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노동조합이 필요하다_박금자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위원장 1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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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박금자 위원장은 방글방글 웃는 만화 주인공 호호아줌마 같았다. 거침없지만 부드럽게 말이 이어졌고, 세 시간 가까이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사무실에서 밥을 해먹는 노조 조합원들의 부산한 발걸음 소리와 식사하시라고 몇 차례 들락날락하며 사무처장이 눈치를 줘도 대화를 중단하기 힘들었다. ‘운동’에 대한 ‘특별한’ 철학이 없었던 그이가 학교 급식실 조리사로 일하면서 부당함에 맞서 노동조합을 만든 이야기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박 위원장은 학교 비정규 노동자들의 산증인인 셈이다.공부할 시간도 없이 시골 집안일을 도와야 했던 맏딸 박금자 위원장이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을 만들기까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담는다.  

인터뷰·정리 : 이진훈 쉼표하나 6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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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자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위원장


산더미 같은 집안일, 공부는 짬짬이


부모님은 전남 보성에서 농사를 지으셨어요. 집이 경제적으로 힘들진 않았어요. 6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죠.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6남매를 대학 다 보내고 먹는 거 입는 거 따져보면, 아버지가 돈을 꽤 많이 벌었던 것 같아요. 만평 넘게 농사를 지었거든요. 시골이지만 본업도 따로 있었어요. 삼베를 본업으로 하셨죠.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의 식사라든가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고,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는 삼베 일을 거의 온 가족이 매달려서 했어요. 저 삼베 짜는 거 잘해요. 삼베 짜는 데는 선수예요.(웃음) 집안일, 농사일, 삼베 짜는 일까지 할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온 가족이 바쁘게 일했어요. 그러면서도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어요.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청소할 때 걸레질을 하면서도 단어장을 걸레위에 놓고 청소를 했거든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가족들 식사 준비를 했어요. 온 가족이 농사며 삼베 일을 하다 보니 제가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 했어요. 제가 지금 쉰셋인데, 그 시절만 해도 시골부엌은 나무 떼서 밥할 때였어요. 밥 짓고, 동생들과 제 도시락도 싸고 새벽에 짬짬이 시간되는 대로 공부를 했어요. 중·고등학교는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어요. 학교까지 무거운 책가방에 보조가방 들고 걸어 다니면서도 항상 영어단어장을 들고 다녔어요. 공부할 시간이 모자랐거든요.


우리 형제는 2남 4녀인데 저부터 시작해서 딸이 연달아 셋이에요. 그렇다고 공부 시키는데 딸들을 차별하진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당시에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예요. 공부에 대한 욕심도 있으셨죠. 아버지가 고등학교 입학할 시절에 광주일고는 입학하기 힘든 인문계 고등학교였어요. 그 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농업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죠. 근데 그 상황이 당신에게는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는지 2학년 때 중퇴를 하셨어요. 그래서 자식들 교육에 더더욱 욕심내셨던 것 같아요. 지금 살아계시면 연세가 여든인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노동 운동한다고 한참 단식투쟁하고 있을 때 돌아가셔서 챙겨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남아요.


남들 뒤따라 다녔던 집회 현장


1984년도에 대학 들어가서 큰 굴곡 없이 지냈어요. 공부는 등록금 반액 장학금을 받을 만큼 했어요. 자취를 했는데, 집에서 자취방을 얻어 주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고요. 그때 사회적으로 한참어지러운 때였어요. 전두환 집권 시절이었거든요. 그래서 학생들 데모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뒤따르면서 ‘전두환 물러가라’며 구호를 같이 외치는 정도였지 앞에나서서 주도한다든가 열성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어요. 사회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대학교 다니면서 만난 남편하고 88년도에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을 했어요.아버지한테 엄청 혼났죠. 남편은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 영어 교사가 되었는데,그때만 해도 교사라는 직업이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반대가 더더욱 심하셨어요. 교사라는 얘기를 듣고 ‘딱 굶어죽기좋겠다’면서 굉장히 서운해 하셨어요. 게다가 맏딸이었던 만큼 기대도 컸는데 막상 졸업하자마자 결혼한다고 하니 많이 서운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 약사니 뭐니 해서 좋은 직업의 중매 자리도 많이 들어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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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 노동자(@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동생 권유로 시작한 학교 급식 조리사


1988년도에 결혼하고 나서 중학생들을 상대로 영어 과외를 했어요. 그때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첫째 아이가 있었어요. 아이 키우면서 일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과외 일을 오래 하지는 못했어요.

그 후로 둘째 아이도 낳고 주로 집안일만 하다가, 울산광역시 학교 영양교사로 일하는 동생이 학교 급식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예요. 동생은 4년제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어요. 동생이 입학할 때만 해도 저는 식품영양학과 나와서 뭐하려고 하냐면서 엄청 반대를 했어요. 큰딸이 반대를 하니 아버지도 반대를 하셨어요.그 반대에도 동생은 입학등록금만 내주면나머지 학비나 생활비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면서 설득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끝내 입학을 해서 전액 장학금도 받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꿋꿋하게 다녔죠. 결국 동생은 식품위생직 공무원으로 학교에서 영양교사를 하게 되고 저는 집안의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던 거예요.


그런 동생이 학교 급식 일을 제게 추천해 주더라고요. 그때가 1995년도였어요.학교 급식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때여서그 일을 하게 되면 바로 기능직 공무원이된다더라고요. 근데 좀 더 알고 보니까 영남권과 호남권의 학교 급식에 대한 재정 지원에 차이가 있었어요. 영남권은 학교 급식 조리사로 근무를 하게 되면 바로 기능직 공무원이 되는 거였는데, 제가 사는 호남권, 특히 순천 지방은 2년 정도 일용잡급으로 근무를 하고 나서 순번제로 기능직 공무원으로 전환이 되더라고요. 동생은 영남권 상황을 보고 제게 추천을 했던 거였죠.


어쨌든 동생 말을 듣고 부리나케 조리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리고 큰딸 아이가 1학년으로 입학한 왕조초등학교를 찾아 가서 이력서를 냈어요. 그 학교가 집에서 5분 거리에 있었거든요. 무턱대고 처음 보는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력서를 냈어요.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니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학교 급식 조리사로 채용해 달라고 하면서요. 근데 교장선생님이 제 당당한 모습을 좋게 보셨는지 다음 날 바로 전화가 하셨죠. 그렇게 그 학교에서 급식 조리사로 일하게 되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교장선생님 며느리도 다른 학교 급식 조리사로 일하는데, 교장선생님이 “저 왕조초등학교 조리사하고만 놀아라”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만큼 저를 잘 보셨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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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실을 청소하는 조리 노동자들의 모습이 위험해 보인다.(@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두 아이 키우면서 인정받는 조리사로     


1,500명분의 급식을 책임지는 조리사로, 13명의 조리원들과 같이 일했어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한 살이었는데, 조리원 분들의 나이는 40대에서 50대였어요. 그 분들을 이끄는 책임자로 일을 해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영양사는 채용이 바로 안 돼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순회근무로 왔거든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집안일들이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렵지 않게 일을 처리해 나갔죠. 조리사는 아침에 급식 재료가 들어올 때 검수를 하고 조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자리예요. 학생들의 입맛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학교에 근무하는 50, 60명의 선생님들, 학부모들의 모니터링까지 신경 써야 했죠. 학교 급식을 처음 시행하다보니 관심들이 많았어요. 부담감을 많이 느낄 수도 있는 자리였는데 어릴 때부터의 경험 때문에 어렵지 않게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음식 맛도 그렇고 일처리도 그렇고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일을 하게 되면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둘째 아이였어요. 네 살 된 아이를 제가 일하는 왕조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니게 했어요. 유치원이 2층에 있었고 1층에 급식실이 있었거든요. 교장선생님이 처음 시행되는 학교 급식에 관심이 많으셨고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셔서 일곱 살에 들어갈 수 있는 유치원에 둘째 아이가 같이 있을 수 있도록 해준 거였어요. 처음에는 잘 지내나 싶더니만 이내 적응을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엄마가 일하고 있는 급식실에 내려와서 혼자 놀곤 했어요. 그 모습을 교장선생님이 보고는 아이에게 천 원짜리를 꼭 쥐어주시면서 딴 데 나가지 말고 엄마 일하는 것 잘 보고 있으라고 하는 거예요. 교장선생님 눈에도 아이들이라 혼자 놀다가 밖에 나가서 다치거나 사고를 당할 수 있겠다고 걱정했던 것 같아요. 근데 아이들이 그런가요. 하루는 학교 소각장에서 놀다가 앞머리를 홀라당 태워먹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나무 작대기 하나 들고 온 운동장을 쓸고 다니다가 축구공에 맞아 울고 들어올 때도 있고···. 그런 게 엄마로서 아이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어요.


그렇게 해가 바뀌고 첫째 아이는 2학년이 되고 둘째는 다섯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둘째 딸아이가 교실에서 언니 옆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때 큰딸 담임선생님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데요.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가 언니 공부하는 거 본다고 매일 교실 앞에 있는 걸 보고는 언니 옆에다 자리를 만들어준 거예요. 그렇게 언니 공부하는 거 보면서 옆자리에서 혼자 놀고 그랬어요.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둘째 딸아이가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애매한 소속, 사라진 기능직 공무원


일하다 보니 학교 급식 조리하는 분들의 급여 구조가 되게 이상했어요. 저는 교육청에서 지급하는 급여를 받았지만 계약은 교장선생님과 맺은 거였고요. 학교마다 두 명 정도는 교육청에서 급여를 받았고 다른 조리원들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걷는 급식비로 인건비를 처리했어요. 소속 자체가 상당히 애매했어요. 급여로만 따지면 조리사는 교육청 소속이고, 조리원들은 학교 소속인 거예요. 또 계약서로 따지면 조리사도 학교 소속으로 참 애매한 위치였던 거죠. 그 구조가 지역에 따라 달랐어요. 영남권은 교육청에서 급여를 받고 교육감과 계약을 체결해서 바로 기능직 공무원이 되고, 호남권은 2년 정도를 일용잡급(당시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일용잡급으로 불렸다)으로 일하고 나서 순번제로 기능직 공무원으로 전환되는 구조였어요.


그렇게 학교 급식 조리사로 일한지 2년이 지나고 97년이 됐어요. 이제 제가 기능직 공무원이 되는 순번이었던 거죠. 그런데 그해 IMF 사태가 터진 거예요. 그러면서 당분간 공무원 전환이 없어져 버린 거죠. 외환위기 때문에 국가 경제 상황이 나빠져서 그런가 보다하고 기다렸어요. 다시 공무원 전환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학교 급식 일을 시작한지 5, 6년이 지난 2000년도에도 여전히 공무원으로 전환될 기미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딸아이들이 학교 가서 공부할 시간 동안 제가 일하는 시간을 맞출 수 있었고(오후 3시 정도면 마무리되는 일이거든요), 게다가 방학 때는 출근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제게는 좋은 일자리였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능직 공무원 전환에 대한 기대도 컸는데 그런 기대가 없어져 버리니까 억울하더라고요. 그도 그럴 것이 95년에 일당이 1만 7,500원이었어요. 그것을 1년에 275일 근무일수로 잡아서 급여를 지급해 주더라고요. 275(이칠오)는 방학기간 등을 제외한 숫자거든요. 정규직 공무원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죠. 그렇게 기능직 공무원 전환을 바라보면서 심한 노동 강도에도 버티고 견뎌왔던 건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거니 많이 억울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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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실 바닥까지 꼼꼼하게 청소하는 조리 노동자들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노동조합의 첫 단추를 끼우다


교육청을 혼자 세 번 정도 찾아 갔던 적이 있어요. 2003년 당시에도 영남권에서는 학교급식 조리사가 바로 기능직 공무원으로 채용이 됐거든요. 근데 전남에서는 근무한 지 2년이 훨씬 지나도 왜 기능직 공무원으로 전환되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누가 대신 말해 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 직접 교육청을 찾아간 거죠. 그런데 두 번째까지는 만나주지도 않는 거예요. 아무리 학교에서 비정규직 조리사로 일하고 있지만 교육청에서 급여를 받는 교육청 소속인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 번째는 담당 공무원과 면담 날짜를 확실히 정하고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렵게 찾아 가보니 사무실도 아니고 구내식당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교육청 급식 담당 공무원이 내려와서는 뭐 하러 와서 귀찮게 하냐는 식이였어요. 그 무시하는 눈초리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혼자 이렇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렇다고 그만두기도 억울했고요. 그때 전교조가 생각나더라고요. 남편이 전교조 활동을 상당히 열심히 했거든요. 우리 같은 학교 비정규직에게는 더더욱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2003년도에 작심을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전라남도는 22개 시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군 각 학교마다 조리사들이 있잖아요. 퇴근한 후에는 그 학교마다 전화를 해서 조리사 분들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어요. 그때만 해도 휴대폰이 별로 없을 때였거든요. 그리고 밤늦도록 생판 모르는 조리사 분들과 통화를 하는 거예요. 그때 집 전화비가 한 달에 18만 원 정도 나온 거예요. 남편 하는 말이, 집에서 사업을 하는 거냐고 할 정도로 열심히 전화를 돌렸어요. 그렇게 조리사들끼리 모여보자고 3개월을 전화 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차츰 시 단위 군 단위로 지역에서 모임이 되도록 주선을 하고,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찾아가서 만나고 했더니 한 200명 정도가 되더라고요. 저와 같은 처지에 있던 조리사 분들이 많았던 거죠. 게다가 2004년도에 일용잡급을 연봉제로 전환한다면서 275일 기준으로 급여를 책정했던 것을 245일치로 연봉을 낮춰 버렸으니, 1년에 30일치 일당이 날아가 버린 거잖아요. 그렇게 되니 급식 조리원과의 차이도 없어져 버린 거예요. 조리 책임자로서 가산금 5퍼센트만 더 받았던 거죠. 믿었던 기능직 공무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깜깜 무소식이고, 영남권과의 처우 차이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혼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그렇게 모여 지더라고요. 그때 전남 지역 조리사 전체 인원이 약 500여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 200명이 모인 거예요.


이 정도 인원이면 되겠다 싶어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 일반노조에 가입했어요. 그 이후로 1년 열심히 싸웠죠. 봄방학이나 여름방학 때는 교육청 앞에 집회한다고 전남지역에 있는 급식 조리사 200~300명이 모였어요. 버스 대여섯 대를 빌려서 교육청에 도착해 보니 전경버스가 훨씬 많은 거예요. 생전 해보지도 않은 집회한다고 왔는데 전경들이 더 많고, 얼마나 겁이 났겠어요. 그래서 얼굴은 꽁꽁 싸매고 눈만 내놓고 집회했어요. 정말 서로 누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였어요. 그렇게 방학 때는 집회를 했고, 각자 근무할 때는 조합원을 늘려나가는 작업을 바쁘게 진행했죠.그렇게 1년을 버텼는데 교육청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고, 조합원들 분위기는 점점 시들해 가고, 싸울 힘도 없어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2004년도에 노동조합을 접었어요.


학교에서 급식조리사 일은 계속했지만 한동안 허탈감에 빠져 있었어요. 자식들도 진학을 하고 해서 신경을 더 써야하기도 했어요. 우리 아이들은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 제가 직접 공부를 챙겼기 때문에, 그래서 앞장서서 뭔가를 다시 조직하고 해볼 생각 없이 지내게 되더라고요.(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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