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게 살고픈 '케이블 노동자'_희망연대노동조합 김영수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지부장

by 센터 posted Feb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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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번 호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꼭지는 센터 글쓰기 모임 ‘쉼표하나’ 이기범 회원님께서 인터뷰와 정리를 맡아 해 주셨다. 당분간 이 꼭지는 ‘쉼표하나’ 회원님들께서 맡아 해 주실 예정이다. 2014년의 마지막 날은 케이블방송 비정규직지부 노숙 농성 177일, 강성덕·임정균 두 노동자의 고공 농성 50일 차가 되던 날이다. 목숨을 내건 그 끈덕진 노동자들의 투쟁 끝에 회사 측과 잠정 합의안을 이끌어 내었고 비로소 광고 전광판 위 두 노동자와 얼음장 같은 보도블록 위 조합원들은 투쟁의 승리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전광판 아래에서, 보도블록 위에서 슬픔과 분노, 괴로움을 삭여 가며 투쟁을 이끌어 가야 했던 이가 있다. 희망연대노동조합 김영수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지부장. 길고 힘들었던 투쟁 과정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뚜벅뚜벅 걸어 왔던 김영수 지부장을 ‘쉼표하나’ 이기범 회원이 만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투쟁 중에 한 오십 차례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처음 언론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고공농성 등 투쟁이 길어지자 인터뷰 요청도 들어왔습니다. 어떤 언론사든 가리지 않고 인터뷰했습니다. 다 응해야 했습니다. 저희 문제를 어디든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수 언론은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았어요. 저희 뜻을 왜곡했죠. 〈조선일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왔습니다. 물론 인터뷰했던 기자의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언론사 측에서 그렇게 바꾼 것이 아닌가 싶네요.


김영수.JPG


 ‘현모양처’가 꿈, “평범하게 살자”


전 부산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고, 본적은 경남 거창입니다. 아버지는 경남 거창 분이고 어머니는 전라도 고흥이었습니다. 작은 아버지가 제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꽃부리 영(英)에 다를 수(殊). 꼭 이 이름으로 지어야 한다고 하셨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부산에서 조그만 가게에서 재단을 하셨어요. 약주를 좋아하셔서 탁주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부산에서 살면서 방학은 전라도에서 보냈어요. 장사가 잘 안됐는지 서울로 이사를 했고,초등학교 때 전학만 8번 다녔어요.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을 하셨어요. 집안이 어려웠죠. 당시 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과학자, 의사, 대통령 등의 꿈을 말할 때 전 그렇지 않았어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 꿈은 여자로 치면 현모양처(賢母良妻)였습니다. 그리고 이 꿈은 고교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몰라도 저는 가정을 잘 꾸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때 땡땡이 치고 지하철 타고 한 바퀴를 돌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기타도 치고 술도 마셨죠. 한마디로 음주가무를 좋아했죠. 아, 그렇다고 지금 말하는 일진은 아니에요. 전 남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아주 분노했어요. 어머니가 일하는 종로로 갈 때 학생들과 경찰들이 대치하는 것을 많이 봤어요. 아마 동국대였을 거예요. 최루탄 냄새는 기본이었고, 그 길은 항상 대치 상황이었어요. 버스는 많이 막혔고요. 버스 안에서 보면 언덕 위에 학생들이 있고 아래에는 경찰들이 있었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딱히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습니다. 고3 때 이모부가 운영하는 동대문 평화시장 원단 가게에서 일했습니다. 전기과를 나왔는데 차량으로 원단 배달 및 짐을 다른 거죠. 그 뒤 호프집 서빙과 바텐더, DJ 등의 일을 했죠. 종로에서 텔레마케터로 일한 적도 있어요. 무작위로 전화해서 자격증 시대라고 말하며 물류관리사 등 각종 자격증 관련 시험 서적을 팔았어요. 백화점 구두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요.


동국대 시위.jpg                                                                                                                                                                   1989년 동국대 앞 시위 모습


통신병에서 시작된 ‘케이블 인생’


306 보충대에서 훈련을 받고, 당시 꿈의 17사단으로 배치돼 통신병으로 근무했습니다. 복무 때 북에서 김일성 사망 사건이 발생해 길에서 완전무장하고 3일간 꼬박 새운 경험이 있습니다. 전 후임병을 딱 한 번 때렸어요. 그것도 제가 제대하기 전날에. 부대에 불이 났는데 이 친구가 어리바리하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 통신의 경우 제일 먼저 전기부터 차단해야 하는데 말이죠. 긴급 상황이라 욕하며 한 대 쥐어박고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제대 전에 한국통신 지역 사무소에서 일하자는 제안도 있었어요. 통신선 깔아본 기술직이 필요했었나 봐요. 하지만 전 제대 후 서울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서 거절했죠. 군대에서의 통신병 경험은 지금의 케이블 업계로 가는데 많은 영향을 줬어요.

제대하고 나니 케이블TV가 막 생겨났어요. 96년 ‘방송’사 근무로 생각하고 지역 SO에 이력서를 썼고 일하게 됐어요. 당시 케이블 사업은 방위산업체 지정도 하는 등 각종 특혜가 있었어요. 세금 감면도 있었어요.



박봉 속 고된 노동, “사람이 좋았다”


성북 북구 케이블에서 일하면서 AS를 비롯해 전봇대를 타고 설치 업무를 했어요. 제가 맡은 지역은 정릉으로 어느 정도 생활 여력이 되는 사람들이 케이블TV를 신청했죠. 한 달에 60만 원 가량 받았어요. 임금이 작다면 작았지만, 생활하는 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아직 애가 없어서 그랬을 거예요. IMF 터졌을 때 케이블TV 업계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언론에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임금 인상이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었어요. 대부분 동결이었고, 일하는 사람들 역시 뭘 요구하지는 않았고, 주는 대로 받았죠. 당시 80만 원까지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해마다 꾸준히 오른 것이 아니라 “야 좀 더 줄까”라는 식이거나 제가 나가려고 하면 잡으려고 올려주는 식이었습니다.

퇴근 시간 개념도 없었어요. 그래도 좋았던 것은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일을 나가지 않는 거였죠. 업계의 암묵적인 룰이었죠. 오토바이를 타고, 전봇대를 올라가다보니 비가 내리면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용인됐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해피콜’이 없었다는 거예요. 고객들도 기상 악화에 이 사람들이 집에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당시 고객 약속을 잡는 방식은 집집마다 방문해 일을 한 뒤 집 전화로 다음 고객의 집으로 전화해 약속 잡는 식이었어요.

업무 중 오토바이 사고가 난 적이 있었어요. 횡단보도 앞에서 한 학생이 튀어나왔고, 이를 피하려다 오토바이가 넘어졌죠. 아이는 피했지만 오토바이와 기계 장비들이 다 쓰러졌죠. 약국에 가서 소독약 달라하니, 병원부터 가라고 했어요. 다음 고객과 약속이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어요. 집 두 곳 정도 방문하고 회사로 복귀해 조퇴했죠. 주위 동료 중에는 오토바이 사고, 낙상 등으로 철심 등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제가 케이블 업계를 못 떠나는 이유 중 하는 사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도 좋았지만, 고객을 만나러 가는 것이 좋았어요. 그리고 케이블 업계가 돌고 돌아서 이쪽에서 일하다가 저쪽에서 일하게 되다보니 서로 잘 알게 되더라고요. 저 역시 강북 케이블에 있다가 북부로 가고 그런 식이었어요. 주로 AS와 설치를 했지만, 내근, 영업, 송출실 등 여러 부서에서 일했어요. 지금은 씨앤앰 하청인 북부케이블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국통신 케이블.jpg

                                                            1990년대 케이블 선을 점검하고 있는 한국통신 직원들의 모습


원청의 과도한 통제, “그만 두거나 노조 만들거나”


초기 지역 SO들이 씨앤앰으로 인수됐을 때만해도 운영 방식이 독립적이었어요. 하지만 MBK가 나타나면서 본사와 원청 개념이 더욱 확실해졌어요. 지표로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AS를 2시간 만에 진행했느냐?’, ‘고객에게 전화는 했느냐?’ 이런 게 40가지가 돼요. 예전에도 20개 정도의 지표는 있었지만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하냐? 말이 되냐?”라고 말하면 넘어가는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지표를 지켜야하는 압박감이 커졌고, 영업 강요의 강도도 높아졌습니다.

원청이 파트너 업체를 평가하게 되는 거죠. 가령 2,000개 가입자를 유치하라는 할당도 버거운데 아날로그 500개, 디지털 500개, 인터넷 300개, 인터넷 전화 200개 등으로 하라는 것이죠. 이것은 고스란히 등급으로 매겨졌고, 수신료에서 깠어요. 하청 업체는 까진 수수료로 운영해야 하니 무한 경쟁이 불가피했죠. 원청은 불가능한 건수를 줘요. 이 같은 압박이 4년 동안 진행된 거죠. 정말 피가 마르는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둘 중 하나인거죠. 그만두거나 노조를 선택하거나.

노조 결성을 위해 초동 모임 때 우리는 서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쪽은 월급 10만 원을 더 주고 있다거나 오토바이가 아닌 차량으로 일을 한다는 등 서로의 노동 조건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정규직 노조와 함께 지역별로 대표가 만났어요. 전 북부케이블의 대표성을 띄고 갔죠. 사실 그 때만해도 ‘노조 결성’보다는 다른 업체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서로가 처절한 노동 환경을 포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부당하고 불합리한 지표에 대해 어쩔 수 없다거나 합리화시키는 거였죠. 서로 그런 이야기 주고받다가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럼 한 번 해 보자”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맥을 동원하기로 했고, 당시 모인 20여 명 모두 ‘여기저기 옮겼던 사람들’로 전체 업계로 퍼지게 된 것이죠. 스스로 조직화 돼고, 2013년 노조 설립 총회 때 300명 정도가 모였어요. 그리고 2차, 3차 모임을 하면서 인원을 늘렸어요.



철저한 보안 속 노조 출범, “사측 기세 꺾어”


노조 설립 때 마음속으로 지부장을 돕는 부지부장을 하려 했어요. 그런데 지부장으로 나서겠다는 사람이 없었어요. 결국 제가 한 거죠. 민주노총 13층에서 지부장으로 선출되고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가서 부인을 깨웠죠. 노조를 하게 돼 3개월 정도 집에 못 들어올 수도 있다고 말하니 부인이 “원해서 하는 거냐”, “집에 월급을 가져오는 것은 지장이 없느냐”라고 묻고 승인을 했습니다.

노조 설립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비밀유지였습니다. ‘걸리면 죽는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노동조합 하는 것이 나쁜 일도아닌데 말입니다. 가입 원서 300장이 모일 때까지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어요.300명이 될 때까지 회사는 몰랐지요. 그리고 첫 선전전에 회사가 알게 됐죠. 동시다발로 각자 회사 앞에서 선전전을 했습니다. 무서웠죠. 300명이 뭉쳐서 선전전을한 것도 아니고, 각자 쪼개져 각 사업장에서 하니 숫자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지역시민사회단체에서 함께 해줘서 힘을 내서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원청을 비롯해 전 회사가 멘붕 상태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노동조합 인원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일부는 노조 규모를 축소해 원청에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013년 투쟁은 노조 기세가 이미 사 측을 꺾은것이었습니다. 그 기세로 타결을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당시 원청 실무자와 만났을 때 회사는 타결을 목적으로 잡고 왔었고, 저희는 싸움의 자세였죠.

원청의 경우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파트너사는 달랐습니다. 첫 타결의 경우 원청에 힘에 눌려 하게 된 것으로 아직 생활 속에서 노조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안착화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서로 간 저항감이 극하게 남아있던 때였지만, 조합원이 더 늘어난 시기였고, 2~300명이 늘었어요. 타결이 되고 비용 및 노동 조건이 개선되니 그동안 관망했던 직원들이 대거 가입을 하게 된 것이죠. 그 때 노조는 55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기자회견.jpg

작년 11월 25일 진짜사장나와라운동본부는 MBK 김병주 회장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긴 파업 투쟁, ‘메말라야 한다’ 다짐


첫 투쟁의 승리로 2014년 투쟁은 길게는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조합원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저 역시 그랬습니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6월 말, 7월에 걸쳐 해고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여유는 있었습니다.

지난해 투쟁에서 노조가 반노조적인 업체 사장들을 교체하는 성과를 얻었기에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조합원들의 눈빛을 보면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조합원들의 눈빛에서 ‘나 집에 큰일 났어’, ‘생계가 어려워’라고 말하는 게 보였습니다. 제가 1억 원이 있어 줄 수도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조합원의 눈빛을 무덤덤하게 넘겼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버틸 수 없을 거라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 안 본 걸로 지웠습니다. 9월이 넘어서면서 조합원들의 힘든 시기를 느끼게 됐습니다. 슬프고 아픈 이야기들이 반복됐어요. 그때 ‘메말라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사람에 대한 메마름이 아닌 투쟁 시간에 대한 메마름 말입니다. 조합원들은 스스로 투쟁 규율을 이어갔습니다. 우리 얘기 하려고 모였으니 이왕 하는 거 힘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리니 이것도 힘들더라고요. ‘그걸 해서 이게 해결돼?’라는 시기가 오더라고요.


이런 시점에 임정균, 강성덕 동지가 고공 농성을 한 것입니다. 두 분이 올라갔던 날 마음이 흔들렸어요. ‘정말 추운데 어떡해’라며 걱정하다가 안에 공간이 있다는 소리에 ‘다행이다’, ‘안되면 내려오면 돼’, ‘경찰이 끌고 내려오면 내려오는 거잖아’ 등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광고탑 위에서 “올라오면 죽어 버린다!”라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정신이 확 들었어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긴 고공농성 끝에 투쟁에 이기고 두 분이 내려왔을 때 사실 혼자 많이 울었어요. 정말 어떻게 보면 그 두 명이 아니면 이번 싸움이 어떻게 될지 몰랐거든요. 더 길어질 수도 아니 패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고생했다’ 담담한 격려 ···  “본인이 선택한 삶을”


2014년 마지막 날 드디어 타결이 됐습니다. 두 사람의 과감한 결단과 단결의 힘이 투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이기고 집에 갔을 때 부인과 아이들은 담담했습니다. ‘고생했다’라는 정도의 분위기였습니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노조 활동에 반감은 없지만 그렇다고 막 응원을 하지는 않더군요. 전 아이들이 본인이 선택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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