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일가의 학벌 사재기와 청년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Files
삶이 지독해지는 과정에 대하여
고명우  청년 활동가


2019년 9월, 조국 사태가 발발했다. 정치적 민주화와 반민주의 싸움, 검찰 개혁 세력과 권위주의 세력의 싸움, 금수저와 흙수저의 갈등, 민주화 세대와 민주주의 세대의 갈등, 노동과 자본, 쁘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체성 찾기, 인권 다양성과 현실 정치 노선의 갈등, 우선시되는 가치관의 차이 등. 이미 넘치도록 다양한 담론과 분석이 쏟아졌기에 굳이 불필요한 사족을 늘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글에서는 조국 일가 자녀의 학벌 사재기에 관한 청년들의 온도 차를 주제로 이야기해볼까 한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백억 대 자산가에 명문대를 나와 집권 여당의 핵심 정치 인사를 지낸 가문과 이 땅의 평범한 대다수 청년이 어떤 접점이 있을지. 사실 그 일가를 진보가 지지하거나 공감해야 할 어떤 접점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게 문제가 되고 있으니 잘 모르는 그들(조국 일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다만 내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돈이 없었다. 공부보다는 학회에, MT보다는 집회에, 장학금보다는 등록금 투쟁에 열심熱心이었던 운동권이었기에. 당연히 학점은 형편없었고, 학점이 형편없는 만큼 등록금 사정도 형편없었고, 대학을 때려치울까 고민도 했지만, 어찌어찌 알바를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다만 80~90년대 대학생들처럼 한 학기 과외해서 한 학기 생활비와 등록금을 모두 버는 건 불가능한 고물가/저임금/학력 인플레 시대였던 터라 한 학기를 다니기 위해서는 두 학기를 일해야 했다. 

등록금을 내고 나서 월세를 못 내는 건 너무 바보 같았으니까. 등록금도 내고 월세도 내고 나서 생활비가 없어 밥을 굶는 건 그나마 양반이었으니까. 물론 낮에 알바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해서 생활비와 장학금을 동시에 마련할 수도 있었다. 그걸 왜 못했냐고 묻는다면, 지독하지만 맞는 말이다. 내 또래의 정말 지독한 누군가는 그렇게 했으니까. 그분들을 존경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지독해지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게을렀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알바를 마치고 오면 저녁에는 담배 한 대 피우고, 맥주도 한 캔 마시며 좀 쉬고 싶었으니까. 안 그러면 주저앉아 울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지독해지지 않기로 했으니까. 

물론 그마저도 그리 성공적인 다짐은 아니었다. IMF와 금융위기가 만들어낸 사회에서 학생들은 학생운동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아무도 유행처럼 운동을 하지는 않았고, 사람이 항상 부족했고, 그래서 뭘 하든 1인 스타트업처럼 움직여야 했고,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가면 언제나 고시생들이 있었다. 고시반이라는 것이 점차 도서관 열람실 지분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시대였고, 그곳에는 살아남기 위해 지독해지기로 결심한 고시생들이 적자생존을 뇌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나만 힘들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모두가 그랬다는 것이다. 누구나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누구나가 병들어 있었다. 오죽하면 이 시대 청년들의 시대정신이 우울증이라고 했을까. 그렇게 누군가는 20대를 ‘가까스로’ 변변찮은 학점과 빚으로 얼룩진 졸업장, 마찬가지로 ‘가까스로’ 변변찮은 가난과 스트레스, 우울과 과로로 얼룩진 골연부종양암 진단서 한 장으로 마무리할 때, 누군가의 20대는 수백 시간의 봉사활동 시간과 논문 작성과, 인문계/이공계를 뛰어넘는 학력과 만점에 가까운 토익점수의 훈장으로 가득 채워졌다. 터무니없이 현실감 없는 이 스펙이 부러운 걸까? 아니, 부럽지 않다. 오히려 내가 부러운 것은 그런 거다. 그는 결코 토익 때문에, 등록금 때문에, 단지 먹고 자고 공부하기 위해 남을 해칠 각오로 지독해질 필요가 그다지 없었을 것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런 20대 삶의 경험은 분명 남은 인생을 빛나게 채워줄 훌륭한 자양분이 되겠지.

사람은 자신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더 크게 화를 낸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그 희망이 부정당할 때 절망하고 냉소한다고 한다. 심리상담을 공부하던 한 지인은 2016년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 문제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보며 “전 국민적 정신병”이라고 했다. 그 말뜻을 부연 설명 없이 즉각적으로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직도 홀로 살아남기 위해 지독해지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하고. 

청년.jpg
2019년 9월 11일,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의 대담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는 청년전태일 회원들.(@청년전태일)

여기까지 이야기를 따라오셨다면, 이제야 본래 이야기하고자 했던 ‘조국과 청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학벌 사재기가 문제일까? 누구나 돈과 여유가 있으면 현재의 제도를 최대한 유리하게 활용하려 하지 않을까? 맞는 말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사회적 신분을 보장해주는 가장 확고한 시스템이니까. 그 시스템은 한쪽에는 노력하지 않은 대가에 대한 처벌로서 평생 자기 혐오적 노동에 시달릴 것을 명령하고, 다른 한쪽에는 처벌받는 사람들에 대한 계급적 우월성과 특권을 보장하니까. 그래서 처벌받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우위에 서야 하니까. 그게 ‘공정’한 거지? ‘공정’하잖아? ‘공정’한 거야 그게.그렇게 우리는 조국 사태를 보며 한 가지 사실을 체화했다. 과거에도 ‘공정’하지 못했던 학벌 시스템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위 ‘진보’가 정권을 잡아도, 그것은 영원히 불공정한 계급 재생산 시스템으로 남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지독해지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최소한 게임의 룰이, 그 룰에 편승하여 이득을 보는 사람의 손에서 개혁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삶이 지독해진 것은 아니다. 마음이 지독해졌을 뿐. 그래서 청년들이 이렇게 분노하는 걸까? 아니다. 이것은 냉소다. 마음 한켠에서는 제발 틀렸기를 바랐던, 지독해져야 옳다고 믿던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리듯.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