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구덩이를 채워서 나아간다-음성노동인권센터를 개소하며

by 센터 posted Apr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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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광복 음성노동인권센터 상임노무사



음성노동인권센터 개소


지난 3월 3일 음성노동인권센터 개소식을 가졌다. 감사하게도 여러 분들이 찾아와 축하해주셨다. 3월 중순부터는 센터 운영진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 분은 어때요?” “아니 우리끼리만 말고 좀 새로운 분들을 생각해보자.” 이렇게 음성 지역 분들이 내 일처럼 생각하고 운영진 구성을 준비해주시니 더디 가더라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음성노동인권센터는 형식적인 관계로 보면 청주노동인권센터의 음성 지역사무소이다. 나는 청주노동인권센터에서 파견한 음성 지역상임노무사다. 하지만 형식적인 이 관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청주노동인권센터가 덩치를 키우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이곳에 일이 필요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청주노동인권센터 운영위원회에서 음성노동인권센터 운영진 구성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모든 운영위원들이 흔쾌히 ‘음성노동인권센터 운영진 구성은 음성 지역 분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라고 결정해 주셨다. 센터 대표인 김인국 신부님은 아예 “음성센터는 독립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남남이 되자는 게 아니라 소유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소유하지 않고 함께 책임지는 관계. 청주노동인권센터와 음성노동인권센터는 필시 ‘아름다운 관계로’ 성장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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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매개로 한 노동인권 활동


음성은 인구 10만 명 조금 넘는 군이다. 민간 센터를 설립하기는 턱없이 작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금왕읍, 대소면, 삼성면을 중심으로 충북 북부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산업체들이 조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수도권에서 교통이 좋은 데다 평야지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중소 사업체들이 많아 노동권이 매우 취약하다. 개소 이후 의외로 많은 노동자들이 사무실을 찾고 있다. 이들은 대개 이주노동자이거나, 상습 체불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거나, 한 사업장의 경우 60명 대다수가 근로계약서 구경도 못할 정도로 최소한의 노동권조차 보호받지 못 하고 있다.

아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청주노동인권센터는 비영리민간단체이다.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상임활동가 임금과 각종 관리비용, 활동비용만 해도 빠듯하다. 이 비용을 600여 명의 고정 후원회비, 후원금 그리고 약간의 용역 사업 수익으로 충당하고 있다. 다행히도 몇 년 동안 얼마간의 기금이 적립되어 그 돈을 종자돈으로 삼아 음성노동인권센터를 설립했다.

청주노동인권센터의 근간이 되는 활동이 상담이듯이 음성노동인권센터 역시 상담 활동이 기본이 될 것이다. 상담을 매개로 두루두루 노동인권 활동을 펼쳐나갈 것이다. 청주에서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비록 청주노동인권센터에서 음성노동인권센터를 설립했지만 음성노동인권센터의 주인은 음성 지역 분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개소 준비 때부터 지금까지(3월 25일) 한 번도 음성 지역 분들에게 후원회원 가입해달라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다. 내가 회원가입 리플렛을 들고 가입해주십사 부탁하면 매정하게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마는, 이 말은 음성 지역 분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물이 구덩이를 다 채우고서야 앞으로 나아가듯 지금은 조용히 시간을 채우는 중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새롭게 구성될 센터 운영진들께서 채워줄 것이고, 운영진들이 관계 맺는 다양한 지역 주민들이 채워줄 것이고, 상담을 통해 인연을 맺은 노동자들이 채워줄 것이다. 그렇게 채울 것을 채운 연후에야 음성노동인권센터는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역에서 민간 센터가 자리 잡기 위한 조건


안타깝게도 민간 부문의 노동인권센터, 비정규노동센터 등의 이름을 단 단체들은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하다. 그래선지 간혹 새롭게 이런 단체를 만들려는 분들이나 혹은 기존의 센터를 잘 살려보려는 분들이 청주노동인권센터로 찾아오곤 한다. 청주노동인권센터라고 크게 다를 것이 있을까마는 이 기회에 그 동안 가졌던 생각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본다.

민간 센터는 무슨 일을 하는가? 노동인권 혹은 비정규노동과 관련된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느냐는 각자의 장점, 지역 특성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자기 고유의 활동을 가져야 한다. 우리 센터는 그것을 ‘상담’으로 잡았다. 내가 노무사 일밖에 경험한 게 없는 데다 내 짧은 머리로 상담만큼 노동자들이 찾아오기 좋고 후원회원 늘리기 좋은 활동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상담 활동이 기계적인 반복 작업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상담은 변화를 품은 씨앗’이라 굳이 의미를 부여해 왔다. 아무튼 어떤 일이든지 각 센터는 고유의 활동을 가져야 하고 그 활동에 ‘매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민간 센터가 필요한가? 나는 민간 센터가 무슨 대단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생태적 다양성 차원의 문제이다. 자연 생태가 건강하려면자연이 키워주는 다양한 생명들이 공존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 사회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사람의 몸을 고치는 데도 대학병원과 마을의원과 보건소가 각각의 영역에서 필요하듯이 노동인권 혹은 비정규노동 문제에서도 노동조합 조직과 정부 또는 지자체와 우리 센터 같은 민간단체의 노력 등이 공존해야 한다. 특히 민간 센터는 민간 부문의 지지와 후원이 생존을 좌우한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한 명의 회원을 늘리기 위해 상담하는 과정은 각별한 것일 수도 있다. 현명한 활동가라면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생명력 있는 활동을 끌어낼 것이다. 이것이 민간 센터의 장점이다.

대표와 운영진을 잘 모셔야 한다. 많은 민간 센터들을 보면 상근활동가들이 대표를 맡고 있다. 나는 부정적이다. 상근활동가들은 보살핌을 잘 받아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노동자를 보살피는 일을 잘 할 수 있다. 훌륭한 신부님과 목사님과 스님들이 대단한 공력으로 좋은 일을 하실 수 있는 바탕은 하느(나)님과 부처님의 보살핌을 넉넉히 받고 있기 때문이다. 상근활동가가 대표가 되면 자기가 자기를 보살펴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힘들고 왜소한 일인가? 그래서 특히 민간 센터는 상근활동가들을 잘 보살펴줄 수 있는 좋은 운영진들을 모셔야 한다. 나는 다행히도 청주노동인권센터에서 김인국 대표님을 비롯해 좋은 분들을 운영위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 가운데 몇 분들은 노동인권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편이었지만 이제 열렬한 노동인권 옹호자가 되셨다.

센터의 주된 활동 목적은 노동조합 조직화인가? 의외로 이걸 기대하는 활동가들이 많다. 감히 말씀드리면 절대 그렇지 않다. 현실을 보아도 조직화를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하여 조직화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단체도 하나의 생명체와 같은 것이어서 특정 목적의 부속이 되지 않고 내적 충실성, 자존감을 지녀야 한다. 경우에 따라 조직화에 많은 노력을 투여할 때도 있지만 단체가 고유의 존재 가치를 가질 때 그 기회도 더 많이 찾아올 것이다.


물은 구덩이를 채워서 나아간다


지자체로부터 위탁 받는 비정규직지원센터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대부분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자리 잡고 일하니 좋은 일이다. 이 분들이 포부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충북엔지오센터라고 있는데 짧은 기간에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 충북시민재단이 충청북도로부터 위탁받은, 엔지오단체 및 엔지오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충북시민재단은 나중에 설령 엔지오센터를 위탁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이 일이 중단되지 않도록 기금을 모금하고 있다. 내가 들은 기억으로 한 해에 1억 8천만 원 정도의 기금을 모금한다고한다. 현재도 엔지오센터 사업비에 지자체로부터 지원받는 돈보다 민간 모금액이 더 많이 투여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자체 위탁 비정규직지원센터들도 운영기관인 모 단체 즉, 민간 부문의 단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모 단체들도 포부를 가졌으면 한다. 이 기회에 모 단체를 건실하게 다지고, 설령 위탁이 끊기더라도 축적된 역량이 소실되지 않도록 기금도 조성했으면 좋겠다. 결국 지자체 위탁 센터조차 그 든든한 토대는 민간 부문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오지랖 넓게 사설이 길어졌다. 물은 구덩이 바닥까지 내려가 남김없이 구덩이를 채우고 나서야 나아간다. 사람의 일도 그런 거라 생각한다. 채우지 않은 채나아간다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청주노동인권센터에서 활동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채우며 나아가고 있는가. 무엇을 채우며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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