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연대하는 거리의 시인_송경동 시인

by 센터 posted Jun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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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희망버스’하면 떠오르는 얼굴, 송경동 시인이다. ‘송경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평택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 등 전국의 투쟁 현장을 누비는 모습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기륭전자 투쟁 당시 포클레인에서 떨어지면서 다친 그이가 목발 짚고 다니는 모습을 거리에서 본 기억이 또렷하다. 송경동은 그런 사람이다. 그런 그이가 시인임을 실감하게 될 때는 집회 현장에서 시를 낭독할 때,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시집을 접할 때다. 그이는 2011년 <꿈꾸는 자 잡혀간다>라는 산문집도 출간했다.

찻집에서 만난 그이는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보다 ‘시인’의 모습이 더 엿보였다. 수줍은 듯 살포시 웃음 짓는 얼굴이,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며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모습이 생각보다 앳돼 보였다.

이번호에는 그이가 살아온 일상의 삶을 센터 글쓰기모임 ‘쉼표하나’ 고현종 회원이 풀어놓았다. 현장 곳곳을 누비며 나누었던 치열한 투쟁 이야기는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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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에 왜 가요?”

서울에 있는 동지들에게 한진중공업(이하 한진)을 가자고 했더니 나온 반응이다. 서울에 있는 동지들 마음이 이해는 됐다. 부산까지 가는 거리도 만만치 않다. 현장은 분열되어 있다. 가족대책위, 지역대책위도 깨져있다. 김진숙은 고립되어 있다. 답이 없었다. 활동하는 사람들은 한진에 가는 것을 반대했다.

희망버스 처음 갔을 때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 김진숙 동지가 얼마나 외롭겠느냐. 외로움과 힘듦을 아는 친구들이라도 가자. 가서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오자.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김주익 열사가 죽은 곳이 아니냐. 이렇게 해서 쌍용자동차, 기륭, 콜트콜텍 등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제안을 해서 1차 희망버스가 출발했다. 출발하면서 주위에 알리기는 하자 해서 내가 이런 투쟁과 현장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수 역할을 했다.

희망버스는 큰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1차 갔다 와서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면 2차 가자. 2차 때도 손만 흔들어 주고 올 거냐, 어떻게 할 거냐?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 속에서 희망버스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으로 번져갔다.


장돌뱅이 아들


나는 전남 보성 벌교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장돌뱅이였다. 늘 읍내 장터에서 이런저런 장사를 하셨다. 기억 속에 있는 부모님은 일하는 모습만 떠오른다. 물엿장사, 소·돼지 사료판매, 고추를 빻아주거나 참기름을 짜주던 제유소, 청과물 도매 등 20여 가지 장사를 전전했다. 늘 어렵게 살았다. 나중에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는 찬모를,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를 하셨다.

나는 3남 1녀 가운데 차남이다. 형은 지금도 건설 플랜트 일을 하고 있다. 동생은 여천 석유화학단지에서 일한다. 여동생은 간호사다. 아버지는 늘 힘들게 일하면서 살았다. 힘들게 일하다 보면 인간이란 게 뭔가 다른 걸 찾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도박을 알았다. 도박으로 번 돈을 다 털어먹었다. 집안에는 욕설이 난무했고 부모님은 치고받고 싸우셨고 어린 우리들은 말릴 힘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부끄러웠다.

내 성격은 친구를 좋아하고 외향적이었다. 외향적인 성격은 내적으로 그늘이 많았던 것을 가리고 싶었던 수단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고등학교 때 늘 자학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문제아로 변해갔다.


처음으로 인정받다


‘김숙경’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다. 봄비를 주제로 시를 쓰라고 해서 썼는데 칭찬을 받았다. 칭찬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 것이라 생각했다. 남의 것을 도둑질한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나도 잘할 수 있는 게 있구나 싶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완전 문제아가 아니었다. 나중에 시를 쓰게 된 것도 당시 받았던 칭찬과 존중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이리저리 삐뚤어지고 정신없이 살면서도 늘 일기를 썼고 시를 끄적인 것도 칭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내가 문학을 하게 된 이유는 세 가지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칭찬, 초등학교부터 스무 살 쯤까지 짝사랑했던 이상형 여자 친구에게 썼던 수백 통의 편지. 또 하나는 말더듬이를 고치려고 했던 노력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강화된 문장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 이질을 앓았다. 이질에 익모초를 다려 먹으면 좋다고 했다. 어머니는 익모초를 너무 많이 먹여서 혀가 굳었다고 한다. 가장 무서웠던 수업 시간이 국어 시간이었다. 일어나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읽으면 아이들이 웃었다. 스트레스가 심했다. 말더듬이 교정원에 보내줬으면 하는 바람을 부모에게 가졌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이루지는 못했다.

말더듬이 때문에 버릇이 생겼다. 누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첫 인사는 어떻게 할지 어떤 이야기들을 할지 연습했다. 말을 잘하고 싶다는 애착과 갈망이 컸다. 애착과 갈망은 자연스럽게 책 읽기가 됐고 문장연습이 되었다. 말에 대한 상처는 아름다운 말을 써야겠다는 욕구로 분출됐다. 문학을 선택하고 끝까지 하게 된 것도 그늘지고 늘 억눌려 있어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소년원에 가다


중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칭찬 때문에 장래희망을 가졌다. 군인이 되고 싶었다. 왜냐하면 군인은 활동적이기도 하고 남성답고 나라와 국가를 지키는 명예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짝사랑하던 여자 친구와 결혼하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시집을 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여자 친구와 결혼해서 군인이 되어 시집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짝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안 되는 인생인가 보다.”

여자 친구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좌절감이 컸다. 대학입시를 봐 놓고 “나랑 비슷한 친구들은 저 친구들일 거야” 하고 문제아들과 어울렸다. 길에서 1만 6천 원과 가방을 빼앗았다. 가방 안에는 통장과 도장이 있었다. 은행에 돈 찾으러 갔다가 검거되었다. 죄명은 강도. 부모님에게 변호사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변호사 비용 50만 원 댈 돈이 집에는 없었다. 초범에 미성년자니 변호사만 사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는데 형을 살아야 했다.

결국 소년원 생활을 시작했다. 소년원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 나 같은 놈은 사랑받을 자격도 없어. 난 못난 인생인가 봐. 결격 사유가 있는 인간.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전과자가 되니 더 불가능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싶으니 그때부터는 자학을 내려놓고 나를 위로해주고 싶어졌다. 밖에서 보면 소년원 사람들이 다 문제아고 거칠어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다 연약한 친구들이다. 사정을 들여다보면 비슷했다. 개인들만의 잘못은 아니구나. 그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 의식이 싹텄다. 소년원은 배움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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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을 노래하는 사람


군인이 되려는 꿈을 버렸다. 전과자 낙인은 군대도 받아주지 않았다. 취업도 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하청, 일용 노동자가 전부였다. 일용직을 전전하기 전 우연찮게 고전 무용을 배우게 되었다. 스승은 한국 무용계에서도 상당한 지위가 있는 분이었다. 무용단에서 일 년 동안 먹고 자면서 승무, 살풀이를 배웠다. 스승은 나보고 무용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 무용의 길로 가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무용으로 새로운 길을 가려 했던 나는 스승과의 갈등으로 포기해야 했다. 예술계에서 스승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은 포기를 전제로 해야 한다.

서울에서 무용 생활을 접고 나서부터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노동자가 돼서 평범하게 살자. 목수가 되든, 뭐가 되든 사람들이 나를 평범하게만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목수 일을 처음 배웠다. 목공일은 힘들었다. 실내 인테리어를 주로 하는 내장 목공은 편한데 아파트 형틀 목공은 육체적 한계를 매번 시험했다. 새벽부터 시작해 해가 지면 끝나는 일. 이 기술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때 여천 석유화학단지에서 배관 일을 하는 형의 부름에 자리를 옮겼다. 동생도 학업을 포기하고 석유화학단지를 다녔다. 삼형제가 한 곳에서 일을 한 것이다. 현장 사람들에겐 ‘오죽 못났으면 형제들이 모두 이런 곳에서 일한다’고 손가락질 당할까봐 사촌지간이라고 속였다.

주로 여수 석유화학단지와 광양제철 2기 공사장을 떠돌며 살았다. 서산 삼성종합화학 공사장에서 일했을 때도 기억난다. 60만 평짜리 공사였다. 현장 노무자만 1만 명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의문이 들었다. 뒤처진 사람들 이야기, 소외된 사람들 이야기, 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졌다. 군인도 될 수 없었다. 여자 친구와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남아 있는 꿈은 시 쓰는 것만 남았다. 글이 삶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위대한 작가보다는 평범한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구로 노동자문학회를 만나다


서산 종합화학단지에서 일할 때 면으로 신발을 사러 나갔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철야 잔업을 하고 나서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벌어진 일이다. 보험이 없어 합의를 보는 2개월 동안 구속되었다. 합의금으로 현장에서 번 돈을 다 날렸다.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죽어라 일했는데 허망했다. 허망한 돈을 쫓아 살아야 하나? 더 나이 먹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해보자고 결심했다. 우연찮게 신문에서 한국의 고리끼 대학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진보적 문학인들이 한길사와 공동으로 한국문학예술대학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으로는 김남주, 이시영 등이 참여했다.

한국문학예술대학 입학 경쟁엔 많은 이들이 몰렸다. 대학 국문과 졸업생까지 몰려들 정도였다. 1년 정도 문학을 공부하다가 구로 노동자문학회를 알게 되었다. 사회 운동, 노동 운동을 알고 싶어서 구로 노동자문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문학예술대학 선생님들은 반대했다. 현장에 가지 말고 본격적으로 시를 써 보라고. 여기서 더 공부하라고. 그렇지만 현장에 가고 싶은 욕구를 어찌할 순 없었다.

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했지만 전선시, 투쟁시는 안 썼다. 노동자의 평범한 감정을 다룬 시를 쓰고 싶었다. 당시엔 박노해, 김남주, 백무산 시인의 시가 낯설었다. 너무 의식화된 시 같았다. 좋기도 하지만 뭔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풍부한 정서, 감정과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노동자 문학 운동의 전망


구로 노동자문학회 활동은 상근비가 없었다. 먹고 살아야 했다. 지하철 공사장에 용접공으로 취업했다. 마침 지하철 5, 6, 7호선 건설 기간이어서 사람을 많이 뽑았다. 용접 기술에 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지하철 공사 용접은 쇠랑 쇠가 붙어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되는 잡철 용접이었다. 배관 일을 하면서 했던 용접에 비해서 간단했다.

노동자문학회 사업 방향은 계급적인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여러 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현장 운동을 조직화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 또 하나의 경로는 노동자들의 삶을 알리는,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것. 그리고 현장 내 건강한 문화 소모임을 만드는 운동. 어떤 회원은 현장 운동이주된 활동이고 문학 운동이 부수적인 활동이라고 했다. 나는 그 반대였다.

노동자문학회에는 여러 흐름이 있었다.개인의 창작 욕구가 있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지키자는 동지가 일부 있었다. 개인 창작보다는 집단적 노동자들의글쓰기를 장려하는 역할을 하자는 동지도 있었다. 반면 여기서 문학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아예 현장에 들어가서 일을 하자는 세 흐름이 존재했다.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해 희망을 잃어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노동자 문예지, 문학지는 사라지고 위축된 상태였다. 박영진열사추모사업회 이인휘 선배, 김종수열사추모사업회 홍기열, 당시 서울진보청년회의 정종권 등 네 명이 모여서 매체 운동을 시작하자고 뜻을 모았다. 시, 소설, 전통 문학 장르로서는 승부가 안 난다고 판단했다. 날고 기는 문학 선배들이 다 떠난 상태. 그래서 차별성 있는 노동자 생활 문예지를 만들어야 된다고 뜻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잡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삶이 보이는 창》이다.


반려자를 만나다


‘르포 작가 박수정’이 아내다. 박수정과는 구로 노동자문학회에서 만났다. 3년 연애를 하고 내 나이 29세에 결혼했다. 구로 노동자문학회에서 함께 일하고, 집 가는 방향도 같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 가까워졌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프로포즈는 내가 먼저 한 것 같다. 나중에 확인해봐야겠다. 아내는 사람들을 잘 챙겨주고, 겸손하고,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성격이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좋은 활동가 모습의 전형이었다. 천방지축인 나를 잘 받아주겠구나 생각했다. 아내는 내가 처음 구로 노동자문학회에 왔을 때부터 좋아 보였다고 한다. 멋져 보였단다. 한눈에 반한 것이다.

활동가들이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전망이 불투명할 때. 둘째, 동지 간에 상처를 입었을 때. 의외로 동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활동을 접는 사람이 많다.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셋째, 아이가 생기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나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다행히 좋은 아내를 만나 힘들어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아내와 난 나중에 역할을 낮춰가며 하더라도 조금 더 해보자라며 몇 번이나 생활 전선으로 가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밀쳐냈다.

“밖에서 하는 일에 십분의 일만 해 봐.”

고등학교 2학년 아이가 하는 말이다. 아이는 수배 중인 나를 만나기 위해 민주노총에 몰래 왔다. 민주노총 계단에서 밥 한 끼 먹고 돌아가고, 포클레인 위에 점거농성하고 있는데 와서 나를 올려다보곤 했다. 아이가 그늘이 져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안을 챙기지 않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 컸던 것이다. 중간에 한 번 활동을 쉴 때가 있었는데 이때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가져서 그늘이 많이 옅어졌다. 어려서부터 늘 노총에 몰래 왔다. 민주노총 계단에서 밥 한 끼 먹고 돌아가고, 포클레인 위에 점거농성하고 있는데 와서 나를 올려다보곤 했다. 아이가 그늘이 져있다는 것을 알았다. 집안을 챙기지 않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 컸던 것이다. 중간에 한 번 활동을 쉴 때가 있었는데 이때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가져서 그늘이 많이 옅어졌다. 어려서부터 늘 집회 현장, 모임 현장을 함께 다녔기에 ‘아빤 저런 사람이다, 엄만 이런 사람이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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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올라갔으면


“추모시는 내가 쓴 시가 아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나를 통해 말을 하는 것 같다. 죽어간 사람이 제단에 서는 몇 사람의 입을 빌어서 하는 말이다. 죽은 사람의 삶과 동일시되려고 노력한다. 시를 쓰고 나면 아내에게 제일 먼저 검열을 받는다. 아내가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하면 주저 없이 삭제한다. 나보다 아내가 훨씬 정직하고 글을 잘 쓴다.

‘송 경거망동’은 친구들이 부르는 내 애칭이다. 문학 운동하는 사람이 사고만 치고 다니고 일만 벌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소원이 있다면 좋은 시를 많이 쓰고 싶다.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일주일 동안 시 정리를 해 봤는데 소출이 너무 없다. 내가 너무 게을리 하지 않았 나 싶다. 추모시 같은 것만 쓰다 보니 일상 공간에서, 조용한 공간에서 읽을 수 있는 시, 풍부하고 풍요로운 시, 내 세계관이 녹아있는 시를 쓰지 못했다. 두 번째 소원은 운동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훼손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소박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 거창한 걸 잃더라도 친구들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젠 고공으로 올라가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도 부산 생탁 동지들과, 거제도 대우조선 비정규직인 강병재 동지 등이 고강도 투쟁을 한다. 그 투쟁은 너무 힘들다. 몇 년간 고공만 보고 살았다. 평지에서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끝까지 함께 지켜야 하겠지만 하늘로 올라가는 투쟁은 반대다.

모두가 지치고 안 된다고, 거기 왜 가냐고 할 때 희망버스는 지치고 어려운 마음을 하나로 모으게 했다. 우리에겐 희망버스 같은 운동이 필요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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