 전업농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남들처럼 자식 대학 가르치고, 자식 결혼 보낼 밑천 마련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연농으로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자연농 밭의 규모가 한 사람 당 500평, 아무리 크게 잡아도 1,000평을 넘기 어렵다고 하니 말이다. 


노는 밭이라도 빌려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자식 가르치는 일이 버겁게 된 현실에서 농약과 제초제와 화학비료와 비닐과 트랙터는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그러니 평생 이렇게 농사 지어오신 분들을 뭐라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정부와 농협이 권장해오던 일 아닌가. 


보통 유기농이라고 하면 화학 성분의 농약과 제초제, 그리고 화학비료와 항생제가 섞인 거름을 쓰지 않는 농사를 말한다. 그래서 대다수 유기농은 비닐을  씌우고 트랙터를 사용한다.  


자연농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유기농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땅을 갈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기농이 농사짓는 방식의 선택 문제라면 자연농은 삶의 선택 문제라 볼 수 있다. 유기농은 상품의 브랜드 가치와 연관될 수 있지만 자연농은 생명의 가치와 연결된다.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가치이다. 


유기농도 그렇지 않느냐고? 이를테면 트랙터는 땅을 깊숙이 아주 깊숙이 뒤집는 일과 뒤집은 흙을 잘게 썰어주는 로타리 작업을 병행한다. 우리 눈엔 잘 보이지 않는 땅 속 생명 활동이 수시로 뒤집히고 잘게 썰린다는 얘기다. 이렇게 트랙터로 갈아준 땅은 또 트랙터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딱딱해져 몇 년은 제대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트랙터로 땅을 가는 행위와 두둑에 비닐로 멀칭을 하는 행위와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는 행위의 공통점은 ‘격리’이다. 작물과 다른 생명(풀, 벌레 그리고 땅 속의 뭇생명)의 ‘공존’을 포기하고 인위적으로 ‘격리’시키는 것이다. 


내 사고가 현실을 무시한,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발상인지 의심도 해봤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개선시키려 애써 온,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들이 현실 속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안에서 교수와 청소 노동자를 구분(격리)하고 다르게 취급하는 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구분(격리)하고 다르게 취급하는 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격리)하고 다르게 취급하는 일,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구분(격리)하고 다르게 취급하는 일, 국내인과 이주 노동자를 구분(격리)하고 다르게 취급하는 일 따위가 그렇다. 


생각해보니 자연농은 거창한 게 아니구나 싶다. 단지 ‘격리’가 아닌 ‘공존’을 선택한 농사 방식일 뿐이구나 싶다. 다만, 버릴 건 버리고 거기에 삶의 방식을 함께 바꾸어야 하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할 뿐.  


그런데 참 신기하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으면서도 자연농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 행복한 대열에 발 한쪽이나마 얹힐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와줘서 고맙다. 


겨울이 되고 바람이 거세지자 다닥다닥 매달려 있던 은행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은행들을 주어 한 곳에 쌓아놓았다. 밤은 가을에 한 무더기를 땅에 묻었는데 한 번씩 파내어 구워먹거나 삶아먹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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