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노동 안전 보건 운동과 ‘노동자안전센터’의 발자취

by 센터 posted Jul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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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전후 노동조합 재편과 노동자안전센터 설립

1960년대는 일본에서 학생 운동과 더불어 노동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전후 1950년을 전후로 재편된 노동조합 운동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춘투’가 관행으로 자리 잡았고, 노동조합들은 임금 인상과 생활 보장을 쟁취해 갔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이 공해나 직업병 등의 문제에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활동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 1950~60년대에 걸쳐 규슈 지역에서 발생한 두 개의 사건, 즉 미나마타병과 미이케 탄광 탄진 폭발 사고였다. 특히 후자의 사건은 당시 일본 노동조합 운동의 중심이었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이하 총평)가 ‘안정 임금 투쟁’ 등을 벌이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던 미쯔비시 미이케 탄광에서 발생한 초대형 사고였기에 더욱 큰 충격을 가져왔다.

총평은 미이케 탄광 사고에 대응해 나아가면서 안전 보건 문제에 관해 독자적인 산하기구 설치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64~65년 2년여 동안 내부 논의와 준비를 거쳐 1966년 ‘일본노동자안전센터’가 설립되었다. 노동자안전센터는 노동 재해 보상 등과 관련된 의료계 및 법조계 전문가들과 현장 노동자들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출범과 더불어 전국적 정보 공유를 위해 기관지인 월간 《생명》 역시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출범 당시 노동자안전센터의 슬로건은 ‘저항 없이 안전 없다’였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미나마타병과 미이케 탄광 사고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의 세 가지 원칙이 제시되었다. 첫째, 노동 재해 및 직업병 관련 활동가 양성, 둘째,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활동, 셋째, 공해 투쟁, 즉 주민 운동 및 시민운동과의 결합이 그것이다.

총평 주도의 노동 안전 보건 운동 체계 확립

설립 이후 노동자안전센터는 1970년대 중반까지 노동 재해·직업병 상담 및 보상 관련 활동을 중심으로 활동 범위를 확장하고 체계를 확립해 갔다. 한편 1970년대 후반부터는 총평 및 중립노련 산하 산별노조들(단산)이 본격적으로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며 연대 활동을 벌였는데, 그 배경에는 센터 설립 당시 목표들과 관련한 중요한 진전들이 있었다. 먼저 1960년대 후반에 학생 운동에 투신했던 이들 사이에서 진보적 의사(산업의), 법률가, 그리고 노동조합 운동 활동가들이 다수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운동노선에 따라, 또는 지역에 따라 각기 독립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학생 운동 시절부터 형성된 네트워크를 통해 전문가들과 현장 간의 유기적인 협력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전문가 및 활동가들의 확충을 배경으로 하여, 설립 초기에 부진했던 지역센터 건설 역시 진전이 이루어졌다. 다만, 노동자안전센터 주도로 계획적으로 설립되었다기보다는 노동자안전센터를 모델로 하여 일본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맥락을 지닌 지역 수준의 안전 보건 운동단체 및 센터들이 본격적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노동 운동 위기와 안전 보건 운동 침체

1970년대 말 전 세계적인 불황 여파로 일본 노동조합 운동은 춘투에 연이어 실패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총평, 중립노련 외에 사회당계와 공산당계 등 노동조합 운동 내 다양한 세력들은 1980년대 초반 노선 투쟁을 벌이며 재편기에 접어들었다. 이처럼 1980년대 초중반은 전반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후퇴하고 조직 간 합종연횡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특히 노동조합 운동의 후퇴 배경에는 ‘ME혁명’에 따른 정보화 및 자동화로 대표되는 급격한 기술 변화가 있었다. 이는 급격한 ‘산업 합리화’, 즉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는데, 그 결과로서 일본의 노동 현장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세계적으로 주목 받으며 확산된 ‘일본적 생산 방식’이었다. 노동조합 운동 후퇴에 따라 노동 안전 보건 운동에서 노동조합의 주도적 역할 또한 상대적으로 약화되자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 조직을 건설하고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의 성과로서 확대된 다양한 영역 및 질환별로 단체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연합체 결성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1986년 1월 노동 재해·직업병피해자대책전국연락회의 출범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결국 1989년에 이르러 공산당계 및 사회당 좌파 등을 제외한 대다수가 렌고(연합)로 합류하면서 총평은 해산하게 되었다.

노동자안전센터 재편과 안전센터 출범

총평이 해산하면서 일본노동자안전센터 역시 해산했는데, 센터 재편에 앞서, 먼저 센터와 관계를 맺고 있던 폭넓은 전문가 집단이 1991년 전국노동재해·직업병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이때부터 매년 전국노동안전보건학교를 개최하였다. 한편, 총평과 일본노동자안전센터 해산 이후에도 각 지역에 남겨진 센터들이 있었는데, 각기 다른 설립 배경을 지니고 있었고, 기존의 노동자안전센터와 수직적 관계는 아니었으나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던 지역센터들이 있었다. 1991년에는 지역센터들의 네트워크로서 노동안전전국센터(안전센터)가 설립되어 일본공산당 계열을 제외한 구 총평 계열 노동조합들과 폭넓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안전센터는 상담 활동을 통해 노동 재해 인정을 받는 활동을 중심에 두는 한편, 석면 관련 활동에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석면 문제는 환자와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새롭게 출범한 안전센터의 핵심 활동가들은 1987년 총평 주도로 조직된 석면대책연락회의의 주요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건강센터 설립과 노동조합-정당-안전보건운동단체 관계

새롭게 출범한 안전센터가 구 총평 및 중립노련의 진보적 노동조합들과 연계를 구축한 반면, 일본공산당 계열 노동조합 및 안전보건 활동가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벌여오다가 각 지역단체 및 센터들을 규합하여 1999년 노동건강전국센터(건강센터)를 설립하였다. 건강센터의 강점은 의료부문 노동 운동 및 의학 전문가 집단과의 긴밀한 연계였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의료기관 연합조직인 ‘민의련’은 물론, 공산당계인 전노련 산하 의료부문 산별노조인 의노련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방식은 안전 보건 운동의 초점을 ‘보상’에서 ‘예방’으로 옮기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특정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캠페인 등 사회운동적 활동에 있어서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안전센터 역시 1980년대 초반에 설립된 비 공산당 계열 의료기관 연합체인 ‘노주의련’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지니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반면 안전센터의 경우 지역별로 차이는 있으나 도쿄의 예를 들면, 분석실을 갖추고 작업환경측정사들이 활동하거나 정부(후생노동성) 측과의 정례협의 등을 통한 행정체계에 개입을 강화하는 방식 등을 통해 차별화를 꾀했다. 그럼에도 진보적 의료기관 연합체와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안전보건단체가 세 축이 되어 안전 보건 활동을 벌이는 방식은 일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진보적 의료기관들이 병원 또는 재단 차원에서 조직을 형성하며 운동을 벌이게 된 배경에는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 전쟁에 전문지식을 통해 협력했던 과거에 대한 성찰이 일본 의학계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운동은 계속된다

총평 시기까지 노동조합이 산하에 센터를 두고 주도했던 일본의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은 노동조합 운동의 전반적인 후퇴 및 재편을 계기로 전문가 및 안전 보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안전보건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안전 보건의 영역 확장에 따라 이슈 또한 다양해지면서 사안별 네트워크 형태 운동이 부상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일본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의 주요 축을 이루고 있는 과로사·과로자살 문제가 대표적인데, 이와 관련된 활동들은 유족단체(과로사를 생각하는 가족모임 등)가 주도하면서 안전센터와 건강센터를 비롯한 안전보건단체들이 협력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정치지형의 우경화로 인해 노동조합 운동은 물론 시민사회 운동 역시 전반적인 후퇴를 겪었는데, 그중에서도 2008년 경제 위기와 이에 따른 민생 파탄을 계기로 집권하였던 민주당 정권의 실패와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및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영향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후쿠시마 이후 일본의 시민사회가 새롭게 각성한 것도 사실이나, 그토록 심대한 문제를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점(원전 재가동으로 대표되는)은 일본 사회 운동 전반에 커다란 패배감을 안겨준 것 또한 사실이다. 노동조합 운동 역시 비정규 노동자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유니온 운동’이 확대되고 노동시장 상황(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 역시 유리하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기존의 보수적 주류 노동조합 운동을 개혁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안전 보건 운동 영역은 꾸준히 확장되고 있으며, 변화된 환경 속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노동 안전 보건 운동에서 주목할 만한 흐름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하나는 노동 시장 변화를 배경으로 아베 정권이 노동 개혁을 추진하면서 장시간 과중노동 문제 해결을 형식적으로나마 추진하면서 과로사·과로자살 관련 운동이 활력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 이후 방사능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위험’인 석면, 화학물질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들어 활발해지고 있는 화학물질로 인한 직업성 암 관련 운동은 지역적 수준에서나마 운동노선 차이로 인해 거리를 두고 활동해 온 안전센터와 건강센터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2012년 간사이 지역에서 발생한 인쇄 노동자 담관암 문제는 안전센터 주도로 노동 재해 인정 투쟁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런데 2016년부터 독립 산별노조인 화학일반노련이 중심이 되어 후쿠이 등 간사이 지역 화학공장에서 발생한 방광암 문제에 관여하면서 초기에 건강센터와 협력하며 대응하였다. 그러나 수년 전 담관암 관련 활동 경험이 있는 안전센터를 끌어들이면서 세 조직 중심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총평 주도의 노동자안전센터가 처음 설립된 지 55년 동안 일본의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은 수차례의 재편과 변화를 거쳤지만,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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