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계약직 노동자였다고요?_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지부장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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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2006년 조합원 370여 명으로 출범한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엔 이제 33명의 조합원만 남았다. 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시작된 그이들의 복직 싸움은 1억 원의 빚을 떠안은 채 현재진행형이다. 조합원 34명이 남았었지만 한 명의 친구를 보내야 하는 아픔도 겪었다.한 토론회에서 토론자로 나온 김승하 지부장을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이 참신했다. 여느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이미지와는 좀 달랐다. 곱게 자란 예쁜 여성에게서 데모라고는 모르고 자란 티가 났다고나 할까? 파업할 때 연대 온 동지들도 투쟁하는 KTX 승무원들의 모습을 처음엔 낯설어했다고 한다. 머리띠 두르고 투쟁 조끼 입은 전투적인 분위기 보다는 화장을 뽀얗게 하고 귀걸이도 단 여성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핀잔 섞인 말도 들었다고 한다. 파업하면서 전경들과 싸우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같은 여성들끼리 떠들면서 얘기 나누고 놀러 갈 계획 세우고 하면서 재미있게 지냈단다.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나 할까. 멋모르고 시작한 파업이 끝나고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남은 조합원들은 정규직으로 인정받을 날까지 투쟁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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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 아이


저는 1남 1녀 중 맏이예요. 그래서인지 엄마는 맏딸에 대한 기대가 컸죠.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받아쓰기 시험을 보면 항상 백점을 받아야 했어요. 엄마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고 싶고, 예쁨 받고 싶은 생각에 뭐든 열심히 했어요. 시험보기 전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생각이 들면 불안해서 밤잠도 못잘 정도였어요. 아빠는 모든 걸 엄마에게 위임하셨어요. 자상한 분이예요. 아빠랑 놀러 잘  다녔는데 “어, 저게 뭐지”라고 물어보면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단어로 쉽게 설명해주셨어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을 좋아해요. 자기 전문 분야라고 전문 용어 써가면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건 싫더라고요. 그래서 전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조합원들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어요. 조합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기대를 충족하기 쉽진 않았어요.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 때 갑자기 공부를 확 놓게 됐죠. ‘어쩔 거야. 나도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죠. 그때부터 성적은 뚝뚝 떨어졌지만, 편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비행을 저지르는 일은 없었어요. 앞에 나서는 성격도 아니고, 엄마가 싫어하는 걸 그닥 하려는 마음도 없었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친구들이 다하는 염색 한 번 해 본 적 없어요. 귀도 안 뚫고 화장도 한 번 안 했죠. 대학교에 가서야 ‘나도 화장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엄마 눈치가 보였어요. 엄마는 “화장하는 건 여우 짓 떠는 거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래도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화장했다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물티슈로 지우고 들어간 적도 있죠.


아빠 고향이 강원도 양양이에요. 아빠가 “행정고시를 통과하면 어린 나이에 군수가 될 수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양양군수가 되면 아빠가 좋아하실 것 같아 중학교 때 장래희망으로 삼기도 했죠. 고등학교 때는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여기저기 여행하는 게 좋았거든요. 낯선 곳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있었고요. 파일럿처럼 전문적인 일을 하면 멋있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어요. 파일럿이 되려면 공군사관학교를 가야 하는데 시력이 안 좋아서 신체검사를 통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파일럿이 되는 꿈은 포기하고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KTX, 비정규직일 줄이야


대학 졸업 후에 항공사 시험을 알아보고 있는데 KTX도 같은 시기에 사람을 뽑더라고요. 두 군데 모두 시험을 봤는데 1차 시험에 다 합격했어요. 그런데 KTX 최종 발표가 더 빨리 났어요. 첫 직장이기 때문에 많이 고민했는데 부모님도 일반 사기업인 항공사보다는 공무원인 철도청이 더 낫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어요. 사기업은 정년이 보장되지 않지만 철도청은 정년만큼은 확실히 보장되니까요. 그래서 KTX에 입사하는 걸로 결정했어요.


정규직이란 걸 의심해본 적이 없어요. 승무원 모집 공고를 할 때도 계약직이라는 표현은 없었고, KTX 승무원 모집이라고만 되어 있었거든요.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요. 같이 입사한 동기들도 승무원으로 입사하면 공무원이 된다는 기대감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취업 전형을 하는데 홍익회 건물에서 면접을 보는 거예요. 이상했어요. 합격통지서를 받고 연수 받을 때 “왜 우리가 홍익회 소속으로 되어 있느냐?”고 물었죠. 관계자는 “현재 회사 사정이 철도공사로 전환하고 있는 중이고, 지금 너희를 채용할 수 있는 공무원 티오가 없다. 철도공사가 되면 정규직으로 너희들을 채용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어요. 그 기간이 일 년이라고 했죠. 우린 그걸 믿었어요. 2004년에 KTX가 개통됐고, 2005년에 철도공사가 생겼는데 우리 신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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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개통 기념 승무원 단체 사진(@KTX 열차승무지부)


민주노조를 만들다


홍익회가 일을 관리 감독했지만, 승무원 운영 경험은 없던 곳이었어요. 자기네들도 민원과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어요. 4월 1일 개통인데 전날까지 몇 시에 출근해야 하는지 스케줄도 나오지 않았죠. 승무원들이 다급해서 홍익회에 전화하면, 전화 건 순서대로 “이거 타세요”하는 식이었어요. 한 번은 한 승무원 친구가 다음에 카페를 만들었는데 홍익회가 회사 공지를 올리는 거예요. 주먹구구식이었던 거죠. 그래서 처음엔 민원도 많았어요. “왜 거꾸로 가느냐, 소음이 왜 이리 심하냐, 왜 300킬로미터로 안 달리느냐….” 그런데 승무원들이 민원을 다 설명해야 했어요. 회사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죠. 회사에서 아무 보조도 해주지 않아서 승무원들이 알아서 공부하고 연구해서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했죠. 홍익회는 철도공사에서 뭔가를 새로 만들었다고 하면 중간에서 전달해주는 역할밖에 못했어요. 우리가 받는 민원이 철도공사에 전해져야 하는데 홍익회가 중간에 끼어 있다 보니 전달 속도가 느렸죠.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우리는 불만이 쌓여갔어요.


홍익회에 한국노총 소속 노동조합(이하 노조)은 있었어요. 처음엔 오픈숍이라고 해서 노조 가입이 자유로웠죠. 2005년 들어 홍익회 노조가 유니온숍으로 바뀌었어요. 제 생각엔 우리한테서 노조비를 떼먹으려는 술책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인원수가 많아 홍익회 노조를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했어요. 유니온숍이 되면서 대의원도 생기고 지부장도 생겼어요. 불만이 있어도 누군가 의견을 모아 전달할 수 있는 창구가 없었는데 어용이든 뭐든 전달 창구가 생긴 거죠. 초대 지부장은 민세원 언니였어요. 사측과 교섭을 해보니 기존 노조는 사측의 이해를 대변할 뿐 우리 승무원의 의견은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죠. 불만이 점점 커졌어요. 갑자기 월급이 깎인다든지, 퇴사한 사람의 유니폼을 후배들한테 지급했고, 보건 휴가를 쓰는데 선착순으로 하거나 제비뽑기를 하는 식이었어요. 아무리 문제제기를 해도 해결되지 않았죠. 마침 철도노조가 옆 사무실에 있어서 그분들의 조언을 받았어요. 결국 홍익회를 나와서 만장일치로 철도노조로 상급 단체를 변경했죠. 그러면서 우리는 ‘철도공사가 직접 고용하라’는 주장을 하며 서울역사 내 선전전을 하고 부당함을 알리는 리본을 매달기도 했어요. 모든 문제의 시작은 우리가 자회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거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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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113일째 서울역에서 청와대까지 제복 행진하는 승무원들(@KTX 열차승무지부)


파업, 뭉치면 이긴다고 생각


결국 2006년 3월 철도노조와 함께 파업에 들어갔어요. 파업 찬반 투표를 했는데 거의 만장일치였어요. 철도노조가 먼저 파업을 정리하고 복귀했지만, 우리는 300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았어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이니 당연히 우리가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싸움에서 질 수 있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런 두려움이나 의심이 있었다면 아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실 파업 할 때 3일에서 1주일 정도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측면도 있어요. 우리 주장은 정당했으니까요. 철도노조에서도 뭉치면 이긴다고 교육 받았거든요.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투쟁이 길어지면서 대오가 조금씩 흩어졌어요. ‘아, 나와 다른 애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철도공사에 들어간 친구들을 보면서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저런 선택을 할까 하는 마음에 배신감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어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똑같을 순 없으니까요. 대오를 떠나 다른 길을 찾겠다는 친구들의 선택도 존중했어요.


철도지방본부, 국회, 당시 서울시장 후보 사무실, 인권위원회 점거 농성을 하면서도 잘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농성을 할 때 공권력이 투입됐어요. 그때 저는 감시조여서 그 현장에는 없었는데, 아직 쌀쌀한 3월이라 대리석 바닥에 앉아 농성하는 게 많이 힘들다고 했어요. 물도 안 들여 보내주고…. 심리적 고통이 심했던 것 같아요.


저는 파업 시작할 때 조장을 맡았다가 어느 순간 대외협력부장을 하게 됐죠. 별 생각은 없었어요. 지부장을 맡게 될 때도 마찬가지였죠. 서울역 철탑까지 올라갔는데 아무 성과 없이 보름 만에 내려오면서 총회를 했어요. 그때 남은 인원이 34명이었죠. 한 명 한 명 개인 생각을 들었는데 법으로 해결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철도공사에서도 법의 판결에 따르겠다고 했죠. 당시 철탑에 올라갔던 오미선 지부장 직무대행이 피로도가 누적되고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 했어요. 잠시 쉬기 위해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했는데 지부장 자리를 비워둘 수 없어 제가 맡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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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투쟁 10일째 서울역 서울지방본부 점거 투쟁(@KTX 열차승무지부)


1억 원의 빚, 그래도….


끝까지 노조에 남아있던 조합원 34명이 서울중앙지법에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고 1심, 2심에서 모두 승소했어요. 공사와 KTX 사이의 묵시적 근로 계약 관계를 인정한 거죠. 그래서 공사는 그동안 주지 않았던 월급 180만 원을 다달이 지급했어요. 그런데 노조에 남는 것도 싫고, 자회사로 옮기는 것도 싫다며 회사를 떠난 친구들 백여 명이 모여 같은 내용으로 다시 2차 소송을 냈어요. 이 소송은 1심에서는 이겼는데 2심 고등법원에서는 졌어요. 그러자 항소를 해서 대법원에 올라갔는데 1, 2차 소송을 묶어서 판결을 내렸요. 2015년 2월 26일 대법원은 1차 소송 건은 파기 환송을 시켰고, 2차 소송은 항소를 기각시켰어요. 그러면서 그동안 받았던 48개월 치 월급을 다시 내놓아야 되는 상황에 놓여버렸죠. 결국 개인당 1억 원의 빚을 떠안게 된 거죠.


1억 원이라는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친구도 있고, KTX로 돌아갈 때까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친구들도 있어요. 2차 소송을 낸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래서 서운한 감정을 갖는 친구들도 있죠. “가만히 있었으면 우리가 승소해서 너희들도 이길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나서서 고등법원에서 져 나쁜 판례를 만들어 우리까지 걸고 넘어졌느냐”는 원망도 없진 않아요.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판단을 하다 보니 이렇게 흘러온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해요. 저도 지부장을 꼭 해야 한다는 의지보다는 하려고 드는 사람이 없는데 나까지 못하겠다고 할 수 없어 이 자리에 있어야겠다고 판단했거든요. 사회적으로 어려운 이야기들이 자꾸 들려서 마음이 아파요. 좋은 소식들이 많아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투쟁 자체가 정치적으로 판결나기도 해서 정치인에 대한 혐오가 많은 친구들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원인들이 바로 그 ‘정치가’라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난 선거 안 해”라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잊지 말고 꼭 투표해서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변화시켰으면 좋겠어요.


인터뷰·정리: 고현종 쉼표하나 2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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