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주의에 빠졌던 삶이 바뀌었어요”_라두식 전국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지회장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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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리: 이기범 쉼표하나 2기 회원


편집자 주 : 2015년 12월 17일 저녁, 두 명의 열사 영정이 걸린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사무실에 라두식 지회장이 앉아있었다. 곰돌이 푸 아저씨처럼 친근해 보이는 그이는 긴 인터뷰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떠나보낸 동지들을 이야기할 때면 눈시울을 붉혔다. 2013년 10월 30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천안센터분회 소속의 최종범 열사는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태일 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 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별이 아빠 최종범 열사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회의가 있어 수원을 가야했지만 라 지회장은 못다 한 말이 많아 출발시간을 늦췄다. 한 해 사이 두 명의 열사를 보내야했던 그이의 회한이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이 갔다. 사고뭉치 말썽꾸러기 소년이었지만 무엇이건 마음먹은 일엔 일등을 꼭 해야 속이 시원했던 라두식 지회장을 쉼표하나 이기범 회원과 함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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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곳에 있다 실내로 들어오면 눈이잘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눈물이 나요.겨울만 되면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겨울 칼바람을 맞고 강남 한복판에서 노숙농성을 하면서 얻은 병입니다. 조합원들중 저 같은 증세가 있는 이가 있어요. 그러다가 괜찮아져요. 눈이 잘 안 보이다가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턱 막혀요. 겨울에 잃었던 동지 최종범 열사가 자꾸 생각나요.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다


분노한 조합원들은 서울 강남 삼성 본사 앞에서 장기간 노숙 투쟁을 했습니다. 종범이가 죽지 않았다면 두식이, 내가 아니 다른 조합원들이 선택했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2013년 7월 14일 노조를 만들었어요. 그동안 노예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죠. 하지만 노조를 만들면서 우리가 찾고 싶은 권리였던 점심 밥 먹을 시간, 여름에 가족과 함께 하루라도 보내기 등 우리에게 없을 줄 알았던 정말 작은 꿈과 희망이 생겼어요. 그 꿈이 모두가 함께 같이 꾸는 꿈이었기에 당시 우리는 노조를 만들었던 거죠. 교섭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파업 쟁의권을 확보하지 않아서 연차를 사용해 투쟁을 했어요. 종범이 생각하며 서울에 올라왔고, 종범이 생각하며 칼바람과 싸웠고, 비닐을 빼앗는 용역에 맞섰어요. 숫자가 조금이라도 준 것 같으면 경비 용역들이 와서 비닐을 빼앗으려 했어요. 그러면 더 투쟁해요. 목이 터지라 외쳤어요. “최종범 열사를 살려내라!” 그리고 막아내고 함께 울었어요. 강남대로 한 복판에서 아저씨들이 꺼억꺼억하면서요. 


삼성은 노동자들을 분리시키려 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고 함께 했어요. 전 혼자가 아니었어요. 그전까지 일등주의에 매몰됐던 제 생각이 투쟁을 하면서 바뀌고 있었어요. 삼성 본관 앞 열사 투쟁에서 3주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옆에 동지들과 이야기하고 투쟁 구호 외치고, 함께 이야기하고, 밥 먹고 잠을 잤어요. 삼성에 노조가 생기고 투쟁한다니 해외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어요. 당시 옷을 얇게 입고 온 홍콩의 취재진이 저희를 인터뷰했어요. 전 삼성이 교섭에 나설 것과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요구, 그리고 종범이를 살려내라고. 삼성이 죽였다는 등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지더라고요. 당시 삼성과 교섭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때였어요. 온갖 생각이 다 들었죠. 주룩주룩 눈물이 흘렀고, 눈가에서 눈물이 얼었어요. 취재하던 앵커가 울기시작하자 카메라 기자도 통역사도 울었어요. 뾰족한 고층 건물들 커다란 빙벽 앞에서 넷이 울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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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6.28 기준협약안 합의를 불이행한 경총을 규탄하며 기자 회견을 열었다.(@삼성전자서비스지회)


사고뭉치 소년이었던 두식


머리 ‘두(頭)’ 심을 ‘식(植)’ 라두식의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특별한 의미를 둔 것 같지는 않지만 이름은 ‘최고’, ‘우두머리’ 등을 뜻하죠. 1972년 2월 22일 전라북도 정읍 목장 집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사고뭉치 말썽꾸러기로 자랐지만 공부는 잘했지요. 초등학교 때 6년 동안 반장을 했어요. 목소리가 작다는 선생님 말에 밤에 공동묘지에 가서 차렷 열중쉬어 연습을 했어요. 전 남에게 지는 게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앞에 나서는 것은 피하지 않았고요.


우유를 많이 먹은 탓에 덩치가 좋았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67센티미터였어요. 중학교 여름 방학 때 370만 원을 훔쳐 친구들과 서울로 가출했어요. 아마 젖소 한 마리를 살 돈이었을 거예요. 명동, 신촌, 남산 등을 일주일 동안 돌아다니며 모두 탕진했어요. 그리고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정읍까지 집에 왔어요.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아버지는 “다 썼냐?”라고 물었어요. “예, 다 썼습니다.” “그래 자라.” 만약 큰형이나 작은형이 그랬다면 다리 하나 부러졌을 거예요. 나중에 아버지는 너의 배포가 좋았다며 허허 웃으셨어요. 그날 이후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잘못한 것을 숨기지 않고 바로바로 인정했어요.


광주와 가까운 정읍. 당시 아버지는 선거 때 내려오지 않으면 형들을 크게 꾸지람했어요. 명절 때 오지 않더라도 선거 때는 꼭 내려오라는 것이 아버지였어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노동가요를 배웠어요. 정태춘의 〈촛불〉, 〈떠나가는 배〉 등을 좋아해요. 당시 담임도 교련 선생님도 전교조 선생님이었고, 그러다 해직되신 분도 있었어요.


1988년 5월 18일 단국대 천안캠퍼스에서 스무 살의 최덕수 열사가 ‘광주항쟁 진상 규명’을 외치며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분신 9일 만에 최 씨는 사망했고, 고향인 정읍에서 장례가 치러졌어요. 선생님이 최덕수 열사가 배영고의 선배라고 알려줬어요. 학교에서 장례식에 가지 못하게 수업 지침을 내렸어요. 당시 제가 선도부장이었는데 아이들에게 수업 받지 말자고 했어요. 집단 등교 거부 투쟁에 선생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요. 이후 누구도 뭐라고 한 사람은 없었어요.


대우전자 영업사원으로 사회 첫발 내디뎌


전 친구를 너무 좋아했어요. 학교도 자주 빠졌고요. 그러다 큰 싸움에 휘말리게 됐어요. 무혐의로 나왔지만 그때 큰 결심을 하게 됐죠.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병무청에 가 입대를 했어요. 운전병으로 철원에서 근무했고, 휴가 때도 일부러 나가지 않고 마지막에 몰아서 나왔어요.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어요. 구치소와 군대를 거치면서 자립하자, 일찍 결혼하자라는 목표를 세웠고, 제대하자마자 작은누나가 있는 인천으로 갔어요.


대우전자에 다니는 매형 소개로 가전 마트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게 됐어요. 거기서 아내를 만났어요. 당시 지점장이 저에게 결혼하려면 기술부터 배우라하면서 대우전자서비스에 들어가라고 알려줬어요. 전 1994년 9월 직업훈련을 받았고 테스터기, 콘덴서 등 전자용어들을 난생 처음 배우게 됐어요. 승부욕이 강해서 책을 무섭게 독파해 나갔어요. 당시 가장 기술력이 좋은 엔지니어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1995년 11월 결혼을 한 이후에 집에 6개월 동안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서 숙식을 하면서 회로도를 외우는 등 기술을 익혔어요. 입사 후 1년 만에 손꼽히는 엔지니어가 됐지요. 당시 월수입이 3~400만 원이 됐고, 원청에서 특별 채용하자는 제안까지 들어오기도 했지요. 그렇게 1999년 10월까지 주안지점에서 일하다 2000년 1월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삼성서비스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고, 기술 강사, 영업 관리 업무 등을 하기도 했어요. 그때 배운 엑셀 컴퓨터 등이 노조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전 기술이 좋다는 말도 많이 들어 자신감도 붙었고, 기분이 좋았어요. 누가 뭐라는 이도 없었고, 마치 천직인 것 같았어요. 전 일등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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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7일, 삼성 본사 앞에서 제1회 삼성노동자대회(@삼성전자서비스지회)


이름도 모르고 일한 서비스 기사들


2012년에 삼성이 악성 클레임을 막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실력 좋은 기술자 100여 명을 모아 팀을 만들었어요. 사실 그때까지 삼성전자서비스 기사들은 옆에 누가 일하는지 알지 못했어요. 내근과 외근은 물론 다른 지역에 어떤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노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어요. 저는 전담팀에서 서울 충청권을 받았고 지금 부지회장인 곽형수는 경상남북도를 맡았어요. 당시 전체 실적도 좋게 하자는 취지에서 상조회도 만들며 서로 교류했어요. 이 팀에서 500억 원가량의 반품을 줄였고, 저는 삼성전자 사장에게 상을 받기도 했어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가면서 ‘일등주의’에 빠졌던 전 우연히 막내 기사들의 하소연을 듣게 됐어요. “직업은 마음에 드는데 마이너스 대출 등 생활고가 심하다.”, “최저 임금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라며 말했어요. 뭔가 머리를 얻어맞는 듯했어요. 당시 서비스 기사들 사이에서는 신입 기사들의 이름을 6개월이 될 때까지 외우지 않았거든요. 10명이 들어오면 1~2명을 제외하곤 버티지 못하고 나가기 때문에 굳이 외울 필요가 없었어요.


그 당시 전체적으로 노동 시간은 늘고 수입은 줄고 있었어요. 삼성은 잘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지원을 해줬어요. 급여 차이가 3~4배 이상 났어요. 삼성에서 엔지니어 몫과 협력사 몫을 분리해서 내려 보내다가 이것이 ‘직접 고용’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한꺼번에 몰아주기 시작했어요. 협력사는 중간에 장난을 쳤고요. 전 불합리에 항의했고, 하나하나 고쳐나갔어요. 다른 센터에서도 저에게 문의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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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신라호텔 앞 이재용 신년회 저지 투쟁(@삼성전자서비스지회)


무노조 삼성에서 노조를 만들다


2013년 5월 부산 동래센터에서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에 삼성이 분사 및 해고 위협을 가했어요. 당시 곽형수가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했고, 전 동래센터를 살려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글을 서로가 공유하고 있던 카톡에 올렸어요. 삼성전자 원청과 하청이 다 들어와 있는 카톡이어서 폭발력이 강했어요. 일부 지역에서는 기사들의 휴대폰을 빼앗아 가는 일도 있었죠. 노동자들의 교류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노조 조직화의 길로 들어선 뒤였어요.


조직할 때 노조가 뭔지 몰랐어요. 무노조 삼성에 대한 두려움은 있었고요. 여기에 소속된 우리가 가입하면 전체 센터가 가입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자신감도 있었어요. 7월 14일 노조 설립 때 400명이라고 했지만 사실 900명의 가입서가 있었어요.이후 조합원은 1,600명까지 늘어났고요. 가장 영향력이 있는 기사들이 노조 깃발을 들었고, 신뢰 속에서 조직이 됐어요.


노조를 조직해 나가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알게 됐어요. 노동자 권리 찾기 수첩은 신세계였고, 빛이었어요. 노동자에게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전 가방 가득히 ‘노동자 권리 찾기 수첩’을 가지고 새로운 동지들을 만나러 갔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40대가 되도록 아무도 나에게 이런 권리가 있다고 말해주지 않은 것이 서글펐어요. 그 수첩을 동료들에게 나눠주면서 “나도 노동조합을 모른다. 여러분과 같이 불안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합법적인 권리가 있다. 지금 내가 이것을 알았다. 당신들도 억울하지 않느냐”며 말했죠. 난 처음으로 꿈을 가지게 됐어요. 나의 작고 소중한 권리를 찾아가는 꿈이었어요. 간절하고 애절했어요.


첫 파업, 인터넷에서 사라지는 투쟁 소식


노동조합이 조직화되고 힘이 생겨날 때 법원은 불법 파견이 아니라고 판결했어요. 그 다음부터 회사의 탄압이 거세졌죠. 곳곳에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표적 감사가 진행됐고요. 3~4년 전 데이터를 들이대면서 부정을 저질렀어요. 시인해라, 그렇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식의 협박을 하기도 했어요. 조합원 300여 명이 떨어져 나가면서 정말 위기였어요.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최종범 열사가 우리를 대신해 목숨을 던졌어요. 그해 겨울 열사 투쟁을 거쳐 1,200여 명의 조합원을 재정비했어요. 그리고 2014년 1월 9일 파업에 들어가게 됐지요.


부산 양산 지역 6개 센터에서 파업에 들어갔어요. 제 생애 첫 파업이었고, 참석률 95퍼센트였어요. 그것 자체가 감동이었죠. 조합원 모두 울었어요. 이후 지역별로 파업이 진행됐는데 참석률이  참석률이 다 90퍼센트 이상이었어요. 정말 못나오는 이유가 있는 사람 빼고 다 모인 거예요. 그동안 외치지 못했던 말들 다 토해내면서 억눌려 살아왔던 우리의 심장이 터져 나온 거예요.


우리 투쟁을 다룬 기사가 인터넷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삼성의 영향력이었죠. 우리는 기사가 뜨면 바로 캡처해 서로 공유했어요. 회사는 파업 기세에 해운대센터와 아산센터를 폐쇄했죠. 휴업 센터 조합원들은 ‘그래 해보자’는 심정으로 서울에 올라와 투쟁을 했고, 우리는 이들을 ‘특공대’로 불렀어요. 이들은 몸자보와 피켓을 들고 투쟁하면 질질 끌려 나오면서 이슈를 만들어 냈어요. 기자들은 이런 거 좋아하더라고요. 미리 알려 달라고 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투쟁이 4월까지 지속되자 경총은 집중 교섭을 마무리하자고 제안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면 자본의 속셈에 말려들고 만 거예요. 집중 교섭이라 했지만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결국 시간만 날렸어요. 탄압은 거세졌어요. 조합원들이 하나 둘 이탈해 가기 시작할 때 염호석이가 결단을 했어요. 

“삼성서비스지회 여러분께. 저는 지금 정동진에 있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지회가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리라 생각해서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제가 여러분 곁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쁨이었습니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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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서 최종범 열사 투쟁(@삼성전자서비스지회)


일 년 사이 두 번의 열사 투쟁


전 염호석 열사와의 포옹을 똑똑히 기억해요. 5월 14일 서울 상경 투쟁을 마치고 수원으로 이동할 때 전세 버스에서 같이 앉았어요. 호석이는 제 어깨를 주물러줬어요. 마무리 집회를 하고 힘껏 안더라고요. 제가 호석이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서울에서 열린 전교조 집회에서 투쟁기금 모금 운동을 할 때였어요. 와락 눈물이 나왔고, “도와 달라”고 외치고 또 외쳤어요. 그때 1,300만 원이 모였다고 해요. 곧장 강원도로 갔고, 염호석 열사의 시신을 확인했어요. 유족을 설득했고 위임장을 받고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왔어요. 당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장례식장에 경찰이 들어와 시신을 탈취해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어요. 조합원들은 정말 처절하게 싸웠죠. 별이 엄마는 아이를 업고 싸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힘에서 밀렸어요. 얼마나 절실했으면 한 간부는 옥상으로 올라가기도 했어요. 다행히 옥상 문이 잠겨 있었다더군요. 제 상복은 찢어졌어요. 전 구조물에 매달려 억울함을 외쳤고, 분노를 터트렸어요.


정말 떨어지려했어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과거 백골단이 시신을 탈취했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지금 그런 일이 발생할지는 몰랐어요. 아무리 삼성이라도, 경찰이 시신 탈취를 하다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막아낼 방법이 없었어요.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올라가는 일밖에···.


장례 진행 방해 혐의로 구치소에 들어갔어요. 인생에서 두 번째 구치소였어요. 비가 오면 동료들 걱정에 잠을 잘 수가 없었죠. 본관 앞에서 노숙하는데 비야 오지마라며 기도를 했고, 면회를 오면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어요. 그리고 6월 28일 합의가 이뤄졌어요. 정말 기뻤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절함과 애절함이 뭉쳐서 승리를 일궈낸 거였어요.


일 년 사이 두 번 열사 투쟁으로 나를 포함한 조합원들이 많은 상처를 입었어요. 함께한 그 동지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밖에서 먹고 자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그렇게 힘든 과정에서 버텨냈어요.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었어요.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 등 기본적이고 소중한 권리를 찾는 투쟁이었어요.


오늘 전 수원에 모여 있는 조합원들을 만나러 가요. 노동조합은 40여 년간 ‘일등주의’에 빠져있던 저의 삶을 바꿔놓았어요. 이제 삼성도 바뀔 것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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