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는 왜 노동조합이 없을까?_김경희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방과후강사노동조합 위원장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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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방과 후 학교는 2006년부터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 격차 완화 등을 목표로 만든 학교 정규수업 이외 교육 활동으로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방과 후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학교도, 교육청도, 교육부도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그이들을 우리는 특수고용 노동자로 부른다. 김경희 방과후강사노동조합 위원장이 곧 추위가 몰아칠 11월 중순 삭발을 한 뜻은 우리도 노동자다, 노동조합을 인정해달라는 무언의 외침이었다. 


인터뷰·정리 : 강인수 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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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항상 약자 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받았죠. 늦게 본 자식이어서인지 아버지는 첫 딸인 저를 유난히 예뻐하고 잘 챙겨주셨어요. 경상도 남자답지 않게무척 자상하셨죠. 그 당시 부모님들이 그렇진 않았잖아요. 좀 무뚝뚝하고 애정 표현도 잘 안 하는···. 그런데 아버지는 운동화며 교복을 주말마다 본인 손으로 빨아줄 정도였어요. 세계문학전집이며 월간 어린이 잡지도 꼬박꼬박 볼 수 있게 일 년 치를 한 번에 구독시켜 줬죠. 저는 폐결핵을 일년 동안 앓은 적도 있고,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 픽픽 쓰러지기도 할 만큼 몸이 약했고, 활동적이지도 않아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전형적인 문학소녀였죠.


그래도 조용히 있다 가도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어요. 비판 정신이 뛰어난 편이어서 옳지 못한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죠.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 30대 초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일 년 내내 수업도 제대로 안 하고, 아이들한테 담배 심부름도 시키는 거예요. 일 년 동안 참다 참다 결국 졸업식 날 담임한테 따졌어요. 선생님도 당황했겠죠.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뭐라 뭐라 하더니 울어버리더라고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부당한 일 보면 지적하고,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곤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평상시에는 얌전한 편이라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노조 위원장을 하고 나서 옛날 친구를 만났더니 “나는 니가 그런 일 할 줄 알았다.” 하더라고요. 뜻밖의 말이었죠. “아니, 왜?” 하고 물었더니 “니는 항상 약자 편이었다.”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어렸을 때 어려운 친구들을 잘 챙겨주곤 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짝꿍이 고아원에서 살던 친구였어요. 도시락 두 개 싸 와서 같이 먹기도 하고, 고아원에서 부당하게 하는 건 없나 하는 마음에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랬죠.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마음에 걸렸나 봐요.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글 쓰는 거 좋아하니까 국군 장병 아저씨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도 친구들이 부탁하면 대신 써주곤 했어요. 책 읽는 거 좋아해서 도서부 활동도 하고. 헤르만 헤세를 특히 좋아했어요.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죠. 


데모하면 잘리는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결혼을 늦게 하면 안 좋은 점이 많다면서 “니는 일찍 결혼시킬 거다.”라는 말을 늘 했어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죠. 대학 가서도 데모는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해서 아버지가 공무원이니까 자식이 데모하면 잘리는 줄 알았어요.


1985년 당시에는 전기대학과 후기대학이 있었는데 후기대학에 입학하게 됐어요. 학교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고, 학생들도 패배 의식에 젖어있는 것 같았죠. 학내 사태가 심각할 때라 일 년 내내 수업도 안 하고 데모만 했어요. 운동장에 모여 집회를 하는데 나도 참여하곤 했죠. 하루는 사회자가 총장한테 할 말 있는 사람은 나와서 해보라는 거예요. 그때 제가 나갔죠. 운동권은 아니지만, 학생으로서 하고 싶은 말은 있으니까요. 사립재단에 대한 문제, 맘에 안 드는 교수들 얘기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발언한 학생들 가운데 나만 유일하게 비운동권이었어요. 뭐 그렇다고 이후에도 운동권이랑 연결돼서 활동한 건 아니지만요.


저는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선 보러 다녔는데 남자들이 저를 편하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좀 화려하게 보는 거예요. 술도 잘 마시고, 담배도 피고, 잘 놀 것 같고, 돈도 팡팡 쓸 것처럼···. 첫 선 보고 너무 놀랐어요. 금융회사에 다니던 남자였는데 단박에 퇴짜를 맞았어요. 그 이유가 자기 월급이 70만 원인데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남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게 “일요일인데 뭐하고 지냈어요?” 하고 물어요. “제가 탕수육 만들어서 식구들이랑 맛있게 먹었어요.” 하면 라면도 못 끓이게 생겨 놓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냐는 식이었어요.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부모님 생신상을 직접 차려드릴 정도로 요리에 관심도 많고 잘하는데 남자들은 외모만 보고 믿지를 않았던 거죠.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개성이 강한 편이긴 해요. 선 보러 갈 때 모자 쓰고, 가죽 잠바를 입는다든지 파란색 마스카라를 하고 간다든지, 그러기는 했지만 꾸미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정말 검소하거든요. 


운동권 출신 사람들을 만나다


결혼도 잘 안 되고 하다 보니 아버지가 독일로 유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해요.유학은 공부에 뜻있는 사람이 가는 건데 뜬금없었죠. 공부는 안 좋아했으니까. 드라마 작가를 하고 싶어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KBS 작가교육원 연수받으면서 논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사투리가 심하다며 거절당한 곳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부산에서 갓 올라와서 지금보다 사투리가 엄청 심했거든요. 


그러다 ‘글사임당’이란 글쓰기 회사에 취업하게 됐어요. ‘글사임당’ 사장이 운영하던 웅변학원에서 글쓰기 강사를 했는데한 달도 안 돼서 ‘글사임당’ 교재 집필 연구원 자리를 제안했거든요. 운동권 출신 사장이 만든 회사고 전국에 지사가 80곳이었는데 지사장들도 거의 운동권 출신이었어요. 상사였던 연구실장도 운동권 출신이었는데 저랑 안 맞아서 좀 힘들긴 했습니다. 유연함이 없고 경직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어요. 제가 〈분홍 아가씨〉라는 짧은 동화를 창작했는데 주인공인 여성을 전투적인 인물로 바꾸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여성적인 인물로 설정했거든요. 회의할 때 줄담배 피우고, 퇴근하면 꼭 술 마시러 가자고 하고. 


결혼은 했지만…


몇 년 일하다가 경상도권 사람들이 회사 정리할 때 같이 그만두고 부산 집으로 내려갔어요. 쉬면서 본격적으로 결혼도 생각해볼 계획이었죠. 그때까지는 한순간도 결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선을 많이 보다 보니 남자들이 허세가 심하더라고요. 나는 솔직한 편인 데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데 남편은 나보다 더 솔직하고, 내가 뭘 하든 개의치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결혼한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인생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거 같아요. 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죠. 시아버지가 유별난 분인 건 결혼 전에 남편한테 얘기 듣고 알고 있었지만, 시집살이 첫날부터 눈물의 결혼생활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 완고한 시아버지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시어머니도 20여 년 중풍을 앓고 있어서 몸도 힘들었어요. 게다가 남편이 중고자동차 사업을 하다가 빚이 많이 생겼어요. 결혼할 때 챙겨온 비자금으로 빚 다 갚고 났더니 1,200만 원 남더라고요. 결국 5년 만에 시댁에서 나와 대구로 돈 벌러 간 남편과 떨어져서 아이 둘 데리고 친정에 들어갔어요. 노동조합 활동은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보람도 있지만, 시부모님 모시는 건 위로와 칭찬은커녕 끝까지 모시지 않았다는 비난과 마음의 상처만 받았죠. 글쓰기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하고, 20개월 만에 5천만 원을 모았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저는 상당히 알뜰한 사람이에요. 자존심도 세서 그때의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빨리 극복해서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어요. 그러다 남편이 서울로 일을 하러 가게 되면서 일산으로 이사를 오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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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2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진행한 방과후강사권익실현센터 출범식(@방과후강사노조)


얼결에 시작한 방과 후 강사


딸이 다니는 학교에 근육병에 걸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어요. 체육시간이면 혼자 교실에 남으니까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 모습을 찍으라고 카메라를 준 거예요. 그 사진을 모아 학예회 날 보여줬어요. 감동이었죠. 그 이야기를 한 신문 독자투고란에 글을 써서 보냈더니 실렸어요. 당시 학교에 폭력 사건이 발생해서 학교 이미지가 좋지 않을 때였어요. 기사를 본 선생님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셨고, 그때 별생각 없이 “방과 후 강사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하고 불어봤죠. 그렇게 방과 후 논술 강사를 시작하게 됐네요. 


일주일에 하루 나가서 100분짜리 수업 두 번만 하면 됐어요. 그런데 40명 정원이었는데 65명이나 신청을 했어요. 일주일에 이틀 나가서 세 타임을 하게 됐죠. 그렇게 해서 번 돈이 160만 원이었어요. 어머나, 대한민국에 이렇게 좋은 직업이 있나 싶었죠. 수입도 되고 내 적성과도 맞고.일 년 지나 독서논술에 역사를 접목해 수업했더니 대박이 났어요. 일산에서 돈을 제일 잘 버는 방과 후 강사가 됐던 것 같아요. ‘글사임당’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교재도 집필해서 수업에 활용했죠. 


그런데 면접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어요. 해마다 면접을 보는데 수업시간이랑 항상 겹치게 잡히는 거예요.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학교 선생님이 면접을 보는데 자기 수업 방해된다고 방과 후에 면접을 잡는 거죠. 면접 보는 강사는 50~60명인데 이 선생님들의 수업권은 안중에 없었던 거죠. 대체강사도 못 쓰고, 수업을 뺄 수도 없고 해서 방과 후 강사들은 매번 난감한 상황을 피할 수가 없어요.


불만이 쌓이다 보니 남편한테 “여보, 방과 후는 왜 노동조합이 없을까?” 하는 말을 자주 하게 됐죠. 김포에 있는 금파초등학교 돌봄교실 선생님이 방과 후 수업을 해달라고 요청을 계속했어요. 돌봄 방과 후는 수업료가 적기도 하고, 이미 수업시간이 꽉 차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요.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겨울방학 때 시간을 억지로 내서 수업했죠. 그때가 또 면접 볼 시기였어요. 너무 힘들어서 “방과 후는 노동조합도 없고, 시간은 저거 마음대로 하고 면접 시간 맞추기 힘들어 죽겠어요.” 하며 투덜댔더니 “누구 소개시켜 줄까?”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돌봄 선생님이 학교비정규직노조에서 돌봄노조를 만든 분이었어요. 그때 소개받은 사람이 학교비정규직노조를 만든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이선규 부위원장님이었죠. 그분도 학비노조 만들고 방과 후 강사를 위한 노조가 필요하겠구나 해서 주변에 방과 후 강사를 소개해달라고 할 때였던 거예요. 그렇게 시작이 됐습니다.


방과 후 민간위탁 문제


당시 수업이 꽉 차 있을 때였어요. 일주일에 하루, 수업을 빼고 일 년 반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설명회를 70회 정도 했죠. 한 지역에 적게는 두세 명, 많을 때는 40명이 모였어요. 지역 활동가들 도움이 컸습니다. 강사 연락처가 오픈돼 있는 곳도 있지만, 아닌 곳도 많아서 활동가들이 조직하는 데 힘을 써줬죠. 


처음엔 노동조합으로 모인 게 아니라 전국방과후권익실현센터’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 설훈 국회의원이 방과 후 강사 민간위탁 허용 법안을 발의했어요. 이걸 막아야겠다 해서 아는 방과 후 강사 50명을 단톡방에 모아 서명운동을 결의했어요. 이게 전국으로 퍼져서 3주 만에 6천 명이 서명했습니다. 서명지 들고 설훈 의원을 찾아가야 하는데 단체도 없고 해서 만든 이름이 ‘전국방과후권익실현센터’였던 거죠. 


민간위탁은 이명박이 대통령 할 때 허용했습니다. 특성에 따라 필요한 과목도 있으니까 한두 과목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전체 위탁을 하면 강사들 피해가 크죠. 서울에 600개 초등학교가 있는데 전체 과목 민간위탁은 47개 학교만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3년 전부터 민간위탁이 절반을 넘었어요. 방과 후 강사가 학교와 위·수탁 계약을 맺어서 수업하면 세금만 내면 되는데, 민간위탁 업체에 소속되면 수수료를 내야 하는데 40~50퍼센트 정도 돼요. 강사 수입이 줄어들게 되는 거죠. 다행히 노동조합이 생기고 열심히 싸운 덕에 20퍼센트로 안정화되었죠.


업체라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에요. 전국에 몇 곳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많아요. ‘울림’이라는 제일 큰 업체가 있는데 서울, 경기도권에서만 33개 학교와 계약을 했어요. 서울에서 나름 잘해오던 업체인데도 마지막 강사료를 못 주고 망했죠. 우리가 알아낸 것만도 지급하지 않은 강사료가 5억 정도에요. 충남 지역이 가장 심각한데 방과 후 학교 100퍼센트가 민간위탁이에요. 한 업체가 회사명만 여러 개 만들어서 입찰하기도 하죠. 전라도 광주는 교육감 의지로 민간위탁을 하지 않아요. 교육감 성향에 따라 지역별로 차이가 있습니다.


민간위탁이 학교에 들어오면 학부모는 교육비가 저렴해져 좋긴 하지만 이득될 게 없어요. 업체에서 강요하는 질 나쁜 교재, 교구를 써야 하거든요. 강사는 질 좋은 수업을 하기 위해서 좋은 교재, 교구를 사용하려고 해요. 요리 수업 같은 경우도 식물성 마가린을 쓰려고 하는데 업체는 공업용을 쓰게 한다든지, 스무 명 요리하는데 양파를 세 개만 준다든지. 바둑 수업을 하는데 교재 내용이 부실해서 창고에 쌓여있는 교재를 덤핑으로 천 원에 가져와서 학부모에게는 만 원에 팔아요. 강사들은 강사료가 낮아지는 문제보다 이런 게 더 스트레스에요. 게다가 강사는 3월 첫째 주부터 수업을 하는데 자기 돈 주고 교재를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줘요. 이후에 업체한테 교재비를 받아야 하는데 안 주는 거예요. 지난해 교재비도 못 받는 일도 있죠. 그런데 업체를 관리하는 곳이 없어요. 교육청에선 업체와 학교와의 계약이니 우리는 관여 못한다 하고, 학교는 업체한테 이미 돈다 줬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하고. 지난달에도 한 달 내내 이 문제로 새벽기차 타고 다니면서 지방을 돌았어요. 교육청 면담하고, 교육부, 교육개발원 앞에서 피케팅하고···. 


학교 선생님들은 일 많고 민원 많다는 이유로 방과 후 업무를 제일 싫어해서 안 하려고 해요. 예전에는 방과 후 업무를 도와주는 코디를 채용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요. 그러니 업체로 넘기는 거죠. 업체에 넘기면 관리할 교사도 필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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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여의도 국회 앞에서 방과후학교 법안 제정을 촉구하며 천막농성을 했다. (@방과후강사노조)


방과후강사노동조합 출범


2017년 2월에 부산 송정 앞바다에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방과후강사노동조합 출범을 했습니다. 서너 명으로 시작했던 ‘전국방과후권익실현센터’가 드디어 노동조합으로 서게 된 거죠. 우리는 ‘13만 개의 흩어진 모래알’이라고 얘기해요. 그때부터 노동조합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내가 13만 명의 대표성을 띨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반장도 한 번 못해봤는데, 평범하게 살던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노동조합 만들고 변화는 많았어요. 어떤 방과 후 강사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시간을 뺄 수 없어 수업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대체강사를 쓸 수도 있고 출산휴가도 3개월 사용할 수 있게 됐어요. 면접 시간도 조절할 수 있고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죠. 모든 권한이 학교장 재량이거든요. 그게 가장 맹점이에요. 방과 후 관련 법이 없어서 조례라도 만들려고 했는데 전교조에서도 반대하면서 확산이 안 됐어요. 당면한 과제는 방과 후 관련 법을 만들고 노조 설립필증을 받는 거예요. 법 제정은 모호하지만, 설립필증 받는 것은 기대하고 있어요. 11월 19일에 삭발을 했어요. 전국학습지노조는 20년 투쟁해서 노조 설립필증 받았잖아요. 대리운전노조나 택배노조 같은 경우도 단식까지 하면서 열심히 투쟁했는데, 우리는 단식은 못하더라도 삭발이라도 해서 고용노동부에 우리 의지를 보여주자. 그리고 방과 후 강사도 노동자라는 인식을 하자는 의도예요. 가족은 삭발한다고 했을 때 충격을 안 받더라고요. “엄마는 하지 말라고 안 할 사람이 아니잖아”하면서. 오히려 주변에서 “위원장님 우짜노~” 이러지. “위원장님이 5년 동안 저 짓은 안 했는데 노조 필증이 뭐길래 삭발까지 하지? 곧 면접도 봐야 하고 애들도 가르쳐야 하는데.” 하면서 놀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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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진행한 노조 설립필증 교부 촉구 삭발식(@방과후강사노조)


무상 방과 후 학교를 꿈꾸며


처음 방과 후 학교를 만들 때는 사교육을 완화하고, 학교 내에서 질 좋은 교육을서비스한다는 목표로 생겼어요. 교육 효과도 좋고 만족도도 높아요. 이걸 더 발전시켜서 무상급식 시행한 것처럼 방과 후도 무상화하면 좋겠어요. 학과목 중심이 아니라 예체능 중심으로 운영하고요. 무상급식하자고 할 때 상상도 못했잖아요. 그런데 왜 무상 방과 후는 못하느냐고요. 국가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봐요.


요즘 고민이 많아졌어요. 40대 중반에 가장이 됐고,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도 낙관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50대에는 돈 버는 일과 상관없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런 삶이 어떤 거였는지 구체적이진 않았는데 50세가 되자마자 노동조합을 시작했네요. 참 신기해요. 시간이 지나서 보니 부모님의 지지와 사랑이 내 자존감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노동조합 위원장 그만두더라도 60세까지는 활동가로 살아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사회에 관심이 많았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고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지금은 방과후강사노동조합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변화시키는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요. 그래서 어려움도 감수하고 있는 거고요. 어려움을 극복하고 단련해서 에너지를 쏟으면 열매를 맺잖아요. 인생이란 게 내가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때론 힘들지만 하느님이 나를 인정해줬다고 여기며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제는 제가 마냥 위원장을 할 수는 없으니까 간부들을 세워야 할 때예요. 저보다 역량 있고 일 잘하는 분을 키워서 우리 노동조합이 튼튼하게 서서 제대로 투쟁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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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방과 후 수강료 인상을 공론화하기 위해 5개 지역에서 동시에 기자회견을 열었다.(@방과후강사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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