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산별 노조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_김진숙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홈플러스노동조합 서울본부장

by 센터 posted Mar 1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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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리: 이응덕 쉼표하나 2기 회원


편집자 주 : 다가온 설 명절로 모두가 바삐 움직이던 2016년 2월 3일 저녁,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강인수 편집부장과 함께 영등포역 근처 홈플러스노동조합 사무실에서 김진숙 서울본부장을 만났다. 선입견이랄까, 그런 게 싫어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이를 만나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100여 분 동안 학창 시절부터 ‘각종 고용 구조의 백화점’이자 우리 시대 노동의 문제가 집약된 대형 마트에서 노조를 조직하고 여러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사람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만큼 그이는 생기발랄했고 야무졌고 큰 꿈을 꾸고 있었다. 4월 말 첫 출산을 앞둔 시점에도 홈플러스를 넘어 전국 대형 마트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산별 노조를 준비한다는 그이의 바람이 빨리,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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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러스노조)


황소고집에 활달하고 잘 따지는 아이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딸 둘 중에 막내에요. 어릴 때 고집이 엄청나 황소고집이었대요. 잘못해서 엄마가 막 야단을 쳐도 제 성질대로 안 되면 끝까지 울음을 안 그치곤 했어요. 엄마 아빠가 “너 옷 벗고 나가.” 하면 진짜 옷 벗고 나갔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진숙이 저거는 아무도 못 말려.” 했어요. 언니는 저와 달랐어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하라는 대로 하는 스타일 이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잘 따지는 애’라는 소릴 많이 들었어요. 왜 선생님이 잘 사는 애들하고 가난한 애들 차별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선생님, 왜 쟤랑 쟤랑 차별하세요?” 하고 따졌어요. 학교에 특수반이라고 약간 지능 낮은 애들만 따로 모은 반이 있었어요. 그 반 한 친구가 우리 교실에 들어오려는데 어떤 애가 못 들어오게 막는 거예요. 소위 말하는 ‘좀 노는’ 애였어요. 제가 “너 왜 그러냐, 막지 마라. ” 했죠. 그러니까 그 애가 “너 학교 마치고 남아.” 이러는 거예요. 마침 저랑 친한 친구가 남아서 둘이서 의자 집어 던지고 막 싸우고 그랬어요. 중·고등학교 때를 돌아보면 그런 일들이 많았던 거 같아요. 친구들이 “하여튼 너는 보통 애가 아니다.” 했어요.


전교조 선생님, 그리고 기자가 되고픈 꿈


고 1때(1995년)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그 분을 엄청 좋아했어요. 거의 사모하는 수준으로. 우리 반 급훈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었는데 교실에서 따라 배우고 했어요. 나중에 커서 보니 그게 그 노래구나 싶었어요. 그때 친구들이 “진숙아, 너 선생님 좋아하면 안 돼. 그 선생님 좋아했던 언니들 대학 가서 다 감옥 갔대.” 했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읽으라고 했던 책을 서점 가서 찾으면 다 금서(禁書)라고 떴대요. 방학 끝나고 선생님이 안 나오셨는데 소문에 안기부(안전기획부, 지금의 국가정보원)에 끌려갔다는 거예요. 정부 기관에서 나온 검정색 차가 선생님 집 앞에서 감시한다는 얘기도 돌았고요. 그때는 전교조가 뭔지 사실 잘 몰랐는데 나중에 대학 가서 보니까 ‘아~ 선생님이 전교조라서 그랬구나’ 싶었어요. 당시 선생님들이 늘 써주시는 거 보면 외향적인 성격에 대인관계 좋고 인기 많고 활달하고 뭐 그런 평이 많았어요. 자기주장도 강하고.


중·고등학교 때 꿈은 기자였어요. 그래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로 쓰고 하는. 막연하지만 ‘기자를 하려면 서울에 올라가야 된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공부를 잘 못해서 신방과(신문방송학과)에 가지는 못했고 그래서 학보사를 가야겠구나 싶어 직접 찾아갔어요. 그러면서 뭔가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던 거 같아요. 학생 기자를 하면서 글도 쓰긴 했는데 그건 뭐 기본적인 거였어요. 제가 98학번인데요, 그때가 딱 IMF(국제통화기금) 시기였어요. 저희 학번들이 사연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잘 살다가 갑자기 가계가 기운 애들도 많고, 그러다보니 학비 싼 국립대나 산업대 경쟁률이 엄청 치열했어요. 제 기억으로는 학생 운동도 그만큼 어려운 시기였지요. 그래서 98학번을 ‘불운의 학번’이라고 불러요. 대학 시절은 그렇게 학보사에서 주로 보냈어요. 


매일같이 울었던 유통업계 생활


대학 졸업하고 일반 회사 사무직으로 첫 취업을 했어요. 그때 제가 받은 월급이 많을 때가 180만 원에 상여금 400퍼센트였으니까 조건이 상당히 좋았죠. 지금 100만 원 남짓 받다보니 그때가 꿈의 직장이었네요.(웃음) 그러다 결혼하기 전에 그만두고 결혼 후 몇 달 쉬다 재취업을 하게 됐어요. 그때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화장품 회사가 월급도 괜찮고 오래 일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렇게 강남 고속터미널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입점 화장품 회사에 입사하게 됐고 그게 유통업에 들어온 계기가 되었지요. 처음에 ‘월급 200만 원은 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받으려면 엄청난 장시간 노동에 판매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아야 가능한 거였어요. 오전 10시 오픈하고 오후 8시 마치니까 하루 10시간 근무가 기본이죠. 거기다 백화점은 세일이나 할인행사 때는 쉬기도 어려워요. 그렇게 장시간 노동에 한 달 4~5일 밖에 못 쉬고. 그때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땐데 거의 신혼이라는 게 없었어요. 퇴근하고 집에 가면 매일 울었던 거 같아요.


백화점 근무는 백화점 관리자와 협력회사 관리자, 이중의 착취 구조가 있더라고요. 제가 속한 화장품 회사의 관리도 받아야 하고 백화점 직원들 관리도 받아야 하고. 협력업체 직원들의 비애였어요. 그리고 제일 힘든 게 하루 종일, 10시간 내내 서 있어야 되는 거예요. 매장에 손님이 있든 없든 항상 몸에 딱 붙는 유니폼 입고 약간 굽 있는 구두 신고 단정한 자세로 서서 일하는데, 그때 4~5개월 근무하면서 몸무게가 8킬로그램이나 빠졌어요. 게다가 월급은 기대 이하였어요. 그리고 제가 있었던 곳은 퇴직금도 없었어요. 나중에 노동조합하고 알게 된 건데 ‘퇴직금은 없다는 계약서를 써도 나중에 청구하면 받을 수 있다’라고 하더라고요. 1년 이상 근무했는데 퇴직금을 안 주는 건 불법이라고 어느 노무사님이 알려주셨어요. 퇴직금도 없고 한 달에 네댓 번 밖에 못 쉬고 기본 10시간 이상 종일 서서 일하고, 제가 그때 받은 평균 월급이 160만 원 정도였는데 그걸 시간당 비교해보면 거의 최저 임금 수준이었어요. 그렇게 1년 정도 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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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러스 강동점 앞에서 일인시위 중인 김진숙 본부장(@홈플러스노조)


‘각종 고용 구조의 백화점’인 대형 마트


그러다 대형 마트 입점업체 직원으로 입사하게 되었어요. 그때도 지인이 백화점보다 마트 쪽이 좀 더 자유롭다고 소개를 해주더라고요. 대형 마트는 한마디로 ‘고용 구조의 백화점’이에요. 마트 직접고용 노동자, 협력업체 직원, 인력 파견업체 직원, 입점한 임대 매장 사장과 사장이 고용한 직원 등. 보통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이 800명 정도 돼요. 그중에 마트 직접고용 노동자는 약 200명, 나머지는 협력회사나 파견회사, 임대 매장 직원들이에요. 마트 직접고용 직원들도 대략 60명 정도만 정규직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정규직이에요. 그런데 여기도 백화점처럼 마트 직접고용 관리자들의 갑질이 심했어요. 흔히 유통업 쪽을 군대식 조직 문화라고 하거든요.웹툰 〈송곳〉이나 영화 〈카트〉에 보면 ROTC 출신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정말 그래요. 갑들의 횡포가 심했어요. 


런데 그때 제가 물류 검품 쪽에 근무하다 어떤 관리자가 어린 여직원한테 반말에 쌍욕하는 걸 보고 엄청 충격을 받은 일이 있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동료들하고 그동안 각자 당한 일들을 모아 정리를 해서 점장 면담을 요청했어요. 대형 마트는 보통 스물 살 때부터 일한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오랫동안 관리자들의 횡포를 일상처럼 겪으며 살아와서 그런지 속된 말이 인이 박혀 있더라고요. 제가 “이제는 참지 말자”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 싶어요. 그렇게 점장 면담을 했는데 점장 입장에서는 당황스런 거예요. 자기 회사가 직접고용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저희가 얘기한 내용이 너무 거칠고 심하다 보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던 거예요. 결국 욕한 직원은 좌천되고 다음 해 퇴사했어요. 거기 근무하면서는 한 달에 한 번만 쉬고 16일을 연속 근무한 적도 있어요.


빨리, 정확히 찍고 회원 유치까지


그러다 2011년 서울 문래동 홈플러스 영등포점 계산원으로 입사하게 되었어요. 돈보다는 주 5일에 근무 시간 확실하다는 얘기에 솔깃했죠. 처음엔 4시간 30분 근무하는 파트타임에 월급 50만 원 받았어요. 그때 주위 분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랬어요. “진숙아 너는 화장하지 말고 생얼로 다녀.” 50만 원 받아가지고 비싼 화장하고 다니면 남는 게 뭐 있냐고. 몇 달 후에 6시간 30분 계약, 7시간 30분, 그리고 풀타임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다 고객 클레임   (불만)이나 환불, 수납 관리를 하는 고객센터로 발령 났다가 다시 문화센터로 옮겼어요. 지금은 노동조합 전임자로 있고요.     


계산원이나 고객센터는 고객과 직접 만나는 부서잖아요. 보통 계산원은 하루 300명에서 최대 500명 정도를 만나요. 그런데 계산대는 정말 ‘날카로운 공간’이에요. 마트에 장 보러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고객들이 매장에서 쇼핑할 때는 자기가 필요한 걸 찾으니 직원들한테 부탁을 해요. 예를 들어 생선 코너에서 “언니 싱싱한 거 주세요, 큰 거 주세요.” 이러죠. 그러다 마지막 계산대 앞에 와서는 불만이나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회사에서는 계산원들한테 세 가지를 요구해요. ‘빨리(물건 바코드) 찍어라, 정확히 찍어라, 패밀리(회원)카드 유치해라.’ 그 짧은 시간에 빨리 찍고 정확히 찍고 회원 유치까지 하라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마음이 급해 찍다보면 ‘따닥’ 하고 두 번 찍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고객들은 “왜 그렇게 일을 급하게 해요.” 하면서 못마땅해 해요. 그리고 쇼핑하면서 불편했던 것들을 계산원들한테 쏟아내는 거예요. 


가끔 고3 취업 준비생들이 실습을 나와요. 그런데 한 여자애가 하루 근무하면서 서너 번을 뛰쳐나가 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왜 이렇게 나쁘고 이상한 사람이 많아요.” 해요. 오래 근무한 아줌마들도 힘든데 어린 여학생이 오죽했겠어요. 정말 웬만한 멘탈(정신)이 아니면 근무하기 힘들어요. 고객들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 우리는 거절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점장 나와.” 하고 소리 질러요. 관리자들이 나와서는 고객들 요구를 다 들어줘요. 결국 고객은 우리만 탓해요. “저 아줌마가 안 해줬다”고. 계산원들은 회사에서 만든 매뉴얼대로 했는데 정작 회사는 우리를 전혀 보호해주지 않는 거예요. 


우리 시대 노동 문제가 집약된 곳


중년 여성이 마트에 나오게 되는 구조적 배경이 있어요. 흔히들 반찬값 벌려고 나간다고 하는데 정말 듣기 싫은 소리예요. 저희 노동조합에서 자체 조사해보면 생계를 책임진 분들이 많아요. 마트 여성 노동자들 남편들이 택시 운전이나 동네 자영업, 무직자가 많거든요. 그러니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그만둘 수가 없는 거예요. 젊은 남자 직원들은 처음에는 열심히 해서 승진하고 정직원 되려는 마음에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다음날 오후까지 꼬박 일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해도 월급은 적죠, 정직원 될 가능성도 불확실하죠, 앞이 안 보이니 빨리 그만두는 거예요.


생수 있잖아요,무게가 엄청 나서 20~ 30킬로그램짜리 물건을 들었다놨다 해야 되요. 그래서 이런 업무는 주로 남자들이 해요. 그런데 젊은 남자 직원들이 계속 그만두니까 결국 나이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엄청나게 무거운 걸 하루 종일 들었다 놨다 하니 어떻겠어요. 어깨, 손목, 테니스 엘보 등 온 몸에 성한 데가 없어요. 어깨에는 부항 자국 달고 살고, 손목 보호대 차고 다녀야 되고. 끄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발톱이 빠지기도 해요. 그렇게 힘들게 두세 시간 초과 근무하는 게 예사인데 연장 수당도 못 받으니 ‘내가 연장 근무한 만큼이라도 회사가 제대로 달아줬으면’ 하는 게 꿈이었어요. 이런 고강도 노동, 저임금, 엄청나게 복잡한 고용구조 등 우리 시대 노동의 문제가 대형 마트에 집약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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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를 끌고 시위 중인 서비스 노동자들(@홈플러스노조)


회사 영화 동아리에서 시작된 노동조합


대형 마트는 오랫동안 같은 점포에서 근무해도 다른 부서 사람들을 제대로 만날 일이 없어요. 근무 시간이나 휴일이 다 다르니까요. 어떤 때는 같은 일을 하는 계산원들끼리도 10일씩 못 볼 때가 있거든요. 이렇게 마트의 핵심 약점은 ‘집단성’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를 도모할 수가 없는 거지요. 


제가 노조를 하게 된 계기는 회사에서 운용하는 영화 동아리였어요. 장시간 노동과 관리자들의 폭언이나 횡포, 이런 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때에 회사 영화 동아리에 가게 되었어요. 영화 보고 밥 먹고 술도 한 잔 하면서 다른 부서 사람들을 알게 되었죠. 그러면서 젊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회사 문제를 얘기하게 되었어요. 그때 어떤 젊은 친구가 “아 진짜 홈플러스는 직원들 피 빨아먹고 안 된다. 내가 진짜 한 달에 연장하는 것만 해도 30시간이 넘는데 하나도 안 챙겨준다.” 했어요. 또 어떤 친구는 이러는 거예요, “제가 전태일처럼 홈플러스에 확 불 질러 버릴까요.”


사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잖아요, 내가 못할 뿐이지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다는 거. 그러면서 “우리 회사도 노조가 있어야 된다. 노조가 없으니까 이렇지.”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이런 얘기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결국 노조를 만들자 이렇게 된 거예요. 참 역설적이죠. 노조를 하게 된 기반이 회사의 영화 동아리였으니. 회사는 땅을 치고 후회하겠구나 싶어요.(웃음)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열 명 남짓이었는데 노조 설립 신고를 준비했어요. 그날이 2013년 3월 24일이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열 명이 이름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 각오는 해야 된다.’ 노조를 만드는 건 쉽지만 지키는 건 어렵다고, 한 해에 노조가 엄청 많이 만들어지지만 대부분 조용히 없어진다고. 얘기 들어보니까 예전 민주노총에서 난다 긴다 하는 활동가들이 마트에 많이 들어왔지만 조직을 제대로 못했다고 해요.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마트 조직하기는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홈에버노조도 많이 힘들었고 이마트나 롯데에서도 만들었는데 잘 안 된 걸로 알아요. ‘전국에 대형 마트만 100개가 넘고 제가 근무하는 영등포점에 있는 사람들도 제대로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6개월에 100명이라도 모으면 대성공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첫날에만 100여 명 노동조합 가입


3월 24일이 일요일이라 25일 노조 설립 신고서를 내고 3~4일 후에 설립필증이 나오면 기자 회견을 하기로 계획했어요. 그런데 월요일 인터넷 포털 다음(Daum) 뉴스 톱에 기사가 뜬 거예요. ‘홈플러스 설립 14년 만에 노동조합 생기다’. 저희가 모두 매장에 근무하고 있을 땐데 회사가 발칵 뒤집어진 거죠. ‘큰 일 났다 아직 필증도 안 나왔는데’ 싶었어요. 그때 저희가 미리 먼저 준비한 게 전국의 직원들 연락처였어요. 카카오 톡으로 소식을 보내자 하고요. 원래는 목요일 이후에 하려고 했는데 월요일에 뉴스가 뜨면서 그날 밤에 급히 카톡을 보내게 되었어요. 제목이 ‘기다렸습니다, 홈플러스노동조합. 14년 만에 드디어 홈플러스에 노동조합이 생겼습니다’였어요. 그리고 ‘더 이상 공짜 노동은 없다, 고객의 횡포로부터 보호받자, 관리자의 횡포와 폭언은 더 이상 용납하지 말자.’ 이런 내용으로 보냈는데 첫날밤에 무려 100여 명이 가입한 거예요.


그날 퇴근하고 저희가 사비를 털어서 마련한 회사 근처 지하 골방 같은 곳에서 그랬어요. “와! 이거 뭐지? 대박이다 어떡하냐.” 처음에 저희들은 사람들이 노조 가입이 아니라 홈페이지 회원 가입으로 착각한 거 아니야 하고 밤늦게까지 전화를 돌렸어요. 그랬는데 대부분 노조 가입인 줄 알고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불과 3일 만에 300명 정도가 가입했어요. 그때 교대 앞 법원에서 노조 설립 기자 회견을 하면서 연장수당 미지급 청구 소송을 같이 했어요. 기자들이 진짜 많이 왔더라고요 막 큰 대포 카메라 들고. 대형 마트 비정규직 노동조합 이런 게 좀 신선했나 봐요. 이마트나 롯데마트에 노조가 먼저 만들어졌지만 생기자마자 탄압을 받거나 어용 노조가 되거나 했거든요. 저희는 이래저래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설립 초기 사람들이 많이 가입했고 언론 주목도 많이 받았고. 그렇게 영등포점에 첫 지부를 설립했어요.


홈플러스노조 가입 95퍼센트가 비정규직


대형 마트는 명절 때 불법적인 관행이 많아요. 직원들에게 상품권이나 물건 강매, 휴무 반납 등. 그래서 저희가 그해 추석에 불법 감시단을 발족하고 언론에도 알렸어요. 이런 것도 또 화제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불법 관행이 많이 줄었어요. 그리고 그때 저희가 점오(0.5)계약 폐지 투쟁을 벌였어요. 한 시간이 아닌 30분 단위로 근로 계약하는 걸 속칭 점오(0.5) 계약이라고 해요. 실제 근무는 1시간 단위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근로 계약을 30분 단위로 하다 보니 결국 30분씩 했던 노동은 돈을 안 주고 회사에서 빼먹는 거지요. 이게 또 이슈가 돼서 국회 토론회도 가고 국정감사에 나가 증언도 하고 그랬어요.


현재 홈플러스 노조원이 2천5백 명 정도 되요.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 가입 가능한데 거의 대부분인 95퍼센트가 비정규직이죠. 전체 비정규직 중에 약 30퍼센트가 노조원이예요. 현재 전국에 48개 지부가 있어요. 조합원이 10명 이상 되면 만드는데, 전국 사업장이다 보니 저희가 다 관리하기가 힘들어 만들지 못한 곳도 있어요. 전임자는 6명이 활동하고 있고요. 2014년 1월 단체 협약을 갱신했고 여름에는 임금 교섭하면서 생활 임금 쟁취 투쟁을 했어요. 물론 완전히 이뤄내지는 못했지만요. 그래도 월급제로 바뀌었고 시급은 최저 임금보다 조금 많은 6,400~6,500원 수준이에요. 홈플러스노조 1기 집행부 임기가 올해 3월 말까지고 2월부터 2기 지도부 선거를 하고 제가 다시 임원이 되면 더 열심히 해볼 생각이에요. 일단 저는 4월 말 출산 휴가를 들어가요. 애기 낳고 빨리 복귀하려고 하는데 첫 출산이라 쉽지 않을 거 같기도 해요. 할 일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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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러스 매각 투기 자본 반대 집회에서 발언하는 김진숙 본부장(@홈플러스노조)


MBK 파트너스 인수와 매각 저지 투쟁 


작년에는 매각 투쟁을 했어요. 작년 9월 영국 테스코 자본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홈플러스가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에 매각되었어요. MBK가 인수한 회사는 C&M 케이블, 웅진코웨이, ING생명, NH저축은행 등이 있어요. 홈플러스 매각 대금이 7조 2천억으로 국내 최대 M&A였고, 국내 토종 자본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투기자본이 회사를 인수한 거죠. 공식 매각 발표는 9월이었지만 저희는 6월부터 미리 “투기자본으로의 매각은 구조조정을 동반하므로 노조는 반대한다”며 투쟁했고, 7월에는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려서 구조조정 반대, 고용 보장을 요구했어요. 결과적으로 매각 이후 아직까지 큰 변화는 없어요.  


올해 1월 예전 테스코 시절 사장이 물러나고 MBK가 임명한 경영진으로 교체되었고 단체 교섭이 이제 막 시작되었어요. 새로운 경영진들이 노사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까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판단으로는 별로인 거 같아요. 작년에 부산 아시아드점 비정규직 네 명이 해고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원래 법적으로 기간제 노동자의 해고는 해고가 아니고 계약해지라고 해서 법적으로는 우리가 불리해요. 그런데 지노위(지방노동위원회)와 중노위(중앙노동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부당 해고, 부당 노동행위로 판결했어요. 이게 의미가 있는 게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고 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이거든요. 그래서 복직 결정이 났는데 새 경영진이 이걸 거부했어요. 또 싸워야죠.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위원으로 참여


제가 작년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에 노동자위원으로 참여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사용자들의 노동에 대한 시선 자체가 뭐랄까 '참 후지다'는 거예요. 공익위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요. 우리는 임금이라는 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잖아요. 그런데 사용자들의 마인드는 뭔가 내 돈을 뺏기는 느낌 이런 식으로 생각해요. 한 사용자위원이 이런 표현을 썼어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좀 더 베풀어야 하는 건 맞지만 우리도 힘들기 때문에 더 이상 올려주긴 힘들다.” 이 말 속에 참 많은 의미가 들어있어요. 임금이라는 게 우리한테 베푸는 게 아닌데도 사용자들은 이런 마인드가 너무 강한 거죠. 사용자들은 최저 임금이 너무 높다고 하면서 이주 노동자들한테 최저 임금을 줘야 되는 걸 보고 ‘국부가 유출된다’고 해요. 사실 똑같은 노동을 하는데 이주 노동자와 한국 사람들의 노동이 다른 게 아니잖아요. ‘우리나라는 노동 후진국이다. 노동에 대한 인식이 천박하다. 사람에 대한 생각 노동에 대한 생각이 천박한 수준이다.’ 이런 생각을 진짜 많이 했어요. 올해 최임위 활동은 5월부터 시작하는데 저는 출산 때문에 활동하기 힘들 거 같아요.


마트노조 발족 원년


노조 설립 후 조합원들이 제일 많이 얘기 하는 게 “할 말하고 살아서 좋다”는 거예요. 할 말하고 사는 기쁨이 얼마나 큰 건지. 이제 갑과 을이 바뀐 거죠. 예전에는 젊은 관리자들이 밥 먹다가 지 기분 나쁘면 엄마뻘 되는 사람들한테 숟가락이나 밥그릇 집어던지고 했어요. 어떤 조합원이 그러더라고요. 하도 관리자가 무서워서 혼나다가 자기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랬대요. 그만큼 관리자들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이제 그 관계가 바뀐 거죠. 완전히 역전이 돼서 이제는 걔네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언니들이 따지고 노조에서 문제 제기하고 이러니까 이제는 편하게 숨 쉬고 살 수 있고, 할 말하고 살 수 있고,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무급 식사시간 한 시간 당당하게 쉬고, 노조에서 찾아준 유급 휴게시간 30분도 당당하게 쉬고, 또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지 않고 일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이 너무너무 좋대요.


전국에 유통업 종사자가 대략 40~50만 명이라고 해요. 어마어마하죠. 마트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 있어야 홈플러스 현장도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게 지난 3년간 저희가 얻은 교훈이에요. 자본은 유통체인연합회 같은 조직을 통해서 이미 담합하고 있는데 우리 마트 노동자들은 각개격파해오다 이제 노동조합으로 시작하는 과정이에요. 이제는 전국의 대형 마트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필요해요. 올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아래 마트노조 준비위원회를 계획하고 있어요. 이 준비위에서 어떻게 공동으로 투쟁하느냐에 따라서 본 조직이 빠른 시간 안에 생길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올해를 마트노조 발족의 원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궁극적으로 마트 산별 노조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열심히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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