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열심히 살았고 너무 많이 참은 너에게

by 센터 posted Apr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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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희 학생




활동하는 단체에서 학내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기 위해 쓴 글을 공개하기 전, 글에 언급되는 비정규직 당사자 선생님들께 글을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글이 좋다고, 그런데 한 가지만 고쳐 달라고 부탁하셨다. 글에 몇 번이고 등장하는 ‘정규직화’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꿔 써 달라는 것이었다. 

“정규직화라는 말은 되도록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래도 요즘 ‘정규직화’하면 다들 예민하니까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국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지침에서 발표한 정규직 전환 대상자에 해당했다. 글에서 상시 지속 업무를 수행하는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직 전환 심의위원회 개최를 요구하면서 ‘정규직화’,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을 더욱 힘주어 썼던 차였다. 그랬기에, 당사자의 이런 반응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명백한 정규직 전환 대상자인 노동자들을 정해진 절차를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적은 것 뿐인데, 학생들한테 이 이야기가 그렇게나 도전적으로 받아들여지려나? ‘정규직 전환’이라는 어구가 들어간 모든 문장에 ‘고용안정 보장’이라는 말을 고쳐 쓰면서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정규직화를 정규직화라 말하지 못한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람?’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근황을 나누던 중, 이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대화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친구는 나의 활동을 응원한다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비정규직들이 차별 받는 건 문제야. 나도 그건 동의해. 근데 차별 받는 거랑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는 건 엄연히 다르지. 비정규직을 정규직이랑 똑같이 만드는 건 오히려 역차별 아니야?”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제야 내게 부탁을 건넨 비정규직 노동자의 걱정이 이해가 됐다.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에 대한 세간의 반발, 특히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불공정하다는 여론이 표출되는 상황에서, 정규직 전환을 단호하게 요구하는 글의 주장이 학생들의 연대를 구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그는 그 점이 우려되었을 것이다.


이쯤 되니 정말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약자들의 요구에 힘을 싣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인 운동 방법이라고, 이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더 많이, 더 크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왔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시행하는 기관들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는 언론기사를 접하면서도 내 앞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손쉽게 지나쳤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혹은 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피곤한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개인적 동기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과의 논쟁을 회피하게 만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말해준 친구 덕분에 그동안 소홀히 했던 설득의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쉽게 취직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비정규직 없는 대학’을 단체 이름으로 내건 곳에서 활동하는 나로서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활동의 일부이기도 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공정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 제대로 된(즉, 정규직이 되려면 마땅히 거쳐야 할) 선발 절차로 채용되지 않은 비정규직들이 정규직과 동일한 지위를 갖는 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며 기회의 평등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려면 객관적이고 투명(하다고 여겨지는)한 획일적 평가 제도를 거치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이 그 직무에 적합한 능력을 평가하는 좋은 제도가 아님을 이들 역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들은 평가의 형식적 공정성에 집착하며, 경직된 선발 체계만을 고수하는 것일까?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금, 복지, 승진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평생 고용 불안에 시달리며, 안전마저 훨씬 위협받는 비정규직과 이들이 가지지 못한 혜택과 권리를 모두 갖는 정규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신분사회. 그러다보니 모두가 어떤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정규직이 되려고 한다. 작은 점수 차, 매겨지는 등수의 순서에 매달리게 되는 극심해지는 경쟁 속에서 공정성에 극도로 민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경쟁 끝에 어렵게 정규직 자리를 얻고 나면 정규직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자신이 노력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올해 가장 화제가 된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김주영 선생이 유출한 시험지로 좋은 성적을 얻은 예서가 시험지 유출 사건을 자수할지 고민하는 장면이다. 자수하면 학교에서 퇴학당할 것이고 그해 입시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엄마 서진은 예서가 어릴 때부터 모은 상장을 꺼내 보여주며 “우리가 이걸 어떻게 만들어 왔는데. 이날까지 너랑 나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잖아?”라고 말하고, 예서는 “난 진짜 열심히 살았어. 서울 의대가 너무 가고 싶어.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돼?”라고 눈물을 보인다. 드라마가 종영하고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이 장면만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진심으로 억울해 하는 예서의 모습에서 나를, 나의 친구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서는 정말 억울했을 것이다. 자신은 정말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왜 자신의 노력과 희생에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 진실된 억울함으로부터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또래 청년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피터지게 노력했고 대학에 와서는 학점 잘 받기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해 아등바등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갈구하며 현재를 유예하는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모두가 ‘진짜 열심히 산다.’ 그래서 너무 억울하다. 내가 들인 시간, 비용, 노력, 많은 것들을 희생한 채 취업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데,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이 손쉽게 나와 같은 자리를 꿰차는 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를 일으킨다. 이성은 둘째치고 우선 감정적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우린 너무 열심히 산다. 너무 열심히 살고 너무 많은 것을 참아온 나머지, 우리가 잊은 건 없을까. 


며칠 전 친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쏟아지는 전공과목 과제들과 시험, 스펙을 쌓기 위해 학업과 병행해야 하는 동아리 활동, 아르바이트와 자격증 준비, 이 모든 걸 잘해나가는 게 너무 버겁다고 토로하는 친구는 겨우 울음을 그친 채 “버텨야지, 버틸 거야. 달리 방법이 없잖아.”라며 스스로 위안했다.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며 생존경쟁의 비인간성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이 경쟁 체제가 이를 고스란히 내면화한 개인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우리가 갖춰야 할 미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대졸자와 고졸자 사이에, 이른바 ‘명문대’와 ‘지잡대’ 사이에 감당할 수 없는 격차를 벌여놓고 주어진 질서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는 노동 환경에서 고용 불안과 저임금을 감내하며 십 수 년을 일해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에 대해,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대해, 다만 정규직 노동자들이 통과한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차별’과 ‘무임승차’를 이야기한다면 앞으로도 이 경쟁 체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공고해질 것이다. 누군가는 승리할 것이고, 패자들은 승자들의 가치와 규칙을 내면화하고 자기들끼리 또 싸움을 벌일 것이다. 


시험 제도나 자격증 소지 여부 같은 규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두고 다투게 만드는 공정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주변의 또래 시민들과 이를 헤쳐 나갈 방법을 모색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이 경쟁이 너무나 유혈적이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이제 ‘주어진 판을 깨뜨리자’는 구호는 더 이상 급진적이지 않다. 주어진 판을 깨뜨리는 것만이 공공성과 연대가 희귀해진 이 시대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이다. 우리, 주어진 판을 깨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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