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마타병이 끝나지 않은 이유, 끝날 수 없는 이유

by 센터 posted Jan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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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미나마타병(水俣病), 누구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대표적인 공해병이다. 일본의 4대 공해병 중 하나인 미나마타병은 유기수은 중독에 의해 후천적 또는 선천적(태아성)으로 얻게 되며, 신경계 손상으로 감각 마비와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병이다. 그런데 ‘미나마타’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 가운데에도, 정작 그 병을 만들어낸 기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의 착취와 파괴 위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가 성립될 수 없음을, 우리는 곧잘 잊는 듯하다.


1950년대 중반, 일본 규슈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미나마타에 ‘괴질’이 발생했다. 1956년 칫소 회사 부속병원의 의사 호소카와 하지메(細川一)는 이 병을 미나마타 보건소에 보고했고, 이것이 미나마타병의 최초 공식 발견이 되었다. 이후 환자들이 다수 발견되자 칫소 측과 행정당국은 미나마타병을 전염병으로 보고 이들을 격리소에 수용했다. 발견 초기에 전염병으로 규정되면서 미나마타 사람들은 기피 대상이 되는 차별을 받게 되었고, 그 낙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로부터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공식적으로, 비교적 명확히 밝혀지기까지 십 년 이상 소요되었다.


1959년 들어 일본화학공업협회는 아시아 침략 전쟁 시기 미나마타시에 위치해 있던 해군 탄약고 폭약이 패전 후 미나마타 앞바다에 버려졌고, 이로 인한 폭약 성분 중독이 미나마타병의 원인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미나마타병을 식중독의 일종이라 보고 있던 후생성1)은 패전 후 미나마타만에 폭약이 폐기된 사실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그런데 얼마 뒤 칫소 병원의 호소카와가 동물 실험 중간 결과를 바탕으로 칫소가 배출하는 폐수가 미나마타병의 원인이라고 사측에 보고한다. 그러나 칫소 사측은 아세트알데히드 생산 공정을 중단하기는커녕 보고를 묵살하고 동물 실험을 중지시켰다.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칫소는 물론 정부와 지자체도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미나마타 지역사회는 들끓기 시작했다.


1959년 11월 초, 지역 어민들 2천여 명이 회사로 찾아가 면담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분노한 어민들은 공장에 난입2)했고, 환자들은 정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사건 후 이틀 뒤 칫소 노동조합3)은 구마모토현에 대해 공장 폐쇄 반대를, 사측에는 원인 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지역 어민들에 대해서는 폭력 행위를 자제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고용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사실상 사측 편에 섰던 것이다. 미나마타병 투쟁의 역사에 있어서 칫소 노동조합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활발해지고 있지만, 초기 단계(미나마타병이 공식 확인된 1956년부터, 정부가 미나마타병을 공해병으로 인정한 1968년 사이 기간)에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이후 피해 확대와 니가타 미나마타병의 발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모아진다.


사실, 칫소 노동조합은 1951년 결성 이후 전투적인 활동으로 규슈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왔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1962년의 이른바 ‘안정임금투쟁’이었다. 문제는 조합원의 고용과 임금 외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는 점이다. 안정임금투쟁은 임금 협상 결렬로 시작되었다. 핵심 내용은 칫소 사측이 임금 인상 조건으로 4년 동안의 무쟁의 협정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대규모 석유화학으로의 화학산업 중심 변화에 따른 사측의 구조조정 필요였다. 사측은 1960년대 내내 주력 생산거점을 수도권 인근인 치바현으로 옮기고자 했다.


노동조합은 구조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측은 곧바로 복수노조인 ‘신노조’를 만들면서 기존 조합원에 대해서는 전환 배치 및 자택 대기 명령, 희망퇴직 강요 등을 자행했다. 노조 파괴가 진행되면서 개별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사측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졌다. 결국 노동조합은 1962년 7월부터 183일간의 파업을 벌였고, 사측은 직장 폐쇄로 대응했다. 나아가 사측은 1967년 다시금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칫소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도 계속되었다. 1962년 당시 3,400명이었던 조합원은 1968년 시점에는 1,278명으로 줄어들었고, 같은 해에 처음으로 신노조 조합원 수가 칫소 노동조합을 앞질렀다.


물론 많은 이들은 안정임금투쟁을 당시의 다른 민간기업 사례에 비하면 신노조 설립을 동반한 노조 탄압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낸 사례로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칫소 노동조합은 수세에 몰리면서 점점 더 지역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공장 밖으로는 유기수은을 포함한 폐수 배출이 계속되고 있었다. 칫소 노동조합이 이처럼 미나마타병에 주목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거쳐 오면서 고용이 위협받을 가능성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68년 1월까지 미나마타병 환자로 인정받은 이들이 111명(이 가운데 42명은 사망)에 머물렀기에 그다지 큰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사측과 정부의 주장, 그리고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중매체들로부터 눈을 돌려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문제는 훨씬 심각하고 거대했다.


마침내 1968년 8월,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조합은 미나마타병에 대해 침묵했던 지난 시기를 반성하는 ‘수치선언’을 발표했다. 칫소가 문제의 아세트알데히드 생산을 중단한 지 3개월 후의 일이었다. 수치선언 이후 칫소 노동조합은 미나마타병 환자 및 지원단체들과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벌였으나, ‘반성’에 바탕하여 환자 조직 및 시민사회단체의 지침에 따를 것, 그리고 개인 자격으로 참여할 것 등을 원칙으로 정했다. 노동조합이 환자 조직이나 시민사회단체 측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꾸준한 연대활동에도 불구하고 1972년의 조합원 법정 증언 이후로 미나마타병 관련 활동 역사에서 좀처럼 칫소 노동조합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원칙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칫소 노동조합의 ‘반성’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나마타병 환자 조직 및 지원단체, 특히 미나마타병대책시민회의 일부 활동가들은 칫소 노동조합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들이 초기 ‘침묵의 기간’ 동안 벌인 구조조정 반대 투쟁을 지원하는 동시에 이들에게 미나마타병 문제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다.


다행히도 같은 해 9월 미나마타병의 원인은 유기수은이 포함된 칫소의 폐수라는 정부의 공식발표가 이루어진다. 칫소 측은 환자들에게 보상 문제를 후생성의 보상처리위원회에 위임할 것을 요구했다. 일부 환자들은 위임에 응했지만, 사측과의 교섭을 요구하는 환자들은 소송을 통한 이듬해 법정 투쟁에 나섰고, 칫소 노동조합도 이를 지원했다. 소송비용 마련에는 지역 조직인 구마모토 총평도 모금을 통해 힘을 보탰다. 1970년에는 환자들과의 교섭을 거부하는 사측에 항의하며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이기에 이른다. ‘공해 파업’으로 알려진 5월 27일의 1일 파업에는 일반 조합원들도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인상적인 점은 이전 시기와는 달리 사측의 임금 삭감과 노조 파괴 공작에도 불구하고 신노조로 이탈하는 조합원이 거의 없었고, 칫소 노동조합은 더욱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1972년 들어서는 칫소 노동조합 조합원들도 사측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재판 증언대에 섰다. 이윽고 1973년 3월, 1차 소송 첫 판결에서 칫소 측의 책임이 전면적으로 인정되었고, 환자들과 칫소 간의 직접 교섭이 시작되었다. 1959년 당시 당장의 생활을 위해 ‘향후 칫소의 폐수가 원인으로 밝혀져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칫소 사측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아야 했던 환자들은 물론, 사측의 압박에 의해 후생성 측에 보상 문제를 위임했던 환자들도 동일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제서야 미나마타병에 대한 철저한 원인 규명, 칫소4)와 정부 책임, 보상, 재발방지 등을 요구하는 기나긴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길고 긴 법정 싸움 끝에 처음으로 미나마타병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 최고재판소(일본의 대법원에 해당)에서 인정된 것이 미나마타병이 공식 확인된 지 거의 반세기 지난 2004년이었으며, 구체적인 보상 문제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진 것이 2015년이다.5) 2016년 현재 공해건강피해보상법에 의해 미나마타병 환자로 공식 인정받은 이들은 3천여 명에 불과하다. 그 외에 1995년에 1만 2천 명, 2009년에 4만여 명이 정부에 의해 보상을 받은 바 있으나, 이들은 미나마타병 환자임에도 공식적인 ‘미나마타병 환자’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밖에도 잠재적 피해자는 2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나마타병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은 단지 선언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말 그대로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보상과 책임 문제에 앞서 이미 배출된 유기수은에 의한 토양 오염, 유기수은 이외의 유해화학물질 등의 문제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조그만 미나마타만을 벗어나 미나마타 앞바다로 나아가면 시라누이해(不知火海)가 펼쳐지는데, 이 해역은 섬들로 둘러싸여 호수와 같은 바다이다. 이 바다 호수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수많은 마을들에서 미나마타병이 다발했음에도, 정부와 지자체의 대응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물망 설치, 준설 및 매립공사 등 공해방지사업은 ‘긴급대책’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 정부는 미나마타병의 오염원이 마치 완전히 사라졌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추가적인 피해가 우려된다.


더욱이 피해자 보상이 생활 보장이 아닌 의료 대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 또한 피해를 재생산하고 있다. 한편, 피해와 보상이 발생하는 곳에는 항상 기회주의자들이 들러붙기 마련이다. 미나마타병의 경우에도 기회주의자들의 획책은 인정 신청이라는 정당한 권리 주장마저 위축시키고 전체적인 피해 규모 또한 축소 인식시켜 왔다. 기회주의자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회주의는 발흥한다. 구조적 문제에 의한 피해자가 ‘돈에 눈이 먼 자들’이나 ‘좌익’으로 낙인찍히는 일은 허다하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칫소 노동조합의 과오를 떠올리게 한다. 노동조합은 언제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칫소 노동조합의 사례에서 보듯,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때조차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반성을 바탕으로 진정성 있는 활동을 계속해도 그 오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회사가 일으킨 공해가 원인이 된 미나마타병을 외면하던 시기, 칫소 노동조합이 드러낸 인식은 ‘우리들이야말로 피해자’라는 인식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도 미나마타병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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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생성이 병명을 ‘미나마타병’으로 공식 지정한 것은 1969년 12월에 이르러서이다.

2) 사건 열흘 뒤 후생성 역시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유기수은이라고 발표했으나, 칫소의 폐수와의 관련성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3) 정식 명칭은 신일본질소노동조합. 일본질소비료는 1950년 신일본질소로, 1965년 ‘칫소’로 사명을 변경했으나, 노동조합은 2005년 조합원 소멸로 해산할 때까지 기존 명칭을 유지했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사측은 ‘칫소’, 노동조합은 ‘칫소 노동조합’으로 표기한다.

4) 2011년 생산부문이 자회사 JNC로 분사되면서 ‘칫소’는 미나마타병 보상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5) 미나마타병에 관한 첫 국가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된 것은 198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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