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의 분기점_미이케 탄광 탄진 폭발 사고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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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산업화, 전쟁, 그리고 석탄


미이케(三池) 탄광은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 위치한 산업화 시기 일본의 대표적인 탄광으로, 정식 명칭은 미쯔이광산미이케광업소(三井鉱山三池鉱業所)이다. 미이케 탄광은 1469년 한 농부에 의해 광맥이 발견된 이후 간헐적으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나, 본격적인 석탄 생산이 이루어진 것은 1872년에 탄광이 국영화되면서부터였다. 단일 탄광으로는 일본 내 최대 규모였으며 1997년 3월 말 완전 폐광할 때까지 120년 이상 가동되었다. 초기 미이케 탄광은 죄수들의 노동력을 대거 활용했다. 1881년 당시 전체 탄광 노동자 3,103명 가운데 2,144명이 죄수로 채워질 정도였다. 1889년에는 미쯔이 광산회사가 탄광을 불하받았는데, 이때 죄수 노동자들 역시 그대로 인수받았다. 신변이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혹사당했다. 1930년경까지 미이케 탄광에서는 죄수 출신 노동자들을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침략 전쟁을 시작하면서 징병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 동원한 노동자들, 그리고 전선이 확대되면서 중국의 강제 동원 노동자들로 메웠다. 패전 직후 석탄 생산량은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고, 탄광은 곧 재편기를 맞이한다. 패전 후 연합국최고사령부(GHQ)는 석탄 자원에 관심이 없었고, 일본 전후 재건 계획에 있어서도 석유 중심 에너지 체제로 재편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일본 재계 역시 이러한 방침에 환영했다. 이에 따라 1950년 들어서 태평양 연안 정유시설들이 조업을 재개했다. 일본 석유회사들은 칼텍스, 셸 등과 자본 제휴 역시 시작했다. 동시에 탄광 노동자들의 노동권은 위기에 처했다. 1959년에서 1960년 사이 벌어진 미이케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에너지 체제 전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59년 미이케 탄광 측은 10월에 4,580명의 희망퇴직 접수를 받았고, 12월에는 퇴직 권고를 거부하던 노동자들 가운데 1,278명을 정리해고 했다. 이에 미이케탄광노동조합은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이하 총평) 지원 하에 313일간 투쟁을 벌였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60년 3월, 사측 개입을 배경으로 긴급중앙위원회에서 노동조합이 분열돼 제2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투쟁이 격화되었다. 6월부터는 학생조직인 전학련까지 가세했지만, 결국 11월 들어서며 일본 노동 운동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투쟁은 결국 패배로 끝났다. 미이케 투쟁은 ‘총자본 대 총노동’의 투쟁으로 불렸으나, 총자본의 결집과 국가의 가세로 패배한 일본 노동 운동은 이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미이케 투쟁이 ‘일본 노동 운동의 분수령’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전후 일본의 에너지 전환과 노동 안전


에너지 전환은 1959~60년 노동자 투쟁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구 일본 자원에너지청 통계에 따르면, 일본 에너지원 가운데 석탄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5년 49.2퍼센트에서 1975년 16.4퍼센트로 급감한 반면, 석유 비중은 같은 기간 동안 20.2퍼센트에서 73.3퍼센트로 급증했다. 또한 석탄만 놓고 보면, 일본 국내 석탄 생산은 급감한 반면, 석탄 수입이 급증했다. 미이케 탄광 역시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생산 단가를 낮추어야 했기에, 광부 1인당 월간 생산량을 1958년 6월 14톤에서 1963년 10월 44톤까지 끌어올렸다. 문제는 무리한 생산량 증대에 따라 퇴적 탄진량 또한 증가해 폭발 사고 위험 또한 커졌다는 점이다. 더욱이 노동자 투쟁을 계기로 미이케 탄광 사측은 17명이 담당하고 있던 탄진 처리 작업 인력을 2명으로 축소한 상황이었다. 해고된 채탄 부문 노동자들의 빈자리를 각종 간접부서에서 끌어다 메우고 있었고, 이로 인해 안전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각종 안전사고도 증가했다. 더욱이 생산량 증대는 대대적인 기계화와 함께 추진되었는데, 안전 관리가 부실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기계 속도에 작업을 맞추어야 했고, 이로 인한 안전사고가 적지 않았다. 1961년 한 해 동안 미이케 탄광에서는 16명이 사망하고 1,922명이 중상을 당했는데, 이는 과거 최고치였다.


탄광은 작업장 자체 특성이 위험도가 높기도 하다. 그래서 노동조합 세력이 가장 절정기였던 1959년만 하더라도 탄광 노동자 네 명 가운데 한 명은 재해를 당하곤 했다. 특히 탄진 폭발은 탄광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해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험하다. 한 번 폭발이 일어나면 그 규모가 매우 크고, 또 갱내 산소 부족으로 인해 대량의 일산화탄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위험성을 잘 보여주는 예가 1906년 프랑스 탄광에서 발생한 폭발로 1천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던 사건이다. 그런데 미이케 탄광 미카와 탄좌(三川坑)에서 1963년 11월, 대규모 탄진 폭발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고 발생 당시 갱내에 있던 노동자 1,403명 가운데 458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839명의 노동자들이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었다. 미카와 탄좌는 지하 약 400미터에서 80킬로미터 길이에 이르는 해저 갱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최초 폭발이 일어난 곳은 탄좌 입구에서 약 1.6킬로미터 들어간 곳이었다.


미카와 탄좌 탄진 폭발 : 예방 부재와 부적절한 사고 대응


미이케 탄광은 메탄가스 발생량이 적었다. 따라서 보통 국지적으로 발생하곤 하는 가스 폭발 가능성이 낮았기에, 사측은 탄진 폭발의 위험성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고지한 적도 없었고, 노동자 투쟁을 계기로 안전 관리 등 간접부서 인력 또한 감축했다. 이로 인해 탄진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졌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갱내 광차 탈선 사고로 인한 충격 및 발화로 여겨지고 있다. 피해가 더욱 커진 것은 폭발 당시가 근무교대가 이루어지던 시점이었기에 갱내 다수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폭발 직후 사측은 갱내에 신선한 공기를 투입한다는 생각으로 대형 팬을 가동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유독가스인 일산화탄소를 갱내로 밀어 보냄으로써 피해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갱내 구석구석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들이 대피를 위해 입구로 향하던 중 밀려들어오는 일산화탄소에 대거 중독사했다.


사측이 구조단 편성을 시작한 것 역시 사고 발생 후 2시간이 지난 시점이었고, 최초로 22명의 구조단이 갱내에 투입된 것이 그로부터 1시간 뒤였다. 일각을 다투는 유독가스 중독 사고에 대해 너무나도 늦은 대응이었다. 일산화탄소 중독의 경우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중증일 가능성이 있고, 걸을 수 있는 상태라 하여도 중독 증상이 있는 자를 걷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사측은 구조단으로 하여금 중증으로 보이는 노동자들을 우선 대피시켜 피해를 확대시켰다. 이에 더해 사측은 갱내에서 탈출한 노동자들 가운데 건강해 보이는 노동자들을 구조단에 편입시켜 다시 갱내로 들여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산화탄소 중독 가능성이 있는 탈출 노동자들 가운데 사측에 의해 다시 갱내로 들여보내진 노동자 수가 200여 명을 넘었다.


물론 사측의 의도는 제대로 된 구호장비도 없는 상황에서 사고 당시 갱내에 없었던 건강한 노동자들을 투입함으로써 피해에 노출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애초에 대형 사고에 대한 대비가 너무도 허술했던 것은 사측의 중대한 책임 방기였다. 구조단이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갱내에 파견된 반면, 사측은 일부 직원들에게 산소마스크 등 장비를 갖춰 내려 보냈는데, 이들은 생산 재개를 위한 피해 상황 조사단이었다. 한마디로 사측은 사고 직후 제대로 된 구조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사측은 생존자에 대한 조치 또한 적절히 취하지 않았다. 939명의 생존자 가운데 412명만이 병원으로 옮겨져 검사를 받은 반면, 나머지 527명은 그대로 귀가시켰다. 


사고 당시 갱내에 있던 생존자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초기단계의 일산화탄소 중독증이었기 때문에, 귀가한 노동자들도 일단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러나 사측은 귀가한 노동자들에 대해 별도의 관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귀가한 노동자들은 친지와 동료들의 안부 확인, 사망한 동료들의 장례 참석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냈고, 이 과정에서 술을 마시는 일도 잦았다. 이는 초기 단계 중독 환자에게 있어 최악의 조건이었고, 결국 귀가한 노동자들 절반 이상이 이후 치료 곤란 상태의 중증을 앓게 되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환자들도 제대로 된 조치를 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고 당일 미이케 탄광 부속병원은 384병상 가운데 83병상만이 비어 있었다. 결국 병원은 361명만을 수용하였고, 나머지 환자들은 다른 병원들로 분산 이송되었다. 제대로 된 처치나 투약을 받을 수 없었음은 물론 한정된 의료 인력이 제대로 대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보상을 둘러싼 투쟁과 후유증 지속


당시 탄광업계에는 노동자가 사망해도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관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대규모의 사고였던 데다, 사측의 예방 및 구조 활동에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해 당시 10만 엔의 조의금이 지급될 예정이었다. 이에 미이케탄광노조와 상급단체였던 총평은 사망자 1인당 100만 엔의 보상금을 요구했고, 그 절충안으로 사망자 가족에게 40만 엔이 지급되었다. 미이케 탄광 폭발 사고와 같은 날, 수도권의 요코하마에서 발생한 철도 사고의 경우, 사망자 1인당 5백만 엔이 지급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미이케 탄광의 피해자 보상 규모는 턱없이 적은 것이었다. 생존 환자들도 당시 노동재해보험 제도의 문제점으로 인해, 상당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음에도 대부분 3년 뒤 보험급여 중단을 통보받았다.


1972년부터 미이케탄광노조의 협력 하에 사망자 유족 및 환자 가족들은 사측을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7년 7월 원고단과 사측은 피해 보상 합의에 이르렀으나, 이조차 거부한 32명의 원고는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1993년 3월, 추가 소송 판결에서 미이케 탄광 측 과실 책임이 인정됨과 더불어, 원고 측인 환자들의 일산화탄소 중독 후유증이 인정되었다. 일련의 소송들이 마무리된 것은 2002년 6월에 이르러서였다.


미이케 투쟁과 미카와 탄좌 폭발 사고 이후,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며 일본 국내 소비 석탄 대부분을 수입 석탄이 차지했다. 1992년부터는 새로운 석탄 정책이 시작되면서 일본 국내 탄광들은 본격적인 폐광 절차에 돌입하게 되었다. 결국 2002년에는 일본의 국내 석탄 정책이 완전 종료되기에 이르렀다. 사고 이후 4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한편에서 지난한 법정 투쟁이 진행되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버려진 탄광 노동자들이 후유증에 신음하고 있었다. 일산화탄소 중독증 환자들을 추적조사 해오던, 하라다 마사즈미(原田正純)를 비롯한 규슈 지역 의사들은 2003년에 폭발 사고 40년째를 맞아 피해자 진찰 및 조사를 실시한 바 있는데, 여전히 이들은 지적 장애, 성격 변화, 신경증, 우울증, 신경 쇠약, 순환기 질환 등을 겪고 있었다. 패배의 후유증은 이토록 길고도 가혹한 것이다. 다만, 미이케 투쟁의 패배와 탄진 폭발사고가 일본 노동 운동에 부정적 유산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폭발 사고는 총평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노동 안전 보건 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67년 총평이 설립한 일본노동자안전센터는 출범 선언문에서 그 직접적인 계기로 미이케 탄광의 폭발 사고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노동 안전 보건 운동 단체들이 이 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져 활동을 벌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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