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발 활동가, 장기 집권을 꿈꾸다_강서희 알바상담소 소장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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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역노동운동단체 활동가라고 하기에는 관심사가 너무 많다. ‘노동’만이 아니라 ‘환경’, ‘젠더’, ‘청년’과 청소년’, 거기에 ‘지역’까지, 여러 영역에서 중심 실무자로 활동하는 활동가. 때로는 트랜드에 민감한 블로거였고 사는 동네에서 직장맘 모임을 조직하는 당사자 활동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밤에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사는 활동가. 그러면서 ‘권력’이나 ‘정치’에 대한 욕심은 없는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인터뷰·정리 : 고명우 센터 상임활동가


도입사진(2).JPG


취학통지서 없이 간 학교


1980년에 태어났어요. 금천구(당시 구로구)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은 두 분 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어요. 위로 네 살 터울 언니가 있는데 학년으로는 3학년 차이에요. 취학통지서 없이 일곱 살에 엄마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 갔어요. 엄마랑 학교를 같이 다녀서 좋았던 기억은 선생님들이 예뻐했고, 그래서인지 선생님이라는 존재자체를 크면서 한 번도 어려워해 본 적이 없어요. 좋지 않았던 기억은 받아쓰기를 틀렸다는 이유로 엄마한테 복도에서 혼난 거예요. 지금은 조기입학도 있잖아요. 한국나이 7세면 조기입학도 되는데, 그 시절엔조기입학 제도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3월 초에 태어난 저는 엄마가 그냥 교장선생님한테 말해서 제일 친한 교사 반에 넣어놓고 ‘1년 이상 안 걸리면 얘는 계속 학교를 다니는 거다’ 이런 형태로 다닌 거죠. 


당시에는 건물도 두 개 이상 있는 엄청 큰 학교였어요. 그때 오전반, 오후반 수업이 있었는데 오전반에는 엄마 반 교실 뒤 책상에 앉아서 숙제하고, 쉬는 시간에는 언니 오빠들이 놀아줬어요. 오후반일 때는 그럴 수 없으니까 양호실(지금은 보건실)에 있었어요. 양호선생님이 봐주셨죠. 그렇게 학교를 1년 반 다녔죠. 그 당시 반포에 잠원동 지구 지하상가가 물에 잠기는 해가 있었어요. 그때 반포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요. 놀이터에서도 많이 놀았고 비가 오면 물길을 만들어서 점점 깊게 ‘포석정’처럼 흙을 파고 수문을 딱 열면 물이 주르르 하면서 흐르는 걸 너무너무 좋아했던, 그 놀이를 즐겨했던 기억이 있어요. 


예전부터 꼭 이겨야 돼, 이런 게 없었어요. 언니가 공부를 너무 잘해서 늘 전교 1~2등했는데,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언니만큼은 못할 거 같으니까 그냥 슬렁슬렁 했던 거 같아요. 늘 뭔가 하고 싶다고 하면 부모님이 시켜주신 것 같고요. 커서 보니 매우 자율적이었더라고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긴 고등학생


중학교 때 산업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원했던 건 정확하게 제품 디자이너였어요. ‘제품을 멋있게 잘 설계하면 좋겠다.’ 이런 걸 원했던 거죠. 고등학교를 가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좀 했죠.


저희 집이 ‘전통적(?) 이과 집안’입니다. 저도 그런 걸 좋아하고 실제로도 잘하고. 중 3때는 과학고등학교를 가고 싶었는데 내신이 별로 좋지 않아 못 갔어요. 그때만 해도 연합고사를 봤는데 한 개인가 두 개 틀리고 다 맞고 고등학교를 가게 되죠. 그런데 그 고등학교가 하필 저희 언니도 졸업한 학교였어요. 학교에 가자마자 모든 선생님이 “니가 000 동생이구나.” 하는 거예요. 언니가 학교 과학반 창립멤버였는데 그 과학반에 저도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내내 과학반과 함께하는 생활을 했죠.


고등학교 때 약간 센티한 인간이었어요. 애들하고 이야기도 잘 안 하고 반에서 친한 애들도 몇 명밖에 없고 말도 잘 안 섞고 이랬던 거 같아요. 그냥 그게 사춘기면 사춘기일 수도 있고, 모범생 캐릭터가 약간 불편한 옷 같은 느낌이었어요. 


중 3때는 주변에 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작정하고 공부 못하는 애들하고도 친해졌죠. 부모님이 선생님이라서 바른생활을 중시했는데 그게 좀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고등학교 때는 좀 더 자신에 대한 탐구,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고 책도 약간 사회비판적인 일반사회책, 빨간책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사회비판적인 책, 뉴스에서 보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해석하기도 하고요. 언니가 대학교 1~2학년 때 학생운동을 했는데 언니가 보다가 내버려 둔 거, 던져 주는 책들을 봤어요. 《전태일 평전》을 보면서 ‘아니 이렇게 슬픈 이야기가!’ 이러면서 보고. 그때는 노동운동 이런 거보다는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러면서 봤어요. 그리고 언니가 여성주의 모임을 했는데 자기가 세미나했던 책들을 나한테 보라고 해서 고등학교 1~2학년 때 많이 봤던 것 같아요. 과학반 동아리 부회장이었는데 회장이었던 친구가 가끔 추천해주는 책도 좀 봤어요. 


전교조가 합법화되기 전이라 다들 지하조직처럼 있었는데 그때 풍물반 담당했던 이철호 선생님(나중에 참교육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영향도 있었어요. 친구가 풍물반에 있어서 연습 구경 갔다가 친해져서 그 선생님과 메일도 주고받고 이야기를 많이 했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든가, 수평적인 관점들, 인권감수성이되게 높은 관점들, 그래서 뭐랄까 차별이라든가 아니면 평등하지 못한 것에 대해저항하거나 이런 것들을 많이 배웠던 것같아요. 이철호 선생님이 나중에 저 결혼할 때 주례도 서주셨어요.


당연한 줄 알았던 학생운동


그러고선 대학을 갑니다. 나는 대학생이 되면 다 학생운동하는 줄 알았어요. 언니가 학생운동을 해서 그랬나 봐요. 다 나의 착각이었던 거지. 학생회 활동을 곧바로 하지는 않았고 학교 신문사에 들어갔어요. 대학교 1~3학년 때는 학보사에 있으면서 학생운동에 친했던 시기였고,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을 한 건 3학년 2학기쯤부터였고요.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정치가 잘 안 맞는 사람이구나, 나는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고 사람을 선동하는 역할보다는 실무자 역할이 잘 맞고 뭔가 기획하고 집행하는 게 잘 맞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프로그래머가 꿈이었다고 했잖아요? 그 당시에 이미 컴퓨터와 친했어요. 우리 집은 컴퓨터를 굉장히 빨리 들여놓았거든요. 그래서 한글편집 이런 거에 굉장히 익숙했어요. 학보사 1학년 말쯤에 내가 조판하는 면들이 생겼어요. 그래서 맥과 함께한 조판 이력이 19세부터 시작하죠. 그리고 학생회를 하면서 모든 선거 홍보물, 학생회 포스터, 자료집 등을 다 제가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학생회 활동이 끝날 즈음 나는 디자인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게 좋겠다, 해서 선배들에게 “저는 기획사에서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하니까 아무도 상담을 안 해주는 거예요. 선배들의 선택지에 그런 건 없었으니까 더 이상 대화가 안 되는 거죠. 그러다 누군가 “너는 글도 쓰고 그러니까 〈대학생신문〉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한 방에 그러겠다고 하고 〈대학생신문〉에 갔어요. 그런데 가고 나서 한 9개월 후에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한 동안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었죠. 


그때는 내가 디자이너로서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전공도 ‘수학’이고요.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선배들이 신문사를 만드는데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해서 인터넷신문  〈프로메테우스〉를 함께 창간하게 됩니다. 일하면서 사회부의 모든 취재들을 다하게 됐어요. 2004~2005년 당시에 장애인 이동권, 국보법 철폐, 반전운동, 이라크 파병 반대 이런 게 빼곡하게 천막이 주르르 있던 때였어요. 그런 취재들을 엄청나게 많이 했죠. 취재하면서 세상을 봤던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고, 책을 열심히 읽지 않았는데 진짜 공부도 많이 했던 때였어요. 그러다 2007년부터 〈프로메테우스〉가 경제적으로 안 좋아서 최소 인력만 두고 나가야되는 때에 저도 나왔어요.


이후에는 아는 선배들이 충북 괴산에 폐교를 임대해서 운영하고 있는 ‘신기학교’라는 곳에 있었어요. 주로 했던 일은 어르신들 문해교육, 농촌에 있는 다문화아동 예술교육. 그 당시만 해도 시골은 다문화 가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문화 소외 계층 아이들과 문화예술교육을 주로 했는데 그 교육을 돕기도 하고, 폐교 안에 밭도 관리했고, 나무 다듬는 일도 했죠. 그렇게 일주일에 3일은 서울에서 과외를 하고 4일은 괴산에 가있는 생활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박종철 출판사에서 2004년부터 2012~13년까지 일하게 돼요. 그렇게 활동하다 권문석(당시 알바연대 대변인, 2013년 급성심장으로 사망)을 만나게 되고 연애를 하고 결혼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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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도연이 태어나기 전에 숲으로 간 태교여행. 부부는 도연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썼다.

권문석 49재를 맞아 진행된 추모문화제


육아하며 블로그, 지역 활동까지 


남편은 1998년도에 청년진보당에 가입했을 때 만났어요. 그때 선배들이 “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활동비가 부족하니까 후원 좀 해줄 수 있어?”라고해서 후원회원인 줄 알고 가입했는데 그게 당원이더군요.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계속 당에 있어서 당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중에 사회당으로 당명이 변경됐어요. 당보를 만드는데 좀 도와달라고 연락이 와서 그때부터 당보를 편집했죠. 2010~11년 정도에 권문석이 당보 담당이었어요. 그래서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친해졌고, 코드가 잘 맞았다고 해야 하나, 이야기도 잘 통해서 내가 약간 작업을 했지. 알고 지낸 지는 10년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죠. 아이는 원래 늦게 가지려 했는데 허니문 베이비로 도연이(딸)가 태어났어요.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저는 집에 있게 됐어요. 활동적이었는데 집에 있으니까 ‘우울증이 괜히 오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집에 있다가는 내가 미쳐버리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돌파구로 찾은 게 블로그였죠. 글 쓰는 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고 사진 찍고, 글 써서 올리고 제품 리뷰도 하고, 당첨도 엄청 많이 되고. 기사 쓰던 감이 있으니까 신청 사연도 당첨되게끔 잘 쓰는 거지. 블로그하면서 애를 키우고 그걸로 거의 모든 용품을 다 장만하면서 살았어요. 


그때는 은평구에 살 때였는데 우리 집 바로 뒤편에 공동육아를 하는 팀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공동육아를 ‘품앗이육아’라고 하는데 부모들이 프로그램 만들어서 서로 돌아가면서 아이 보고, 부모들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책도 읽는 팀을 발견하고 같이 활동하게 됐어요. 은평지역이 마을공동체의 메카 같은 곳이잖아요? 그래서 ‘살림의료사회적생활협동조합’도 가보게 되고, 〈은평시민신문〉 편집하면서 은평 시민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있고 지역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다보게 된 거죠. 


블로그가 재미없어질 때쯤, 서울시에서하는 정책기자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서울시 여성정책과가 만들어질 때 ‘서울우먼 리포트’ 이런 걸 운영했는데 여성 정책에 대해서 알기 쉽게 리뷰하거나 글을 쓰는 일이었어요. 그때 시의 정책에 대한 시야가 확 틔었죠. 그리고 ‘서울시건강가정지원센터 기자단’도 한 2년쯤 하고. 이제까지 잘 몰랐던 영역을 보게 된 건데, 강사들도 엄청 많이 발굴하게 된 거죠. 괜찮은 강사들 연락처도 모으고 프로그램도 많이 보게 되고. 그래서 이것이 나중에 용산에서 동네 직장부모커뮤니티를 만들 때 밑천이 되었어요. 그러다 권문석이 죽고 나서 다시 용산에 친정 부모님 댁 옆으로 이사를 하는데 여기서도 그걸 계속 이어 나갔어요. 출근도 하게 되어서 ‘직장부모커뮤니티’라는 걸 만들어서 이어나간 거죠. 


.육아모임.jpg동네모임.jpg 동네 육아모임하는 엄마들과 보쌈 겉절이 파티.              2017년 여름, 동네에서 만난 직장맘들과 아이들.   




죽음을 대하는 자세


남편인 권문석은 2013년 알바연대 대변인으로 활동했어요. 6월 첫 주 주말 토요일에 강의를 하고 들어와서 같이 아이 씻기고 저는 피곤해서 먼저 잤어요. 새벽에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까 남편이 소파에 쓰러져있었어요. 보자마자 죽은 걸 알았어요. 지금도 그때 이야기하면 슬프고 마음이 그래요. 장례식장에서 계속 울기만 하니까 내 친구가 했던 말이 있었어요. “남편의 죽음은 너의 잘못이 아니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마. 너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을 거야.”라고요. 그 이야기가 당시엔 위로가 되었어요. 내 잘못이 아니구나. 거꾸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됐어요. ‘그래도 마지막 가기 전에 같이 아이 목욕도 시키고 그랬구나, 다행이다.’  


그 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며 되게 시니컬했어요.너무 직접적인 충격을 크게 겪은 뒤라 ‘누구나 사람은 한 번 죽을 수 있지. 좀 빨리죽은 거지.’ 이렇게 생각해버린 거죠. 오히려 죽음에 대한 슬픔에 무뎌진 거였어요. 평소 친했던 오준호 작가와 세월호 관련 인터뷰를 하다 박근혜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일을 어렸을 때 경험한 건데, 그래서 죽음에 대한 냉소라든가 애도에 대한 감정을 전혀 만들지 못하는 것일 거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번뜩 돌을 맞은 것처럼 ‘아, 늘 경계하면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변에서 계속 나를 바쁘게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어요. 남편의 죽음으로 다른 나쁜 생각 못하게. 그 사람들한테 고맙죠.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활동을 빠르게 다시 하지 않았을 거 같아요. 


낮에는 활동가, 밤에는 디자이너


그해 여름 알바노조가 설립되고, 당시 구교현 위원장이 저한테 홍보팀장을 같이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단순히 물리적으로 사무실이 가까워 애 키우기 좋겠다 생각하고 이직을 했죠. 진짜 재밌게 열심히 잘했던 것 같아요. 알바 노동자 중 알바를 오래했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되게 자존감이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대학을 가지 않고 알바만 해왔던 사람의 경우, 다른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쯤 알바 경력 4~5년차인 건데 고졸로 갈 수 있는 회사라는 건 굉장히 한정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몰라서 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근로계약서나 주휴수당도 잘 모르고. 그래서 노동법 교육과 심리 지원 사업을 좀 더 강화하면 좋겠다 싶어 알바상담소를 분리해 특화 운영해보자 해서 알바상담소를 운영하게 됐어요. 청소년 교육도 하고, 노동법 교육도 하고, ‘공감인’이라는 단체와 같이 심리치유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운영기획도 하고. 이렇게 일상적 상담 사업과, 심리 지원에 관한 특화 사업 두가지를 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교육을 하다 보니 청소년 교육 생태계에 관심을 갖게 돼서 용산구에서 청소년교육 관련 네트워크에 참여하게 되죠. 그후 구청에서 ‘혁신교육지구사업’ 민간 파트너로 일해 달라고 해서 ‘용산혁신교육지구 실무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2017~18년에 실무협의회 위원으로 같이 일하게 되고 올해는 실무협의회 위원장이 됐지요. 


2018년에 서울시 지원사업으로 마을공동체 일환인 에너지절약실천사업을 하게 되었어요. 에너지주민강사양성과정을 만들고, 그때 멤버들과 환경 교육으로 좀 더 폭을 넓혀 초등학생 대상 교육을 시작했어요. ‘새활용’이라고 해서 환경 교육 활동이에요. 더해서 용산마을센터 마을지원활동가로도 활동하면서 마을공동체 팀 사업 컨설팅도 합니다. 아참, 마을활동가로서 하는 것 중에 ‘젠더거버넌스’ 활동도 해요. ‘젠더거버넌스’는 구의 정책이 얼마나 여성 친화적인지 살펴보는 모니터링 활동이죠. 하나 더 하자면 밤에는 프리랜스 디자이너이기도 하고요. 


누가나에게-알바상담1.jpg 누가나에게-알바상담2.jpg

2014년 마포구청 앞에서 열린 마을박람회 '마포에 살다 마을을 담다' 


알바상담소 장기 집권을 꿈꾸며


요즘 민관이 거버넌스를 많이 하는데, 이를 보면서 민간이 가져야할 역할에 대해 많이 고민해봅니다. 건강한 민간 영역이 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고민이 많이 생겼어요. 특히 관 행정이 갖는 경직성이나 관습들을 중간 지원 조직이 끌고 오는 경향이 있어서 올바른 민간의 역할과 입장에 대한 고민들이 더욱 많아요. 마을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지역노동은 대부분 노조 중심으로 이야기되는데, 그 지역 노동 감수성을 만드는 데는 서울노동인권복지네트워크(서로넷)가 되게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요즘은 안전교육을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받아요. 어린이집도 지진 대피 훈련하고 탈출 훈련도 많이 해요. 그런데 산업안전은 안 배우는 거예요. 저는 초등학교에서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스갯소리로 주변에 알바상담소 20년 장기 집권해야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농담이 아니라 진담입니다. 20년이 너무 길면 10년은 좀 해보고 이게 되는 일인지 확인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이걸로 지역에서 정치를 하거나 권력을 획득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어요. 단지 “쟤들 좀 하다가 안 되니까 관뒀구나.”하는 평가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직원(활동가)이 생기면 좋겠어요. 알바상담소는 CMS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알바연대에서 주는 30만 원 정도의 후원금 외에는 고정수익이 없어요. 다행히 아직까지 월세를 빚지고 있진 않아요. 하지만 인건비만큼은 벌 수 있는 조직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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