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_나지현 전국여성노동조합 위원장

by 센터 posted Dec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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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여성 운동에서 그다지 조명 받지 못했지만, 여성 노동 운동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전국여성노동조합 나지현 위원장을 만났다. 굉장한 신념을 가지고 산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동적인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라며 인터뷰를 고사했지만, 녹록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해맑아서 그이가 살아온 삶의 굴곡을 한순간 잊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노는 걸 좋아하지만 춤은 못 춘다며 중·고등학교 졸업할 때 더 이상 무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좋았다고 한다. 투쟁도 즐겁게 해야 한다며 아기자기한 퍼포먼스로 집회 문화도 바꾸고 싶단다. 그이는 사주팔자에 자기 쓸 돈은 잘 못 벌지만 남한테 줄 돈은 벌 수 있다며 재정위원회 같은 거를 해서 돈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말해주듯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나 위원장을 쉼표하나 회원인 이상선 씨와 함께 만났다.

 

나지현-도입사진.jpg


전국여성노동조합(이하 여성노조)은 여성 노동자를 조직하고 지원하며 상담하는일을 하는 곳이에요. 여성노조는 1999년에 만들어졌어요. IMF 경제 위기 때 정리해고니 뭐니 하며 힘들었잖아요. 텔레비전을 보면 대기업이나 남성 가장들이 해고돼서 어려운 걸로 많이 나왔는데 실제론더 많은 여성들이 해고되고 비정규직이 되고 했어요. 여성 노동자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들어 자기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만들어졌어요. 저는 2005년에 한 번 위원장을 했고, 2013년부터 9대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전태일을 알게 되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살지는 않았어요.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딸로 컸거든요. 엄마 나이 마흔 셋에 저를 낳았는데 몸이 많이 약하셨어요. 그래서 어릴 땐 엄마가 일찍 돌아가실까봐 불안해하고 전전긍긍 했죠. 어린 나이에도 내가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강건한 분이셨어요. 자상하지는 않았지만 씩씩하셨죠. 그래서 저한테도 자기 몫을 다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어요. 예를 들면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식이었죠.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선 사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다른 형제가 없어서 눈에 보이게 차별받는 거는 잘 못 느끼고 살았어요. 공부도 잘했고요. 별문제 없이 자란 거죠.


근데 사는 동네 환경이 좋지는 않았어요. 서울 이태원 옆 보광동에서 살았는데 가난한 동네였어요. 미군부대 옆이다 보니 학교 주변 길엔 어스름할 즈음 의자 놓고 앉아서 손님 기다리는 ‘양공주’라고 부르는 여자들도 있었어요. 그런 모습이 일상이었으니까 분위기가 좋은 동네는 아니었던 거죠.


중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는데 목사님이 하는 말씀이 “너희랑 같은 나이의 애들이 청계천에 가면 1미터짜리 철판, 널빤지로 막은 곳에서 시다를 하고 있다”면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죠. 전태일 얘기도 해주셨어요.

고등학교 다닐 땐 공부는 잘했지만 모범생은 아니었어요. 등교시간에 버스 타면사람이 너무 많아서 낑겨서 타야하는 거예요. 그게 싫어서 항상 지각을 했어요. 그런데 애매하게 늦으면 벌칙으로 운동장을뛰어야 해요. 그래서 1교시 끝나는 시간에맞춰 간 적도 많아요. 그런데 애들이 많으니까 모르더라고요.


중학교 친구들 중에는 공장 간 애들도 있었는데 저는 국립대를 들어갔어요. 등록금이 정말 쌌는데 국민의 세금으로 학교 다니고 있으니 국가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학생들끼리 천문대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비가 와서 못 가게 되자 친구 한 명이 자기가 어디 공부하는 모임에 가는데 같이 가보자고 해요. 그래서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갔는데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책을 보는 거예요. 그 책이 뭐냐면 대형 교회를 까는 내용이에요. 교회가 돈을 섬기는 거에 대해서. 그 책에 꽂혀서 모임에 계속 다니게 됐죠. 그게 기독학생회였어요. 그때 전태일 얘기를 들으면서 중학교 때 목사님 생각도 나고···. 학생 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거죠. 그때 야학을 했는데 조사 받으러 끌려가기도 했죠. 혼자 조용히 양심적으로 살면서 지원하는 것만으론 안 되겠다 싶어 구로동 쪽에서 노동교회를 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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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 무기한 철야농성 12일째 국회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는 나지현 위원장.(@여성노조)


노조를 만들다


무기정학도 받으면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반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때 운동을 한 친구들은 보통 현장에 가거나 데모 주동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했죠. 그런데 그런 생각을 안 했어요. ‘너네는 가난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얼마나 힘들 건지 눈에 보이듯 뻔한데  왜 가겠어요. 엄마를 모셔야한다는 생각도 강했어요. 그 당시 엄마가 60대였는데도 일을 하고 계셨거든요.

대학 다닐 때는 내가 사회 나가서 돈 벌어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 해 본 건 아니었어요. 자신이 없더라고요. 2년 정도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다보니 돈을 번다는 게 끝이 없는 것 같았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엄마랑 단둘이 사는데 큰 돈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제가 미식가라 맛있는 걸 좋아하는데 비싼 게 꼭 맛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공장에 들어갔어요.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곳이었어요. 컴퓨터 회사에 다녔으니까 땜이나 이런 거 할 줄 알았거든요. 중학교 졸업에 10년 경력이라고 속이고 위장취업을 한 거죠. 산업체학교 애들이 많은 회사였어요. 일도 하고 학교도 다니려고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들이잖아요. 5시면 학교에 갈 시간인데 어느 날은 회사에서 갑자기 일방적으로 잔업을 하라는 거예요. 학교에 가지 말라는 거죠. 너무 화가 나서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잊어버리고 라인을 탁 꺼버렸어요. 그리고 애들을 학교에 보낸 거죠. 다음 날 출근을 하는데 어떻게 해고될지 고민이 되는 거예요. 내가 왜 그랬지 하면서 뒤늦게 걱정이 된 거죠. 출근했더니 사무실에서 불러요. 학력이 낮아서 고민했는데 경력도 충분하고 리더십도 있는 것 같으니 학생 라인 조장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진급을 한 거죠. 같이 일하던 친구 중에 여상을 나온 친구가 있었는데 학벌이 좋아서 일반인 조장을 했어요. 그 친구랑 둘이 공모해서 노조를 만들었어요. 그 친구가 위원장 하고 제가 사무장을 했죠. 남성이 딱 한 명 있어서 그 친구를 잘 꾀어서 부위원장을 시켰어요.


그 당시 인천에는 다양한 정치 조직에 들어온 조직 활동가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노조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죠. 단지 그땐 조합원이 30명 이상 되어야 노조를 만들 수 있어서 사람을 조직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비밀리에 30명을 모았어요. 일 년 이상 일한 사람이어야 임원을 할 수 있는데 회사 자체가 일 년이 안 되었어요. 그럴 때는 원래 아무나 할 수 있는데 그 회사의 설립연도는 일 년이 더 된 거예요. 공장은 일 년이 안 되었는데 그 전엔 봉제회사였거든요. 그래서 사무원 중에는 일 년이 넘은 사람이 있었어요. 근데 회사에서 그 사무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어용노조를 만들었어요. 결국 두 개의 노조가 생긴 거죠. 우리가 먼저 만들었지만 일 년 이상 된 사람이 생산직 중에 하나도 없으니까 어용노조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게 됐어요. 결국 우리는 불법 노조 판정을 받았는데 그냥 설립보고대회를 해버렸어요.


점거농성, 그리고 구속


그리곤 공장 3층 개발실을 점거해 농성에 들어갔죠. 노조원 30명이 다 같이.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전부 끌려 나와서 지하실에 감금 됐어요. 저는 야학을 하다 중앙치안본부에서 조사 받았던 게 통보가 돼서 격리됐어요. 개발실에 감금됐는데 한두 시간 붙잡아두고 있다가 내보내주더라고요. 애들은 남자 사원들과 폭력배들로 구성된 구사대한테 둘러싸여서 밤새도록 두드려 맞고···. 작업복 단추가 막 떨어져나간 채로 차에 실려 여기저기 집 근처에다가 부려놨더라고요. 원래 다른 사람들한테 “쟤는 빨갱이니까 쟤 빼고 다 집에 가라”고 했는데 의리를 지킨 거죠. 우리는 항상 30명이 같이 의논하고 같이 결정을 했기 때문에 이탈했던 적이 없어요. 다음날 새벽에 결국 각서 쓰고 모두 나왔어요.


우리는 할 만큼 했지만 불법 노조가 됐고, 정리를 할 건지 어떻게 할 건지 얘기를 하다가 한 친구가 화가 나서 이렇게는 못하겠다며 끝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날 세 명씩 조를 짜서 회사 주변을 빙빙 돌면서 회사 앞에 모였어요. 무서워서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모였는데 회사가 문을 잠근 거예요. 한여름에 8일 정도 비 맞아 가면서 농성을 했어요. 큰 도로변에 회사가 있었는데 온몸에 멍이 든 여성들이 반바지 입고 있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곤 했죠. 너무 많이 맞아서 뼈가 부러진 애도 있었어요. 아는 노래라곤 늙은 노동자의 노래밖에 없어서 그거 부르고, 교회 다니는 애들은 찬송가도 부르고···. 처음엔 <파업전야>에 나왔던 회사인 한독금속 노동자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서류도 만들어주고 농성장에 매일 찾아오고, 그 후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했죠. 한 5백 명씩 저녁때마다 모여 연대집회를 했어요.


우리 요구 조건이 임금 천 원 인상이었는데 결국 관철되었고 노조도 인정받았어요. 복귀해서 한두 달 노조 활동했는데 공안 정국이 되면서 다시 탄압이 시작됐어요. 위장취업 했던 사람들은 어차피 다 잡혀가니까 위원장하고 기본 노조 틀은 지키자고 결의해서  ‘위원장은 그냥 꼭두각시다, 우리가 다했다’고 주장해서 위원장은 살아남았어요. 우리는 구속돼서 들어갔는데 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회사 앞에서 집회하고 했다더라고요. 저는 판사가 초범이라고 집행유예 선고를 내려줘서 대통령 선거 전날 나왔어요. 실형 전과가 있던 사람들 빼곤 다 집행유예로 나왔죠. 대선 결과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고를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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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무직법 통과를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여성노조)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여성노조


70~80년대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조직돼 있지 않았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도 않은 상황이었어요. 그때 저는 인천노동조합협의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활동을 하고 일꾼역사교실이라는 곳에서 교육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여성노조를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생소했어요. 듣고 보니 괜찮은 거예요. 기존 노조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법적으로 가능하면 해보자고 했죠. 그래서 비정규직이나 작은 사업장이어도 아무나 가입할 수 있는 노조를 만들어 여성 노동자 문제를 우선으로 해결해보자는 취지였어요. 같은 시기에 일반노조가 생겼어요. 그때는 해고자라는 것만 명시 안 하면 노조설립필증을 내줬어요. 그나마 김대중 정권일 때여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여성노조 처음에 시작했을 땐 아무 것도 없었어요. 누가 오게 될지, 뭘 해야 할지 몰랐어요. 맨 처음 찾아온 사람들이 88CC에서 일하는 경기보조원이었어요. 특수고용이다 보니 노조 만들어도 설립필증이 안 나와요. 인하대 청소 노동자 분들도 찾아왔는데, 이분들이 처음에는 학생회에서 민주노총을 소개받고 연락을 했대요. 그런데 그 당시 민주노총은 50대 아줌마들을 조직해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한테 연락해서 하겠냐? 해서 우린 하겠다 한 거죠. 학교비정규직도 처음엔 전교조, 공무원노조를 찾아갔나 봐요. 그런데 조직 대상이 아니었던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나 조직한다더라 하는 말 듣고 찾아온 거예요. 그제야 우리도 학교비정규직을 알게 된 거죠.


파견법이 시행될 때 다른 노동 운동 영역에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 여성계에서 정말 강하게 반대했어요. 파견 딱 2년이 되면서 이제부터 해고자가 나올 거라고 예고했는데 사람들이 안 나올 거래요. 혹시 모르니 광고를 해보자고 해서 해고를 당하면 상담을 하라는 광고를 냈어요. 그런데 상담이 정말 온 거예요. 창원 쪽 연락 온 곳은 상담하고 연락을 하자마자 회사에서 바로 직고용을 했고, 인천에 있는 대우중공업은 파견 2년차가 되니까 해고가 된 거예요. 이 분들이 너무 갑갑해서 연락도 없이 저녁에 상담을 왔어요. 노조를 조직해서 싸워야 한다고 상담을 했는데 다음날 쫓아가서 정규직 노조 위원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어요. 정규직 노조가 함께해서 직고용을 하고 복직이 됐죠.


조합원들에게 배운다


4대 위원장을 하고 4년 정도 쉬면서 다른 활동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당시 여성노조는 오랫동안 활동했던 친구들이 지쳐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죠. 인천에 사는 조합원 언니가 어느 날 찾아왔어요. 지부장 할 사람이 없다, 일 년만이라도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처음엔 못하겠다고 사양했죠. 더 잘할 수 있는 젊은 친구들을 시켜서 보내보려고 했는데 결국 잘 안 됐어요. 서울 생활 좋아하지도 않았고, 감동 받으면서 활동했던 지역이 인천이라 서울 올 생각은 안 했죠. 그런데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다음 지부장 세울 때까지 2년만 하겠다고 다시 시작을 했죠. 그런데 중앙에 위원장이 그만두게 되는 상황이 생겨버린 거죠. 지부장만 할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위원장까지 겸하게 돼버렸어요.


처음 여성노조를 하면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결국 조합원들에게 배우는 것 같아요. 87년 노조 할 때도 저는 그렇게 강건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시 회사에서는 노조를 만들면 회유하기 위해 노조를 깨면 요구조건을 100퍼센트 들어주겠다, 위장취업자만 빠지면 노조도 인정하겠다는 식으로 했어요. 너무 힘들고 지칠 대로 지쳐있어서 말이 그렇지 투쟁을 한다는 게 정말 힘들잖아요. 저는 말은 안 했지만,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노조를 만들었으니 이젠 빠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날라리 같았던 한 조합원이 이러는 거예요. 왜 저쪽은 좋은 대학교 나온 사람을 다 쓰는데 우리는 안 되냐, 같이 들어가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조합원 모두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사실 저는 놀랐어요. 그 말을 한 사람은 잊었겠지만 제가 계속 활동을 하게 해주는 힘이 된 말이기도 해요.


전 몇 년 주기로, 다양한 운동이나 다양한 일들도 많은데 이 운동만 계속 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도 하는데 이 일만큼 강한 욕구를 일으키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좋고 이 일을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집회 문화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들이 참여하기 쉽지 않아요. 투쟁도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연대하러 온 분들은 낯설어하더라고요. 학교비정규직 투쟁할 때는 유니폼을 입고 오기도 해요. 교육부에 종이비행기를 날리기도 하고 리본을 달기도 하면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하죠. 저는 여성 노동자들이 더 많이 조직되어서 좀 행복하게 활동했으면 좋겠어요. 임금을 많이 올린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노조 안에서 자기 목소리 내고 세상에 대한 눈도 떴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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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구조개악 반대 시국농성장에서 스톱모션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여성노조 조합원들.(@여성노조)


여성 노동 운동, 사람을 남기는 운동으로


여성 노동자 문제를 최우선에 놓고 활동하기는 쉽지 않아요. 여성 운동 속에서 여성 노동 운동은 그렇게 조명 받지는 못했어요. 70~80년대에는 여성 노동 운동이 그냥 운동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남성 중심의 운동이고, 대기업 운동이 되었어요. 그 속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리더십을 발휘하고,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기제들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역할이 여성노조에 있다고 봐요. 저는 운동이란 가장 힘든 사람들을 향해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같은 비정규직이어도 여성들의 임금이 더 낮잖아요. 여성의 일자리나 임금 차별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바꿔야 해요. 남성들은 노조 간부도 하지만 지역에 가서 또 활동할 수 있어요. 집안일을 안 하니까 밤늦게 들어오죠.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건 여성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일과 가정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게 인간적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이라는 이름을 건 노조는 필요가 없을까 하는 고민도 했어요. 왜냐하면 학교비정규직이나 업종으로 조직되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고, 청소 노동자 문제도 일반노조에서 하다가 공공운수 서경지부에서도 같이 하잖아요. 그래서 여성노조에서 연구 작업을 시작했어요.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가장 우선으로 조직하는 곳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저희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때그때마다 사람을 남기고 사람을 성장시키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운동도 행복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조금 더 함께할 수 있고,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식의 노동 운동을 하면 좋겠어요.


인터뷰 : 이상선 쉼표하나 2기 회원 / 정리 : 강인수 센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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