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장, 하러 왔습니다_이미지 방송작가유니온 지부장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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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연말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주로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스태프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다. 화려해 보이는 방송계에도 숨어있는 노동이 곳곳에 있는 까닭이다. 방송작가도 그 직군 중 하나. 언제 어떻게 ‘해고’를 당해도 무기력하게 살아왔다. 2017년 11월 11일 방송작가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출범할 때도 앞에 나서는 게 쉽지 않았다. 노동조합에 회의를 가졌던 이미지 지부장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방송작가 일을 20년 동안 해오면서 겪었던 불합리함을 후배 작가들은 겪게 하지 않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2년여를 작가와 노동조합을 겸해 활동해온 그이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다.

인터뷰·정리 : 강인수 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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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철든 아이


신생아 때 눕혀 놓으면 서너 시간 동안 울지 않고 가만 있었대요. 서너 살 때도 1개월 위 오빠가 업어 달라 보채면 오빠 업어주라 양보했다 하더라고요. 반찬 투정없이 주는 대로 먹었어요. 맛난 반찬 요구하는 게 피곤하고, 맛없는 반찬 참고 먹는 게 편했거든요. 한마디로 일찍 철든 아이였죠. 남자애들이 짓궂게 장난쳐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괴로워해야 장난치는 재미가 있는데 반응이 없으니 금세 장난을 멈추죠. 장난 피하는 법을 일찍 깨달은 건데, 반면 또래의 재미는 모르고 자란 거죠. 유년시절은 아이다워야 하고, 소녀 때는 소녀 감성도 있어야 하는데 너무 일찍 철들어 제 나이답게 크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이 안쓰러울 때도 있어요.


지방 대도시 도심에 살다 보니 시골 친척이 볼일 보러 오면 며칠씩 집에 머무르는 일이 흔했어요. 수많은 친척이 들락날락하는 집. 함께 살며 대학 다니는 오촌 아재, 고모도 있었어요. 그래서 촌수에 강하죠. 인사도 잘합니다. 하지만 일상을 잔칫날같이 많은 사람과 늘 식사하는 가정에서성장했다는 건 엄마가 너무 바쁘고 고생했다는 얘기잖아요. 일찍 철들 수밖에 없었죠. 


어릴 적 뭔지도 모르면서도 인권 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고생하는 엄마 보면서 남녀 차별에 일찍 눈뜨기도 했고요. 친척들이 용돈 줄 때 오빠에겐 지폐를, 저한테 동전을 주었거든요. 나이 차이도 거의 나지 않는데 말이죠.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걸 일찍 깨달은 거죠. 


방송작가, 해보고 얘기하라


넉넉하진 않아도 학비 걱정은 없이 성장하다 대학교 1학년 때 IMF를 지나며 집안이 풍비박산 났어요. 과외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죠. 경제적 독립이 주는 정신적 여유를 일찍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혼자 학비, 생활비 벌며 살아서인지 조급한 선택을 반복했어요. 


학보사 기자였는데 고시 공부 핑계로 일찍 그만뒀죠. 사법 고시도 공부도 얼마 안 하고 빨리 포기했어요. 부모님 고생시키더라도 도움받으며 해볼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합격 기약 없는 공부에 몰입을 못 했어요. 언론고시 준비도 그랬고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학보사 기자 생활을 좀 진득하게 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조바심 내지 않고 준비했을 것 같아요. 사법고시든, 언론고시든. 좀 늦어도 그게 늦는 게 아니란 걸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방송작가는 우연히 하게 됐습니다. 방송 기자 준비하다가 우연히 방송작가 공채공고를 접했죠. 방송작가가 뭔지도 모르고 지원했고 합격했어요. 합격하고 나서야 알았죠. 흔치 않은 공채시험이었다는걸요. 공채시험이 없었다면? 방송작가가 되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전에도 흔치 않았고, 그 이후로도 없는 공채시험으로 작가가 됐으니, 어쩌면 운명일까요?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동기 열두 명은 수개월 내에 거의 그만뒀어요.이상하다는 걸 깨닫는 데 며칠 걸리지 않았거든요. 아니구나. 그만둬야지 생각하다가 송지나 작가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렸어요. “MBC 구성작가가 됐는데 이틀 만에 그만두고 싶어졌다.”고. 작가님이 “해보고 얘기하라.”는 답글을 다셨더라고요. 너무 경솔했구나, 해보고 얘기하자고 버티다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네요. 


방송작가가 되고 나서는 뭐에 홀린 것처럼 일했어요. 방송사 일을 밖에서는 화려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궂은 일이죠. 연예인이나 정치인 같은 유명인을 만날 수 있고, 남들이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직업이긴 해요. 교양, 구성작가의 경우는 처우도 좋지 않고 야근이 잦죠. 불규칙하게 일하고요. 밤도 많이 새고, 밥도 많이 굶죠. 다이어트 많이 한 20대 여성들이 걸린다는 병이 생겼는데 일하느라 굶어서 얻은 직업병이죠.


하루 한두 시간 자며 열흘 버틴 적도 있고, 일주일 동안 집에 못 가고 일한 적도 있죠. 새벽 서너 시에 퇴근하지만, 교통비 지원도 야근수당도 없어요. 어느 해인가는 여의도 벚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어요. 더위 한번 못 느끼고 여름을 지내기도 했죠. 방송사 에어컨은 빵빵하고 방송사 밖을 안 나가서요. 그만큼 계절 변화를 못 느끼며 살았죠. 사회 친구들 못 만나 사회생활도 단절됐어요. 돌이켜보면 재미나 보람 때문에 그렇게 일한 건 아니고 끝을 보자는 오기 때문인 것 같아요. 2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아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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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1일, 방송작가유니온 출범식(@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 그리고 노조


노동조합(이하 노조) 활동할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어요. 방송작가의 구조적 모순에 분노하긴 했지만 그걸 개선하기보다는 그만두려 했죠. 그래서 노조 출범 준비 단계에 몸담지 않았고요. 노조에 동참하고, 심지어 지부장까지 맡게 된 건 순전히 한 친구 때문이죠. 공채작가 동기인데, 노조 함께하자고 계속 제안했지만 전 응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험난한 준비 과정을 보며 “그만하면 됐어. 빨리 나와!” 하는 식으로 노조를 결성해서 문제를 개선한다는 것에 대단히 회의적이었죠. 


방송작가노조 출범까지 많은 작가가 2~3년간 헌신했습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사랑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분들이 뜻을 모은 거죠. 그렇게 힘든 준비 기간을 거쳐 드디어 노조를 띄울 시점에 지부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KBS, MBC가 정상화되기 전 돌마고(돌아와라!마봉춘 고봉순) 투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방송계는 엄혹한 시기였고 지부장이라는 자리는 이름과 얼굴이 공개되는 터라 부담감이 컸죠. 지부장 하면 방송작가를 더이상 못 할 수도 있으니까요. 


친구는 노조 출범에 대한 의지도 높고 사명감도 컸어요. 하지만 친구는 방송작가 노조 출범과 함께 tbs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싶어 했죠. 방송작가 지부장 하면서tbs 타 직군 조직화를 할 수는 없잖아요. 오래 고민하던 친구가 “오늘 회의 가서 지부장 못 하겠다고 말해야 해. 그러면 노조 출범을 못 해. 수십 명이 지난 3년 동안 준비했던 일이 물거품이 되는 거야. 그 책임을 오롯이 내가 져야 해.”라며 제게 지부장 제안을 했어요. “너 미쳤어? 그걸 내가 왜 하니?” 둘이 격론을 벌이다 헤어졌죠. 고민하다 오후에 언론노조로 찾아가요. 준비 모임 중이었는데 문 열고 들어가서 “지부장 하러 왔다.”고 말했죠. 친구뿐 아니라 사람들 다 놀랐죠. 


나중에 그날을 복기해봤어요. 오전까지만 해도 안 하려던 마음이 어떻게 바뀐 건지. 많은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할 사람이 그리 없다면 내가 하자 했어요. 당시 〈김어준 뉴스공장〉 작가였는데 노조 지부장이라는 이유로 해고될 가능성이 적은 작가였던 거죠. 능력도 부족하고, 자격도 없지만, 본인이 지부장하게 된 이유라고 대외적으로 얘기해왔죠. 또 하나 이유는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이 직업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힘을 보태면 의미 있겠다 싶었죠. 후배들이 좀 더 나은 노동 환경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던 거죠. 친한 친구 어깨에 놓인 짐을 나눠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요. 그렇게 2017년 11월11일 방송작가노조가 출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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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정의당과 함께한 방송작가 노동권 보장을 위한 간담회(@방송작가유니온)


노조 출범 이후 달라진 것들


노조 출범 만으로 큰 성과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방송작가 노동 현실과 직업적 상황을 아는 분들은 작가 노조 출범이 기적이라고 얘기했죠. 그 정도인지 저는 사실 잘 몰랐어요. 


출범 후 조금씩 변화가 생겼습니다. 지역 방송사에서 교섭을 시작했고요. 대구MBC에서 작가노조와 사 측이 교섭이라는 방식을 통해 작가 원고료를 논의했죠.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이 많이 되진 않았지만 큰 성과죠.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방송작가 개인이 원고료 인상을 요구하긴 대단히 어렵습니다. “돈 올려 달라고? 그 돈에 만족하며 일할 작가로 교체할게.”라고 할 수 있거든요. 임금 인상 요구하다 해고되는 판이죠. 개인이 아닌 노조가 요구해 가능했고, 크지 않은 성과지만 얻어낸 거죠. 독소 조항 가득한 계약서 체결도 노조가 나서 저지시켰습니다. 


원고료 관련해 노조가 가장 선명하게 잡은 투쟁 노선은 막내작가의 최저임금 보장이었어요. 누가 들어도 합리적이잖아요. 이 흐름은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상파에서 시작됐고, 최근 정부 산하 케이블 방송사도 최저임금 수준으로 인상됐습니다. 노조 밖에서 “가난팔이 그만해. 언제까지 방송작가 최저임금 타령할 거냐.”고 조롱하는 분도 있어요. 그러나 방송작가 중 일부는 여전히 최저임금을 못 받고 있어요. 


프리랜서와 노동자 사이


노동자로 불리는 걸 불편해 하는 작가도 있지만, 노동자성이 인정될 작가도 많죠. 막내작가 그리고 보도국 작가들이 그래요. 막내작가는 근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막내작가가 투잡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한 프로그램만 해도 잠이 모자라거든요. 상근하면서 피디의 종속 지시를 받으면서 일한단 말이에요. 보도국 작가들도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면서 정규직 PD, 기자와 함께 일하거든요. 근로감독 하면 노동자성 매우 높게 나올 겁니다. 지상파 대표 시사프로그램 막내작가만이라도 근로계약 체결하면 좋겠어요. 프리랜서라는 프레임에 갇혀,위장 프리랜서로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을박탈당하고 있는 작가들 말이에요. 


서울 tbs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지난해 일부 작가가 근로계약서를 썼는데 최근에는 방송작가 열 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했습니다. 작가들도 4대 보험 적용받고, 퇴직금도 받을 수 있는 거죠. tbs 사례가 방송작가 정규직 채용 흐름에 불씨가 돼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제회를 통해 작가 처우를 개선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노조에 산적한 현안이 많아 정책적으로 큰 그림을 고민할 수준은 아직 안 되지만요. 모성 보호 관련해서도 그래요. 방송작가들은 결혼과 출산을 기피합니다. 출산해 아이 키운다는 이유로 저를 존경하는 후배가 있을 정도거든요. 방송작가 대부분 여성인 만큼 방송작가에 대한 출산 육아 지원이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작가노조는 대통령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간담회도 하고 있어요. 출산 시기에 있는 20~40대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정규직에만 초점을 맞출 거냐는 거죠. 이제는 비정규직이 됐든 프리랜서가 됐든 출산하고 육아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 정책을 만들어갈 시점이 아니냐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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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제작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1인시위에 연대했다.(@방송작가유니온)


쉴 때도 됐어


2월 말 지부장 임기가 끝납니다. 연임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유지되는 건 조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고, 개혁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이 강한 분이 새로이 지부장을 맡는 게 좋겠다 싶었죠.


작가 일을 하면서 지부장을 했던 터라 신체적, 정신적으로 번아웃 됐어요. 지부장 임기 종료에 맞춰 작가 일도 쉬려고 해요. 학창 시절부터 제대로 놀아보지를, 쉬어보지를 못했더라고요. 수학여행 갈 때도 책 들고 다녔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에요. 스스로 혹사시키는 스타일인 거죠. 방송작가하면서도 그랬어요. 애 낳는 날도 일했거든요. 새벽 1시 제왕절개 수술 후 마취 풀리자마자 당일 생방송 원고를 썼어요. 단 하루도 쉬지 않았죠. 방송사는 쉬어주길 바랐는데 제가 하겠다고 하니 내치지를 못한 거예요. 그렇게 살아온 삶이 번아웃을 가져오고, 상처로 남은 것 같아요. 


일을 쉰다는 결정에 “적은 나이도 아닌데 어쩌려고 그러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없네요. “그래, 잘 선택했어. 쉴 때도 됐어.”라고 말해 주시더라고요. 일은 또 있겠죠. 씩씩하게 쉬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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