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성 암과 ‘규제의 정치’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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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지난 4월 19일부로 시행된 고용노동부의 개정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1,2-디클로로프로판(이하 디클로로프로판)을 산업안전보건법상 관리대상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해당 물질을 노동자에게 중대한 건강장해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특별관리물질’로 지정하고 유해성 고지 및 취급일지 작성 등 추가조치를 하도록 한 것이다. 국내에서 2014년까지는 해당 유해물질 중 하나였던 디클로로프로판 사용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디클로로프로판이라는 물질이 뒤늦게나마 규제 대상이 된 배경은 무엇이며, 어째서 2014년에 이르러서야 규제가 추진되기 시작했을까?


일본에서 작업장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직업성 암 문제는 최근 10여 년간 중요한 이슈로 자리 잡아 왔다. 그중에서도 후쿠이현의 중소기업인 미쯔보시화학 공장에서 발생한 방광암 집단 발병을 둘러싸고 노동안전보건단체와 노동자들이 벌여온 산재 인정 투쟁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미쯔보시화학 노동자들의 투쟁은 무엇보다 일본에서 드물게 노동조합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노동조합이 꾸준히 안전보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며 지역 내 노동안전보건 전문가 및 전문단체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다는 사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하나가 간사이노동안전센터(이하 간사이센터)이다. 간사이센터는 인쇄 노동자 담관암 산재 인정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단체이다. 


산요CYP라는 인쇄업체 노동자들이 담관암 집단 발병을 계기로 2012년 간사이센터에 모이면서 산재 인정 투쟁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사망자 9명을 포함한 17명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인쇄업종 노동자들의 담관암 문제는 전국적 이슈가 되어 곳곳에서 산재 신청이 이어졌다.산요CYP 인쇄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 투쟁의 시작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생으로 1994년부터 10여 년간 산요CYP에 재직했던 G씨가 2009년 담관암 발병으로 투병 끝에 숨졌다. 물론 G씨 이전에도 같은 사업장에서 일했던 8명의 노동자가 담관암을 앓았지만, 유족에 의해 산재 신청이 이루어진 것은 G씨 사례가 처음이었다. G씨 유족들은 지역 내 일반노조인 교토유니온에 산재 관련 문의를 하였고, 교토유니온은 이들을 간사이센터에 연결해주었다. 이듬해 간사이센터는 G씨의 산재 신청을 하였으나, 오사카 노동행정당국은 시효 만료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간사이센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산요CYP의 전현직 노동자들, 그리고 지역 내 노동안전보건 전문가와의 협력을 통해 ‘환자 찾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작업장 내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담관암 문제를 널리 알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이가 지역 내 의대 교수였던 쿠마가이 신지였다. 쿠마가이 교수는 이미 수년 전 간사이 지역 내(효고현 아마가사키 시)에서 발생한 ‘쿠보타 쇼크’ 사건에도 긴밀히 관여한 바 있었다. 이윽고 이듬해인 2012년, 간사이센터 등은 G씨를 포함한 3명에 대해 다시 산재 신청을 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측인 산요CYP는 면담과 사실증명 등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산재 재신청을 계기로 산요CYP 전현직 노동자들 가운데에서는 물론, 타 지역 인쇄업종 노동자들로부터도 담관암 산재 신청이 이어졌다. 인쇄 노동자들의 담관암 문제는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고 정부의 담당 중앙부처인 후생노동성 또한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후생노동성은 인쇄업종의 전국 561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일제 점검을 실시하였고, 산재 신청 사안에 대해서도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병 원인이 디클로로메탄과 디클로로프로판으로 다시금 확인되었다. 반면, 사측은 책임 회피와 사실 부정으로 일관하였고, 개별적인 대응에 한계를 느낀 당사자들은 담관암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였다. 결국 2013년 산요CYP의 총17명에 대해 산재 인정이 결정되었고, 사측에 대한 압수수색도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사측과 피해자 모임과의 공식 협의도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 전국의 인쇄업종 담관암 산재 신청에 대한 결정이 이어졌고, 산업위생학회 등을 중심으로 세정제 성분 물질들의 발암성을 둘러싼 논의가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안전위생법 개정으로 화학물질위험평가가 의무화되었다.


이상의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위험 기준 등을 둘러싼 ‘규제의 정치’라 할 수 있다. 노동안전보건 및 환경 문제와 관련된 위험요인 기준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시공간적 지평을 갖는다. 각종 기준들은 시기에 따라 새로운 사실 발견이나 환경 변화에 의해 달라지기 마련이며, 공간적으로도 정치 환경, 제도 환경 등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규제 수준을 갖기 마련이다. 특히 노동안전보건과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이 노동안전보건 담당자를 두고 외부 전문가 및 전문단체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산요CYP 사건에서 핵심적인 유해요인이었던 두 물질은 국제암연구소에서 2014년 6월부로 발암물질로 지정되었다. 디클로로프로판은 확실한 인체발암물질로(그룹 3에서 그룹 1로 변경), 디클로로메탄은 동물 실험에서 확실한 발암이 확인되었으나 인체 발암은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진 물질(그룹 2B에서 그룹 2A로 변경)로 분류가 변경되며 발암물질로 규정된 것이다. 기존 분류는 1999년의 화학물질평가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이는 일본 측에서 국제암연구소의 2014년 화학물질평가회의에 쿠마가이 교수와 후생노동성 관계자 등 5인이 참가하면서 이루어진 변화였다. 쿠마가이 교수는 평가회의 전후로 국제 학회 등에 참석하여 일본 인쇄 노동자들의 담관암 발병 사례를 보고하였고, 이 과정에서 유럽 인쇄 노동자들의 유사 사례를 접하고 토론할 수 있었다.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2014년 국제암연구소 발암물질 지정 이후로도 해당 물질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같은 해 일본산업위생학회는 디클로로프로판의 경우 그간 허용 농도조차 정해진 바 없었음을 지적하면서, 산하 위원회에서의 논의를 거쳐 8시간 평균 허용 농도로 1ppm을 제안하였다. 나아가 2016년 도쿄의대부속병원은 디클로로프로판 노출이 담관암 발병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의 일부를 밝혀냈다. 간에서 생성된 반응성 대사물이 담즙으로 배설되면서 담관에서의 발암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기준 적용 역시 정치적인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미쯔보시 화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산요CYP 사건 역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특정 물질이 법적 규제 대상이 아니더라도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면, 사업주에게는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이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산요CYP의 경우에도 담관암 발병이 문제로 떠오르기 이전부터 현장 노동자들은 매캐한 냄새로 인한 불쾌감과 구토감 등을 호소하고 있었다. 특히 디클로로프로판 같은 경우는 발암성에 대한 정보도 없었지만, 허용 농도 등 위험 정보가 매우 부족했다. ‘위험 정보가 없는 것은 위험하다고 간주한다’는 원칙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산요CYP가 사용하고 있던 세정제 가운데 디클로로프로판을 주성분으로 하는 제품의 물질안전보건자료에는 미국 산업위생전문가협의회의 권장 허용 농도를 비롯하여 독성 정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측은 이를 무시하였고, 유기용제중독예방규칙 등 일본 국내 관련 법제도의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만 주목하여 이를 안전상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후생노동성은 사건 발생 이후 뒤늦게야 고시를 통해 물질안전보건자료를 교부받을 수 없는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국내외 사용실적이 적고 연구도 불충분하여 유해 위험성 정보가 부족해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부득이하게 사용할 경우에는 위험성이 큰 물질로 간주하고 안전 교육, 작업 기록, 보호 장비 마련 등 조치를 취해 노동자에게 노출을 방지하는 규칙을 마련하였다.


위험 기준 설정과 적용 문제는 정치적·제도적 환경 차이에 따라서도 상이하게 나타난다. 2012년 일본의 담관암 사건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총과 노동안전보건단체 등이 자체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 국내 인쇄업 및 제화업에서 사용되는 산업용 세정제의 경우 디클로로메탄과 디클로로프로판은 사용되지 않지만, 그보다도 독성이 강한 벤젠, 톨루엔, 노말헥산 등이 사용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일본의 경우 이들 물질의 독성 때문에 사용을 중지하고 디클로로메탄과 디클로로프로판 성분의 세정제로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2013년 일본 인쇄 노동자들에 대한 산재 인정이 이루어진 직후인 7월 초 담관암 피해자 모임과 노동안전센터 등이 방한하여 한일공동심포지엄을 열어 양국의 사례들을 공유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노동조합과 안전보건단체들은 정부에 조사 및 대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14년 국제암연구소의 발암물질 지정으로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이후로도 벤젠, 톨루엔 등 사용 규제는 물론 디클로로메탄과 디클로로프로판 사용 현황 추적조사, 취급 사업장 공개, 피해자 찾기 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인쇄업종이나 제화업종뿐만 아니라 2015년에는 한수원과 발전 5사가 발전 설비 계획 예방 정비 시 디클로로메탄 및 디클로로프로판이 함유된 세척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2018년 1월에 공개된 안전보건공단의 ‘2017년 사전예방적 역학조사’ 결과에서 디클로로프로판이 총 61개 실태조사 대상 사업장(제조업) 중 30퍼센트(18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올해 4월에 이르러서야 디클로로프로판에 대해 초보적이나마 규제가 도입된 것이 우리 현실이다.


끝으로 산요CYP를 비롯한 일본 인쇄 노동자들의 담관암 발생 사건은 산업재해에 대한 사업주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측면에서도 몇 가지 시사점을 남겨주었다. 산재 인정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 가운데 오사카노동기준감독서는 산요CYP가 지난 10년간 노동안전위생법상 의무조항인 안전보건관리자 배치 의무를 어겼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장 등을 검찰에 불구속 송치하였다. 그러나 사측에는 결국 약 50만 엔의 벌금이 부과되는 데에 머물렀다. 검찰 측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적용도 검토했지만, 사측이 담관암 발병을 예측할 수 있었는지 입증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결국 해당 혐의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았다. 이는 한 사업장에서, 그것도 70여 명 규모의 사업장에서 전·현직 노동자 17명이 집단 발병하고, 그 가운데 9명이 사망한 커다란 사건임에도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너무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는 법제도상의 문제를 드러냄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산요CYP 사건이 일단락된 직후 불거진 미쯔보시화학 방광암 사건에서도 사업주에 대한 불충분한 처벌이라는 문제는 그대로 반복되었다.


동시에 산요CYP 사건은 노동안전보건 이슈를 제대로 제기하고 해결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외부 전문단체나 피해 당사자 조직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이 함께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산요CYP 사건이 단순한 산재 사건을 넘어 직업성 암에 관한 사회적 문제제기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개별적 해결이 아닌 피해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 조직적으로 해결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미쯔보시화학 노동자들의 직업성 암 산재 인정 투쟁에 노동조합이 긴밀하게 함께하게 된 데에는 산요CYP 사건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산요CYP 사건과 미쯔보시화학 사건 모두 중소기업으로, 각종 책임을 인정함에 따른 비용을 감당하기 쉽지 않아 사건이 불거진 초기부터 전면적으로 책임을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태도는 ‘일본적 노사관계’를 통한 ‘원만한’ 문제해결을 어렵게 했고, 해당 사안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달리 말하면, 일본에서 유해화학물질을 일상적으로 다루는 화학업종을 비롯한 다수의 제조업 분야 대기업들은 상시적으로 하청관계 등을 통해 위험을 외부화하고 있으며, 직업성 암을 비롯한 직업병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노동조합의 암묵적 동의하에 금전적 보상 등을 활용하여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중소기업의 경우 그 영세성으로 인해 노동조합을 통한 집합적 대응과 사회적 문제제기 없이 해결에 이르는데 어려움이 따른다면,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노동조합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하고 사측에 의존적이라면 오히려 ‘담합’을 통해 은폐의 공범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산재 인정 과정 및 보상과 관련된 제도적 문제점도 드러났다. 산요CYP의 최초 산재인정 신청자인 G씨의 경우 최초 신청 시 산재보험 청구권 시효 소멸에 따라 신청이 반려된 바 있다. 문제는 결국 G씨를 비롯한 인쇄 노동자들의 담관암 산재 인정이 특수한 사례로서 구제절차를 통해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구제절차 전례도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진행되었지만, 직업성 암과 같이 노출로부터 발병까지의 잠복기가 긴 경우에 시효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대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유사한 사례로 쿠보타 쇼크 이후 석면 관련 질환을 둘러싸고 발생한 시효 문제에 대해서 특별법 제정을 통해 대응이 이루어진 바 있지만, 결국 산재보험법 자체 개정을 통해 노동자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시효 문제가 다수의 산재 신청 및 인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산요CYP 사건만 하더라도 만일 시효소멸에 따른 신청 반려 이후 커다란 사회적 주목을 받지 않았더라면, G씨의 재신청과 다른 피해자들의 산재 신청이 불가능하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본 노동안전보건 단체들의 상담사례에서는 크고 작은 산재 신청 사례들에서 여전히 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문전박대’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12월 산업안전법 개정에 따라 물질안전보건자료, 즉 사업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물질에 대한 유해성 정보를 고용노동부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과 더불어, 영업비밀로 인해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제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 사전 심사를 받도록 규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올해 4월에는 산업안전보건규칙 또한 개정을 통해 유해화학물질 관련 내용이 추가되었다. 모두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는 변화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위험의 ‘기준들’이 현재 어떠한지, 그러한 기준들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어떠한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어떠한 역관계가 작동하고 있는지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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