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모르고 시작한 노동조합_이종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상임활동가

by 센터 posted Jun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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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새해 첫날, 삼성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본관 앞 길거리에 비닐천막을 친 반올림 농성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날은 노숙 87일째였다. 삼성이라는 권력의 심장부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종란 노무사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삼성 이야기가 나오자 쉴 틈 없이 투쟁 과정을 자분자분 쏟아내는 그이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노숙농성 227일째를 맞은 5월 20일, 센터 쉼표하나 회원인 여민희 씨와 함께 그이를 다시 만났다. 다시 찾은 농성장은 계절에 맞게 변신해 있었다. 하얀 고무신에 하얗고 빠알간 예쁜 꽃들이 피어있고, 잘 다듬어진 솟대가 농성장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삼성반도체 LCD 공장에서 숨진 76명의 노동자들, 고 황유미 씨의 영정사진 등이 농성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종란 노무사가 지금껏 걸어온 길엔 계획한 건 아니지만, 삼성과의 지난한 악연의 끈이 이어져 있었다. 수줍음 많았던 그이가 삼성이라는 거대 권력과 싸워온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담아본다.                                                 

인터뷰·정리: 여민희 쉼표하나 4기 회원

 

도입사진1.JPG


산에서 뛰어놀던 자유로운 셋째 아이


초등학교 3학년 초까지 시골에서 자랐어요. 충청북도 옥천에 있는 ‘대골’이라는 마을이었는데, 이름만 들어도 산골짜기인 산 밑 동네에서 살았죠.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이전엔 주로 산에서 놀던 기억이 떠올라요. 자연과 자연스럽게 접했던 환경 때문인지 지금도 그런 정서가 남아 있는 거 같아요. 도시의 삶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초등학교 3학년 때 옥천 옆 대전으로 이사를 했어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라 잘 나서지 못하는데 전학 와서도 조용히 지냈던 것 같아요.


대가족이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고 형제들 넷과 주말부부였던 엄마, 아빠가 계셨죠. 아빠는 주말마다 오셨고, 그 때문에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치매를 앓으셨는데 엄마가 병간호를 혼자 다하시면서 아이들 넷을 키우셨죠. 그때는 엄마가 화를 내고 우리에게 회초리 드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랬겠어요? 엄마는 대단한 희생을 하며 사셨던 거였어요. 죄송하게도 철이 들면서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10대 때는 엄마가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반항도 많이 했어요. 엄마가 보기에는 제 성격이 삐뚤어졌다는 이유로 자주 야단맞았죠. 저는 셋째 딸이에요. 딸, 딸, 딸 그리고 막내가 아들이에요. 아들을 낳기 위해서 딸 셋을 낳은 거죠.

청소년기에는 몸이 약간 약했어요. 그래서 돌봄 받기를 원했는데 부모님이 바쁘셨던 환경이 나에게만 사랑을 쏟기에는 힘들었고 또 가족들이 힘들기도 했죠. 그런 이유가 내 성격이나 진로를 선택할 때 영향을 미친 거 같아요.


다른 세상을 알게 한 경영학회 학술부


돌봄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에 고등학교 때 진로를 선택하면서 자연스럽게 특수교육학과를 지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미 두 언니가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집안 형편상 특수교육학과가 있던 사립대학교는 진학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특수교육학과는 가지 못하더라도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좋은 일을 하자는 취지로 대전에 있는 국립대학교 경영학과에 지원을 하고 입학했어요. 그런데 참 어리석은 일이었어요. 입학하고서야 경영학과는 마케팅을 배우고 샐러리맨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학과 공부에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대신 소위 운동권 동아리였던 경영학회 학술부에 들어가면서 학교생활의 재미를 알게 되었어요.


조선일보가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라는 연재를 하던 때에 그 신문 칼럼을 두고 한국 현대사에 대해 선배들과 논쟁을 했어요. 그동안 배웠던 질서와는 다른 한국 현대사 이야기도 듣고,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정말 다른,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5.18 망월동 묘지 참배도 다녀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요. 내가 나만을 위한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조금은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학 1학년 때 전국 대학교에선 학생회를 중심으로 5.18 광주 학살자들 처벌 공소 시효 만료 시기를 앞두고 이들을 법정에 세워야한다고 했어요. 학생총회를 성사시키고 유성에 있는 학교에서 대전역까지 거리시위를 했어요. 대학 다니는 내내 동아리, 경영학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학생회에서 일한 건 아니지만 학내 집회나 농활, 그리고 경영학회 세미나에는 열심히 활동을 했죠.

경영학회 학술부에서 노사 관계 분과를 맡게 되면서 노사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지방이라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근 신탄진에 있는 한국타이어 해고자들과 간담회를 진행하고 학교 주점을 준비하면서 함께 순대를 썰기도 했죠. 지금 한국타이어에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정말 감개무량해요!


95년 말,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되는 것을 겪고 96년도에 노동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어요. 이어 97, 98년도에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을 우려한 노동계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때 국회에서는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죠. 노동 시장 유연화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온 노동자들을 보면서 학내에서 제대로 알려야겠다 싶었어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무엇인지, 정리해고제가 무엇인지, 파견근로제가 무엇인지 미리 공부해서 알리기를 했죠. 그 당시에는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노동자들에게 위험 신호라는 것을 막연하게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활동했던 거죠. 그렇게 경영학회 활동 4년을 하고 졸업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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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회 학술부 선후배들과 함께


노무사의 매력에 매료되다


졸업을 하고 백화점 판촉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친구가 노무사라는 자격증이 있다면서 자료를 뽑아왔어요. 나중에 노동조합에서도 일할 수 있고, 일반 기업에서도 일할 수 있고, 법인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무엇보다 노동조합에서 일을 하는데 국가자격증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그렇다고 내가 노동조합에 취업을 할 것이라는 엄청난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데 뭔가 참신하다는 생각과 노동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껴서 공부를 시작했죠.


199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2002년에 노무사 자격증을 땄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노무사 시험기간 중에 알게 되었던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박성우 노무사가 “놀면 뭐하냐? 대전에 있으면 뭐하냐? 수습 시작하기 전에 여기 와서 자원 활동해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노동법률지원센터로 가서 2002년 11월부터 상담 자원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연고도 없고 생경한 서울로 올라와서 고시원에 짐부터 풀었죠.


집에서 반대는 없었어요. 데모한다고 다녔는데 자격증이라도 땄으니 기특하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셨어요. 그렇게 보수적인 집안은 아니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어느 집에서나 마찬가지로 데모하는 것을 당연히 싫어했죠. 그 당시 사회적인 인식도 그랬고, 정부의 탄압이 워낙 심하고 빨갱이라는 인식이 만연했잖아요. 그렇지만 노무사 자격증을 땄다는 것이 가족들을 안심시킨 것 같아요.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첫 상담을 시작했어요. 자격증을 따자마자 상담을 바로 시작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죠. 노동법을 알기는 했지만 이론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어요. 정말 특이하게 첫 상담이 선원 노동자였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근로 기준법이 아니라 선원법의 적용을 받거든요. 선원법을 찾아가며 열심히 상담을 했죠. 다음엔 택시 노동자, 콩나물 국밥집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을 상담했어요. 그런데 기성세대인 그분들이 20대 후반의 젊은 노무사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사안에 대한 내용을 얘기하시는 게 아니라 살아온인생을 털어놓고 하소연하시는 거예요. 마치 심리상담을 받는 것처럼 고충을 털어놓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는 것을 보면서내가 가진 힘은 조금밖에 없지만 이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줄 수 있는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을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사람을 접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이 직업에 더욱 매료되었어요. 그래서 이 생활을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후 수습 노무사들이 모임을 갖고 그 모임에서 진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죠. 노동조합처럼 소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곳을 찾는데 쉽지가 않았어요. 수습 노무사들이 MT를 갔는데 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8기 노무사 선배인 장혜진 노무사가 왔고 민주노총에서 일하면 가장 좋은 점이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경기지역 일반노동조합을 소개했어요. 위원장님이 밤이나 새벽이나 정신없이 전화를 해서 상담을 하지만, 이곳이야 말로 노무사들이 보람 있게 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밤새 고민을 하다가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고 위원장에게 면접을 봤죠. 그런데 노무사 채용 면접인데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구속된 경험은 있는지? 집회 사회를 본 적이 있나? 운전면허가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채용하셨어요.


2003년 3월부터 수원에 근거지를 두고 일을 시작했어요. 경기지역일반노조 산하 수원, 성남, 용인, 하남 등 이런 곳의 사업장 분회에서 벌어지는 임금, 해고, 징계, 노조 설립과 부당노동행위 대응 등 관련된 일을 3~4년 정도 했어요. 재미있기도 했지만 힘도 들었어요. 아침잠이 워낙 많은데 아침 일찍 선전전을 하러 가자고 깨우러 오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수원의 한 전자회사 아주머니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군포에 있는 삼성 하청인 전자부품회사에서 삼성의 압력으로 폐업을 하게 되고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이 싸움을 하면서 ‘철의 노동자’를 부르는데 “내 하루를 살아도~” 하는데 함께 눈물을 흘렸어요. 이런 마음은 똑같았어요. 소외된 노동자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싶은 노동자라는 점을 짚어주고 자각하는 순간에 모두 하나가 되는구나를 느끼면서 감동을 받았고 희망을 느꼈죠.

노조일은 박봉과 거친 일이었지만 잘 이겨내면서 즐겁게 생활했던 것 같아요. 여기까지가 첫 직장에서 일이에요.


삼성을 알게 되다


! 이건 엄청 쑥스럽고 잘 얘기하지 않는 부분인데요. 2004년 초에 이마트 용인수지점 계산원 분들이 민주노총 경기본부로 찾아왔고 제가 일하던 노조에서 상담을 했어요. 이분들은 부당한 일들에 맞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처음에 5~6명이 가입했고, 이분들에게 부당노동행위 교육을 했어요. 저는 이분들을 언니라고 불렀어요.


신세계 이마트 용인수지점 분회를 만들었어요. 그때 분회장 언니가 제가 일하던 노조에 우리가 안에서 조직을 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니 지원을 해 달라고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의논을 하다가 제가 반 농담 삼아 지원을 하겠다고 이야기 했죠. 그리고 민주노총 경기지역 일반노조에서 일을 했다는 부분을 빼고 서류를 접수했더니 붙었고 면접까지 합격을 했어요.


2004년 8월쯤 첫 근무를 시작했어요. 현장 조직을 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떨리기도 하고 중압감이 있었죠. 하지만 언니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계산원 일을 잘하지 못했어요. 일이 어렵더라고요. 

기본 근무 시간이 7시간인 단시간 근무 형태로 근로 기준법의 보호는 받지 못하게 하면서 연장근무를 시키고 입사할 때 1년짜리 근로 계약서를 쓰게 했어요. 계약을 반복 갱신하고 있고, 오리엔테이션 때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장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규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죠. 이것이 비정규직 형태이고 회사가 원하면 언제든지 계약해지할 수 있다는 것을 언니들은 잘 믿지 못했어요. 그런데 분회를 만들고 나서 회사는 노조 탈퇴하지 않는 조합원 언니들을 모두 계약만료로 해고를 시켜버렸죠.


2004년 12월 21일 창립총회를 했는데 그때까지 회사는 몰랐어요. 제가 들어가서 일한 지는 4개월 정도였는데 그동안 분회장 언니와 조합원 언니들이 열심히 조직을 했어요. 그때 계산원 50여 명 중에 23명이 가입했어요. 민주노총 경기본부에서 창립총회를 했어요. 노조위원장, 분회장이 상견례를 하겠다고 이마트 용인수지점 지점장에게 공문을 보내고 지점에 갔는데 분회장과 점장이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점장이 문을 걸고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대요.


일인시위.jpg

이마트 수지점 앞에서 부당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일인시위


삼성식 노조 탄압

  

노조 만들고 이틀 만에 전국 지점장 회의가 용인수지점에서 열릴 정도로 회사는 매우 민첩하게 대응했어요. 저는 창립총회 날이 휴무일이었는데, 면담을 할 테니 들어오라고 했고, 보통 계산원들은 밤 11시 안에 모두 퇴근을 하는데 노조 탈퇴를 시키기 위한 개별면담을 하느라 자정이 넘도록 내보내지 않았어요. 분회장을 미행하고 조합원들이 특정 장소에 모인다고 하면 먼저 와있고, 수지점 계산원 대신 전국에서 모인 SV(슈퍼바이저)들이 계산대를 접수하고 노조 탈퇴서를 쓸 때까지 조합원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에게는 일을 시켰어요. 징계해고를 하기 위해서 실수를 유발하도록 만들었던 거죠. 주변에는 사복차림을 하고 손님으로 가장한 보안요원이 곳곳에 있었어요. 너무 떨리고 무서워서 제대로 일할 수 없었죠. 그러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손님에게 용기를 내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더니 감시를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제 옆에 바짝 붙어있던 낯선 본사 파견 관리자가 “끌어내!” 하는 한마디에 주변 보안요원들에게 번쩍 들려서 나왔어요.


그건 정말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나중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하고 법적으로 싸울 때 그들의 서류에 ‘그때 이종란이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고 써있었죠. 화장실을 들어갈 때마다 몇 번째 화장실 칸에 들어갔다고 무전을 치고 지하 사무공간에서도 바짝 붙어서 아무 일도 못하게 했어요.


신세계 이마트에서 그렇게 탄압을 심하게 하는데 견딜 조합원이 없었어요. 남편이 삼성에 다닌 한 언니는 회사에서 남편에게 ‘부인이 노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구조조정 1순위’라고 협박해서 노조를 탈퇴하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집에 침입을 해서 협박을 하고, 경찰인 오빠한테도 압력이 가해진다고 했어요. 이런 탄압에 많은 조합원이 탈퇴를 했고 결국 저를 포함해 네 명만이 남았어요. 기본적인 탄압은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몰랐죠. 신세계도 삼성 족벌답게 삼성식 탄압을 한 거죠. 삼성공화국과 경찰, 한국 사회에서 삼성의 위치, 그리고 부조리에 대해서 그때 공포감을 가지고 뼈저리게 알게 되었죠.


몇 년 동안 악몽에 시달리다


당시 우리 분회 문제로 신세계이마트의 여성 노동자 인권 유린에 대응하는 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또 비슷한 시기에 수원지역에서 삼성SDI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삼성에서 포착해서 핸드폰 위치 추적을 하는 일이 생기면서 그에 대응하는 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하면서 삼성 문제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죠. 저는 노조 설립 후 일주일 만에 징계해고 되었고, 남은 조합원들은 3개월 정직 후 복직되었다가 노조 탈퇴 의사가 없다고 하니 바로 계약 만료로 해고되었어요. 그 이후에 세 명의 조합원들과 수지점 앞 1인 시위, 또 다른 지점으로 다니면서 1인 시위를 했어요.


멋모르고 시작했다가 노조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느꼈고, 탄압이라는 것이 정말 잔인하고 견디기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악몽을 꾸었고 누가 자꾸 미행을 하는 것 같아서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기가 겁이 났죠. 그땐 엄청 힘들었어요.


그런 일을 겪은 후 노무사 일을 계속 했어요. 2000년 중반 경에 삼성전자, 삼성SDI 등 삼성계열사들이 인력 구조조정을 했어요. 감시를 당하거나 감시의 공포 속에서 삼성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경기본부를 찾아왔고 그 분들과 함께 1인 시위를 하고 공대위를 만들어서 함께 활동했죠.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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