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곤운수 김태경 조합원

by 센터 posted Jun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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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태경.jpg


나는 버스 일한 지 통틀어 16년 됐어. 지방에서 사업을 하다가 IMF 때 사업이 자빠지면서 서울 올라와서 버스 일 시작하게 된 거지. 처음에는 범일운수라는 곳에 있었어. 노선버스, 시내버스 같이 하는 회사였는데 종업원이 600명 정도 되는 큰 곳이었어. 근 10여 년 가까이 근무했는데, 만 64세 연령 제한에 걸리면서 그만둬야 했어. 그러곤 2010년 11월에 이 회사에 입사했지. 여기선 일한 지 6년째야. 이 회사에선 배차시간을 식사시간 없이 짜버려. 한 바퀴 돌고 오면 밥 먹을 시간은 고사하고 쉬는 시간도 없이 바로 돌아나가야 해. 길게 쉬어봐야 5분 정도거든. 배차 시간 맞추려면 안전운전을 하려야 할 수가 없어. 그러다 접촉사고라도 나면 비용은 전부 개인 부담이야. 급여명세서에 가불금으로 처리해버려. 이 지경이란 말이야.

나는 새벽 4시에 집을 나선다고. 그래야 첫차 시간에 맞출 수 있어. 엔진 물 붓고, 오일 점검하고 에어 채우고, 다 체크해서 늦어도 5시에는 차고에서 출발해야 해. 그런데 회사에서 아침식사로 주는 건 빵 하나, 우유 하나가 전부야. 퇴근 때까지 그거 말곤 먹지를 못해. 마을버스 요금이 인상되었을 때도 기사들 임금을 올려주기는커녕 1년에 7천 원씩 쳐주던 근속수당을 없애버리더라고.

노조가 생기면서 싸우니까 하나씩 나아지고 있는 게 재미져. 그 전엔 차고지에 화장실이 없어가지고 노상방뇨하고 했단 말이야. 근데 싸우니까 간이화장실을 만들어주더라고. 밥시간도 겨우겨우 12분을 만들어놨는데, 아직 멀었어. 12분 가지고 밥 못 먹으니까. 지금 교섭 중인데 해고 협박에, 시급제인데 근무 시간도 줄여버리고, 회사의 노조 탄압이 말이 아니야. 내가 올해 73세인데 일 해봤자 1, 2년밖에 더 하겠어? 동지들하고 같이 웃고 하는 게 좋아서 하고 있는 거지. 열 명 남은 우리 동지들하고 잘 싸워야지. 어떤 불이익이 있어도 이게 정의라고 생각하고 하는 거니까. 우리는 성격이 그래.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고려관광 이창훈 지회장

by 센터 posted Jun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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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창훈.jpg


나는 60년생이니까 올해 57세예요.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웃음) 관광버스 일을 5년 했어요. 한 사업장에서 1년, 한 사업장에서 4년 일했죠. 그래도 사업장 바뀔 때마다 계약을 다시 하고 수습 3개월을 거쳐야 하니까 경력이 없는 것과 같아요. 게다가 처음 이 회사 들어와서 50일 동안 못 쉬었어요. 휴일에도 일을 해야 하고, 졸음운전에 죽겠더라고요. 쉬게 해 달라 통사정하다가 ‘그만두겠다’ 하니까 50일 만에 겨우 하루 쉬게 해주더라고요. 시내버스는 차량 한 대당 기사가 2.69명인데, 관광버스는 차 한 대당 기사가 한 명이 채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기사가 부족하니까 쉬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대기시간 포함해서 하루 20시간까지 해봤어요. 집에 가질 못해서 차에서 자고, 쉴 공간이 없으니까 트렁크 들어가서 쉬고요. 요즘은 차에 GPS가 달려있어서 시동 걸어놓고 히터나 에어컨 틀어놓으면 회사에서 공회전이다 뭐다 하면서 바로 전화 오니까 얼음장 같아도, 찜통이어도 트렁크 들어가 쉬는 거죠.

요즘은 출퇴근, 현장학습, 학교 수학여행 다 관광버스로 하잖아요. 안전이 정말 중요한데, 관광버스는 안전의 사각지대예요. 한 번 사고 나면 대형사고인데도 대책을 세우려는 곳이 없어요. 기사들은 과잉노동에 노출되고, 피로한 상태로 운전을 해요. 벼룩시장에 관광버스 기사 모집 공고를 보면, ‘경력 무관’이라고 나와 있어요.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이니 경력 무관한 기사를 뽑아 부릴 대로 부려먹는 거죠. 초보운전자들이 과로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장시간 운전을 하면 그 안전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어요? 문제 시정을 위해 저는 노조에 가입했어요. 나는 직영 기사였고 노조에 가입했다가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렸고, 지금은 해고되었어요. 해고투쟁을 2년 했지만, 아직도 복직되지 못했죠. 하지만 이런 것들을 꼭 알리고 싶어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학교비정규직 전산실무사 박귀화

by 센터 posted Mar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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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귀화.jpg


이 일을 한 지 올해로 15년 차에요. 올해 서른다섯이니까 스무 살 즈음에 이 일을 시작했죠. 큰 학교, 작은 학교 다 있어봤지만 거의 혼자 관리를 해요. 우리는 5분 대기조에요. 교사가 수업을 하다가 피씨(PC)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뛰어가서 처리를 해줘야 해요. 학년 말 교실이 바뀌면 피씨 포맷을 하고 아이피를 잡는 등 컴퓨터 사용과 관련된 모든 작업을 해야 해요. 그 외에도 피씨, 텔레비전, 실물화상기, 비디오 다 관리하고 고치고, 나르고, 수업 지원에 공문 처리까지 업무가 너무 많아요. 저희는 개인정보 보안 감사까지 나와요. 그런데 공문 보고는 저희가 하고, 수당은 정보부장님이 받아가요. 우리 이름으로 보고하지 말라고 교감 선생님이 지시해요. 일은 우리가 하지만, 이름도 없는 투명인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병설 유치원이 있으면 유치원 업무까지 겸임해야 해요. 근로계약서에도 안 나와 있는 업무인데, 거부하면 근무 평가가 나빠지니까 어쩔 수 없이 하죠. 심지어 손님들 차 접대, 수영장 청소, 운동회 때 운동장에 의자 깔기, 태극기 달기, 홈페이지 관리 등 온갖 업무를 떠맡겨요. 뿐만 아니라 피씨 고치는 일부터 핸드폰 사진 옮기는 것, 영화 다운 받는 것 등 개인적인 심부름들도 시켜요.


저는 여성이지만 남성들과 똑같이 일해요. 혼자 일하니까요. 컴퓨터도 몇 대씩 옮겨야 해요. 얼마 전에 컴퓨터를 옮기다가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내 부주의라는 거예요. 계속 빨리 빨리를 주문하면서 다치면 네 잘못이라니, 너무 하잖아요. 우리는 비정규직이 아닌 한 사람의 노동자예요. 인간적인 대우를 바래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초등학교 사서 권용희

by 센터 posted Mar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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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용희.jpg


딸 하나 아들 하나 있어요. 작은애가 4학년 때, 큰애가 6학년 때 처음 일을 시작했죠. 저희는 사서 자격증 우대로 뽑긴 하지만 사서 대우는 안 해줘요. 실무사 자격으로 뽑는 거죠. 저는 사서지만 실무사로 묶여있어서 상장 출력 업무도 해요. “뭐 그렇게 말이 많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교감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교감 선생님은 대꾸하는 걸 싫어하세요.


책이 오래되면 결재 받고 폐기를 하거든요. 한 번은 폐기되는 도서가 너무 아까워서 학급문고로 활용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라벨을 전부 다 떼고, 폐기도서 있으니까 학급문고 필요하면 가져가시라고 메신저로 전체 메시지를 보냈다가 교감 선생님한테 혼났어요. 담당 선생님이나 연구부장님한테 연락을 해서 그 두 분 이름으로 보내야하는데 제 이름으로 보냈다는 게 이유였어요. 저는 학교 내에서 단지 실무사일 뿐이에요. 시킬 땐 사서고, 불리할 땐 실무사가 되요. 내 노동에 대한 존중이 없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전부 사서는 비정규직이에요. 지난번 파업 때 교감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왜 파업을 하냐 물어보시길래 식비를 하나도 못 받고 있어서 그렇다고 말씀드렸어요. “우리도 조금밖에 못 받는다.” 하시기에 “우리는 조금도 못 받습니다.” 그랬더니 똑같이 되려고 하지 말래요. 저는 똑같이 해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적어도 복지는 똑같이 해달라는 거예요. 저도 제 일터에서 제 노동에 대해 존중받으며 일하고 싶어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학교시설기동반 정훈록

by 센터 posted Mar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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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훈록.jpg


저희가 속해 있는 시설기동반은 교육청 소속 직속기관이에요. 학교의 시설보수 일을 하죠. 매일 아침 시설사업소로 출근해서 오더를 받아요. 설비, 방수, 조경으로 분야가 나뉘어져 있는데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일을 나가요. 초·중·고등학교 전부 나가고 다시 사업소로 와서 장비 정리하고 퇴근하면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죠. 나무도 자르고 전등도 교체하고 변기도 뚫고 세면대도 수리하고 온갖 일을 다 해요. 노동 강도가 센 편이에요. 사고도 많고요.


그동안 우리는 11개월씩 계약을 했거든요. 2월부터 12월까지 일을 하고 계약 만료되면 1월에는 실업급여 받으면서 쉬어야 해요. 그리고 다시 또 서류부터 원서를 다시 내고 서류 통과되면 실기시험도 다시 보고요. 계속 일해 왔던 사람이니까 별문제 없으면 뽑는데, 말 잘 안 들었던 사람, 불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골라서 떨궈 버리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공무원들 눈치를 보게 되요. 과장이 “왜 이 정도밖에 일 못했냐.” “이런 식으로 말 안 들으면 사업소 다 없어질 거다.” 이런 이야기들도 묵묵히 들어야 해요. 얼마 전에는 심장 판막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한 사람이 있었어요. 사람인데 몸이 갑자기 아플 수 있잖아요. 무급으로 병가를 쓰는 데도 한 달 지났으니 사직서를 내라는 거예요. 너무 부당하잖아요. 그래서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연말 계약 만료되고 새로 뽑을 때, 오래 일한 사람들을 노조 가입했다는 이유로 다 해고한 거예요. 결국 교육청 가서 46일 농성하고서야 ‘조합원은 다시 채용 과정 거쳐서 채용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요. 40~50대들이 비굴하게 살지 않으려고 농성을 한 건데 그 과정에서 생계 때문에 떠난 사람들이 있어요.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보조출연자노동조합 지도위원 김형모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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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3.김형모.jpg


드라마를 보면서 한 번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이 일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일을 시작한 지 올 해로 20년 되었네요.


우리는 소속이 없어요. 각 기획사에 우리 이름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일이 있을 때마다 부르고 제일 먼저 연락 온 데를 우선으로 가는 거야. 일용직이죠. 우리는 전속배우들과는 달라요. 촬영장에는 등급배우들이 있고, 단역배우들이 있고, 그리고 우리, 보조출연자들이 있어요. 같이 촬영을 해도 받는 돈이 하늘과 땅 차이죠. 우리는 무등급이니까, 영원한 엑스트라지. 일지를 모아서 가져가면 돈을 주는데 촬영을 하면 두 주 후에 방송이 나가요. 그러고도 두 달 후에 돈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일용직이라서 돈을 그날그날 줘야 하잖아요, 원래. 촬영을 할 때마다 일지를 주고, 대사가 있으면 일지 한 장 더 쳐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한 장을 더 안 주는 거예요. 이야기를 해야겠더라고. 말 하니까 주긴 줬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일을 안 주는 거예요. 그때 항의를 했던 반장 프로에는 아직도 못 들어가고 있어요. 반장 권한이 대단해요. 반장이 일거리를 받아와서 일을 주니까 그래요. 나는 그때 항의를 하면서 사실 이런 상황을 각오했어요. 노동조합도 그 각오로 하고 있는 거예요. 각오 없이는 못해요.


원래는 12시간에 2만 원 남짓한 돈을 받고 일했어요. 한 달 최저 임금이 안 되는 돈을 받았죠. 그런데 노동조합이 생기고서 많이 나아졌어요. 근로자성을 인정받아서 이제는 연장·야간·철야수당도 받아요.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만,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싸우고 있으니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죠. 다 좋아질 것 같아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보조출연자노동조합 지도위원 임송림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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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2.임송림.jpg


우리 애가 토끼띠니까, 올해 마흔 하나네요. 그 애가 세 살 때 이 일을 알게 되었어요. 보조출연자라는 일을요. 전화도 놓으려면 일 년, 이 년 기다려야 했던 때였어요. 사람 동원하는 아줌마가 있어 내 아이를 출연시킨다고 데리고 가겠다고 하대요. 삔 예쁜 거 한 쌍 사면 2천 원인데, 그거 꽂아서 보냈어요.


나는 작은 애가 있으니까 촬영장을 못 따라갔는데, 새벽에 간 애가 밤 10시가 되어도 안 오는 거예요. 밤늦게 애를 데리고 와서는 촬영을 못했다고 한 푼도 안 주는 거야. 애가 오래 빨지도 않은 가발을 쓰면 얼마나 가려워요? 애기만 고생시키고. 나중에 보니까 애기는 애기 엄마 몫까지 두 몫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한 푼도 안 준 거예요. 내가 이 바닥을 아나요, 뭘 아나요? 아무 것도 모르는 엄마였어요. 출연료를 그렇게 못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아줌마가 돈을 다 먹어버린 거더라고. 그런데 벌어먹어야 하니까 어떡해. 그런 줄 알면서도 나중엔 나도 그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내가 일을 시작할 당시에는 보조출연자 업체가 한국에서 하나였어요. 친목회 방식이었는데, 동네마다 지부장들을 두고 친한 사람들 불러다가 일을 맡겼죠. 그러다 주식회사가 된 거예요. 주식회사가 된 후로 반장들이 생겼는데, 초기에는 빽이랑 주먹으로 반장을 했지. 반장이 욕을 하거나 보조출연자들을 때리는 일도 허다했어요. 지금도 반장이 마음대로 해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집에 가라고 해요. 한 번은 누가 졸고 있는 사진이 반장한테 들어간 거예요. 아니, 밤을 새고 촬영을 하는데 안 졸겠어요? 그런데 반장이 지부에 전화해서 이 사람 일  주지 말라고 했고, 진짜 일을 안 주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서럽냐고. 나도 지금 노동조합 지도위원으로 있다는 이유로 반장이 나한테 일을 안 줘요. 40년 동안 이 일을 해왔는데, 일을 못하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내 속이 다 썩어 문드러졌지. 아무도 몰라요, 그 심정은.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 문계순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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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1.문계순.jpg


오십 하나, 아이들 다 키워놓고 일을 시작했어요. 열일곱에 원풍모방을 다니면서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는데, 오십 하나에 일을 하고 보니 노조가 없으면 안 되겠다 싶어 시작했죠. 현장이 너무 엉망이었거든요.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네요.


우리 일이 묘한 데가 있어요. 드라마는 KBS건데, 외주제작사가 그걸 받고, 외주제작사는 또 반장을 받고, 반장은 또 용역회사를 받고, 이렇게 얽히고설켜 있거든요. 이 잘못된 구조를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방송사가 용역을 주면서 도급이라고 주장하는 건데요. 우리는 도급이 아니라 파견이에요. 방송사 촬영 현장에서 우리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시키는 건 PD예요. 파견이죠. 이번에 노동부에 진정서를 넣었어요. 우리가 파견인지 도급인지 공급인지 확실히 이름표를 정해달라고요. 파견이 인정되면 4대 보험 적용되고, 주휴수당, 연차수당 다 받을 수 있거든요.


거대 방송사가 원청이잖아요. 갑질 논란이라는 게 이 바닥이 최고예요. 그들이 지금 외주를 주고, 파견을 두면서 20퍼센트 이상을 떼먹기 때문에 우리 출연자가 백날 일을 해도 받아가는 돈은 쥐꼬리만큼 밖에 안 돼요. 최저 임금도 못 받다가 노동조합 만들면서 이제 겨우 최저 임금을 받게 되었는데, 이동 시간, 대기 시간 다 잘라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최저 임금이 안 되는 거죠. 법에 위배되는 부분들을 정상화시켜달라는 거예요. 일한 만큼 대가를 분명히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하루만, 단 하루만 우리 출연자들이 촬영 안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바뀔 거예요. 우리 출연자들이 하루만 둔치에 모여 신바람 나게 놀면 3사 방송 사장들이 찾으러 올 텐데 말이에요. 이소선 어머니가 생전에 매일 하시던 이야기가 ‘단결하라’였잖아요. ‘그래야 세상을 바꾼다’ 하셨는데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단결이 안 되었지. 하지만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다는 바람과 믿음이 있어요. 바뀔 거예요, 반드시.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동양시멘트 사내하청 노동자 최창수

by 센터 posted Dec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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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최창수.jpg


나는 95년도 입사입니다. 군 제대하고 3일 만에 들어갔어요. 나는 컨베이어 벨트랑 기계 파트에서 일했어요. 동양시멘트 하도급 업체는 ‘동일’하고 ‘두성’이 있습니다. ‘동일’은 장비업종이고, ‘두성’은 인력업종입니다. 산을 발파해서 돌을 깨서 운반 장비가 덤프트럭에 싣고 맷돌 기계에 붓습니다. 그러면 기계가 돌면서 돌을 부수죠. 그게 벨트라인 타고 가는 겁니다. 인력업종은 그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작업하거든요. 제일 처음 들어간 곳은 분진가루 퍼내는 곳이었어요. 나는 동양시멘트 안에 있는 광산 쪽 하청업체는 다 돌아다녔어요. 해당 부서 일만 시키는 게 아니라 온갖 잡일을 다 시켜요. 대기실에 앉아있지도 못하게 해요. 장갑이나 귀마개도 정규직들만큼 주지 않으니까 늘 모자라고, 눈치 보며 쓰곤 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어요. 벨트는 위험하거든요. 돌아가는 회전체니까요. 흙이 벨트에 붙으면 떼 내야 하거든요. 원래는 벨트를 세워서 떼 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어쩔 수 없이 벨트 세우지도 않고 망치질 하는 거예요. 8시간에 만 톤에서 만이천 톤 생산량을 내라고 요구하고, 못 내면 뭐라고 하니까요. 손이 딸려 들어가기도 하고 손톱도 많이 빠졌어요. 계속 손톱이 빠지니까 이젠 재생이 안되요. 산재요? 산재는 무슨 산재. 안 해줘요. 병원 가서 약 좀 바르고, 붕대 감고, 쉬지도 못한 채로 일해요. 손톱 하나 빠지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아야 해요. 자주 다치다보니 사람이 둔해지는 거죠. 공상처리도 안 해주는 경우가 많아요. 내 부주의 때문에 다친 거라고 하거든요. 하면 안 되는 걸 했다는 거예요.

구정 앞둔 어느 날이었던가요. 우리는 서로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서 일을 하니까 식사시간, 퇴근시간에만 서로 얼굴을 보거든요. 씻고 집에 가려니까 한 사람이 안 올라오더라고요. 그래서 랜턴 들고 찾으러 갔더니 벨트 쪽에 사람 다리만 보이는 거예요. 정년퇴직을 앞둔 분이었는데 그렇게 질식사로 돌아가셨어요. 벨트에 말려서 돌아가신 분만 해도 몇 분 됩니다. 언론에서 크게 안 떠들어서 그렇지. 서로 쉬쉬 하잖아요. 사망사고 나면 안전과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게, ‘사람은 들어가지 말라’는 안전망 표시를 붙여요. 경찰 오기 전에요. 없었던 건데 원래 있었던 것처럼 붙여버려요. 노동자들도 경찰에게 ‘원래 우리는 이렇게 작업 안 한다’고 이야기해야 해요. 내가 살기 위해서요.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예요. 그런 현장에서 여태까지 일했어요. 억울해서라도 버틸 거예요.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동양시멘트 사내하청 노동자 안상영

by 센터 posted Dec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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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안상영.jpg


나는 1993년도에 입사를 했습니다. 올해 만 56세입니다. 다음달 12월 31일이면 정년입니다. 처음엔 컨테이너 박스 하나 갖다 놓고 시작했습니다. 20년이 넘은 폐차 직전의 장비를 갖고 광산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얼마나 장비가 오래되었는지 뚝뚝 끊어지는 배선을 다시 엮고,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문을 끈으로 묶어 가며 일했습니다. 가다보면 타이어가 빠져나가기도 하고, 차가 한쪽이 떨어져나가서 넘어지기도 하고요. 에어컨도 히터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해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너희들은 왜 물량을 못 내냐? 그럽니다. 정규직들은 새 차로도 그 물량을 못 내는데, 장비를 정비해가면서 더 이상 어떻게 물량을 냅니까. 노천 광산에선 덤프트럭이 커브 길을 돌다보면 싣고 있던 돌들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바퀴 달린 도저가 그 돌을 치워주게 되어있어요. 그건 정규직들에게만 해주더라고요. 우리 하청 노동자들은 직접 내려가서 돌을 치워가며 일해야 합니다. 그 설움은 말로 다 못합니다. 정규직들에게 온갖 차별대우를 받아가면서 뼈 빠지도록 진짜 열심히 일했습니다. 차별을 좀 줄여보자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왜 해고를 시킵니까? 왜 계약해지하면서까지 해고를 시키느냔 말입니다. 연말에 정년 무렵에 부부 동반으로 회사에서 해외를 가게 해 주거든요. 내 평생 해외 한 번은 갈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그것도 못 가게 되었습니다. 해고가 되었으니까요.

나는 진짜 몰랐습니다. 내가 왜 이 회사에게 가압류를 잡혔는지, 집이 잡히고 통장이 잡혔는지…. 아내한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진짜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술을 한 잔 먹고서야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맨땅에 침낭 하나 놓고 농성을 했습니다. 요즘은 천막이 이렇게 모양새를 갖췄지만,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바닥의 습기 때문에 허리가 찢어질 정도로 아픕니다. 올 겨울은 어떻게 나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회사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년이 다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같이 싸워서 우리 동생들, 정규직 복직하는 모습 보고 싶습니다.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동양시멘트 사내하청 노동자 이재형

by 센터 posted Dec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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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재형.jpg


두 사람으로부터 노동조합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같이 해볼래? 한 명씩, 한 명씩 그렇게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날이 기억납니다. 일요일 5시였어요. 처음 모인 자리에서 우리는 총회를 열고 지부장, 부지부장, 조직부장을 선출했습니다. 일사천리로요. 그동안 너무 차별 당해왔으니까요. 사실 다들 노조의 필요성은 아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을 뿐이었거든요.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동해 사무실에서 상담을 했죠. 우리는 우리가 하청의 정규직인 줄 알았는데, 명백한 불법파견의 근거가 있다는 겁니다. 위장도급 판정은 잘 안 내려지니까, 불법파견, 위장도급을 같이 가져가보자는 거예요.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어요.

노동부 판정이 보통 70일이면 나오는데, 노동부에서 계속 판정을 미뤘어요. 8개월이 지나고, 노조 간부 몇 명이 노동부 지청장을 찾아갔습니다. 계속 조사 중이다, 그런 말만 반복하더라고요. 1차로 4시 퇴근하는 조합원들, 2차로 밤 12시에 퇴근하는 조합원들이 모였고, 노동부 지청장실에 수십 명이 들어가 앉았습니다. 답을 언제까지 주겠다는 문서를 받고서야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받아낸 것이 위장도급 판정입니다. 직접고용하라는 통보를 받고 동양시멘트는 하청업체와의 도급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하청업체는 우리에게 집단으로 해고를 통보했고, 우리는 그렇게 해고가 되었습니다. 설 전날이었습니다. 나는 2000년 10월 4일 입사했습니다. 내가 14년 4개월 동안 다닌 ‘동일주식회사’, 아니   ‘동양시멘트’는 그렇게 우리를 버렸습니다. 2월 28일 해고되던 날에, 우리 젊은 조합원이 결혼을 했어요. 해고되고 출산한 조합원도 있고, 이혼한 조합원도 있어요. 이런 고통과 아픔에 대한 피해는 어디 가서 보상받나요? 조합원들에게 손배가압류가 16억이 잡혀있습니다. 당신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저는 억울하니까 큰 소리로 외칩니다, 아주.

내가 올해 마흔 넷이니 나는 그곳에서 청춘을 바쳤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네팔 이주 노동자 로산 라이

by 센터 posted Oct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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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3.로산.jpg


나는 네팔 사람이에요. 2012년 5월에 한국으로 왔어요. 그때 나이가 스물두 살이었어요. 한국이 좋았어요. 한국 영화도 많이 봤고, 한국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말을 배웠고 이곳으로 왔어요. 하지만 와 보니까 일이 너무 힘들어요. 일 시키는 회사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 많아요. 월급도 잘 안 줘요. 기숙사도 잘 안 주고, 기숙사를 줘도 월급에서 많이 깎아요. 법에 규정된 노동 시간보다 더 많이 일 시키면서 수당도 주지 않아요. 더 힘든 일을 시키면서 돈은 훨씬 적게 줘요. 이주 노동자도 한국 노동자들하고 똑같이 돈 받아야 해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우리 이주 노동자도 사람이에요. 일 열심히 할 때도 그런 나쁜 말들 들으면 일하기 어려워요. 욕 먹고 그러면 울고 싶어요. 마음도 아파요. 똑같은 사람인데 같은 마음으로 대해줘야 해요. 지금 제일 많이 문제되는 것은 농업 이주 노동자들이에요. 농사일 하는 친구들 많아요. 원래 일요일마다 쉬어야 하는데, 농사일 하는 친구들은 한 달에 한두 번 밖에 못 쉬어요. 일하는 사람들은 다 일요일이면 쉴 수 있어야 해요.


나는 첫째 아들이에요. 고향에 돈을 보내야 해요. 나만 외국에 나와 있어요. 가족은 다섯 명. 이주 노동자들은 몇 년 동안 가족과 만날 수 없어요. 하지만 돈을 벌어서 가족들에게 보내야 가족들이 먹고 살아요. 법으로는 최대 4년 10개월만 있을 수 있는데, 돈을 더 벌어야 하니까 불법 노동자가 되는 사람 많아요.


2015년 6월 25일 대법원에서 이주노동조합이 합법이라는 판결이 있었어요. 오늘 여기서 이주노조도 합법화 되었어요. 앞으로 한국 정부와 함께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뻤어요. 연대해주신 분들도 고맙습니다. Labor is the one. 노동자는 다 같아요. 우리는 함께 모여서 우리의 권리를 찾아야 해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 나즈물 후사인

by 센터 posted Oct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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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2.나즈물.jpg


비가 며칠 간 많이 왔지만, 우리는 지붕이 있어 별다른 문제가 없었어요. 고용노동부 건물 바깥으로 나가라는 항의를 듣기도 했는데, “그럼 이주노조 설립필증을 빨리 내라. 그럼 우리 빨리 갈 거야.” 그렇게 대답해줬죠.(웃음)


나는 2006년에 한국으로 왔어요. 올해로 9년 되었네요. 처음에는 산업연수생 비자로 왔어요. 처음 일을 한 곳은 염색공장이었어요. 그냥 사무소에서 그리로 보냈어요. 나한테 묻지도 않고요. 하루 12시간 동안 일했는데 급여는 다른 한국 노동자들보다 훨씬 적게 받았어요. 다른 사람 월급은 200만 원인데 나는 왜 60만 원이냐고 사장님한테 따졌더니 “너는 기술 배우러 왔잖아. 학생이니까 학생 월급을 받아야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또 “새끼야!”, “씨발!” 그런 말들을 자꾸 했는데, 한국말 잘 모를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무서웠어요. 때리려고 하고. 너무 괴롭혀서 그 회사 그만두고 안산에 있는 다른 회사로 옮겨야 했어요.


나는 방글라데시에서도 학생 운동을 했었어요. 지금 나는 난민이에요. 커뮤니티를 만들어 난민 활동도 하고 있어요. 난민들은 한국에서 취업을 할 수가 없어요. 인천공항에서는 난민인 게 확인되면 인천 출입국 보호소에 넣어버려요. 지금 감옥에 2,300명 난민들이 갇혀 있어요. 말도 안 되잖아요. 우리는 깃발을 세우고 투쟁할 거예요. 나는 2011년 말에 난민 신청을 했어요. 출입국 사무소에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이주노조 활동이 정치적인 활동이라서 난민으로 받아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노조 활동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요. 나는 혼자 잘 사는 것보다 같이 잘 살고 싶거든요.


우리는 아파도 병원에 못가요. 사장님은 그렇게 말해요. 병원에 가지 마. 회사 바쁘다. 아파도 일을 해야 해.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니잖아요. 우리도 아플 수 있어요. 회사 사장님들이 이해 못해요. 고용허가제도는 사장님 마음대로 하도록 되어있는 제도예요. 우리는 노조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투쟁해 나갈 거예요. ‘고용허가제 폐지! 노동허가제 쟁취!’를 위해 계속 싸워야죠. 우리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네팔 이주 노동자 우다야 라이

by 센터 posted Oct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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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1.우다야.jpg


나는 2003년 한국에 왔어요. 처음 일한 공장은 봉제공장. 금속공장에서도, 책상 만드는 공장에서도 일했어요. 6년간 공장 노동자였어요. 처음에 들어왔을 땐 어느 사업장으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보내졌고, 그런 일은 지금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어요. 월급도 제때 안 줬어요. 항의도 해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찾았고, 이주노조에 가입하게 되었죠. 이주노조 합법화 하라, 단속추방 반대, 고용허가제 폐지 이런 목소리들이요.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당하면 안 되니까요. 그렇게 정부와의 투쟁이 시작된 거예요.


차별도 너무 심하고, 고용허가제도 계속 개악되어 왔어요. 노무현 정부 때 고용허가제 실시하고, 이명박 정부가 강화했잖아요. 박근혜 정부는 그걸 더 강화하고 있는 거예요.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 많이 박탈하고 있어요. 사업장 변경할 때 이주 노동자들에게 공장 리스트도 주지 않아요. 사업장 퇴직금도 출국해야만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다보니 퇴직금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아요. 사업장 변경하는 노동자들은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사업장 변경 안 하는 노동자들은 사업자가 원하면 다시 들어오게 해줘요. 사업장을 변경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이런 제도들에 나는 너무 화가 나요.


2005년 3월에 처음 이주노조 설립필증을 신청했어요. 10년 싸움이었잖아요. 그동안 우리 동지들도 많이 잡혀갔고요. 정당한 요구를 한 것 뿐인데 왜 이렇게 잡혀가야 하나. 억울했어요. 이주 노동자를 무시하는 정부의 그런 태도들로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노숙농성을 하게 되었고요. 이렇게 안 하면 안 줄 것 같았어요. 이주노조 설립필증 교부를 반려시킨 이유가 ‘정치 운동 금지’인데, 어떻게든 안 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제도가 나쁘다고 주장할 수 있어요.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정당한 요구예요. 규약에 넣으면 안 된다, 정치 운동이다라고 하면서 설립신고필증 발급을 미루는 건 노조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주 노동자 합법화와 노동허가제 쟁취를 목적’ 부분을 ‘사회적, 경제적 지위 향상’으로 바꾸면서 규약 문구는 양보를 했지만 우리의 활동을 양보한 건 아니에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숙농성을 하면서 네팔, 방글라데시,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의 응원 메시지가 페이스북에 올라왔어요. 사회적 약자인 이주 노동자들은 투쟁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런 걸 다시 한 번 확인했어요. 정당한 요구를 하면 승리할 수 있어요. 오늘의 승리는 연대와 동지들의 힘이에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기아차 1차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조덕구

by 센터 posted Jul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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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덕구.jpg


나는 27살에 이 공장에 들어왔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니 IMF가 터졌어요. 나는 직업훈련소에서 지게차 자격증을 땄고, 이 공장에 취직을 했죠. 진로를 찾을 여유가 없었어요. 비정규직으로 온갖 부당한 처우들도 견딜 수밖에 없었죠. 못살겠다! 싸워보자! 그런 마음으로 2005년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만들었고요. 처음 싸우던 날이 생각나요. 출근을 하는데 출입문에서 우리 업체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깃발을 흔들고 있더라고요. 낯설기도 했는데, 가슴이 뛰었어요. 요구안을 회사에 전달하고 첫 잔업 거부를 하려고 모여 있었죠. 우리가 일을 안 하면 조립라인이 바로 정지되거든요. 생산에 바로 지장을 주는 거예요. 회사에서도 부담이 되었는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죠. 그날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어요. 탄압이나 징계, 해고를 감수하면서 정말 열심히 싸웠어요. 그 결과 처음 단체협상 체결할 땐, 비정규직 노동조합 최초로 원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도 했죠. 지금은 예전처럼의 차별도 없어졌고, 임금도 많이 올랐어요. 당시의 싸움들 덕분이에요. 하지만 지금 공장 내 분위기는 2005년 우리가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 때 같진 않아요. 1사 1노조로 조직 통합이 되면서 투쟁이 거의 없어졌거든요.

하지만 올해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가지고 국가인권위원회 전광판에 올라간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어요. 2010년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므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어요. 2014년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468명에 대해서도 같은 판결을 내렸죠. 지난 5월 12일, 정규직 노동조합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3,400명 중에 465명을 정규직 신규 채용하기로 회사와 합의를 해버렸어요. 나머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제 정규직이 될 길이 없어진 셈이죠. 이 모든 사태에 대해 항의하며 시작된 고공농성이에요. 우리의 요구가 꼭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기아차 2, 3차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이동우

by 센터 posted Jul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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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동우.jpg


나는 2004년 2, 3차 하청업체에 입사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잘 안 나네요. 내가 일했던 곳은 대진물류라는 곳이었어요. 관리자 두세 명 포함해서 주야로 30명 정도가 일을 했죠. 공장 바깥에 있는 업체에서 기사 노동자들이 큰 트럭에 부품을 싣고 오면, 그것을 내려서 메인 라인 작업장까지 전기차를 끌고 가서 주고, 빈 차를 수거해오는 일을 했어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실수가 날 수 있잖아요. 잘못된 부품이 왔다거나, 부품이 불량이거나 하면 방송을 해요. 대진물류 영업사원 어디로 와달라고요.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죠. 당시에는 자다가도 ‘대진물류’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고 그랬어요.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멸시였어요. 잘못된 부품이 들어오면 그걸 들고 와서 바닥에 던지면서 욕을 했어요. 뿐만 아니라 연월차 사용이나 조퇴도 자유롭지 못했고, 저임금이었죠. 일도 힘들어서 이직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하청업체 사장이 원청에서 지급한 도급비를 중간에서 떼먹는 경우도 많았어요. 보급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서 장갑 같은 걸 빨아서 쓰거나, 정규직이 버린 것을 가져다 쓰기도 했어요.

이런 일련의 부당함들 때문에 2005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 금속노조 경기지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를 만들었어요. 회사에 노동조합 활동을 위해 취업 규칙에 다른 정당한 휴직 요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나는 해고가 되었어요. 2006년 복직 권고를 했지만, 공장 밖으로 복귀하라고 해서 합의가 파기되었고 또다시 해고되었죠. 2008년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정규직 노동조합과 1사 1조직으로 통합이 되면서, 2, 3차 사내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조합원에서 배제되었어요. 당시 비정규직지회 부지회장이었던 저도 그때부터 조합원이 아니게 된 거죠. 지금껏 복직 투쟁을 하고 있지만 아직 복직되지 못했어요. 조합원이 아니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공장 안에는 2, 3차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계약직, 일용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들도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고, 노동조합에 가입해 노동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어요. 그들의 권리를 위해서도 노동조합이 함께 싸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경찰청 의경부대 계약직 영양사 함은용, 신진숙, 김영례

by 센터 posted Jul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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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찰청.jpg


저희는 경찰청 의경 계약직 영양사들입니다. 이 곳에서 일한 지는 올해로 2년 되었어요. 2013년 공개채용 합격 통지서를 받고 아산에 있는 경찰 교육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잘 오셨다. 우리는 20년, 30년 끝까지 갈 가족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희는 한 달 최저 임금에서 만 원 더 받아요. 수당도 없어요. 오버타임도 인정 안 해주죠. 그 전에는 경력이 있으니까 연봉 3000만 원까지도 받아온 사람들이거든요. 어떤 선생님은 탈의실이 따로 없어서 식당 한구석에 파티션 치고 옷을 갈아입기도 했어요. 부대 내에 여자 화장실이 없는 곳도 있어서 맞은편 아파트 상가 화장실을 썼던 분도 있었고요. 이 모든 열악한 환경들을 견딘 이유는 2년 뒤 무기계약 전환에 대한 경찰청의 약속 때문이었어요. 법도 그렇잖아요.

경찰청 의경 영양사는 저희가 처음이에요. 그 전에는 영양사 없이 선임이 후임을 지도하는 형태였는데, 조리법도 일정치 않고, 영양소 균형도 제멋대로인 데다 비위생적이었어요. 평소에 계란 프라이도 안 해본 대원들이 많거든요. 그들에게 영양사는 꼭 필요해요. 저희는 그들에게 조리 지도, 위생 교육, 청소 지도를 하고, 식단을 준비하고, 검수, 발주 등의 일을 이제껏 해왔어요. 그런데 얼마 전, 6월 30일부로 1기에 뽑힌 계약직 영양사 37명이 모두 계약 해지될 거라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어요. 예산이 없어서래요. 그리고 우리가 나간 자리에 다른 계약직 영양사들을 뽑겠대요. 공공 부문에서 앞장서 비정규직을 쓰다 버리는 게 말이 되나요? 우리는 전에 ‘노동조합’의 ‘노’자도 몰랐던 사람들이에요. 겁도 많이 났어요. 하지만 이런 부당한 해고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였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이혜정 기록 노동자


정안석_인천공항지역지부 사무처장

by 센터 posted Jun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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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석사무처장.jpg


항공기가 계류장에서 진입을 하면 브리지가(이동 탑승교) 항공기에 붙는데, 그걸 유지 보수하는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어요. 9년차입니다. 130대의 탑승교에서 계속 데이터가 와서 서버에 저장이 되는데, 저는 그 서버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유지 보수 업무는 장애가 나면 바로 가서 조치하는 일이에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태풍이 불어도 밖에서 일해야 하는 게 힘들어요. 일하다 사망한 적도 있어요. 탑승교 바퀴가 사람 몸 만한데 그걸 교체하는 과정에서 바퀴가 터져서 사고가 났던 거죠. 그런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에요.

우리는 계속 일을 하고 있는데 3년에 한 번씩 계속 업체가 바뀌어요. 신규는 자기네들(하청업체)인데 우리한테 신규 입사자라고 해요. 신규 입사자는 연차가 없어요. 6천 명 중에 노조가 없는 4천 명은 연차도 없이 일하고 있어요. 원청은(공항공사) 인사권·경영권은 하청업체에 있다고 하지만, 과업내용서라는 문서에 보면,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고 볼트는 어떻게 조여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세세하게 들어가 있어요. 원청과 하청업체 인건비 차이는 두 배가 넘어요.

현장에서 시설을 관리하고 승객을 응대하는 건 비정규직들이 다 하고 정규직들은 업체 관리만 해요. 그런데 마치 자기들 성과인 것 마냥 성과급을 천만 원 이상씩 가져가요. 그래서 2013년 12월에 파업을 했어요. 일은 우리가 하는데 왜 성과급은 너희들이 가져 가냐고 했더니 명절에 30만 원씩, 그것도 평가를 해서 차등 지급했어요. 우리 인건비는 공항공사 사업비로 책정이 되어 있어서 기획재정부를 통과해야 해요. 그래서 원청은 우리 인건비를 마음대로 올려줄 수 없다고 해요. 인건비도 문제지만 가장 힘든 게 업체가 바뀌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잘려나가는 거예요. 신규업체가 원래 일하던 사람에 대해 뭘 알고 평가를 하겠어요. 업체가 바뀌어도 고용 승계하겠다는 확약서를 원청에게 받는 게 시급한 일이에요.

소방대에서 일하는 분들도 비정규직들이에요. 화재가 나도 문을 부수고 불을 꺼야 하는데 허가를 받아야 해요. 시설관리, 소방, 탑승교 모두 안전을 책임지는 업무인데 수동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 언론에 기획 기사가 실린 적이 있어요. ‘인천공항에 내려서 출국하는 그 순간까지 정규직은 한 명도 없다’라는 내용의 기획 기사에요. 그 기사가 참 와 닿았어요. 면세점에서 물건을 파시는 분들도, 청소하시는 분들도, 저도 모두 다 비정규직인, 비정규직 공장이에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변정윤 센터 사무국장


박대성_인천공항지역지부 지부장

by 센터 posted Jun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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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지부장.jpg


저는 공항에서 보안 검색 일을 10년째 하고 있는 박대성입니다. 공항에는 일반 구역과 보호 구역이 있어요. 보호 구역은 비행사, 정비사, 직원들이 다닐 수 있는 곳이고, 저는 유해물품, 면세품 이런 것들을 검색해요.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 전체는 7천 명이고 1천 명은 공항공사 정규직, 6천 명이 하청업체 직원이죠.

저희들은 주간, 야간, 비번 이런 식으로 일을 해요. 기본적으로 세 시간 근무에 한 시간 휴게로 되어 있어요. 근무는 일반 검색하는 것과 순찰조가 따로 있어요. 한 구역을 맡아서 계속 돌면서 위험 물품과 소란이 있는지 확인하고 대테러 방지 업무를 하는 식이죠. 우리는 급박한 문제가 생기면 무전기로 상황실로 연락을 해요. 상황실은 전체를 관리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상황실도 하청업체 소속이고 공항공사 직원 한 명이 같이 일하는 거죠. 제가 상황실 비정규직한테 보고하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공항공사 직원한테(팀장) 보고를 해요. 그러면 하청업체 직원은 팀장 지시를 받아서 우리한테 또 지시하는 좀 복잡한 시스템이에요.

법무부, 세관, 공사 직원, 경찰, 검찰, 이런 사람들하고 매일 싸우느라 업무가 좀 힘들어요. 검색할 때 소리가 나면 ‘확인시켜주십시오’라고 말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세관 직원인데, 내가 경찰인데, 내가 법무부 직원인데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우리는 일을 하는 건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하고 욕하면서 확 지나가버려요. 열 명 중에 한 명은 그런 사람들이에요. 하청업체에서는 “네가 참아라.” 해요. 매번 그렇게 넘어가요. 성질은 나는데 불이익이 날까봐 문제 제기를 하려고 해도 조심하게 되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요.

공무원들은 권위 의식이 많아요. 승객들도 가끔 보호 구역으로 가려고 해요. 안 된다고 하면 따지고 욕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공항공사 홈페이지에 근무자를 욕하는 글을 남겨요. ‘고객의 소리’를 잘 만들어놔서 그런 걸로 징계 먹는 거예요. 아직도 청소하는 조합원들은 화장실에서 간식을 드시고 편하게 쉴 공간이 없어요. 공항은 넓은데 휴게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승객들이 앉는 벤치에서 이불 하나 덮고 쪽잠을 자요. 비상계단에 주워 온 의자 놔두고 기대서 쉬기도 하고, 비상계단에서 혼자 밤에 쉴 때는….

정규직은 이틀 일하고 이틀 쉬어요. 우린 나흘 일하고 이틀 쉬어요. 월급은 정규직이 더 많이 가져가요. 저는 월급보다 정규직처럼 주야비휴를(이틀 근무, 이틀 휴무) 받고 싶어요. 생체 리듬이 많이 깨져요.


사진 이상엽 센터 이사 / 인터뷰 정리 변정윤 센터 사무국장


오순남

by 센터 posted Feb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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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울산과학대_오순남.jpg


노동조합에 들기 전에는 천날 만날 모가지 대상이었어요. 94년도에 미포복지회관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 현대중공업에서 해고된 분이 회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는데, 아는 사람인 거예요. 인사도 하고 커피도 줬어요. 그게 찍힌 게 아닐까 해요. 용역업체가 다른 건물로 절 보내더라고요. 그렇게 2번을 쫓겨 온 곳이 울산과학대예요. 15년을 근무했어요. 노동조합을 들고 나서는, 그 힘을 빌어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오고 있어요. 10년 전 그때는 말도 못했죠. 용역업체 반장한테 출퇴근마다 가서 인사를 해야 해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고. 노동조합을 만드니 반장이 알아서 나가더라고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우리가 해고되고, 그래도 투쟁해서 원직복직 됐잖아요. 복직을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이 이 말을 했어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실컷 싸워서 이제 끝났구나 했는데, 시작이라니. 워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복직해 일하다 보니 수시로 탄압이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가 좀 약해지면 모가지 칠라고. 김순자 지부장이 앞에 서고 우리가 뭉쳐서 지켜낸 거죠. 뿌듯해요. 노동조합 만들고 8년 동안 청소일로 애들 키우고 시집보내고 손주 세 명을 제가 키웠어요. 요새는 맞벌이 아니면 안 되잖아요. 큰딸이 육아휴직을 2년을 받았는데, 1년 더 연장하려니 눈치도 보이고 자기 자리도 사라질 것 같고 해서 복직을 해야 해요. 그럼 3월에 초등학교 들어가는 손자 볼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내가 여기 농성장에 있어야 하니까. 내가 돈을 못 가져가니까 딸들 부담이 커 가고. 작은딸은 엄마 때문에 노동조합에 질렸대요. 지금도 내가 집을 나서면 물어봐요. 엄마 어디 가냐고. 그럼 내가 “세상 바꾸러 간다.” 그래요. 그럼 딸은 “그 세상 언제 바뀌는데?”라고 묻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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