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라 말하고, 어느새 농성은

by 센터 posted Apr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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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분향소.jpg


봄맞이하느라 사람들이 바쁘다. 노랑 파랑 빨강 온갖 꽃과어린 나무를, 또 잔디를 심는다. 물을 주고 살뜰하게 보살핀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 경고문 세워 지킨다. 봄볕 아래 초록빛 쑥쑥 잘도 자란다. 투실투실 잔디 더미가 저기 가득. 얼음지치던 광장에도 어느새 봄이다. 거기 동료 떠나보내느라 노동자들이 상복 입고 바쁘다. 국화를 꽂고, 향을 심는다. 눈물몇 방울 거기 보탠다. 먼 길을 오가고, 긴 밤을 새운 탓에 언젠가 밤낮 없던 일터에서처럼 깜박 졸았다. 올빼미는 밤에 운다.늦은 밤 상가에서 이들은 울음 참느라 입을 앙다물었다. 노조를 짓밟지 마시오. 오랜 구호 새긴 선전물은 광장에서 부서지고 밟혔다. 영정만을 품어 겨우 지켰다. 앉아 버티며 향을 또심었다. 재가 수북했다. 언젠가 향내 멈추질 않던 거기 또 향내짙다. 건너편 대한문 앞에서 화단 지키느라 바빴던 경찰이 오늘, 광장에서 잔디 지키느라 빙 둘러 우뚝 섰다. 책임지는 이가 없어 탈상이 멀었다. 멀지 않은 곳 옥상에 오른 비정규 노동자 둘이 그 꼴을 지켜봤다. 끝장을 보고 싶다 말하고, 어느새꽃은 피고지고. 매한가지 책임을 묻는 농성이 어느새 길었다.


정기훈 |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올해는 당신

by 센터 posted Jan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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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정기훈.jpg


새 해가 떴다. 어제 또 그제의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애써 의미를 찾는다. 매듭 삼아 오늘 더 새롭기를 바란다. 그 새벽 어디 높은 곳이며 땅끝을 찾아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볕은 대체로 공평한 편이어서 새벽어둠과 추위를 견디던 사람들의 볼에, 눈에, 코에 고루 이르렀지만, 그늘 짙은 곳엔 미치질 못했다. 오래전 쌓인 눈이 그대로다. 얼음으로 남았다.


어느 광장에서 손잡은 연인은 떨어질 줄을 몰라 이인삼각 꼴을 하고 엉거주춤 빙판을 기었다. 노란색 안전모 쓴 아이들이 겁도 없이 치고 나가는 통에 뒷자리 따르던 부모가 뒤뚱거렸다. 서툰 솜씨였지만 저마다의 속도로 나아갔다. 넘어져도 웃을 일. 손잡아 일으켜 줄 이가 곁에 있었다. 머리 희끗희끗한 왕년의 청춘은 녹슬지 않은 솜씨를 뽐내려다 그만 들것 신세를 졌지만 허허 웃고 말았다. 음악 틀던 디제이가 소리 잠시 줄여두고 말솜씨를 뽐냈다. 흥을 돋웠다. 망원동에서 온 누군가의 가족 사랑 사연을 알렸고, 빙판 위 젊은 남녀의 애정행각을 지적했다. 붉은색 점퍼 입은 젊은 여성의 전화번호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외로운 청춘의 마음도 마이크 잡아 전했다.


새해 광장에서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즐겁다. ‘올해는 당신’이라고 적힌 새 현수막이 도서관 벽에 걸렸다. ‘기아차 비정규직 정규직화’라고 적힌 낡은 현수막이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위에 해를 넘겨 여전하다. 넘어가던 햇볕이 그래도 공평한 편이어서 거기 잠시 머문다. 그 자리 하늘을 지붕 삼아 오래 머문 사람이 엉거주춤 오가다 가만 섰다. 빙판 위 즐거운 사람들을 한참 살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출근길

by 센터 posted Mar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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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첫출근1.jpg 쌍용차첫출근2.jpg 쌍용차첫출근3.jpg


유제선 씨는 요사이 잠을 설쳤다. 지난밤이 유독 길었다. 새벽 4시 30분까지 버티다 그냥 씻고 나섰다. 가방엔 세면도구와 여분의 양말, 접이식 깔개 따위를 챙겨 넣었다. 없으면 불안한 것들이다. 노조 조끼도 넣을까를 잠시 고민했다. 오랜 버릇이다. 회사 정문 앞 새로 생긴 커피 집에 들러 잠을 쫓았다. 언젠가 분향소와 낡은 농성천막이 있던 자리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걸음이 성큼 가벼웠고 표정이 종종 밝았다. 정문 너머 공장을 슬쩍 훑었다. 우뚝 선 굴뚝에서 연기가 폴폴 솟았다. 뒤따르던 박호민 씨는 노조 사무실 앞에서 사람들을 안고 울먹이느라 눈두덩이 부었다. 흰자위가 붉었다. 축하인사가 내내 민망했지만 내민 손 꼭 잡아 화답했다. 울다 웃던 박 씨는 담배 물고 땅을 오래 살폈다. 비정규직 지회장 서맹섭 씨도 언 손을 비비며 거길 찾았다. 스마트 폰을 들어 노조 현판을 찍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이름이 거기 나란했다. 그 안쪽 사무실에 일찍부터 김상구 씨가 서성거렸다. 가끔 웃었는데, 표정 변화가 적었다. 말수도 그랬다. 별일도 아닌 듯, 7년 만의 출근을 기다렸다. 윤충열 부지부장이 안쪽 부엌 개수대에서 머리 감느라 바빴다. 낡은 노조 조끼를 서둘러 챙겨 입고 나섰다. 출근길 사람들을 배웅했다. 인재개발원행 버스가 곧 출발했다. 2016년 2월 1일 오전, 손 흔들던 사람들이 길에 남았다.


정기훈 |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분리수거

by 센터 posted Feb 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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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구속행진.jpg


높다란 빌딩 휘황찬란한 강남 대로엔 담배꽁초 따위 쓰레기가 안 보여 말끔하다. 곳곳에 펄럭이던 대형 태극기 아래에 안보 1번지 선전문구가 또렷하다. 명품도시 자부심이다. 오랜 버릇 끊지 못해 또 한 대 꺼내 문 사람들이 안 보이는 구석을 찾아들어 빠끔거린다. 찬바람에, 또 벌금에 벌벌 떤다. 정경유착, 그 버릇 끊지를 못해 수백억 뇌물 꽂던 사람들의 초상이 무개차 위에 수의 차림으로 섰다. 쓰레기통 지나 광화문 소각장을 향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범죄자는 감옥에 넣는 것이 이치에 맞다. 썩은 내 진동하는 탓에 재활용이 어렵다. 복권 사면 매번 꽝이다. 철저한 분리수거야말로 시대의 과제다. 담배꽁초 따위 말고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조 파괴 없는 세상이야말로 깨끗한 세상, 명품세상 아니던가.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줄초상

by 센터 posted Oct 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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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사람들 흰 국화 들고 줄줄이 섰다. 얼굴 없는 영정 앞에 향을 피웠고, 고개 숙였다. 안전화와 안전모와 안전띠가 그 앞자리에 가지런했다. 망자의 것은 아니었다. 2013 대한민국 안전대상 소방방재청상 수상 기념 동판이 박힌 어느 통신 대기업의 높다란 빌딩 앞이었다. 일터는 높았고, 비가 줄줄 내렸다. “일이 많이 밀려 있다. 다 처리하라”는 회사의 지시가 떨어졌다. 전봇대를 올랐다. 툭 떨어지던 몸을 잡아 줄 안전줄이 없었다. 머리를 지켜줄 안전모가 거기 없었다. 감전의 흔적이 손에 남았다. 밥 벌어먹기를 바랐던 그는 누워 젯밥을 받았다. 꽃 피워보지 못한 그 이름 앞에 활짝 핀 국화가 쌓였다. 안전은 저기 원청의 경영 지침에 그쳤다. 다단계 하도급 고질병이 뿌리 깊다. 모두의 상식으로 그 죽음은 외인사였으나, 끝내 병사로 남는다.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비처럼 떨어지던 비정규 노동자 혹은 근로자영자의 작업복 가슴팍에, 또 영정 놓인 높다란 빌딩 앞에 주황색 ‘행복날개’가 있다. 헛된 것이어서 오늘 또 국화가 팔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우산

by 센터 posted Oct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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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우산.jpg


맑은 날 우산 든 사람들이 노조할 권리를 외쳤다. 이미 헌법에 새긴 권리였으니 새삼스러운 얘기였다. 노조 만들었다고 쫓겨난 사람들이 많았으니 매번 새로운 얘기였다. 법이 멀었다. 구호 따라 주먹이 하늘에 가까웠다. 언젠가 비 오는 날 촛불 켠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를 외쳤다. 온갖 공약에 선명했으니 지근거리 저 앞이었다. 삐죽 솟은 돌부리가 많아 걸음이 자꾸만 꼬였다. 돌덩이 하나같이 굳은 땅 아래로 깊어 삽자루가 자꾸 튕겼다. 코앞이 멀었다. 기어코 노조 우산 아래 든 사람들도 여전히 길에서 비를 맞는다. 땡볕 아래 붉게 익어간다. 안전장치 없는 현장에서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애쓴다. 쨍하고 해 뜬 날 큰 우산 펼쳐 작은 그늘을 지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오랜 구호가

by 센터 posted Ap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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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서비스.jpg


나두식 노조 지회장이 합의서를 살펴본다. 진즉에 문구 한 줄, 토씨 하나 수없이 확인했을 테다. 거기 회사는 협력업체 직원들을 직접 고용한다고, 또 회사는 노조를 인정하고 합법적인 노조 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었다. 오랜 구호였다. 등에 새기고 목청에 새긴 것이었다. 오랜 시간 길에서 뱉은 말이었다. 먼저 간 동료의 유서 내용이었다. 서명 마친 합의서를 다시 살폈고, 스마트 폰 들어 기록했다. 카메라 든 삼성의 홍보팀 직원이 손잡은 노사 대표자의 화기애애한 표정을 주문했다. 굳은 표정의 지회장과 노조 간부들이 잠시 웃었고 찰칵, 기록으로 남았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데칼코마니

by 센터 posted Aug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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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사람들은 부둥켜안고 반쯤 울었고 반쯤 웃었다. 엎드려 절하기를 108번, 때마다 바닥에 소복소복 흰 눈처럼 쌓였다. 입술 앙다물고 참았는데 꺼억 꺽 울음이 비집고 나와 터졌다. 땀인지 눈물인지가 얼굴 타고 흘러 벌건 코끝에 자주 맺혔다. 화장이 제멋대로 번졌다. 끝내 웃음 번졌다. 서로 안고 마주 보는데 울음 또 거기 섞였다. 돌덩이 하나씩 속에 들어 체증이 오래도록 깊었는데, 한결 가벼웠다. 서로를 돌봤다. 더불어 단단해졌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슈퍼맨은 아직

by 센터 posted Jan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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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jpg


해거름, 어린이집 향해 뛰다 걷다 경보하느라 아빠는 숨 가쁘다. 발이 꼬인다. 언 땅을 밟고 허둥댄다. 돌아온 슈퍼맨은 하원 시간 맞추느라 쩔쩔맨다. 슈퍼 가자고 징징대는 아이와 씨름하느라 길에서 떤다. 눈에서 레이저를 쏜다. 아빠 왔다 소리가 제일 반가웠을 아이한테 못할 말을 하고 만다. 코로 먹는지 눈으로 먹는지 저녁밥을 때우니 잘 시간이다. 놀겠다고 버티는 아이와 싸우던 끝에 산타할아버지를 소환했다. 잠자리에 평화가 찾아왔다. 산타 선물은 택배로 오는 거냐고 아이가 물었다. 아마도, 산타는 요즘 너무 바쁘거든. 해질녘, 로켓배송하느라 잰걸음 종일 놀렸을 쿠팡맨이 짐칸에서 바쁘다. 당일 배송 굳은 약속 지키느라 저녁이 없다. 일 150건 이상 배송, 고객 설문 만점, 무결점 근태를 지키지 못하면 정규직 전환 기회는 없단다. ‘하늘의 별 따기’란다. 계약 해지 걱정에 쿠팡맨은 전전긍긍한다. 별 보며 일한다. 얼마 전 각양각색 옷차림의 택배 노동자들이 노조 깃발 아래 모였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한 싸움에 나섰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그들이 꿈꾸었던

by 센터 posted Aug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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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jpg


광장 건너편 낮은 자리에서 가수 박준이 노래한다. 작은 모금함을 앞에 뒀다. 뇌출혈로 쓰러진 LG유플러스 비정규 노동자에 작은 도움 주기를 노래 틈틈이 알렸다. 일어나,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퉁겼다. 노조 깃발 들고 그 길 지나던 사람들이 습기 머금은 지폐를 통에 넣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가수 박준은 마저 노래했다. 그 앞 집회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가 흘렀다. 그 날 선 노랫말 속에 노래 활동가 그들이 꿈꾼 세상이 선명하다. 그 길 지나던 아이들이 낯선 노랫말을 두어 구절 따라 했다. 모자에 온갖 배지 잔뜩 매단 길거리 가수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땀에 젖은 가수 박준이 작은 무대를 정리했다. 뜨겁던 광장에 소나기 한바탕 곧 쏟아졌다. 반가운 비라고 누가 말했는데 해갈엔 부족했다. 되레 습기 잔뜩 몰고 와 숨이 턱턱 막힌다고 사람들은 푸념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핫팩처럼

by 센터 posted Feb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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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핫팩.jpg


그 따뜻하다는 솜 넣은 부츠가 하나 생겨 시골집에 보냈다. 아버지 신으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욕심을 냈다. 원래 이런 건 크게 신어야 한다나. 아이고 어머니, 내 하나 더 사 보낼게요. 겨울 다 지나 늦었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추위가 늦도록 기승이다. 발 따시니 참 좋더라는 전화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진짜 추운 날엔 발끝이 아프다. 여느 집회 사회자 말마따나 투쟁의 열기가 곳곳에 높았으나 손끝, 발끝 아린 걸 어쩔 순 없었다. 핫팩 몸에 붙이고, 손에 쥐고, 발 등에 올려놓고서야 아픔을 덜었다. 이 겨울 누구나가 추웠지만, 칼바람 맞아 시린 사람들이 길에 유독 많았다. 체감온도는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흰옷 입고 앞장선 사람들이 자꾸만 아래로 엎어져 아스팔트에 핫팩처럼 붙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골든타임

by 센터 posted Jul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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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무직파업선언.jpg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고, 비정규 노동자들이 유령 가면 쓰고 광장에 섰다. 미룰 일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 나설 일이라고 팻말 들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얘기 풀어내다 보면 땡볕 아래 회견이 길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였다. 누구나의 상식을 구호 삼아 외쳤다. 퇴행이 오래도록 빠르고 깊었던 탓이다. 꽃도 한 철이다. 오랜 가뭄에 바짝 타들어 가는 게 논밭의 작물과 거리의 나무만이 아니다.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광장에서 사람들은

by 센터 posted Dec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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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즐겁다26.jpg


친구와 더불어 사람들은 즐겁다. 입에 붙은 노랫말 흥얼거리며 잠시 머물다가, 앞선 방송차 없이도 이제는 익숙한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누군가 앞서 외친 구호 따라 퇴진하라, 구속하라 추임새를 거든다. 모이고 또 모여 저마다의 함성이 으레 거기 높다란 돌담을 넘는다. 아이 목말 태운 아빠는 목이 휜다. 외치느라 목이 쉰 엄마가 아이 옷깃을 여민다. 팔 쭉 뻗어 손팻말을 들고, 팔 쭉 뻗어 셀카를 남기며 사람들은 살갑다. 퇴진 군밤 팔던 장수가, 하야 마스크 팔던 노점상 청년이 그 길에 바빠 흥겹다. 호두과자 익는 연기가 폴폴, 횃불 기름 타는 냄새가 풀풀. 종종 머리칼 타는 냄새가 솔솔 퍼지니 비명인지 구호인지. 타닥 탁탁 불꽃 터지는 소리 따라 꽹과리, 장구 소리 거기 섞여 요란스런 광장에서 젊은 연인이, 또 주름진 부부가 딱 붙어 정겹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되새겼는데, 털점퍼 길에 벗어두고 펄쩍펄쩍 날뛰던 교복차림 소년 소녀까지 누구나가 늦은 밤 광장에서 깨어 즐겁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작가


맨 앞에 오토바이

by 센터 posted Ju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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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세이.jpg


이런저런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던 하루, 퇴근길 상념이 짙다. 종일 추적거리던 비가 그치고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짙었다. 교차로에 빨간불 들어와 급히 멈춰 섰다. ‘신홋발’이 마음 같지 않아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과했다. 그래도 맨 앞이구나, 되지도 않는 이유 들어 마음 추슬렀다. 동네 친구 집에 맡겨 둔 아이 생각에 급했다. 어느새 오토바이 한 대가 앞자리 섰다. 배달 노동자였다. 중학교 시절 방학이면 신문 배달 알바를 했다. 이른 새벽 지국으로 나가 온갖 광고 전단부터 끼워 넣었다. 책처럼 두툼해진 신문을 자전거에 싣고 한겨울 미끄럽던 골목길을 누볐다. 쓱 접어 슉 던지면 이층집 현관 앞에 착 떨어지곤 했으니 일이 손에 붙을 때였다. 반쯤 돌렸을까, 자전거 바퀴가 펑크 났다. 별수도 없어 끌고 걷고 달렸다. 지쳐 돌아가던 길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다른 신문 지국이었는데, 오토바이 내어준다면서 꾀었다. 확 끌렸지만 거절하고 말았다. 오래전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 생활이 길었는데, 그 뒤로 우리 집에서 바퀴 두 개짜리 차 얘긴 금기였다. 곧 신호가 바뀌었고, 오토바이는 치고 나갔다. 곡예하듯 차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달려 멀어졌다. 신호등 맨 앞자리엔 언제나 배달 오토바이가 있었다. 밥 차리기엔 늦어 배달 앱을 뒤적거렸다.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밤늦도록 집 앞 골목에 울렸다. 쓰는 사람은 많은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고,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이 어느 자리에서 말했다. 만나면 누가 식물인간이 됐다더라, 죽었다더라 얘기를 나눈다고도 했다. 불나방에 비유했다. 노조할 권리 보장을 그 앞자리 정치인과 정부 관료에게 호소했다. 신호가 바뀌었고 맨 앞자리 오토바이가 내달린다. 거기 배달통에 책임과 위험을 가득 싣고, 식지 않은 음식을 나른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맨 앞자리에서

by 센터 posted Aug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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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jpg


진상은 낯설지 않았다. 이미 구호에 들어 오래 외친 말들이 화면에서 흘렀다.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고 발표자가 말했다. 하청 또 재하청을 복잡한 사슬을 타고 흘러내렸다. 맨 앞자리에서 지켜보던 엄마 눈에서 물이 흘렀다. 마르질 않았다. 돈 때문이었음을 조사 결과는 말해줬다. 분할되고, 외주화된 공정에서 새로운 위험이 발생했다고도 조사위는 지적했다. 청년 노동자들은 오늘도 거기 일급 발암물질 뿌옇게 휘날리는 곳에서 일한다. 바뀐 게 많지 않다고 앞자리 선 이가 전했다. 엄마는 맨 앞자리에 앉아 두툼한 자료집 구석에 메모를 꾹꾹 남긴다. 울음 꾹꾹 참느라 자꾸만 고개를 떨궜다. 그 앞 화면에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생전의 김용균 씨 사진이 멈췄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가 8월 19일 진상조사 결과와 권고안을 발표했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옛날이야기

by 센터 posted Feb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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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거짓말.jpg


아이가 한 번씩 뻔한 거짓말을 한다. 곧장 타이르기는 피하고 싶었으니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시간이다. 그러니까 옛날에 말이야 양치기 소녀가 있었는데···. 두어 번은 잘 듣더니 금세 지겨운 모양이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피노키오 이야기로 돌려막았다. 거짓말은 나쁘다는 걸 알려 주는 맞춤형 이야기들이다. 얼마간 효과가 있었다. 일하며 찍은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정리하는데, 피노키오를 알아본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이게 뭐냐고 물었다. 글 읽는 아이 앞에서 거짓말로 둘러댈 수도 없어 우물쭈물 설명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기다란 코에 적힌 노동기본권 보장이며 비정규직 제로시대 같은 것들을 말해주느라 새로운 피노키오 이야기를 지어내야만 했다. 일하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에 이르니 이어 가기가 버거웠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여러 처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켜지지 않아 거짓말이 돼버린 약속을 줄줄이 읊었다. 촛불 행진을 선언했다. 생선 굽느라 켜둔 촛불을 보고도 광화문광장 구호를 떠올리는 아이가 저기 사진 속에 적힌 촛불 행진에 관해서도 물었다. 그때와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것이기도 하다며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옛날 옛적에 사람들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는데···. 훗날 광장의 촛불 이야기는 어떤 교훈을 품게 될까 생각해 봤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사라져야 할 것들

by 센터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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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처럼.jpg


한때 크고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는 기자증을 대신하곤 했다. 공연장이나 공사 현장에서 형광 스태프 조끼가 그러했듯 말이다. 좋은 촬영 조건을 찾아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오른 건 대개 큰 카메라였다. 스마트폰은 눈치를 살펴 주저했다. 오랜 관습이었으나 곧 뒤집어질 구습이기도 했다. 누구나가 찍는다. 저마다의 언로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대형 집회 무대에 거리낌 없이 올라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와 소형 캠코더로 찍는다. 생중계한다. 시청자와 독자를 지닌 미디어는 적어도 그 자리에서 눈치 보지 않고 과감했다. 주최 측은 1인 미디어를 차별하지 않았다. 기자만이 찍고 알린다는 건 낡은 질서에 들었다. 사법적폐 청산을 외치던 촛불집회엔 구호가 다양했는데, 그중 언론 개혁 팻말이 적지 않았다. 기레기 표현이 잦았다. 엘이디 촛불을 든 사람들이 크고 무거운 카메라 든 기자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질책했다. 드론이 날아 담은 촛불 파도 영상이 무대 위 유튜브 생중계 화면에 흘렀다. 천박한 구시대 유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최후통첩에 적었다. 무대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사라졌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겨울, 거울

by 센터 posted Ja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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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거울.jpg


거기 액자에 김용균 아닌 누가 들었대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의 광장에서 운이 좋아 죽지 않은 그의 동료가 유행 지난 롱패딩을 입고 서성인다. 비질하고 꺼진 촛불에 불 놓아 살린다. 꺼지지 않는 향에서 연기 오르는 동안 회색빛 재가 툭툭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쌓여 간다. 어느새 수북했다. 철을 모르고 싱싱한 국화가 또한 그 앞에 쌓였다. 뒷벽에 빼곡하게 붙은 온갖 추모의 글은 사진을 인쇄해 붙인 것이니 진짜가 아니었다. 수년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붙은 접착식 메모지는 지금 다른 이의 영정 뒤에 병풍처럼 붙어 묵은 추모를 새롭게 이어 간다. “당신의 죽음은 사회구조적인 죽음입니다.”라는 말이 다만 진짜였다. 달라진 것 없는 죽음 뒤에 붙은 추모 문구가 달라질 리 없었다. 촛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외투 주머니에 손 넣은 채 잔뜩 움츠린 사람들이 그 앞 횡단보도를 끝없이 오갔다. 거기 누가 들어도 어색할 것 없는 영정 액자에 빛 들어 수은주 새겨 넣은 등대 조형물이 비친다. 김용균을 처음 발견한 동료가 이불 같은 점퍼에 손 넣은 채 죽음 옆자리에 머문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언제나 분수처럼

by 센터 posted Apr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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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금지.jpg


개나리 꽃망울 터지듯 와글와글 피어나던 아이들 웃음꽃이 더는 광장에 없다. 솟구치는 분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아이들 뒤꽁무니를 쫓다 그만 포기해 버린 엄마 아빠의 걱정 섞인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 4월이면 시간표 따라 어김없던 일인데, 기약 없는 일이 됐다. 언젠가 잘게 부서진 물방울이 낮은 햇볕 머금어 무지개가 뜨면, 갖은 색깔 옷차림 아이들이 그 아래를 우당탕 뛰었다. 그리고 지금 잿빛 돌바닥엔 도심 내 집회 금지를 알리는 알림판만이 바람을 견딘다. 기약 없는 분수를 정비하느라 한 시설관리 노동자가 허리 굽혔다. 새로운 일상은 예고도 없이 스몄다. 전문가들은 앞다퉈 닥쳐올 경제 위기를 예고했다. 바닥에선 이제 아우성이 솟구친다. 해고 금지 팻말 든 사람들이 광장 언저리에서 이미 닥친 현실을 증언했다. 언젠가 그 바닥의 분수처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인지부조화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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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통.jpg


오토바이엔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뒤쪽에 앉았던 사람이 가게 앞까지 날아왔다고 바퀴 고치던 자전거가게 사장님이 말했다. 바퀴에 바람 넣느라 그 앞에 섰던 사람들은 넘어진 오토바이에서 뜯겨나간 잔해와 배달통을 튀어나와 날아간 포장 음식 따위를 살펴보다 혀를 찼다. 거길 지나던 동네 사람들에게 사고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틈틈이 인도 한편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던 라이더를 살펴봤다. 얹어 배달하던 음식 보따리 여러 개엔 붉은 국물이 줄줄 흘렀다. 지켜보던 아빠는 자전거 뗀 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 안전모를 꼭 써야 한다고,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잔소리했다. 좁은 골목길을 빠른 속도로 내달리던 배달 오토바이에 놀라 아이 손을 급하게 잡아끈 아빠는 씩씩거리면서 저만치 간 오토바이 꽁무니를 흘겨본다. 저녁 밥상을 차리려 냉장고를 뒤지던 아빠는 다 귀찮아 배달 앱을 뒤진다. 예상 시간이 길다.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아이한테는 금방 올 거라고만 거듭 말했다. 오토바이 소리 들려 나가보면 옆집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배달 기사의 말에 괜찮다고 했는데, 거기 짜증이 잔뜩 묻었다. 그리고 일 나간 아빠는 어디 배달플랫폼 업체 본사며 국회 앞에서 헬멧 쓴 라이더의 이야기를 듣고 찍는다. 최소한의 안전망 없이 위험한 질주에 내몰린 특수고용 노동자의 사연 전하던 사람을 그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 꽁무니와 엮어 사진에 담는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요지의 설명을 보탠다. 조화롭지 못한 여러 생각 보따리가 머릿속을 내달린다. 오늘도 배달 오토바이가 내달린다. 균형 잃은 배달통에서 붉은 국물이 쏟아진다. 코로나 시대 일상다반사다.


정기훈 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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