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와 아베 정권의 노동개혁

by 센터 posted Jul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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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직수 센터 정책연구위원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나카소네 정권은 냉전질서의 붕괴가 시작되고 대처와 레이건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 세계정세의 맥락 속에서 본격적으로 시장주의적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 30여 년간 일본 사회를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로 ‘격차사회’가 꼽히게 되었다. 노동자파견법이 제정된 1985년 당시 일본의 비정규직 비율은 16퍼센트(남성 7퍼센트, 여성 32퍼센트)였으나, 2015년에는 37.5퍼센트(남성 21.9퍼센트, 여성 56.3퍼센트)로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빈곤율 통계를 정부가 공식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민주당이 집권하면서부터인데, 이 또한 꾸준히 상승하고 있으며, 2012년 기준 상대빈곤율(중위소득 50퍼센트 미만 기준)은 16.1퍼센트 수준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고령자, 아동, 청년층, 여성 빈곤이 선진국들 가운데에서도 높은 수준이며 좀처럼 개선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된 일본


1995년 일본경영자단체연맹이 〈신시대의 ‘일본적 경영’〉을 발표하면서 보다 유연한 노동 시장과 성과주의 인사제도 강화를 역설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 198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일본은 더욱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어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법인세이다. 법인세율(기본세율)은 나카소네 정권 초기였던 1984년 43.3퍼센트였으나, 아베 정권 하의 2016년에는 23.4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졌다. 주요 금융기관이 법인세를 납부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미쯔비시UFJ은행은 2001년부터 2011년 사이, 미쯔이스미토모은행은 1998년부터 2013년 사이 법인세를 납부하지 않았다(이들 두 은행은 미즈호은행과 더불어 일본의 3대 금융기관임). 초기에는 불량채권으로 적자를 겪던 주요 금융기관에 대한 ‘보호 조치’라는 명목 하에, 버블 붕괴 이후 상황의 ‘고통 분담’ 논리가 이를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고이즈미 정권기인 2002년부터 2008년 사이, 일본 기업들은 전후 고도성장 이후 다시금 상당 기간의 호황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2006년 일본의 기업들은 전후 최고의 수익을 거두어들였다. 반면, 이 기간 동안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곤 또한 증가하면서 격차사회 논의가 부상하게 된다. 경제단체연합회(이하 경단련)의 간부를 배출하고 있는 일본의 핵심 대기업들을 살펴보면 이 기간 동안 외국 자본 비율의 증가라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1990년 일본 주요 대기업들의 해외 매출 비중은 약 30퍼센트 수준에 외자 비율은 약 10퍼센트 수준이었으나, 2006년에 이르면 해외 매출 비중은 약 50퍼센트 수준, 외자 비율은 약 30퍼센트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대표하는 기업과 경영자가 바로 캐논의 미타라이 회장이다. 그는 경단련 회장을 맡으면서 고이즈미 정권을 뒷받침하던 학계 엘리트들과 함께 탈규제화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국회의원 세습 관행


대체 어떤 정치가 이런 나라를 만들었을까? 일본 정치를 이야기할 때 ‘세습 의원’에 대한 문제제기를 종종 듣게 되는데, 실제로 현재 여당인 자민당 국회의원들 가운데 세습 의원이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수치가 1992년 이후 일본 총리를 지낸 15명의 정치인 가운데 12명이 세습 의원이었다는 점인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최근 들어 그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6년 이후로 좁혀볼 경우 총리 역임 정치인 7명 가운데 5명이 세습 의원이었다. 일본에서 ‘가업’을 잇는다는 것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일이긴 하나,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두 명도 아닌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대를 이어’ 정치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비민주적인 국회의원 세습 관행이 지속되는 배경에는 비민주적인 선거제도가 있다. 일본의 공직선거법은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과 동시에 그 모체가 만들어져, 전후시기를 거치면서도 커다란 개혁 없이 유지되어 왔다. 특히 1996년부터 시행된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는 거대 자민당과 분권화된 야당 구도 하에서 민주당(현 민진당)에 큰 기회를 제공한 측면도 있으나, 동시에 공고한 자민당의 아성의 기반이 되고 있기도 하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자민당의 비례 절대득표율(기권자를 포함한 전체 유권자 대비 득표율)은 16퍼센트 수준을 유지해 오고 있다. 보수정당의 장기집권 기반인 선거 제도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습 관행과 밀접한 제도는 사실상 세금 없이 정치자금을 상속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인데, 이는 족벌 의원이나 세습 의원 같은 정관계 엘리트들에게 매우 유리하다.


퇴행적 국가주의의 발흥에서 우익의 주류화로


1980년대 후반 노동조합 운동의 재편이 전체적인 우경화로 마무리되면서 1990년대 들어서는 진보정당들이 쇠퇴하였고,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는 보수정당 주도하에 퇴행적 국가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1996년의 일미안전보장공동선언, 1997년 일미방위협력지침(이른바 ‘신가이드라인’), 1999년 주변사태법(일본 주변에서 주요 사태 발생 시 자위대의 미군 지원 관련) 등으로 이어진 당시의 흐름은 최근 아베 정권 들어 특정비밀보호법-안보법제-공모죄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역사교육 의원모임(1997년), 일본회의(1997년) 등 주요 우익 엘리트 조직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마침내 200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노선이 주류화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테러대책법, 유사법제 등이, 중반 들어서는 방위청의 ‘성’으로의 격상, 테러대책법 개정, 교육기본법 개정 등 제도 개혁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익 정치인들은 꾸준히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무엇보다 우익 노선의 주류화를 실감하게 한 사건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재특회’가 2007년경부터 가두시위와 같은 공개적 활동을 개시한 일이었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집권 자민당 역시 심판대에 올랐고, 2009년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으나, 민주당이 보여준 것은 처절할 정도의 무능함과 ‘별반 다르지 않음’(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 등)이었고, 결정적으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민주당 주류는 원전추진파의 주요 세력이었음)를 맞게 되면서 짧은 집권 시기를 마감하게 된다.


한편, 2012년 이후 아베 정권의 행보는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언론 통제이다. 아베 정권의 강력한 언론 통제가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미디어에서조차 다른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상당한 변화를 겪으며 다시금 활성화된 듯 보였던 진보적 시민사회조차 안보법제의 성립과 원전 재가동으로 사실상의 패배를 맞이한 데 더해, 지난해 참의원 선거에서는 어렵게 성사된 야당 선거 공조에도 불구하고 패배하면서 그야말로 질곡에 빠졌다.


보수 우익 정권의 ‘진보적’ 노동개혁 추진 배경


그런데 이상과 같은 우경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격차 문제 심화 속에서 지난해부터 아베 정권이 제기하고 있는 노동개혁 내용이 심상치 않다. 아베 정권은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장시간 과중노동 규제 두 축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개혁을 추진 중이다. 물론 2016년 노동개혁안과 함께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노동의 미래 2035〉 보고서는 “2035년에는 개개인이 보다 다양한 형태로 일할 것이며, 기업이나 경영자와 대등한 계약을 맺게 되는 등 보다 자율적인 노동이 확산됨에 따라 사회 전반이 크게 변화할 것”이라거나, “개인사업주와 임금 노동자 간의 경계가 더욱 흐려져 조직에 소속된다는 것의 의미 자체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며, “복수의 조직에 다층적으로 소속되는 사례들도 늘어날 것”이라는 등 비현실적인 전망을 제시하며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개혁과 퇴행의 간극이 상당 수준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간 아베 정권은 한편으로는 장시간 노동 규제 등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규제 완화 중심의 개혁을 추진해 왔으나 그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적절한 권한이나 보상 없이 책임만을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에게 하향 부과하는 것을 추진한 재량노동제 확대 및 잔업수당 제로 법안 역시 2015년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런데 2016년 제시된 노동개혁안은 노동계의 주장을 상당 수준 반영한 것이어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하여 추진되고 있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경우, 정부 측이 이러한 정책을 전면에 내세운 적은 처음이다. 한편, 노동개혁과 더불어 아베 정권이 가장 중요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이 헌법 개정이다(현실적으로는 완료된 것과 다름없으나, 명실공히 쐐기를 박는다는 점에서, 아베 정권에 있어 개헌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 이를 두고, 노동개혁안의 ‘개혁성’이 실은 아베 정권의 군사대국화 추진, 즉 개헌 의도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적지 않다.


아베의 철옹성 구축과 전시동원체제 재림의 위협


아베 정권에 있어 군사대국화와 노동자 처우개선은 양립 가능한 목표인데다, 나아가 상호 보완적인 측면도 지니기 때문이다. 한편, 고이즈미 정권 이후 아소 정권 시기까지의 자민당 정권의 정책은 규제 완화 일색이었으나, 규제 완화가 사회적 한계에 이르면서 정책 수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에 아베 정권의 노동개혁은 실현 가능성 또한 높다. 더욱이 자민당의 총재 3선 규정으로 인해, 아베 총리는 2021년 9월까지 집권이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집권 후 4년간 전례 없는 높은 지지율이 지속되며 역대 최장기간 집권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전 시기 후쿠다 정권이나 아소 정권 당시에도 일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추진된 바 있으나, 아베 정권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재계의 경우 임금 인상을 기본적으로 노동 비용 상승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기본적으로는 개혁보다 현행 법제도 유지를 선호하므로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아베 정권이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면서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노동자층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에는 첫째로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정당 등 노동자 조직과의 협력이 있고, 둘째로는 단결권을 부정하며 노조를 탄압하여 관제 조직(어용노조)을 설립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방법은 파시즘이나 군사독재의 경우에나 가능하다. 따라서 아베 정권의 선택은 노동자 처우개선으로 노동자 조직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사회적으로는 인구 감소 위기론을 바탕으로 국가주의, 내셔널리즘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경제대국’ 유지를 위해 출생률을 높여야 한다는 이 같은 논리는 일본재흥전략 2016년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 바 있다. 반면 여성 경제 활동 참가 제고는 노동력 필요성의 측면에서만 논의되어 왔다. 노동개혁(정확히는 ‘노동방식’ 개혁)이라는 표현은 일본재흥전략 2014년판에서 처음 등장하였는데, 당시의 내용은 규제 완화 중심이었다. 그런데 2015년판에서는 정규직 전환 정책이 핵심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별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이나 승진제도 강화, 직무형 정규직(‘job형’ 정규직, 중규직 개념과 유사하나 전문직 등에 초점) 등 개인주의적 접근법에 머물렀다. 그러나 2016년판에서 그 내용이 크게 변화하였다. 그 목적은 실질적인 노동자 처우개선을 약속하며 군사대국화에 대한 노동자층의 ‘동의’를 획득하고자 하는 ‘동원’으로 보인다. 일본의 역사적 맥락에서 ‘1억 총활’이라는 아베 총리의 슬로건은 전시 동원 체제를 연상시키는 문구이기도 하다.


그간 아베 정권은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특정비밀보호법, 안보법제, 공모죄 적용 등을 관철시켜 왔다. 2016년에는 참의원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개헌의 결정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나, 아키히토 천황의 ‘생전 퇴위’ 선언에 밀려 한 발 물러섰다. 이에 더해 지지율의 주요 기반이었던 아베노믹스가 흔들리면서, 노동개혁안은 개헌에의 ‘동의’를 이끌어낼 실질적인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아베 정권은 2017년 들어서는 2월에 잔업 상한을 대폭 완화하고 성과주의 임금제도를 포함한 법안을 제출하는 등 노동개혁이 내용상의 큰 후퇴를 보이고 있다(이 직후에 아키에 스캔들이 터짐). 그러나 아베 정권의 대표적인 민생 법안인 노동개혁 추진을 군사대국화 추진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며 경계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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