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일본 노동, 모르는 일본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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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연재를 마치는 마당에, 연재 제목이 왜 ‘우리가 아는 일본, 모르는 일본 노동’으로 정해졌는지 필자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미디어 등을 통해 비교적 손쉽게 일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에 반해, 일본의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염두에 둔 편집위원회의 깊은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조금만 공들여 찾아보면 일본의 노동 문제에 대한 자세하고 심도 있는 정보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필자만 하더라도 일본의 노동 문제에 전문적 식견을 지닌 한국과 일본 연구자 및 활동가 동료들이 많이 있다. 오히려 비전문가라 할 수 있는 필자가 연재를 맡게 된 까닭은 노동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 사회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노동자들의 생활이, 그리고 생명과 건강을 위협받아 온 현실에 초점을 맞춰 보았던 것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일본 사회에 대해 경제대국, 노사 관계 3종의 신기(종신고용, 연공임금, 기업별 노조) 같은 막연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경제는 장기불황에 돌입했고 노동 빈곤층과 비정규 노동자들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던 중 2008~2009년 금융위기 당시 대규모로 해고된 파견 노동자들이 도쿄 한복판에 모여 노숙을 하고, 또 PC방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국내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사정이 악화된 것은 비정규 노동자들만이 아니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지키려면 더욱더 일에 매달려야 했고, 과로사 문제가 다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제 비정규 고용과 과로사 위험군의 결합이 일본의 고용 및 노동의 표준모델이 되었다. 공공 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요 공공기관들은 이미 민영화되었고 고용 유연화가 뒤따랐다. 지자체 등에서도 ‘비정규 공무원’과 민간위탁이 크게 늘었다. 청년층 고용 악화도 심각해졌다. 이미 노동력 고령화가 한계에 이르러 일본 청년들은 취업 걱정을 안 하게 되었다는데 이상하게도 고용 불안과 저임금 문제를 호소하는 청년층의 목소리는 나날이 커져 갔고 ‘블랙 기업’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2000년대 들어 큰 폭으로 대학 등록금이 상승하면서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해 청년들이 부채를 짊어진 채 사회에 진출하게 된 상황도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정치권에서 나타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민주당이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지만,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의 현 외 이전 포기 등 실망스러운 모습들만 보여주던 차에 급기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 심지어 정권 말기의 노다 내각은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물론 민주당 자체가 줄곧 원전 추진 세력이었기에 예상 가능했던 일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대규모 재난은 국가의 무능을 드러냈고, 이를 계기로 일본 사회는 급격한 우경화를 맞이하였다.


이듬해 아베 신조가 재집권하면서 강력한 언론 및 시민사회 통제와 더불어 군사 대국화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다만 흥미롭게도 아베 정권이 내세운 노동개혁안은 상당히 개혁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이미 ‘어용’ 수준에 이른 주류 노동조합을 헌법 개정과 군사 대국화에 동원하기 위한 ‘떡밥’에 불과하였음이 드러났다. 동시에 비정규직, 청년,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보육 서비스 대란이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보육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존 주류 노조들은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포괄하지 못하였고, 2000년대 이후 새롭게 시도되어 온 개인 가맹 방식의 지역일반노조들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노동 현실은 정치적 우경화와 더불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일본에 짙게 드리워진 검은 안개의 정체는 따로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수많은 노동자와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원전을 재가동하고 방사능 관련 문제들을 은폐하기에 바빴다. 원전 사고 얼마 뒤인 2011년 어느 날, 참의원 의원인 야마모토 타로는 원전 및 제염 노동자들의 방사능 노출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천황에게 직접 서한을 전달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천황에게 직소하는 것은 매우 불경한 행위이다. 결국 그 역시 황궁 행사에 출입 금지 조치를 당했다. 당시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이 백여 년 전 인물인 다나카 쇼조를 떠올렸다. 그는 19세기 말 광독 사건으로 수많은 지역 주민이 사망했던 아시오 구리광산에서 ‘생명과 건강’에 대한 산업자본과 국가의 책임을 물으며 주민들과 끝까지 함께 싸웠던 인물이었다. 얄궂게도 그가 사망한 1913년, 아시오 광산에서는 일본 최초로 관 주도, 기업 주도 안전보건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바로 여기서 처음으로 ‘안전제일’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계기로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 각국으로 팽창해 나아가던 시기였다.


제국주의 시기 내내 아시오 광독 사건이 일본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면, 전쟁과 패전 이후 고도 성장을 향해 발돋움하던 시기,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규슈에 위치한 미나마타의 칫소 공장에서 배출하던 폐수로 인해 수많은 지역 주민이 유기수은에 중독된 사건이었다. 안타깝게도 초기에 칫소 노동조합은 지역 주민들의 피해를 외면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미이케 탄광에서 대규모 탄진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 수준의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노동조합은 패배하고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나마타병과 미이케 탄광 사건은 일본 내에서 본격적인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이 설립한 노동자안전센터는 1980년대 후반 노동조합 운동이 분열되면서 분화되기는 하지만, 상당 기간 동안 밀도 있게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


일본의 노동 현실과 노동 운동 역사를 되짚어 보면, 장기불황에 접어들며 노동 빈곤과 비정규 노동 문제가 심화되기 이전부터 노동자들이 물건 취급을 받으며 생명과 안전을 위협받아 왔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특히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은폐되고 외면받아온 그 모든 사건을 지금 여기로 불러낸다. 무엇보다 방사능의 위험이 현실화되면서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 아니, 실제로 방사능만큼은 아닐지라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석면, 비산, 유해화학물질 누출 등이 심각한 수준으로 일어났다.


비가시적인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지금껏 일어났던 사건들이 재조명되었고, 미나마타병은 물론 아시오 광독마저도 여전히 온전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간사이 지역 인쇄 노동자들의 담관암 발생, 미쯔보시 화학공장 노동자들의 방광암 발생 등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직업성 암에 대한 산재 인정 투쟁도 일어났다. 노동 빈곤과 비정규 노동 확산 등 노동권을 약화시켜온 조건들이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협을 더욱 강화한다는 인식도 확산되었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이들의 목소리와 운동이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일본, 일본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 단초 역시 일본 내에서 주변화되어 있지만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목소리로부터 얻어보고자 한다.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은 저서 《유신의 그늘》에서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일본 사회의 핵심 규정 요소로서 메이지 유신을 통해 형성된 국가주의를 들고 있다. 그는 일본 국가주의를 ‘화혼양재 이데올로기’로 설명하는데, 그것이 단순히 서구 발전모델의 채택이 아니라  ‘정신과 기술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기술로부터 역사적 사회문화적 맥락을 제거하고, 그에 대한 의미 부여는 전적으로 국가, 즉 천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뒷받침한 것이 엘리트 기술관료 집단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지난 150여 년 동안 팽창, 침략, 전쟁, 수탈, 동원, 패전, 고도 성장, 장기불황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겪어오면서도 기술관료의 지배는 일관되게 계속되었고, 그러한 체제 하에서 주변적 집단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철저히 억압받아 왔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보더라도 국가주의 성향이 강한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가운데에서도 일상생활 수준에서 일본 사회는 개인주의적이고 사생활을 철저히 존중하지만, 집단 내에서 다른 의견을 피력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단적으로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앞에서 멈춰 선다. ‘재일’로서 살아온 그가 일본 내에 뿌리 깊은 신분적 차별뿐만 아니라, 하시마 탄광, 아시오 광산, 미이케 탄광, 미나마타, 후쿠시마에 발을 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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