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한비네 활동가 워크숍_비정규 노동 운동, 그리고 나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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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철 센터 정책연구위원



시민단체 활동가의 정체성


유난히 더웠던 지난여름, 여느 날처럼 축 늘어진 채 정신줄 끝자락을 부여잡고 페이스 북을 들락거리다가 다수의 페친들이 걸어 둔 링크를 따라 가다보니 ‘‘386운동권’이 떠난 시민사회, 다시 흥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에 도달했다. 장하나 전 국회의원이 시민단체 비상근 활동가로 돌아온 것에 대한 인터뷰였다. ‘시민사회-공직 순환 모델’이 활동가 개개인에게는 새로운 커리어 모델로, 정체된 듯한 시민운동에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조직모형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 흥미로운 기획 기사였다. 하지만 정작 내 관심은 인터뷰 자체보다는 시민사회 위기 담론과 진단, 해법에 대해 당사자인 활동가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플랜B1)’라는 커뮤니티에 쏠렸다.


시민단체의 주인은 회원이고, 모든 사람은 회원이라는 이 원칙이 사라지면 비록 현실적으로 생존한다 해도 단체로서 존재의의는 없는 것이다. (기업의) 직원은 급여만큼 일하게 된다. 하지만 조직의 가치에 동의한 회원은, 나아가 아예 그 가치와 비전에 온전히 시간을 다해보겠다는 ‘상근 활동가’는 ‘직원’과는 분명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

〈비영리활동가, 정체성에 대한 다른 시선: 활동가는 누구인가?〉


“이 같은 논리는 현직에 종사하는 말단 활동가들에게 더 쥐어짤 것을 요구하는 논리로 사용될 것이다. 나의 선배 세대들은 초과 노동을 당연히 하며 일해 왔고, 그렇기에 현재 한국의 시민운동이 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노동 착취를 통해 급성장한 한국 자본주의의 궤적과 다르지 않다.”

〈활동가를 향한 정신 승리의 파산을 바라보며〉


“청년들에게 시민단체 활동이 자기 활동으로 안 느껴진다면, 청년들에게 시민단체 일은 말 그대로 ‘일’이다. ‘노동’이다. 청년 활동가들은 이미 짜여진 조직에 들어가서 실무를 담당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기획하고,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면서 만족을 하면 다행이겠지만, 실무에 시달리고 경직된 단체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민단체에서 청년들이 사라지는 이유〉


쏟아내야 할 것은 많은데 채워지는 건 없어서 ‘새로운 발상’ ‘대안’ ‘창의성’은 어느새 사라지고 ‘해왔던 것’ ‘안전빵’ 위주로 일들을 기획하게 된다. ‘다른 삶’을 이야기 하면서 정작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게 활동가의 삶이다.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노동자성) 문제, 경력 개발과 전문성 문제, 조직 문화 및 의사 결정의 문제, 세대 차이 그리고 운동의 재생산 문제까지 본인들의 경험에 비추어 토해낸 고뇌의 흔적이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었다. 이 논쟁은 그 어떤 운동보다 활동가 개개인들의 역량과 희생에 의지해 온 비정규직 노동 운동의 지속가능한 전망을 그리기 위해서 운동 내부에서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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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활동가와 신입 활동가의 대화 시간(@서울노동권익센터)


비정규 노동 운동 활동가의 정체성


지금까지 비정규 노동 운동, 더 범위를 좁힌다면 한국비정규직노동단체네트워크(이하 한비네)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정규직 중심 조직 운동에 대한 반성과 대안 운동에 대한 필요성으로부터 시작했다. ‘노조가 노동 운동의 주연이라면, 비정규센터는 명품조연’, ‘기존의 노조 운동에 쓴소리를 하는 시어머니’, ‘노동 운동의 감초역할, 한 마디로 실사구시2)’ 등의 표현들은 이러한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미시적으로는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게’라는 구호가 상징하듯 정파나 기타 이해관계를 초월해 형성된 활동가들 사이의 연대와 친밀한 관계는 위와 같은 정체성이 뿌리를 내리고 노동 운동에 새로운 활력과 상상력을 불어넣는데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인 연대와 친밀성은 그 시간을 공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배타성으로 비칠 수 있다. 또한 외부를 향해 단결된 목소리를 주조해 내는 데는 촉매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내부 모순과 한계를 덮고 감춰버리는 가림막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법정 최저 임금 1만 원이 되면 우리가 제일 먼저 문을 닫을 것이다’란 말은 뒤풀이 전용 자조 또는 농담으로만 남고, 공적 의사소통 공간에서 그런 인식을 낳는 구조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영원히 연기되는 것이다.


결국, 비정규직 주체 형성의 조력자를 목표로 하는 비정규직 노동 운동 활동가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그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경력과 전문성을 쌓기 위한 물질적, 조직적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근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때, 운동은 연대와 친밀성을 통해 안정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논의는 제도와 비제도권 경계에서, 운동과 행정 업무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업무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지만, 산전, 수전, 공중전을 거치며 자신만의 무게 중심을 찾은 선배 활동가와는 달리, 여러 가지 경력 모델을 놓고 고심할 수밖에 없는 지자체 위탁센터의 신입 활동가들에게 더 절실할 수 있다. 논의의 출발점은 ‘플랜B’가 보여준 것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고 물어보고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이다.


제1회 한비네 활동가 워크숍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난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열린 ‘한비네 활동가 워크숍’은 외연을 확장하고 있는 한비네가 내부적으로도 위와 같은 논의를 점화시키는 데 소홀하지 않은 건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반가운 신호였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한비네 조직 진단 사업 때 주로 센터장님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비정규센터들이 펼치고 있는 주요 사업 위주로 현황을 정리하는데 그치면서 상근 활동가들과 생각을 나눌 시간을 갖지 못한 진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미뤄둔 숙제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알차게 기획된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에서 둘째 날의 ‘선배 활동가-신입 활동가의 대화’에 특히 관심이 갔다. 기획단이 미리 활동한지 10년이 안 된 상근 활동가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후, 이를 상담, 행정 및 회계, 정책 등 비정규센터 주요 업무 분야로 분류해 각 업무에 대해 오랜 실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선배 활동가들로부터 답을 듣는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원래부터 꿈꿔왔던 일인가?”, “10년 후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 거 같은가?”, “고된 활동 속에서 자신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최저 임금의 절반 정도를 받고 도대체 어떻게 생활을 꾸려갔는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했는가?” 구체적인 업무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활동가로서의 삶과 커리어 전반에 관한 질문이 공통 질문으로 던져졌고, 네 분의 패널은 자신들의 경험을 가감 없이 공유해서 때로는 좌중을 웃음바다로 뒤흔들기도, 때로는 숙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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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천안에서 열린 한비네 활동가 워크숍 단체사진(@서울노동권익센터)


“비정규직 노동 운동은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보람과 자부심도 있지만, 그만큼 지금 걷고 있는 방향이 맞는가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활동가로 경력 쌓는 것인가? 아니면 상근자로 월급을 받는 것인가? 운동의 당위성은 있지만 워낙 실무가 어렵다보니 위와 같은 질문 속에서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이전에 어떤 단체에서도 상근 활동한 경험 없이 비정규 운동의 당위성만 보고 15년 전에 시작했다. 이 일은 모든 업무를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고, 또 결국 그렇게 되는, 슈퍼맨 아닌 슈퍼맨이 되게 만든다.”

“처음에 지역 인권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권단체의 80퍼센트가 최저 임금을 주지 못하고 있었고, 나도 받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임금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단체들은 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문을 닫든가, 주든가.”

“(활동과 가정 양립에 대해)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미안함과 아쉬움, 또 아이에게 엄마로서의 의무를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과 아쉬움.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명품조연이라는 말은 좋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이 눈에 보이는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 힘들다는 딜레마가 있다.”

“이 커리어는, 스스로 결정을 하고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커리어다. 떼돈 벌려고 작정한 거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기획한 사업이 현실화 돼서 자그만 변화를 일으킬 때만큼 성취감이 큰 순간은 없다. 그런 순간을 통해서 나도 사람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이외에도 앞으로도 계속 곱씹으면서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소중한 시간이었다. 단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신입 활동가들은 선배들의 경험과 비정규 노동 운동이 서있는 위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까지 논의를 확장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못다 한 얘기들은 자연스럽게 뒤풀이 자리로 이어졌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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