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자”고 외쳐온 ‘민들레’_공군자 서울노동광장 대표

by 센터 posted Nov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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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공군자’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많지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도 참 많다. 서울노동광장 대표를 비롯해 서울노동인권복지네트워크 집행위원장,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봄봄 카페지기,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 희망씨 이사 등. 그만큼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아 일정이 빼곡하다. 허투루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하루 24시간을 48시간으로 쓰고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이는 사실 11년간 노동부 근로감독관으로 일하다 ‘민주노동당 당원 활동이 공무원법상 정치 활동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해고된 첫 번째 공무원이기도 하다. 이 글은 해고 노동자에서 지역사회 일꾼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그이의 이야기이다.

인터뷰·정리 : 이기범 쉼표하나 회원



탄생과 이름의 비밀


태어날 때 비밀이 있었다. 아들 삼형제를 낳은 어머니는 딸 하나를 꼭 낳고 싶었다. 아버지 역시 은근히 딸을 원했다. 전남 장성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는 딸이지만 태어나서 한동안은 동네에 아들인것처럼 하라고 했다. 정말 귀여운 딸이 태어났다. 부모를 절묘하게 합쳐놓은 아이는 집안에 웃음을 안겨줬다. 


어느 날 집으로 놀러온 아버지 친구는아이를 한참 지켜보면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우종이, 아이 이름을 지었는가?” 

“아직 없네. 좋은 이름이라도.”

소반 위에 차려진 막걸리 상을 사이로이름들이 오고 갔다. 옆에 있던 김점순 여사는 아이가 잠투정도 없고 조용히 무럭무럭 잘 자란다고 했다.

“그럼 군자는 어떤가?”

“성인군자聖人君子할 때 ‘군자’. 괜찮은 거 같은데. 군자 엄마 괜찮지.”

사람은 이름값을 한다. 아이는 호기심이 많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지 않았지만 잠자리 위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밤새도록 떼를 썼다. 지친 어머니는 아이를 달랜 뒤 다음 날 밭일을 뒤로 하고 아이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군자를 본 선생은 아이가 너무 작아 수업을 따라 올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연필을 쥐어줬다. 군자는 종이 위에 한글 이름과 한자를 또박또박 적었다. 덧셈과 뺄셈도 할 수 있다는 말에 선생은 아이의 사슴 같은 눈을 보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반장으로 뽑혔다. 아이들은 군자를 잘 따랐지만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공군, 군자, 공자 등 이름을 놓고 놀렸다. 당시 집에서는 ‘윤정’이라는 예명으로 불리곤 있었지만 아이는 은근 자신의 이름이 좋았다. 공군자.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이의 집은 부자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분가할 때 할아버지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점순 씨와 결혼 후 부지런히 남의 밭에서 일을 해서 집터를 마련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막내오빠가 뇌염모기에 물려 크게 아팠다. 당시 의료보험이없던 때라 큰 환자라도 생기면 기둥뿌리가남아나지 못했다. 아픈 막내오빠는 더 이상 군자의 책가방을 들어주지 못했다. 군자는 이름처럼 의젓했다. 어렸을 때부터자신의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참으며 문제를 감내했다. 아이는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군자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5월 어느 날 학교에 선생님들이 오지 않았다. 휴교를 했다. 당시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작은오빠는 다음 날 새벽에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왔다. 작은오빠는 금남로에 군인들이 잔뜩 깔려 있다며 참혹한 상황을 전했고, 버스가 없어 집으로 걸어왔다고 했다. 오는 중간 중간에 군인과 경찰들은 오빠의 손에 화약 냄새가 나는지 검사를 했다. 


‘덩기덕 쿵덕!’ 민중의 소리에 빠지다


1988년 아버지와 오빠들의 힘으로 고등학교를 마친 군자는 전남대학교 자연대 수학과에 진학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 문제를 마음껏 풀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지만, 되레 장구에 푹 빠져 버렸다. 동기, 선배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에 맞선 전태일이란 이름을 알게 됐다. 선배들은 실천 투쟁이라고 했다. 군자는 북을 든 풍물패 동기들과 함께 최루탄이 가득한 아스팔트를 누볐다. 


1989년 임수경 씨가 북에 올라갔을 때였다. 남총련으로 서울에 올라온 군자는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던 중 선배가 “다내려”라고 하는 말에 뚝섬에서 한양대역까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누르며 뛰었다.앞선 선봉대가 뚫어놓은 한양대를 무사히들어갈 수 있었고, 집회 후 또다시 선배들의 투쟁과 기지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개구멍으로 나온 군자 일행은 돈을모아 인근 시장에 가서 옷을 사와 갈아입고 연세대로 갔고 거기서 기다리던 조선대스쿨버스를 탔다. 하지만 서울 톨게이트에서 경찰에 잡혀 결국 철장에서 이틀 동안 있어야 했다. 경찰서 곳곳을 찾아 헤매던 군자의 오빠에게 한 경찰서장은 “지금은 숫자도 많고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사실 제 딸도 잡혀 있는데 찾지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91년 국가 폭력에 맞섰던 많은 청년들이 세상을 떠났다. “강경대를 살려내라!”라고 외친 박승희 열사의 분신은 군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광주에서는 상반기 내내 투쟁과 장례식이 이어졌다.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울분을 토해냈던 군자는 결국 몸이 아파 쓰러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졸업 후 ‘노동 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군자의 뜻을 알던 선배들은 “너의 체력으로 생산 현장에서 조직화 사업을 하기는 어렵다”며 사무직에서 뜻을 펼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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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풍물패 활동


“공무원들도 노동조합 한번 합시다”


공군자는 조용히 광주 자취방을 정리하고 큰오빠가 있는 강동구 천호동으로 갔다. 1년 만에 9급 공무원에 합격해 서울동부지방노동사무소(현 지청)로 발령받고, 산재 업무를 맡았다. 공무원 생활에 자리를 잡은 뒤 강동에 있는 시민단체 강동송파시민회에 문을 두드렸고, 자신 있던 풍물패 활동을 했다. 여기서 후배였던 남편을 만났고, 군자 나이 29세에 결혼을 했다.


근로감독과로 가면서 노동 문제를 실질적으로 접하면서 한국 사회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지켜봐야 했다. 또한 공무원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도 직면하게 됐다. 당시 공무원 노동자들은 외국 서버를 이용한 ‘다산’ 사이트에서 공무원 사회의 여러 문제를 공유했다. 이 사이트는 신분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사이트 운영 원칙이었다. 군자는 즐겨 부르던 민중가요 제목을 따 ‘민들레’ 또는 ‘장산곶매’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 게시판 글만 보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누구도 불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우리 봅시다”라고 첫모임을 제안했고, 이후 출판사와 연계해 공무원의 어려움을 담은 책을 냈지만 곧바로 노동조합 결성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했고 당시 여의도에서 열린 출범식에 군자는 노동조합 조합원이 아닌 시민단체 회원으로 참여했다.


2004년 출산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하려고 할 때 군자는 ‘정치 활동 금지’를 이유로 해고됐다. “민주노동당 가입하셨죠? 게시판에 이 글 올리신 적 있죠?” 감사실은 이미 공군자를 표적 삼아 징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2003년 활동 내용들을 비롯해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따지고 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였고, 공무원노조 출범 후 노동부 내에서도 노조 결성 움직임이 있던 때였다. 


공무원노조, 민주노동당과 함께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으로 1여 년을 싸웠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경찰들은 공무원 신분에서 해고됐다는 사실과 일인시위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추운데 고생 많으십니다. 오늘도 또 나오셨군요. 보고용으로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경찰도 노동조합 좀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대법 판결까지 가봤지만 ‘공무원 중립’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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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청소년노동인권교육 활동가 양성 기초과정’에서 교육하고 있는 공군자 대표.


“더불어 살아가 봅시다”


해고 후 선배의 소개로 활동하고 있던 서울노동광장에서 상근으로 일하게 됐다. 서울노동광장은 2004년부터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 ‘새로운 노동 운동’을 도모하는 단체다. 공군자는 현재 서울노동광장 대표를 비롯해 서울노동인권복지네트워크 집행위원장,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봄봄 카페지기,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 희망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요즘 청소년 노동 인권 교육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A. 사실 우리는 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노동 운동 세대 간 단절이 가장 큰 걱정입니다. 청소년들의 마인드는 과거와 정말 달라요. 노동 운동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청소년 노동 인권 교육이 정말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자라고 하면 폭력 시위 등 과격함만을 이야기하는데 청소년들에게 노동자는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알려줘야 합니다. 학교에서 노동 인권 수업을 한다고 하지만 정말 요식적입니다. 한 특성화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 전체를 대강당에 모아놓고 두 시간하고 끝냈어요. 방송실에서 스피커 틀어 놓고 교육하는 경우도 있고요.


Q. 카페 봄봄에서도 활동하시던데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A. 지금 노동 운동이 집중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거슬러 올라가면 민주노동당에서 학교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 경험에서 지역 운동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지역에 있는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자는 취지를 살린 것이 카페 봄봄입니다. 그동안 노동 운동이 회사 중심으로 운영됐다면 이제 지역을 기반으로 해보는 것입니다. 마을 유니온과 노동시민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노동조합의 역할과 공동체 역할을 해보면 좋겠어요. 지난해 영등포에서 ‘공감 밥상’ 활동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현장 노동자들이 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하자는 것이죠. 그들의 서비스를 받는 지역 주민들은 어떻게 이들을 대해 왔을까요? 택배 노동자를 대하는 지역 주민들이 달라지게 되더랍니다. 서로 다른 노동을 이해하고, 문제를 풀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Q. 많은 일을 하시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A. 사람이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이에요. 현장에서 삭발하는 모습만 봐도 펑펑 웁니다. 왜 저 사람은 머리를 깎아야 하는가. 측은지심이 아니에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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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오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높이고 노동자들 간에도 공감하는 자리를 만들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공감밥상’


Q. 힘든 적은 없으셨나요?

A. 게임 중독에 빠진 적이 있어요. 2011년 이춘자 노동광장 대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견딜힘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핸드폰 게임에 빠졌지요. 이후에 제가 정말 소진된다고 느꼈을 때 혼자 제주도 여행을 가서 올레길을 돌아다녔어요. 그리고 다시 복귀했습니다. 저는 힘들면 걷습니다.


Q.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교회를 한번 보세요. 신자들은 매주 자발적으로 예배 보고 성경 읽고 십일조도 냅니다. 청년, 구역, 산악회, 성가대 등 모임도 다양하고, 층층으로 구성이 돼요. 관계 형성도 하고 서로의 삶도 돌보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운동은 어떤가요? 종교에서 하는 것만큼 해야 하지 않나요? 많은 이들이 활동을 못하더라도 후원도 많이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으로 나갔으면 합니다.군자의 남편과 오빠를 제외하면 가족들은 군자가 여전히 공무원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해직 이후에도 평상시와 똑같이 “회사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속였다. 사실 공무원 생활은 아니지만 복직 투쟁과 노동시민사회단체에서 계속 활동해왔기 때문에 ‘거짓말’은 아니다. 한번은 아이가 군자에게 “엄마, 해고가 뭐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군자는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동자가 회사에 더 이상 다니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말해줬다. 지금 군자는 ‘노동’을 보듬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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