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정규직센터와 함께 한 8년

by 센터 posted Aug 18, 201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글│명등룡 광주비정규직센터 소장



극우 보수 정권도 입에 올리는 비정규직 문제
“전체근로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두고서 어떻게 국민행복시대를 얘기할 수 있겠나?”
이 글을 쓰고 있는 7월 17일자 신문에 실린 최경환 신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이다. 지난 십수 년 동안 비정규직 운동을 해 온 사람들이 거리에서 외치던 비정규직 문제를 이제 새누리라는 극우 보수 정권의 장관이 입에 올리는 시대가 되었다. 저들조차 비정규직 문제를 화두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정규직 문제가 이미 사회 양극화와 갈등의 핵심적인 원인이 되고 있고, 그동안 자신들이 줄기차게 강조해 온 ‘성장’도 가계소득 증대 등 최소한의 ‘분배’ 정책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인 삼성과 현대 등 재벌들의 저항을 저들이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공 여부를 떠나 적어도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 없이는 경제 성장도, 그 성장이 분배로 이어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합의적 결론에 이른 듯하다.



광주비정규직센터의 탄생
광주비정규직센터는 2006년 9월 8일 문을 열었다. 1999년 삼성생명 영업사원, 2000~2002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사내하청, 2003~2004년 대우전자 광주공장 사내하청, 2005년 금호타이어 비정규직노조 등 7년 동안의 현장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세웠던 결심이 실현된 것이다. 노동조합을 세우고 투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너무 낮아 현장과 지역사회의 힘과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투쟁도 힘들고 궁극적인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비정규직 지역 활동의 거점을 세워야 한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결심 초기에 민주노총 광주본부에 찾아가서 직책이나 보수는 필요 없으니 책상과 의자 하나 놓고 ‘비정규직센터’ 앞에 민주노총 이름만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중한(?) 거절을 당했다. 평소 비정규직특위라고 하지 왜 미조직을 앞에 붙여서 미조직비정규직특위(미비특위)라고 물타기를 하느냐는 비판에도 꿈쩍 안 하던 당시의 민주노총의 입장에서 보면 미비특위가 있는데 그런 것이 왜 필요하냐는 정도의 인식 수준이었다. 그래서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모델로 하여 독자적인 지역 비정규직센터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롤 모델을 세우게 된 것은 2002년 기아사내 하청투쟁과 2005년 금호타이어 비정규직 투쟁 때 열심히 취재를 해 주셨던 워킹보이스 기자님들 덕분이다. 이를 인연으로 한국비정규노동센터도 방문하게 되었고 박승흡 선배님이나 김성희 선배님 등 좋은 분들을 만나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산할 필요성과 현실적 가능성에 크게 눈을 뜨게 되었다.
센터 문을 연 즈음 민주노동당에서는 ‘비정규직철폐운동본부’를 설치하였는데 광주시당의 운동본부장을 맡게 된 나는 중앙당 회의를 다니면서 지역 비정규직센터 설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마침 최고위원으로서 본부장을 맡으셨던 이해삼 선배님은 당 차원에서 4개 지역에서 인큐베이팅을 하는 지원사업에 대한 결정을 이루어 내셨다. 당시 4개 지역 공모에 11개 지역에서 응모를 하였으나 서울 동부와 안산, 부상과 광주 등 4개 지역이 선정되었다. 덕분에 선정 지역은 사무실과 최소한의 인건비, 사업비 등의 부담을 덜게 되었고, 민주노동당은 전국적 규모에서 각 지역 비정규직센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미 고인이 되신 이해삼 선배님은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시다.

 

이해삼.jpg



비정규직을 알리다: 정책개발과 사회여론화
문을 열면서 세웠던 사업 내용은 ① 정책 개발, ② 사회 여론화, ③ 상담, ④ 교육, ⑤ 지역사회연대 네트워크 구축 이렇게 다섯 가지였다.
정책 개발 사업은 주로 지역 비정규직 현황과 실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센터가 자체적으로 주최하는 토론회는 예산과 인력 등에 한계가 있어서 주로 시청과 광산구청에 사업 계획을 내고 보조금을 지원 받아서 1년에 1회 정도 꾸준히 진행을 해 왔다. 그리고 지역 내 여러 단체와 노조, 관공서에서 주최하는 비정규직 관련 토론회에 발제자로 1년에 3회 정도 참여하였다. 과거 현장이나 거리에서만 활동할 때에는 가까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와도 투쟁 현장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막연한 불신이 컸는데, 막상 공무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을 하다 보니 도우려고 하는 분들도 많았다. 또한 공공 부문이든 민간 부문이든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지방자치단체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거나 협력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노조나 민간단체가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은 오히려 사업의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매우 제한적이고 불필요한 힘겨루기와 갈등으로 시간만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현장에서는 당연히 사측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겠지만 보다 광범위한 지역사회의 여론을 얻고 싸우려면 지방자치단체를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으로 바꾸거나 지원을 이끌어내는 전략도 필요하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사회 여론화 사업은 지역신문에 정기적인 칼럼을 쓰거나 사안에 따르는 논평, 성명, 보도 자료 등을 내는 방식으로 진행을 했다. 보도 자료를 내면 라디오나 TV의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설립 초기에는 1년에 약 20회 정도였는데 4~5년이 경과하면서 지역에 많이 알려지게 되자 1년에 40회 정도로 늘어났다. 비정규직 관련 방송토론회에도 1년에 1회 정도 꾸준히 참여해 왔다. 비정규직과 관련해서 현장과 지역을 망라하는 전문가가 워낙 귀한 시절이라 누리는 특권이었던 셈이다.


비정규직실태발표회.jpg



비정규직과 만나다: 상담과 교육
상담 사업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상담을 소화하기 위해 1차 상담에 주력을 했고 2차 상담은 지역 내에 노동 친화적인 좋은 노무사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을 해 왔다. 상담전화를 홍보하기 위해 지역 생활정보신문에 쪽 광고를 내거나, 주요 상가나 공단에 직접 거리홍보를 나가서 명함과 안내 리플렛을 배포하였다.
상담 건수(인원)는 1년에 평균 120건(명) 정도 되는데 1인당 상담 횟수는 평균 2회, 상담 시간은 30분이었다. 상담을 하면서 깨달은 최고의 상담법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 상담자가 전화까지 하는 경우는 대부분 개인적으로 매우 절박한 상황이다. 따라서 상담자의 감정 상태를 잘 이해하고 조절해서 최대한 객관적인 진술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법률적 지식의 적용이나 대처 방안은 그 기초 위에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한편으로는 상담을 하는 사람 스스로도 상당한 감정노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헌신과 투쟁을 신념으로 삼기 때문에 상담자의 감정이나 처지에 너무 몰입되어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사용자 측과 싸우는 데 몰입해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르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교육 사업은 주로 근로기준법이나 비정규직 관련법, 임금계산법, 노동조합 설립과 운영, 부당노동행위 대처 절차와 방법, 산업재해 등을 내용으로 연 1회 정도 진행을 해 왔다. 그러나 모집 대상이 한정되어 있는 탓에 연차가 거듭될수록 수강 인원이 줄어들었다. 이에 5년 차부터는 컴퓨터나 SNS 활용법 등 실용적인 내용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교육 사업은 참여자를 조직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인데다가 당장 눈앞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이라 다른 사업에 비해서 상당한 공력이 든다. 그러나 교육 없이는 사람이 바뀌기 힘들며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노조로 뭉치기도 힘들고 최소한의 자기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매 시기 적절한 교육 내용과 형식을 꾸준히 개발하고 현장으로 다가서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고민을 하던 중 지역의 노동자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2012년에 ‘광주노동자교육센터’를 설립하게 되었다.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창립.jpg



지역사회연대 네트워크, 센터의 동력, 그리고 성과
위의 네 가지 사업을 가능하게 한 동력이자 그것을 뿌리로 한 성과가 바로 지역사회연대 네트워크 구성이다. 2007년부터 시작한 청소년 노동인권 활동은 3년째인 2009년 11월에 지역의 18개 단체가 참여한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는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먼저 결성된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를 최초로 지역화 한 것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활동가 개인들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단체들 간의 네트워크라는 점이다. 따라서 대중적인 활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펼쳐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들이 다른 지역에도 알려지면서 지역 차원의 청소년노동인권운동 네트워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3년 여름에 결성된 ‘청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는 광주와 직접 교류를 맺으면서 생겨난 첫 지역네트워크다.
2013년 3월에 결성된 ‘광주지역비정규직연대회의’는 그동안 민주노총 지역본부 미조직비정규직특위에 한정되었던 지역 내 비정규직 관련 노조와 단체들의 연대 틀을 벗어난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시기에 민주노총이라는 틀을 벗어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현재 민주노총이 꾸려 나가고 있는 비정규직 관련 사업의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그동안 광주에서도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뿐 아니라 여러 단체들이 미비특위에 참여해서 지역 내 비정규직 관련 문제를 논의하고 연대해 왔다. 그러나 사업 방향이나 활동에 있어서 한국노총이나 여성노조 등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노동조합과의 연대 의지가 약했고, 노동조합이 아닌 단체들의 특성과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문제점들을 극복해 보고자 만들어진 연대체가 매년 최저임금 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광주지역 최저임금 운동본부’였다. 이 운동본부가 3년 차 되던 해인 2012년에는 최저임금 문제를 포함하여 비정규직 의제를 포괄적으로 함께 다루는 연대체를 제안했으나 민주노총 지역본부는 납득할 만한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지도 않고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비정규직 문제가 최저임금 투쟁을 넘어서 훨씬 다양한 의제들로 넘쳐나는 시대에 포괄적 의제를 내용으로 한 연대체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그에 동의한 12개 노조와 단체가 모여 ‘광주지역비정규직연대회의’를 결성하게 되었다. ‘광주지역비정규직연대회의’는 각 사업장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하여 공동으로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뿐만 아니라 「광주광역시 비정규직 지원조례」 제정 등 제도화 사업과 노동인권 등 교육사업, 최저임금 현실화나 청소년 노동인권 캠페인 등 다양한 홍보와 여론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로 작년 9월에는 재작년에 제정한 「광주광역시 비정규직 지원에 관한 조례」를 토대로 ‘광주광역시비정규직지원센터’를 위탁하여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노동인권캠프.jpg



부족한 활동가를 키워 나가야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미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히 당사자들의 고용이나 임금 문제를 뛰어넘어 전 사회·국가적인 발전의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정도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현장과 지역에서 힘과 지혜를 모으고 해결해 나갈 사람, 즉 활동가가 너무나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필자 역시 지난 8년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후회스럽고 부족하다고 느낀 점이 바로 그 문제를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사람을 준비하고 키우는 일을 가장 우선에 두고 준비를 해 나갈 계획이다. 열쇠는 청년 비정규직에게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비정규노동》 덕분에 짧지만 지난 8년 동안의 지역 비정규직센터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지면으로나마 감사드린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