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건 알아도 염통 밑에 쉬 스는 것 모른다_장대전 기아차 사내하청노동자, 윤주형 열사 추모사업회 의장

by 센터 posted Oct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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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이혜정 기록노동자


편집자 주 : 장대전 씨는 정년을 앞둔 기아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는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이고,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이며 윤주형 열사 추모사업회 의장이기도 합니다. “머리가 나빠져서 기억이 잘 안나. 갑자기 불쑥 기억이 떠오르고 그래요. 이해해줘요.” 멋쩍게 웃는 그와 술을 기울이며 오래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시를 씁니다. 10대 때부터 그래왔습니다. 지금도 그는 가끔 시를 씁니다. 기아자동차 공장 안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묻혀 있습니다. 그에게도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기록된 것들은 그의 부분, 부분들입니다. 행간에 자리했던 한숨, 침묵 등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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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가 뭔지도 몰랐던 시골 소년


올해 육십 되었어요. 나는 상당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유교적인 경향,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경향들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걸 보고 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요. 6대 장손이고, 저는 경기도 포천에서 성장했어요. 포천은 할아버지가 고향 떠나서 피난 오다가 정착하신 곳이었어요.


나는 호롱불 세대예요. 밤새 호롱불에 책을 보면 코가 새카매졌어요. 조금 나은 집은 호야라고 유리커버가 있는 등을 썼는데, 호롱불보다 다섯 배는 밝았어요. 열일곱 되던 해 전기가 들어오면서 밤에도 대낮같이 밝은 것이 참 신기하더라고요. 학교는 20리를 걸어서 다녔어요. 당시 운동화 바닥이 얼마나 잘 떨어지는지, 한 달도 안 되어 밑창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구멍 난 운동화 바닥에 곽 쪼가리를 깔창처럼 넣고 다녔죠. 어릴 때는 그냥 꿈 많고 보이지 않는 것을 동경하는 시골 아이였어요. 봄이면 사방 지천에 피는 꽃들을 보면서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죠.


독재 치하였어도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하루에 버스가 세 대밖에 들어오지 않는 동네였고, 신문도 없었거든요. 동네에 라디오 있는 집이 간혹 있었는데, 스피커를 연결해서 동네 사람들이 같은 방송을 듣곤 했어요. 고춘자, 장소팔 만담을 듣거나 연속극을 들었어요. 그게 세상과 유일한 연결고리였어요. 시골은 언론 통제가 필요 없었어요. 선거 때 막걸리, 고무신 돌리면 박정희 다 찍어주니까요. 어렸을 땐 교무실에 면사무소에 박정희 사진이 다 걸려있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열세 살에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12월 새벽이었어요. 당시에 아버지는 싸리나무를 마차에 실어서 20리 거리에 있는 관, 읍에 가서 팔았거든요. 다섯, 여섯짐 실어서 운임료를 버는 거죠. 그 일 도중에 밧줄을 위에서 당기다가 차갑게 얼어붙은 바닥에 떨어지셨어요. 그날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죠. 할머니와 어머니의 통곡소리. 저는 병원 가자고 할아버지한테 보챘는데, 할아버지는 객사하면 시신을 방 안에 못 모신다면서 안 된다고 하셨어요. 나중에 도저히 안 되어서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가려했는데 가래 끓는 소리를 끝으로 결국 운명하셨어요.


아버지는 술을 자주 드셨어요. 술만 드시면 집안에 큰 소리가 났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런 것들이 참 싫었어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안 살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었어요. 그렇게 싫었던 아버지인데도 초가 움막에 들어가서 빌었어요. 제발 살려달라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당시 열한 살 동생과 열세 살이었던 제가 상복을 입고 대성통곡을 하는 걸 보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울었대요.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는 방법이 없을까, 아버지가 살아나면 정말 잘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계속 했어요. 아버지가 살아서 벌떡 일어나는 꿈도 자주 꾸고요.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뒤 죽음에 대해 오래 생각했어요.


그런 시절을 겪으면서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어요. 당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경제적 책임을 지고 계셨는데, 할아버지가 진학을 반대하셨어요. 나보다 어린 당숙까지 열 식구가 먹고 살아야 했거든요. 진학은 하고 싶었지만 나 혼자 욕심을 차리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 담임 선생님이 고등학교 보내라고 집에까지 찾아오셨는데 결국 못 갔어요. 


시를 꿈꾸다


저는 10대 때부터 시를 썼어요. 중학교 때 한 번은 시화전에 당선되는 사람에게 찐빵 사기로 친구와 내기를 했어요. 어릴 때 찐빵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땡땡땡 종이 친다. 아이들은 종례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들떠서 집에 가기 위해.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종례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런 내용의 시였어요. 계속 미루다가 종례시간 때 다급히 써서 낸 시였는데, 덜컥 당선이 된 거예요. 친구에게 빵을 얻어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네요(웃음). 그런 시를 썼던 걸 보면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땐 그렇게 더러 시를 썼어요.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 시는 전 학년이 모인 강당에서 낭송했었어요.

“하얀 눈이 내린다. 지붕 위에도 장독대 위에도. 저 눈이 쌀가루라면 함지박에 양푼에 가득가득 담아서 내년 봄 장리쌀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음력 3월 즈음 쌀이 떨어지면 빌려 먹는 쌀을 ‘장리쌀(예전에, 장리(長利)로 빌려주거나, 꾸는 쌀을 이르던 말. 본디 빌려주는 쌀의 절반 이상을 한 해 이자로 받기로 하고 빌려주는 곡식이다. 흔히 봄에 꾸어 주고 가을에 받는다.-다음 국어사전)’이라고 불렀어요. 9월에 추수하면서 5할의 이자를 붙여 갚는 거죠.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쓴 시는 가난과 착취에 대한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늘 가난했고 농사를 많이 지어도 가을에 빚 갚으면 남는 게 없었거든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우연히 들었는데, 시, 소설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집한다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라고요. 그게 서울문학회였어요. 종로로 갔죠. 그때 제 나이가 서른둘이었어요. 당시에는 내가 글 좀 쓰는 줄 알았는데, 그 모임에서 완전히 깨져버렸죠. 내 시를 보고 상투적이다, 추상적이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비판을 하던 후배가 유일하게 인정한 시가 한 편 있어요. ‘벌초’라는 시인데, ‘내 생성을 결정한 오랜 뼈들이 온 산에 누워있다’ ‘아버지, 당신은 너무 산발입니다’ 두 구절이 생각나네요. 서울문학회에서 총무까지 맡아서 했는데, 지금은 해체되어 버렸어요. 이젠 추억이 되었네요.


50가지가 넘는 직업을 가지다


나는 직업이 많았어요. 50가지가 넘어요. 농사를 지으면서 동네에 있는 광산에서도 일을 했어요. 광산에서는 농사 일당의 두 배를 줬거든요. 두 가지 광산이 있었는데 하나는 인조석이라고 건물 바닥에 까는 돌을 생산하는 곳이었어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서 무너진 돌을 포클레인으로 실어온 뒤 그걸 빻는 거예요. 콩알보다 조금 더 크게요. 또 다른 하나는 소석회라는 돌을 굽는 곳이었어요. 석탄을 때어서 며칠 동안 돌을 구워요. 엄청 뜨거워요. 그 돌을 싣고 가서 빻은 뒤 체를 쳐요. 그걸 분말로 만들어서 산성화 된 밭에 뿌리는 거죠. 소석회가 닿으면 살이 다 까져버리니까 한 여름에도 방한모 쓰고 목도리 두르고 마스크 쓰고 내복 입고, 긴 작업복 바지를 입고 일을 해야 해요. 보통 군복을 입고 일했어요. 가루가 잘 털어지니까요. 일이 끝나면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옷이 흠뻑 젖어있었어요. 새벽 다섯 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한 시가 되면 일이 끝나니까 오후에는 밭에 가서 농사를 지었죠. 


농사짓다가 한 번은 조부님과 다투고 가출도 한 번 했죠. 세 달인가, 두 달인가. 서울 성산동에 있는 핸드백 공장에 가서 일하다가 다시 내려온 적도 있었고··· . 파지 공장도 가봤어요. 인쇄소에서 인쇄하고 남은 자투리를 모아서 파는 곳이었어요. 수지, 비닐 이런 거 모아서 녹인 뒤 다시 비닐을 만드는 공장에서도 일했어요. 천막 쪼가리, 색깔 있는 거, 없는 거, 투명한 거 다 분리한 뒤에 그걸 녹여요. 녹인 비닐이 국수 가락처럼 나오면 찬물에 식혀 쌀알만 한 크기로 자르죠. 그걸 담아서 납품을 하는 거예요.


영업도 해봤어요. 북 세일즈. 영업을 하면 농사일보다 힘도 덜 들고 돈도 많이 번다는 말에 시작했어요. 회사에서 교육을 받고 필드에 나갔죠. 교양서적을 팔았는데, 처음엔 해야 할 이야기들을 적어가지고 다녔어요. 농사만 짓던 놈이 의욕만 넘쳐서, 한 나절 동안 사무실 문만 두들기고 나오고를 반복했어요.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뒤 “예스 아이 캔!” 소리를 질렀더니 나이가 많고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예스 아이 캔!” 답을 해주더라고요. 처음 들어가서 파는 물건에 대해 설명하는 걸 어프로치라고 하고 마지막 사인받는 걸 클로징이라고 하는데, 갑자기 교육받은 내용이며 적어온 것들이 생각이 하나도 안 나(웃음).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 겨우 나온 말이 “책 하나 팔아주세요”였어요. 그랬더니 “젊은이 열심히 살아보게” 그러더라고. “고맙습니다” 하고 나왔죠. 그 일도 정말 열심히 했는데, 한동안 하다가 그만뒀어요. 


기아바이라고 알아요? 버스나 열차 안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을 기아바이라고 해요. 왜 고속버스 타면 뒤따라 올라와서 “회사가 부도가 나서 원래 3천 원인데 천 원에 팝니다”라고 물건 파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일도 했었어요. 고속버스에서는 잘 팔려요. 손님들이 전부 앞만 쳐다보거든요. 거기서는 돈이 막 꽃이 펴요. 전철에서도 팔았어요. 거기는 공안이 있어요. 걸리면 구류 살아요. 행상을 못하게 되어있거든요. 한 번 걸려서 다시는 안 한다고 싹싹 빌었던 적도 있었죠. 처음 팔았던 것이 일회용 우비였어요. 연설문을 인쇄해서 줘요. 그걸 외워가지고 파는데, 나중에 살을 붙이다보면 말이 길어져요. 청량리 내릴 거를 살이 붙다보면 상봉동까지 가버리고···. 나는 결혼을 서른일곱에 했어요. 아내는 서른넷. 저는 아내에게 반말 안 했어요. 지금도 존대하고요. 반말이 가끔 튀어나오지만 안 한 게 훨씬 많아요. 지구상 70억 가운데 만난 얼마나 소중한 인연입니까. 아껴주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결혼관에 대해 말씀드렸죠? ‘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어릴 때부터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늦게 결혼하는데 방 얻을 돈이 없어서 되게 창피했어요. 그 후로도 한 번도 좋은 집에 못살았어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한 부분이에요.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도 우리 아들은 항상 행복하다고 말해요. 고맙죠. 저는 우리 아들한테 그랬어요. “너는 세상 최고의 엄마를 만났다”고요. 저는 아내에게 ‘경애하는 여사님’이라고 그래요. 아내는 늘 저를 믿어주었고, 그게 너무 고마웠어요.


아내는 매우 근면한 사람이에요.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글을 쓰겠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아내는 먹고 사는 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냄비, 프라이팬 같은 걸 떼어다가 노점을 시작하더라고요. 나중에는 글 쓰는 걸 포기하고 둘이 같이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겨울 니트, 원피스 같은 걸 떼어다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점을 했어요. 아들이 두세 살 때였는데, 가끔 “오천 원이요” 하며 거들기도 했어요(웃음). 니트는 잘 팔렸어요. 제천에서 140만 원치를 팔았는데, 안동에서 247만 원치를 판 거야. 그 때 노점을 한 덕에 2천만 원짜리 전세방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런데 그 전세 자금을 빌려다가 양파주스, 동충하초 같은 걸 팔아보려 했는데, 돈 다 까먹어버렸어. 아내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죠. 이후에 농장에서 소를 기르면서 그 집 사택에서 살기도 하고, 우유 배달도 해보고, 과수원 얻어서 복숭아 농사를 조그맣게 짓기도 하고, 경비도 하고, 학원차 기사도 하고, 노가다도 하면서 먹고 살았어요. 하루 서너 시간 자고선 일했어요. 그러다 기아차 들어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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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이동우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가 선전전을 하고 있다.


공장 노동자가 되다


2002년도에 공장 들어왔거든요. 어느 날, 장모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자네는 직장 언제까지 왔다 갔다 할 것인가.” 큰딸을 늦게 시집보냈는데 갑갑하셨나봐요. 그 말 듣고 ‘이화모듈’이라는 기아차 2, 3차 업체에 들어갔어요. 소렌토 하체를 부분 조립해서 납품하는 곳이었어요. 너무 힘든 공정이라 한 명을 붙여주더라고요. 그걸 ‘1도움’이라고 해요. 공장 벽에는 ‘노동을 운동같이 하자.’ 그런 구호가 붙어있었어요. 하다가 요령이 생기니까 1시간 할 것을 40분에 마치게 되었는데, 조금씩 일을 더 줘요. 아주 나쁜 놈들이에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배터리카를 몰다 세워둔 트럭 백미러를 깼는데, 노동자에게 변상을 시키는 거예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렇게 6개월 일하다가 1차 하청인 ‘SCM(공급망 관리)’에 TO가 나서 입사했고, 지금까지 일하게 된 거죠.


당시에는 성과급도 없었어요. 정규직 파업할 땐 100만 원, 아닐 땐 120만 원 받았는데 뭘. 2005년도에 그곳에서 일하다가 허리가 망가졌어요. 앞 범퍼 끼우는 일을 했는데, 계속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해야 했거든요. 통증을 호소하니까 쉬운 공정에 있는 사람에게 한 타임에 십 몇 분씩 도와주라고 그러더라고요. 공정을 바꿔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니까 다른 공정으로 옮겨주긴 했는데, 또 허리를 많이 쓰는 공정으로 보낸 거예요. 아침에 나와서 일을 하는데 뚝, 소리가 나고는 숨을 못 쉬겠더라고. 병원 갔더니 디스크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거예요. 그때 산재를 나가야 했는데 공상처리를 한 거야. 나는 당시 산재가 뭔지도 몰랐어요. 무지했죠. 한두 달 치료를 받다가 다시 일을 했어요. 산재는 그러지 않는데, 공상은 빨리 들어와서 일하라고 재촉을 하거든요. 2007년도에 디스크가 재발했는데, 그 때는 산재신청을 했죠. 그런데 퇴행성이라고 불승인 떨어졌어요. 변호사 사느라 백만 원 날아가고, 월급 몇 백만 원 못 받고. 변호사가 노조에 가입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가입하려고 보니 내가 노조에 기여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나 필요하다고 가입하는 건 양심이 허락하질 않더라고요. 승인되든, 불승인 떨어지든 결과가 나오면 가입하겠다 생각했고, 불승인 떨어지고서 바로 가입을 한 거예요. 노조 가입하고 2007년도에 처음 집회 참가해서 “투쟁!” 소리를 해봤는데, 굉장히 어색하더라고(웃음).


윤주형 열사에 대한 추억


윤주형 열사하고는 같은 조직에 있었어요. 워낙 윤주형 열사가 인사성이 좋고 붙임성이 좋아서 자연스레 가까워졌어요. 윤주형 열사는 나랑 스물한 살 차이에요. 형님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고, “선생님이라고 할까요?” 묻길래, “내가 널 언제 가르쳤다고 선생님이야?” 그랬더니, “그럼 선배님은 어때요?” 묻더라고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인생의 선배니까 선배님은 괜찮겠다,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 왜 윤주형 열사한테 형님 소리 한 번 못 들어봤을까 싶더라고. 우리 어머니한테 배 안 아프고 낳은 막내라고 소개시키면서도 왜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못했을까. 형이라고 좀 부르면 어때요? 서로 통하기만 하면 형젠데···. 그게 가장 후회가 돼요.


윤주형 열사는 활동도 적극적이었어요. 당시 일하던 업체 사람들을 조합원 가입도 많이 시켰어요. 항상 “선배님 저 자신 있어요” 하던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은 “선배님, 우리 퍼포먼스 한 번 해봅시다.” 그러더라고요. 조암 장날 해보자고, 대본을 써달라고 했어요. 윤주형 열사는 노동 문제에 대해 지역에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조암이 보수적인 동네거든요. 그 후에 또 한 번은 미조직 노동자들 조직하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기아차 화성공장 주변에 미조직 노동자들 많거든요.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아, 도와줘야지.” 흔쾌히 답을 했는데, 같이 하자고 해놓고선 저렇게 가버렸잖아.


윤주형 열사 통해서 기아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하 해복투) 동지들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 해고자였던 윤주형 열사나 이동우 동지, 김수억 동지 보면서 “앞장서서 싸우는 동지들인데, 생계를 위해 후원회 조직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이야기를 조직 내에서 여러 번 했어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 있잖아요. 그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조직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왜 우리는 라이언 일병을 못 구하느냐?” 그랬더니 “형님이나 그런 마음 갖지. 그게 되겠어요?” 그러더라고. 함께 싸울 생각을 안 해요. 윤주형 열사도 그걸 간파한 거겠죠. 김수억 동지 출소할 때 내가 다시 제안을 했고 해복투 후원회 CMS를 만든 거예요. 아이디어는 제가 제공했거든요. 이런 거는 자랑을 하고 싶어(웃음). 2010년에 윤주형 열사가 해복투 동지들 부탁이니 총무 좀 맡아달라고 해서 총무도 맡았는데, 윤주형이 이놈은 부탁만 해놓고···.


윤주형 열사 장례 투쟁 때 조직 사람들이랑 완전히 갈라졌어요. 윤주형 열사를 해고자 신분으로 보낼 수는 없었어요. 지부, 지회, 양경수 분회장 쪽은 장례식을 빨리 끝내려고 했어요. 우리는 이렇게 끝낼 수 없다고 윤주형 동지의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시신 앞에서 연좌한 거죠. 그런데 저들이 우리 몰래 윤주형 열사 염을 해버렸잖아요. 시신탈취예요. 그러고도 저들은 해복투 동지들이 윤주형 열사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몰아붙였잖아요. 아주 나쁜 자들이에요. 일말의 반성도 없어요. 지금도 분노가 치밀어요. 윤주형 열사의 아픈 사연은 나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어머니한테 막내아들이라고 소개시킬 때 호적에라도 올려놨으면 장례 투쟁 때 ‘윤주형 열사 염원이다. 나머지 해고자들 모두 복직시켜라’고 강하게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들어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급히 보자고 해서 조암 다방에서 만났었어요. 그날 윤주형 열사한테 커피를 얻어먹었지. 다른 일정 때문에 빨리 일어섰는데, 그 날 좀 길게 이야기했더라면 살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윤주형 열사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아서 같이 수련회도 가고 해야 하는데···. 나쁜 놈이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나는 너무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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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같았던 윤주형 열사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침묵하지 않기 위하여


지금 공장 안에서 제일 불안정한 사람들은 계약직이에요. 그 다음이 비정규직. 비정규직 투쟁? 계약직 투쟁? 없어요. 기아차 전체를 따지게 되면 3만 4천 명 노동자거든요. 그런데 비정규직이 1/10 밖에 안 되거든. 그 가운데 조직된 노동자는 천팔백 명이니까 1/15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비조합원이니까. 표만 계산해서 누구에게 집중할지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거지. 비정규직 철폐, 말로는 하죠. 하지만 어떤 조직도 나서지 않아요. 그게 너무 분한 거야.


특별교섭이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이미 김종석 기아차 지부장이 5.12 합의를 했잖아요. 합의했는데 무슨 특별교섭입니까? 그래서 5.12 합의 폐기가 우선인 거예요. 보수적인 법원에서도 불법파견이라고, 정규직 전환하라고 인정한 거잖아요. 이제 노동조합이 투쟁을 해야 하는 거예요. 법에만 맡길 것 같으면 노동조합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3천 명 중에서 3백 명? 웃기는 소리하지 말아라. 편 가르는 거냐?” 노동조합은 회사에 그렇게 항의해야 하는 거예요.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건 알아도 염통 밑에 쉬 스는 것 모른다’는 말이 있어요. 어머니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씀이에요. 정규직들도 잘 못 깨달아요. 염통에 쉬 슬 때까지 모르면 이미 늦은 거예요. 사람 죽어요.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을 때 속이 곪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내가 아픔을 못 느끼니까 모르는 거예요. 옆에 노동자가 아프면 같이 아파야 하는데 못 느끼는 거죠. 이건 내 일이에요. 남의 일이라고 간과하게 되면 곧 내 앞에 닥쳐요. 바람이 불어야 해요. 2005년부터 시작된 기아차 비정규직지회(이하 비지회) 투쟁 덕분에 현장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전에는 인격적으로 무시당하고, 해고도 많이 당하고 그랬는데 많은 동지들이 싸운 덕분에 단체협약을 만들면서 지금은 함부로 해고를 못하죠. 거기에 반해 아무 노력도 안 하고 밥상에 앉아서 숟가락만 들고 먹으려는 세력들이 있어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싸운 김수억 동지, 이동우 동지, 김영성 동지, 가열차게 비지회 투쟁을 했던 동지들은 바보들이에요. 영악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나는 그런 게 너무 슬퍼요.


나도 오랫동안 비겁하게 살았어요. 이 비겁이 비지회 동지들 투쟁할 때도 나를 가로막고 있었어요. 잘못 나섰다가 우리 가족, 아내가 힘들어질까봐. 하지만 교육위원을 하면서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죠. 노동조합의 교육은 부당한 자본의 짓거리에 다함께 투쟁하자고 선동하는 거예요. 그런데 교육위원들이 안 움직여. 교육위원들이 투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공염불이에요. 말로만 하려면 교육위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해고 동지들 보면서 깨달은 건, 내 공장 안의 고소 고발과 해고를 막으면 노동 해방 온다는 거예요. 노조가 해고나 고소 고발을 막지 않으니까 아무도 안 나서요. 나도 싸우면 저렇게 될 거니까. 현장이 그렇게 죽어가는 거야. 울타리를 넘어가야 해요. 운동이란 건 나보다 더 힘든 현장을 찾아가는 거고, 미조직 노동자들 손잡고 함께 투쟁하는 거예요. 임금을 더 받는 것보다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중요해요.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차별받고 있잖아요. 미조직 노동자들은 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우리는 조직이 있잖아요. 천팔백 명이라는 대오가 있단 말입니다. 이런 동력을 활용 못하면서 핑계만 대면 뭐합니까. 이렇게 조직원이 많아도 싸움을 못하고 있잖아요. 대기업 조직된 노동자들이 차별의 구조를 깨잖아요? 그 여파는 바깥으로 갑니다. 여기서 안주하려하니 박근혜 정권이 비정규직 기간 연장을 하려고 하고, 정규직 해고 유연화를 주장하는 거예요. 노동 개혁이라고 하면서 재벌들이 정규직 연봉을 깎아서 신규 채용하자고 하잖아요.


어느 날 구조조정 바람이 불겁니다. 정규직들은 구조조정 때 다들 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다른 현장들을 보세요. 기아차도 멀지 않았어요. 미국, 중국, 멕시코 등에 해외공장 계속 만들고 있잖아요. 이제 일거리가 점점 없어질 거예요. 특근도 안 해. 그래도 조합원들은 관심 없어요. 임금·단체협상 때 지금 임금에서 얼마 더 올라갈 건가, 그런 거에만 관심 있어요. 하지만 비정규직 투쟁하는 동안 정규직 동지들이 같이 한다면, 정년퇴직 후여도 나는 정규직 동지들 구조조정 될 때 머리 허옇게 휘날리면서 달려올 거예요. 같이 싸울 거예요.


내가 받을 돈에는 민감한데 재능, 대우조선, 부산 생탁, 아사히 글라스 등 수없이 많은 투쟁 사업장에는 신경 안 쓰잖아요. 남의 일이니까. 내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 내 앞에 닥친 것만 아는 거예요. 그렇게 싸우는 동지들이 무너지게 되면 결국 나도 무너진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사람들이. 쌍용자동차 77일 투쟁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눈물도 나고 너무 분하더라고. 동지들이 하나둘 목숨을 끊어가는데···. 안타깝고 아팠어요.


‘이것은 소음이다. 소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침묵이다.’(《말테의 수기》 중에서-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말 알아요? 나는 살아온 과정 중 많은 부분을 후회하지만, 깨달음이 조금씩 있었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하면서 조금씩 벗어났던 거예요. 내가 가는 길이 틀리진 않았다는 거, 그런 걸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노동 운동은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등 떠밀어도 스스로의 자각이 없으면 절대 안 움직여요.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사회, 차별이 없는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를 위해 가야해요. 불의한 세상에 침묵하지 않아야 해요. 나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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