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노동자의 길, 더 이상 꿈이 아니다_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

by 센터 posted Apr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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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굴뚝농성 97일되는 날,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을 만나기 위해 평택을 찾았다. 몇 년 전 철탑농성을 할 때, 지역 투쟁현장 이곳저곳을 돌다 잠깐 들렀던 적이 있지만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치유공간인 와락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서맹섭 지회장이 기차역 앞으로 데리러 왔다. 굴뚝에서 고공농성 중인 이창근 씨에게 점심식사를 올려주고 오는 길이란다. 200986일 동안 굴뚝농성을 경험했던 그이가 7년이 지난 지금도 세 번째 굴뚝농성을 지원하고 있는 게 쌍용차의 현실이다.쌍용차 투쟁을 생각하면 일단 가슴부터 쓸어내리게 된다. 77일 파업과 26명의 죽음, 여전히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것조차 서로에게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쌍용차 투쟁은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비정규직 문제도 혼재해 있다.


누가나에게1.JPG


섬진강이 흐르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 전라도 구례군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 누나들은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만 유일하게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시골에서 지냈죠. 시골살이가 대부분 그렇지만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다보니 공부보다는 농사일을 많이 도왔어요. 아침엔 풀 뜯어먹으라고 소 몇 마리 섬진강변에 풀어놓고 학교 가고, 저녁에 데려 오고. 초등학교, 중학교가 집에서 20~30분 거리에 있었는데 동네에 가게가 없어서 아버지 술심부름 하러 학교 근처까지 다니고 그랬죠.

중학교 때 수영을 좀 했는데 같이 했던 친구들 중에는 특기생으로 목포상고에 간 친구들도 있었어요. 친구들은 전라도 광주며 순천 쪽으로 진학해서 인문계 고등학교도 가고 상고도 갔어요. 저도 그렇게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만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구례에 있는 농고에 진학했어요. 발목 잡힌 거죠. 농고라고 농사짓는 일만 가르치는 건 아니었어요. 조경과도 있고 기계과도 있고 그랬어요. 저는 기계 조립하고 만지는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기계과를 전공했는데 조경을 담당하는 연구생이기도 했어요. 그래도 공부는 재미가 없어서 하기 싫어했고 노는 게 좋았죠. 시험 날 다가오면 몰아치기로 공부하고···. 집에서 용돈 타 써 본 적도 없어요. 시골에서는 경운기나 트랙터 모니까 동네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논밭 갈아드리고 용돈 받으니까. 그 돈 모아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친구들 중에서 처음으로 중고차도 살 정도였으니까요.


답답했던 시골을 벗어나 무작정 가게 된 구미


보통 3학년 1학기 되면 현장실습을 나가는데 전 2학년 2학기 때쯤 미리 취업을 한 것 같아요. 대게 답답하더라구요. 시골에서 막 벗어나고 싶었어요. 시골에 있으면 일만 시키니까···. 아는 선배 소개로 2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 공릉동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좀 했어요. 양말 바닥에 메이커 도장 찍어 케이스에 담는 일을 했죠.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에 월급을 20~30만 원 받았나? 아침 9시부터 저녁 7~8시까지 일했는데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용돈 벌이는 한 것 같아요. 첫 월급 받아서 부모님 내복 사드리고 저금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죠. 같이 일했던 분들 중에 이주노동자들도 있었는데 그땐 그분들이 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하는지 생각 자체를 안 했어요. 그저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열심히 일만 했죠.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같은 대기업에서 취업 추천서를 내라고 하긴 했는데 별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와선 후회되긴 해요.

그리고 3학년 때 구미로 갔어요.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취직을 해서 간 것도 아니었어요. 지도 한 장 펼쳐놓고 볼펜으로 찍어서 나온 곳이 구미였던 거죠. 무작정 운전해서 갔는데 할 일이 없더라고요. 술집 아르바이트생 구한다는 전단지 보고 일 시작했죠. 술집 웨이터부터 삐끼도 해보고 별 거 다해본 것 같아요. 처음엔 전라도에서 왔다고 하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을 드러내더라고요. 그래도 부딪히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다보니 인정도 받고 잘 지냈어요. 돈도 많이 벌었어요. 월급은 70만 원인데 팁을 장난 아니게 주니까. 그래도 전 팁 받아서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나눠드리기도 하고 시골에도 보내고, 차곡차곡 모아서 저금도 꽤 했어요.

거의 2년 정도 그렇게 생활했는데 아버지 몸도 안 좋으시고, 군대 영장도 나오면서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죠. 그런데 아버지가 바로 돌아가셨어요.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부모님만 남겨두고 객지로 나왔던 건데 2년 사이에 몸이 안 좋아지셔서 돌아가신 거라, 내 탓인가 싶어 속도 상하고 많이 힘들었죠. 그나마 제가 임종을 지켰다는 것에 위안 삼았어요.


쌍용차와의 질긴 인연 시작


강원도 화천으로 군대 갔는데 생활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사회에 나가면 뭘 해야 하나 고민했죠. 제대하는 고참들이 공무원시험을 한 번 봐보라고 충고하기에 경찰시험 준비를 했어요. 학원에서 보내주는 책 보고, 휴가 나가는 후임병들한테 교재 부탁하고 해서 공부했어요. 그리고 제대할 때쯤, 고향 친구 7명이 비정규직으로 쌍용자동차(이하 쌍용차)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연락을 했죠. 제대하고 나가면 시험도 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하니까 자리 좀 만들어 보라고. 제대하고 내려가서 며칠 있으니까 일자리 생겼다고 연락이 왔어요. 바로 보따리 싸서 올라왔죠. 거처할 곳이 없어서 친구 집에서 한 달 정도 신세지고, 첫 월급 받아서 바로 방부터 구했어요. 월급이 100만 원 정도였는데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15만 원 짜리로. 그리고 월급 받을 때마다 살림살이 하나씩 장만했죠. 그러면서 경찰시험도 두세 번 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영어가 문제였는데 영심이처럼 찍고···. 자꾸 떨어지니까 은근히 짜증도 나고 해서 포기해버렸어요.

1년 다녔나? 당시 주야간 교대 근무였는데 3~4주 계속 야간만 시키는 거예요. 일할 사람은 빠지는데 할 사람이 없다고. 그래서 대판 싸우고 나와 버렸어요. 그리고 3년 반 정도 평택 통복시장에서 식자재 납품하는 업체에 들어가 배달도 하고, 정수기 파는 영업직도 좀 했어요. 그런데 다시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고 싶더라고요. 평택 토박이인 집사람 만나서 결혼도 했고.

다시 쌍용차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연락을 했죠. 자리 있냐고. 퇴사할 때 싸우고 나오긴 했지만 제가 손재주도 있고, 기계 만질 줄도 알고, 용접도 할 줄 알고 해서 일하는 동안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다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 20039월에 다시 쌍용차 하청업체에 입사해서 지금가지 쭉 이렇게 있게 된 거죠.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다시 들어가선 무쏘문짝 만드는 차체1팀에서 일했어요. 그러다가 20042월에 로디우스신차가 나오면서 자리를 옮겼죠. 용접도 하고 문짝·후드도 달고, 사상 작업(마무리, 다듬기 과정에서 하는 그라인드 작업), 조립하는 일을 했어요. 직장과 제가 먼저 일을 배웠고, 나중에 온 정규직, 비정규직 분들에게 일을 가르쳐주기도 했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일을 같이 배웠어요.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왼쪽 문은 정규직이 달고,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이 다는 식이었죠. 용접 일은 옷에 구멍 난다고 정규직들은 안 하려고 해서 비정규직이 했어요.

2005년 노동부의 사내 하도급업체 특별 지도 점검과정에서 쌍용차 12개 하청업체 중에 3개 업체 4개 공정 44명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이 났어요. 제가 일하던 공정도 불법파견 혐의로 노동부 조사를 받으면서 3개 업체와 원청(쌍용차)이 법원에 약식기소 돼서 벌금 100만 원 씩 처벌을 받았어요.

임금은 적고 일은 힘들었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거든요. 그때 품질 향상 분임조 대회에 나가서 사내 우수상 받고 경기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전국대회에 저하고 정규직 직장, 생산 관리직 관리자 세 명 같이 출전해서 대통령상 은상을 받기도 했어요. 원래 정규직만 나가는 대회였는데 비정규직은 저 뿐이었고, 비정규직이 상 받은 유일한 사례죠. 사내 신문에도 실렸어요. 같은 상을 받았는데도 정규직은 2호봉 씩 올라가는데 나한테는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사장이 고생했다고 밥 먹으라고 봉투 하나 준 게 다였어요. 정규직들은 대회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같은 직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2호봉 씩 올랐는데. 대회 갔다 오니까 부사장이 면담하자고 해서 직장이랑 갔더니, “이렇게 하면 정직원 되지 않겠냐조금만 더 고생하자, 노력하자그랬어요. 저도 그 말만 믿었죠. 상도 받았고, 열심히만 하면 곧 정규직 되겠지 하는 자신감이 있었죠.


차별과 불공평에 맞선 비정규직 노조 설립


그런데 2006년도에 비정규직 500명을 내쫓을 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쫓겨나는 거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죠. 비정규직이 일하던 자리에 정규직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정규직 중에 활동하시는 몇 분을 만나 얘기도 듣고 하다 보니 노동조합의 필요성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당시 지엠이나 현대, 기아에는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다 있었는데 쌍용만 없었죠. 혼자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마음먹고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 몇 사람이 조심스럽게 준비를 시작했죠. 그런데 사측에 발각되는 바람에 흐지부지 무마돼버렸어요.

1,700여 명에 달했던 비정규직이 2008년이 되니 640여 명 밖에 남지 않게 됐죠. 그런데 또 구조조정에 들어갔어요. 비정규직이라고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주야간 쎄가 빠지게 뛰어도 한 달 월급이 상여금 포함해서 많아야 160~170만 원인 거예요. 5년을 일하든 10년을 일하든 월급은 거의 똑같고···. 연봉 2,500만 원 넘은 적이 딱 한 번 있었어요. 성과급 나왔을 때. 월급도 차별 받는데 일하는 것도 웃기는 게 뭐냐면, 하루 일하면 장갑 두세 켤레 씩 떨어져요. 그런데 정규직 중에 일부는 일도 안 하고 놀다 집으로 가는 거예요. 월급은 300~400만 원 이상 받아가면서. 처음엔 그런갑다 했어요. 그런데 월급명세서 보면 기본급 차이도 있지만 수당 차이도 많이 나요. 모든 게 차별이고, 모든 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 문제를 누군가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사내하청 소속 비정규직이 640명 남았는데 전환배치해서 정규직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나가지도 않았는데 실제로 들어온 거죠. 정규직들한테 우리가 다 쫓겨나면 그 다음은 정규직 니네들 차례다. 전환배치 받으면 안 된다. 막아달라하며 수없이 외쳤죠.

가만있으면 모두 잘릴 게 불을 보듯 뻔했죠. 20081022일 비정규직 지회 노동조합을 띄웠어요. 지회장은 김운산, 사무국장은 복기성, 저는 부지회장을 맡았어요. 비정규직 노동자 640명 중에 150명이 가입 할 정도로 호응이 컸어요. 그때 일부 정규직 활동가들이 많이 도와줬죠. 보고대회를 하는데 사측에서 나와 촬영을 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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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과 정규직 공동투쟁, 77일 옥쇄파업


우리가 노조를 만들지 않았으면 그때 다 쫓겨났을 거여요. 면담도 하고 시끄럽게 하니까 비정규직에게 희망퇴직을 안 받는 대신 휴업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주일 만에 엎어버렸어요. 당시 쌍용차지부 1기 집행부가 비정규직 347명에 대한 휴업을 전제로 하는 전환배치에 합의한 거예요. 그리고 집행부는 사측과 비정규직 희망퇴직을 재협의해 합의하기까지 했죠. 위로금 4개월 치를 줄 테니 나가라는 거죠. 일하는 사람들이 한 다리 건너면 친인척 관계가 많아요. 다시 부를 테니 희망퇴직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가했죠. 이때 상당수가 희망퇴직으로 나갔고, 이를 거부한 비정규직은 강제휴업자가 돼 거리로 내몰린 거죠.

다행히 쌍용차지부 2기 지도부 선거가 12월에 있었는데 한상균 현 민주노총 위원장이 당선됐어요. 새 집행부가 비정규직 보듬어 안겠다. 같이 풀어보자. 같이 싸우자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계가 많이 바뀌었죠.

근데 역부족이었나봐요. 20091월에 바로 법정관리 들어가고 하면서 정규직도 정신 없었어요. 같이 할 건 하더라도 비정규직은 따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비정규직은 노조 띄우자마자 강제휴업 조치, 폐업, 해고되고, 정규직도 20095월에 정리해고 들어와 버린 거죠.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해 함께 투쟁에 돌입하게 됐어요. 우리 노조원 19명은 정규직과 함께 옥쇄파업에도 끝까지 참여했죠. 정규직들도 이전엔 비정규직을 방패막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젠, 남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싸워나가야 할 문제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았어요. 그래도 제가 정규직과 같이 굴뚝에 올라갈 때 일부는 부담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더라고요. 나중에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때문에···.

2009513일 새벽 4시에 저와 정규직 두 명이 굴뚝에 올라갔어요. ·하청 정규직 비정규직 총고용 보장하라는 요구안을 들고 간 거죠. 비도 안 내리고 한참 더울 때였어요. 올라가면서 밖에서 못 들어오게 출입문 안에서 용접으로 막아버렸어요. 문을 잘라버리지 않는 한 들어올 수 없게 해버렸어요. 공권력이 들어오기 전에 밑에서 밧줄을 연결해서 밥을 올려줬어요. 지금은 일하는 직원들 본다고 밑에까지 줄을 못 내리게 해서 40미터쯤 계단을 걸어 올라가 밥을 올려줘야 해요.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들은 올라 갈 수가 없어요. 바람 부는 날은 꼭 바이킹을 타는 느낌이었죠.

굴뚝 넓이가 1미터 정도 되는데 쌍안경으로 보면 밑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 볼 수 있어요. 파업하는 77일은 완전 전쟁터였죠. 각 출입문을 다 막고 철조망 다 뜯기고, 수시로 경찰들이 밀고 들어오고 하는 게 다 보였죠. 그래서 공장 주변 상황을 무전기로 시시각각 알려주고 그랬어요. 비해고자인 산자와 해고자인 죽은자로 나눠져서, 10~20년간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 서로 마주보면서 새총을 쏘고 쇠파이프 들고 싸우는 모습을 보는데 굴뚝 위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힘들었어요. 화염병과 고무탄들이 난무하는···.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에요. 헬기가 굴뚝으로 최루탄을 쏟아붓는데 죽을 것 같았어요. 피부는 화상 입은 것처럼 막 벗겨지고···. 서로 죽이려드는, 너무 서글픈 일이었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선봉대 서고 같이 싸우고, 한마디로 원·하청 공동투쟁이었죠.

85일 아침 740, 하늘에서 컨테이너를 타고 경찰 특공대가 내려왔어요.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해서 무전기로, 문자로 이 사실을 알렸죠. 특공대는 조립 3,4팀 옥상에 착륙했고, 도장 공장 쪽으로 갔어요. 쌍안경으로 진압 장면을 보는데 너무 끔찍했지만,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죠. 살아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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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지키지 않은 쌍용차


86일 간 굴뚝에 있다가 86일 노사 합의를 보고 내려왔는데, 내 발로 올라갔지만 내려올 땐 내 발로 내려오기 싫어서 헬기 불러달라고 해서 타고 내려왔어요. 병원에 3개월 입원해 있었는데 내시경하니까 속이 시커매져 있었어요. 좀만 더 있었으면 위험했다고 하더라고요. 1년 동안 약물 치료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매운 걸 못 먹어요.

원래 굴뚝에서 내려온 이유도, 우리는 2009101일자로 19명에 대한 고용을 보장받았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거 믿고 내려왔던 거죠. 실질적으로 8.6합의에는 사내하청 사람들 공장안에 취업 알선하겠다고 나와 있어요. 그런데 구두상으로는 고용 보장하겠다고 했는데 회사는 발뺌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해 10월에 면접을 봤어요. 그런데 형식적이었더라고요. 공장에 넣으려고 면접을 본 게 아니었던 거죠. 굴뚝에서 내려오고 9월에 쌍용차지부 통해 공문 한 장 보냈어요. 원청에 비정규직 19명에 대한 고용 보장 약속 이행하라고요. 하지만 쌍용차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때는 내가 왜 굴뚝에서 내려왔을까 싶었어요. 정말 믿고 땅을 밟았는데, 회사가 엎어버리니까 얼마나 화가 나요.

지금은 8명의 조합원만 남았어요. 그때(200911) 곧바로 복직 요구 기자회견 하고 천막농성에 들어갔죠. 일인시위도 하고 별의별 짓 다해봤지만 쌍용차는 비정규직을 신규채용할 뿐 약속했던 복직은 이행하지 않고 있어요. 희망퇴직한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해 일을 시키고 있어요. 현재 쌍용차 안에는 비정규 노동자 전체 800여 명이 일하고 있는데 사내하청 소속 비정규직이 360여 명 정도, 분사업체 등 소속 노동자가 440여 명 정도 되요.


그래도 희망은 있다


20114, 네 명이 불법파견 소송을 시작했는데 1심 판결에서 모두 이겼어요. 지금은 항소심 진행 중에 있고요. 제가 2003년도에 입사했으니까 2005년부터 정규직이라는 판결이 난 거예요. 우리는 법원에서 정규직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해라, 체불임금 지급하고 근속 인정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불법파견 판결이 나고 나니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 중에도 관심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드러내놓고 얘기는 못 하죠. 소송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존재가 드러나니까. 그러면 사측에서 압박할 테고, 고용 불안에 시달릴 테니 쉽지 않은 일이죠. 해고를 각오하고 싸우면 밖에서 우리가 도와줄 수 있지만···. 그래서 그들과 조심스럽게 관계만 형성하고 있어요. 공장 안은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게 없어요. 성과급 차별도 심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정규직 100만 원 주면 비정규직은 95만 원까지는 줬는데 지금은 50만 원밖에 안 준대요. 같이 고생하고 같이 성과 만들었는데. 그것도 직접라인만 주고 간접라인은 주지도 않고. 우리가 다시 현장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바꿔나가야 할 문제는 산재해 있어요.


노조에서 나오는 생계비 백만 원으로 아이 넷 키우면서 살고 있는데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겁니다. 외식은 꿈도 못 꾸고 아이들 데리고 꽃구경도 한 번 못가죠. 굴뚝 올라갈 때 일곱 살이었던 큰아이가 벌써 초등학교 6학년이 됐는데 아이들 보면 세월이 흘러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나는 이 공간에서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아이들이 그때 일을 기억하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아빠는 왜 싸워야 하냐. 그래서 얘기해줬죠. “너희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아빠처럼 차별 받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동등하게 일하고 동등하게 대우받았으면 좋겠다. 너희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이죠.그런 말 하면서도 착잡하긴 해요. 남들처럼 주말에는 아이들 손잡고 공원도 가고고향에도 가고 싶은데, 이 싸움이 끝나야가능한 일이죠.

우리는 이제 비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정규직으로 돌아갈 겁니다. 파견법을위반했고, 이미 정규직이 됐어야 하는데비정규직으로 강제로 쫓겨난 거잖아요. 이미 법원에서 인정도 받았고요. 그동안고생한 아내한테도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달라고 하고 있어요. 이젠 희망이 있잖아요. 정규직으로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울 겁니다.


*쌍용차지부 비정규직지회 투쟁 후원계좌 : 농협 351-0475-6720-03 (예금주 : 서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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