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파이터, 거리의 시인_송경동 시인2

by 센터 posted Jul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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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송경동 시인의 살아온 이야기가 담겼던 지난호에 이어 시인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그이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약속 시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회의며 집회 현장이며 그이가 찾아야 할 곳은 많았다. 그래도 우리는 만나야 했다. 이미 지난호에 회원님들께 ‘그이의 투쟁 이야기를 기대하라’고 예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나기엔 아쉬웠고, 그이의 삶이 궁금했다. 그러나 정작 그이는 “뭐 나 같은 사람 이야기가 두 번이나 책에 나가야 하나요” 하며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다른 이들에게 미안해했다. 순조롭지는 않았다. 몇 차례 약속이 어긋났고, 겨우겨우 인터뷰를 했는데 녹음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한다면 한다. 정신없이 바쁜 송경동 시인을 다그쳐 다시 약속을 잡았다. 홍대 근처에서 그이를 만난 센터 글쓰기모임 ‘쉼표하나’ 고현종 회원이 풀어놓는 송경동 시인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인터뷰.JPG


내 청춘의 구로공단


20대 대부분은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보냈다. 현장 노동자로 살면서 주변 노동자들의 삶을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마침 한 선배를 통해서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랑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문학을 하는 곳이겠구나 싶어서 찾아갔다. 당시만 해도 노동자 문학회는 전국에 꽤 많았다. 87년 이후 합법적인 공개 활동이 가능해지자 전국 각지에 노동자 문학 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지역에 뿌리박고자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전국 14개 지역에 노동자 문학회가 있었다. 노동자 문학회 간 연대가 활발했다. 거기서 주로 했던 것은 공부나 학습, 그리고 노동자 삶의 글쓰기 운동이었다. 대중적인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노보를 만들었고, 지역 노조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자 문학의 밤 행사를 1년에 한차례씩 열었다. 노동자 문학교실을 통해서 일 년에 두 번씩 현장의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서 자기표현을 하게 했다. 우리가 쓴 글들은 우리 사회 노동자들의 꿈과 현실이 무엇인지를 사회적으로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그밖에도 지역 단체들이 연대해서 지역 내 민주 운동을 함께하는 일들을 하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노동자 글쓰기 운동, 전국으로 확대


전국적 규모의 노동자 글쓰기 운동, 민중 글쓰기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2006년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잡지였고 출판 단위였다. 그 당시에는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노동자 운동에 대한 사회적 회의가 몰려들 때다. 진보적인 출판단위들이 노동 관련 책 내는 것을 접고 있었다. 사회적 패배감 때문에 평범한 노동자들의 삶 이야기들이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 우리라도 해보자 해서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와 김종수 열사 추모사업회, 노동자 문학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전국적인 규모로 노동자 글쓰기 운동, 민중 글쓰기 운동을 하자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작은책》 정도가 그런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구로 지역을 중심으로 하지만 전국적인 규모로 하는 노동자 생활문예지 출판사업이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건 중간에 《삶이 보이는 창》 잡지 사업이 어느 정도 안착이 되고 네트워크망이 생긴 이후에 좀 더 넓혀서 해봐야겠다 해서 ‘여성 노동자 글쓰기 교실’, ‘르포 문학 교실’ 만든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여성 노동자 글쓰기 모임, 르포 문학 교실에 모였던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책도 여러 권 작업해 보았다. 르포 문학 교실을 통해 모인 이들이 참여해 펴낸 책으로는 청계천 도시빈민들의 르포집인 《마지막 공간》과 비정규직 르포집인 《부서진 미래》, 뉴코아 이랜드 투쟁을 담은 《우리들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용산 참사 당시 철거민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르포집 《여기 사람이 있다》 등이 나오기도 했다. 별도로 단행본 사업도 했다. 기억에 남는 책은 이란주 씨 책이다. 이란주 씨는 지금도 부천에서 이주 노동자 일을 하고 있다. 그 당시 이미 십여 년 이주 노동자 운동을 해 왔던 소중한 동지였다. 그가 《삶이 보이는 창》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서 《말해요, 찬드라》라는 책을 냈다. 이주 노동자들이 수많은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실상을 구체적이고 정서적으로 표현된 글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시기였다. 어찌 보면 한국에 온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 내에서 1970년 전태일 같은 삶의 조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장 열악한 일과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면서 가장 비참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는 분들이어서 그 책이 기억에 많이 남고,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도 기억에 남는다. 공공운수노조에 보면 화물연대가 있다. 지금은 규모가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컸는데 그 화물연대가 막 태동되던 시기에 화물연대 1차 총파업 관련된 참여기를 경북에 있는 한 동지가 잘 기록 했다. 작가도 아니고 지역에서 노동 운동하는 동지였는데 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인 자유게시판에 글쓰기를 했던 거였다. 그 동지는 그걸 그냥 복사만 해서 들고 왔다. 2차 총파업에 맞춰서 내달라고. 그 책은 현장의 기록이고 무척 소중할 수 있겠다 싶었다. 2차 총파업까지 한 열흘 남았다. 인쇄 기간 빼면 7일 남는 거다. 날밤을 세워 당시 디자이너로 도와주고 있었던 권진영 씨와 책 작업을 했다. 2차 총파업하는 날 국회 앞 농성 집회에 올라온 대오들에게 책을 전달하던 때의 감격스러움이 남는다. 왜 그런 책들이 기억에 남는가 하면 내가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출판 운동에 참여하고 출판 단위를 만든 것이 어떤 문학인들의 책을 내는 것보다 그런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투쟁은 나의 허물을 벗고 싶었던 과정


《삶이 보이는 창》에서 8년 6개월 상근을 했다. 나 역시 상근비도 없는 자발적 무보수였지만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힘들게 했던 게 미안하다.(마지막 2년 동안 한해 월 40만 원, 다음해 월 60만 원씩 상근비를 처음으로 책정해 받아보긴 했다.) 독립출판사들은 초기에는 지원, 후원과 연대가 아니면 굴러갈 수가 없다. 자본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서 받쳐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 보이는 창》을 그만 둔 것은 일종의 직업병 때문이다. 《삶이 보이는 창》은 작가들이 많이 참여해서 만들기도 했다. 모토 자체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글쓰기여서 늘 글을 안 쓰거나 못 쓰는, 그렇지만 삶이 있는 사람들의 글을 받아서 싣다 보니까 늘 원고 정리하는데 품이 많이 들었다. 어느 순간 그것도 직업병인지 타인의 글을 읽고 만져서 고치고 상의하는 작업이 힘들기 시작했다. 원고를 잘 보질 못하겠더라. 이제 출판 운동은 이 정도 하고 정리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마침 《삶이 보이는 창》도 최소한의 인적 구조와 재정적 구조는 마련된 것 같고 내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답답했다. 지역과 출판 운동 그 외에 문화 운동 쪽도 관여는 했지만 늘 이차적이었다. 현장에서 싸우고 부딪히고 일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그걸 이차적으로 글쓰기를 통해서 반영하고 이런 일들이었다. 전혀 현장 연대를 안 한 건 아니지만, 그것도 매너리즘이 있어서 자꾸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면서 글을 받거나 뒷정리만 하는 것이 어느 순간 관성화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힘들게 저렇게 하는데 난 늘 사무실에서 편집 작업이나 하고 있는 거 같아 답답했다. 또 노동자 문학 운동이나, 잡지라는 마당을 지키고 쓸고 닦고 하면서 내가 원했던 어떤 활발한 노동자 문학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시대 탓이긴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면 나라도 현장을 쫓아다니면서 글쓰기 운동을 해 봐야 되지 않을까? 현장 싸움에 직접 참여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도 현장 가까이에서 현장과 함께 어울리면서 뭔가를 배워가고 역할을 찾아가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 몇 가지들이 내 안에서 신호가 와서 그때부터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 콜트-콜텍, 희망버스, 쌍차 이런 식으로 쫓아다니면서 배우는 것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송경동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서 그런 현장 쫒아 다니면서 열심히 했다는 얘기를 하고, 응원하고 격려해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경우다. 사실은 내 안에도 어느 틈엔가 배여 있는 삶의 매너리즘 또는 적당히 살아가려는 나의 허물을 벗고 싶은 노력의 과정이었다. 오히려 현장에서 힘써 싸우는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구원받고 싶은 마음에서 쫓아 다녔던 일이었다.


머리 위에 내려앉은 흰나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자해 공갈단 아니냐 한다. 수시로 병원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자해 공갈단이라면 돈을 많이 벌었어야 하는데 돈은 못 벌고 여러 사람들 걱정 끼치고 폐 끼치는 일이었다.

제일 처음 다친 현장은 대추리였다. 두 번 병원에 실려 갔다. 한번은 경찰들이 농사를 못 짓게 하려고 농토 중간 중간에 흙무덤을 팠다. 대형 굴삭기로 파놓은 4~5미터 깊이가 되는 흙무덤이었다. 논밭을 훼손시키는 거다. 농사를 지으면 쫓아내기가 어려우니까. 흙무덤 팔 때 마침 문화예술인 대책 모임인 들사람들이 있었다. 정태춘 선배와 몇 사람들이 제안해서 함께 했는데 그 흙무덤에 뛰어 들었다. 정태춘 선배, 나, 이윤엽 판화가 셋이서. 목 졸려서 죽는 줄 알았다. 플래카드를 안 뺏기려고 양쪽 끝에서 목에 감았는데 같이 뛰어든 전경 열댓 명이 플래카드 뺏으려고 당기는 통에 목이 졸린 것이다. 정신이 까마득했다. 병원에 실려 갔다. 거의 기절 상태까지 갔다. 덕분에 병원에 실려 가서 연행이 안 됐고 벌금을 안 물었다. 정태춘 선배는 300만 원인가 벌금을 맞았다.


또 한 번은 대추초등학교를 군경이 부숴 버릴 때였다. 대추초교는 투쟁과 연대의 중심지였다. 마을 문화의 핵이다. 대추초교는 대추리 주민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바닷가에서 돌을 골라내서 리어카로 운반해서 지었다는 학교다. 거점을 부수려고 1만 6천 명이나 되는 군경이 동원돼서 쳐들어 왔다.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작전명이었다. 새벽에 대추초교 지키겠다고 있다가 전경들이 던진 벽돌에 맞아서 머리가 깨져서 병원에 실려 갔다. 다음날 다시 머리에 빵꾸만 때우고 대추리 진격 투쟁하러 다시 나왔다. 거기서 내 생애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를 보았다. 병원에서  “머리 찢어진 곳에 반창고 조그맣게 하나만 붙여주세요” 하고 투쟁 현장으로 가기 위해 나왔는데 집결지인 도두리에 도착하니 나처럼 머리에 흰나비처럼 반창고 하나씩 붙이고 나온 사람들이 한참 많았다. 사람들 마음이 나랑 비슷한가 보다. 그리 머리가 깨져서도 다음날 반창고만 붙이고 다시 나온 많은 사람들만 생각하면 살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또 다쳤던 건 용산참사. 투쟁하다 다친 건 아니다. 일 끝나고 이런저런 힘든 일들이 있었는데 저녁에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목 디스크 증상이 왔다. 그 다음엔 기륭전자에서 2010년 투쟁 때 포크레인 점거 농성을 두 번 했다. 두 번째 점거 농성은 시간이 꽤 길게 갔다. 나는 보름 정도 하고 다른 동지들은 더 오래 했다. 포크레인에서 생활하다 미끄러져 떨어졌다. 발뒤꿈치 뼈가 산산조각 났다.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깁스하고 풀 때까지만 5개월이 걸렸다. 목발을 집고 다닌 것도 한참동안 이어졌다. 뼈는 굳었어도 관절염 비슷한 게 왔다. 장애 운동하는 동지들이 장애 등급을 신청하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꼭 그럴 건 아닌 것 같아서 안 했다.


그리고 또 병원 갔던 건 작년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 때 종로1가 보신각 앞에서 경찰들과 청와대 가겠다고 붙었을 때다. 어느 순간 보니까 내가 방송차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내가 꼭 올라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아무도 마이크를 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현장에서 마이크 잡는 것은 불안하다. 집회 주동자로 찍히기도 하고 현장에서 어찌될지 몰라서다. 나도 그 당시 희망버스 운동 관련해서 보석 상태이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마이크 잡고 있다가 경찰들이 연행하겠다고 하는데 마이크 잡은 사람이 뒤로 물러서고 꽁무니 뺄 수 없었다. 오늘 다시 감옥에 가야 되는 날인가보다 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봉고차 위로 뛰어 올라와서 연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갈비뼈에 금이 가 작년에 병원 생활을 잠깐 했다. 덕분에 구속을 면했다.


병원 치료비나 벌금은 대부분이 개인 부담이다. 나는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륭에서 떨어져서 다쳤을 때는 기륭공대위 동지들이 병원비까지는 해줬다. 요양처럼 몇 개월씩 가는 것은 방법이 없다. 그때그때 다쳤을 때는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이 십시일반해서 조금씩 도와주는 경우는 있었다. 그 외에는 본인이 부담하는 거다.


다칠 때마다 처가 많이 걱정하고 불편해 한다. 대부분이 내가 실수로 떨어지거나 과하게 하거나 해서 다친 것들이어서 활동을 하더라도 “좀 잘해라” 한다. 사실은 과거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이나 사회 운동 과정에서 지금도 의문사로 해서 풀리지 않는 분들도 많지 않은가. 근현대사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 해방 운동, 민족 해방 운동, 노동자 운동 과정에서 돌아가시고 다치는 분들이 숱하다. 조금씩 다치고 이런 건 아무 일도 아니다.

아들은 아내 반응보다 더 무섭다. “옳은 일 하는 것 만큼 아빠가 맨 먼저 책임져야 하는 가족에 대한 예의를 최소한이나마 갖춰봐! 밖에서 무슨 윤리적인 인간인 것처럼 집안에서 모습도 조금은 인간다워져 봐!”라고 하는데 대꾸를 할 수가 없다. 집에 가면 가부장적인 인간이고 만날 밖에서 하는 일 핑계대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기 역할과 책임을 다 못하는 놈이니까. 사실 아이의 비판과 질타가 무섭고 굉장히 아프다. 아이 얘기를 듣고 한 가지라도 행동을 바꿔보려고 하는데 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핑계로 그러질 못한다. 다정해지려고 하고 고쳐 보려고 하는데···.

지금도 운동을 배워가고 인간이 돼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들과 이미지와 다르게 보이지 않거나 작은 생활 속에서 제대로 된 인간이 돼가야 그때 가서 조금씩 사람이 돼간다는 소릴 듣는 거 아닌가?


송경동-한진.jpg

                                                                                                                                                           @정택용


조선일보의 친절한 투쟁 지침


투쟁을 하다 다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재판에 따른 벌금과 손해배상 청구다. 내 주변에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에게는 작은 건들일 수 있지만 열 몇 건씩 이런다. 나도 대추리부터 총건수로는 20건 정도 된다. 벌금액 부담은 개인 부담이 적지 않다. 조금씩 해당 투쟁 과정에서 함께 한 분들이 부담해 주고. 꼭 내가 다 책임지는 건 아니다.

희망버스 운동은 국가에서 내게 손해 배상을 걸었다. 1심에서 1천 5백만 원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고 2심에 올라가 있다. 희망버스 과정에서 다친 경찰들 손괴됐던 것들을 물어내라. 그걸 개인한테 건 거다. 재미나는 건 그때 1천 5백만 원 배상 판결나니까 조선일보 보인 태도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현대차 비정규직 때는 손해 배상 청구가 40억 원이었다. 그런데 희망버스 했던 송경동 씨에게는 1천 5백만 원이 웬 말이냐! 이렇게 해서 국가의 법질서가 잡히겠느냐!’ 하고 법원 판결을 질타했다. 조선일보는 마무리로 친절하게 앞으로 국가와 경찰만 나서서 손해 배상 청구할 것이 아니라 지자체들이 나서서 개인에게 손해 배상 청구를 해야 된다며 행동 지침까지도 알려주었다. 이 건은 아직 진행 중이다.


탄압은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


이런 손해 배상 청구를 비롯한 공권력의 행위에 약간씩 압박을 받기도 한다. 계속 스트레스 받게 하고 뭔가 마음 준비를 하게 하는 자체가 탄압이 안 되는 게 아니다. 지금처럼 집행 유예 3년 받으면 3년 안에 또 뭔 일하면 작은 일할 때도 마음 결정을 해야 한다. 이번에 들어가야 하나? 그럼 이 정도 선에서 멈춰야 되지 않나? 이런 탄압의 효과는 있는 것 같다. 되도록 이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살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런 생각은 했던 것 같다. 역사 공부를 통해서, 과거 운동 이야기를 들으면서 탄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땐가 그런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다. 탄압을 받으니까 오히려 고맙다. 조금은 열심히 살아가는가보다 싶다. 나의 문제 제기들이나 행동이 그토록 싫어하는 국가 체제에 약간의 위협은 되는가보다. 지면을 통해 국가 권력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주변에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좀 쉬면서하라고 많이 그런다. 희망버스 재판 받을 때 혹시 구속돼서 실형을 받을 수 있는 경우까지도 가니까 어머님이 전화하셨다. 완전 시골 부모님이셔서 이런저런 사회 운동에 대한 이해가 없으시니 자식이 어떻든 국가로부터 형벌을 받는다 어쩐다 하니 걱정돼서 잠도 못 주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잠시 생각해 봤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까?

노동을 하면서 배운 사회적 진실이나 사람으로서 지켜야 되는 삶의 도리가 뭘까? 라는 고민을 하는 과정들이 나에게 끊임없이 이런 일들을 하게 한 것 같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억압과 제도적이든 관습적이든 구체적인 폭력 하에 노출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노동의 가치를 착취 받으면서 살아야 되는 세상에 대해서 조금은 배워서 알게 됐는데, 그게 눈앞에 보이는데, ‘가만있으면 안 된다’라고 배웠던 게 있던 터라. 연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술가적 심성이 연민을 자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가적 심성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시민, 인간적 본성과 윤리 의식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기획력보다 중요한 건 진정성


비정규직 운동 못지않게 중요한 게 진보 정당 운동이다. 진보 정당 운동이 잘 되고 힘들을 모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직접 당적을 가진 적은 없지만 진보 정치 운동, 진보 정당 운동에 무슨 일이든 돕고 참여하려고 했다. 중간 중간에 그런 상황(입당 권유)은 있었는데 내가 준비가 부족했고 진보 정치 운동의 전략적 운동 주체로 자신을 설정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내적 준비도 부족했다. ‘당’ 운동이라면 정말 목숨 걸고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가? 그런 나름의 두려움과 자기 검열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분들처럼 열심히 헌신적으로 진보 정치 운동, 진보 정당 운동에 함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때든 준비가 되고 계기가 되면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부분으로는 어쩌다보니 대중적인 활동 공간에서 역할을 맡고 있어 특정한 정파나 당을 피해줄 것을 주변에서 요청도 했고 뿌리칠 수 없었다. 대신 대중 투쟁에 조금 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기획력이 좋다, 결합하는 곳마다 이슈가 되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 비결, 그런 건 없다.


기륭전자 같은 곳도 당시 대법에서도 지고 사주가 세 번이나 바뀌어버리고 64만 1,850원 받던 비정규직들 처지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적었다. 어쩔 수 없이 다 떠나가고 나중에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10명 남짓 남았다. 답은 안 보이고 공장도 중국으로 이전해 버렸다. 금속노조 중앙에 있다는 사람들이 얘기했던 게 “위로금이라도 받으면 열심히 한 거다. 그런다고 누가 기륭 동지들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천일 투쟁. 공대위 만들어서 하다 보니 커진 거다. 나도 가서 배웠던 사람이지 내가 무슨 역할을 해서 커진 건 아니다. 기륭 동지들이 2008년 투쟁할 때 고공농성만 네 번 했다. 서울시청 광고탑, 구로역 광장 CC카메라 탑. 공장 2층탑에 올라가서 김소연의 94일 단식으로 상징되는 집단 무기한 단식, 마지막에 망루 쌓아서 올라간 것까지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운 거다. 이런 사회적 진정성이 알려지면서 싸움이 커졌던 거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그랬던 것 같다. 굳이 그런 곳(사회적 이슈가 된)을 찾아 갔던 것은 아니다. 한진 희망버스도 김진숙이라는 탁월하고 진정성 있는 여성 노동 운동가의 목숨을 건 투쟁, 함께 지키려고 했던 한진 동지들의 노력이 사회적으로 잘 전달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연대로 엮어진 거다. 내가 전혀 결합 못해본 현장도 사회적 이슈가 되고 사회적 투쟁이 되었다. 나도 여러 현장에 가서 함께 연대하는 과정이었다. 오히려 내가 뭔가 큰일 한 것처럼 회자되는 것을 많이 경계한다.


송경동-기륭.JPG

작년 12월 매서운 한겨울 비정규직 법 제도 전면 폐기를 외치며 기륭전자 노동자들과 오체투지 기자회견을 했다.


원숭이가 되지 않는 게 계획이다


앞으로 계획은 살아왔던 대로 열심히 긴장감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원숭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과거에 무슨 일을 했다 뭘 좀 했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현재 보이지 않는 내가 드러내지 않으면서 내 안에서 얼마나 인간다운가, 하는 긴장감이 중요하다. 현재 사람이 인간적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하지, 나이 먹고 조금 고생했다고 보상심리 아니면 꼰대처럼 돼가는 것을 경계한다. 겉으로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인간이 미달되어 있는 사람은 뭘 해도 원숭이 짓이다. 인간이 됐나, 안 됐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교수다 뭐다 하고는 상관이 없다. 언제든 인간 존엄과 가치가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오히려 많이 알고 있으면서 제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가족으로서 동료나 동지로서 기본적인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내 안에서 숙화되지 않으려면 매순간 유혹에 빠지는 나에게 지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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