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 년

by 센터 posted Apr 2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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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시골에서 이것저것 하는 사람



부천에 살던 아내가 짐을 꾸려서 장수로 내려왔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는 아니지만 이제 반쪽 홀아비 신세를 면하고 아내가 차려주는 삼시 세끼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난해 3월 14일 내가 장수로 귀농했고, 딱 1년 뒤인 엊그제 3월 14일 아내도 귀농했다. 이런 우연이 인연인 건지 인연이 우연을 만드는 건지. 


흙집.jpg

매동제 저수지가 바라다보이는 전북 장수 멧골 흙집


장수에서의 일 년은 금방 지나갔다. 이불 두 개와 옷가지 몇 벌, 그릇과 수저 서너 개, 김치와 장아찌, 쌀과 잡곡 등을 승용차에 싣고 장수로 왔다. 충견으로 유명한 임실군 오수나들목을 나와 북쪽에 높게 솟아있는 팔공산(1,151m)을 향해 달리다 보면 장수군 산서면이 나온다. 장수에서 팔공산 너머 서쪽을 가리키는 지명이 산서이다. 산서면소재지 조금 못 미친 삼거리에서 직진을 하면 600~700미터 산들이 둥글게 울타리 치듯 둘러싸인 산 아랫마을이 줄지어 나타난다. 그 길의 끝자락에 닿을 즘에 동고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오래된 시골집 담벼락 사이로 작은 길이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산속으로 통하는 듯한 언덕을 넘어서면 오른쪽 발아래로 매동제라는 저수지가 나온다. 매동제 고개를 넘어설 때가 우리 집에 들어서는 아주 큰 묘미이다. 내겐 마치 지리산의 통천문을 지나는 듯이 신비한 세계의 출입문 같다. 그렇게 저수지가 있는 고개를 지나 산꼭대기로 이어질 듯한 마을 길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에 집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있고 지붕만 조금 내민 흙집이 두 채 보인다. ‘임자유’라는 친구가 사는 집이다. 자유네 집을 지나면 왼쪽엔 기와집과 초가집이 나란히 보인다. 기와집은 옥천 육씨(박정희 아내 육영수가 옥천 육씨이다)를 모시는 제각이고, 초가집은 그 제각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 아담한 흙집과 그 뒤에 기와집이 있다. 흙집과 기와집은 아주 가까이 있어서 하나의 집으로 아는 사람들도 많다. 흙집은 내가 사는 집이고, 뒷집인 기와집에는 MBN 〈나는 자연인이다〉 7회 출연자였던 신종영(쇼에) 씨가 산다. 이렇게 다섯 채의 집에 네 가구가 사는 마을이 멧골이다.


전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마치고 죽어라고 부어라 마셔라 했기에 늦게 일어났고, 늦게 일어난 만큼 늦게 출발해서 약간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장수집에 도착했다. 집 주변에는 묘지가 굉장히 많다. 집 입구 30미터 앞에 묘지 두 개가 마중을 나와 있고, 집 마당 왼쪽 30미터쯤에 또 세 개의 묘가 있고, 그 뒤에도 새로 조성된 묘지가 있다. 집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묘지 천국이다. 그래서 이 동네 이름을 멧골이라고 부른다. 시골말로 메가 묘다. 묘가 많다는 건 좋은 점이 꽤 있다. 우선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는 지형으로 풍광이 좋다. 동북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을 향하여 내려다보이는 저수지와 그 아랫마을들. 거실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저수지 아래에 넓은 들판과 그 들판 끝에 상서산이라는 균형 잡힌 산이 봉긋이 솟아있다. 두 번째로 좋은 점은 묘가 많기에 쉽게 개발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땅값 또한 오르지 않을 것이고 이 지형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이곳 논밭은 평당 5만 원을 넘지 않는데 나는 이곳에 이사한 지 몇 개월이 지나서 논 두 필지를 삼사만 원에 사는 행운도 얻었다. 세 번째로 좋은 점은 묘가 많다 보니 논밭이 적고 상대적으로 농사를 적게 짓다 보니 과수원이나 축사가 없다. 장수가 사과와 한우로 유명한데 실상 사과 과수원과 축사 옆에는 사람이 살기 좋지 않다. 과수원은 일 년에 열댓 번 농약을 쳐대고 축사에선 늘 소똥 냄새가 진동한다. 암튼 멧골은 한마디로 청정지대 그 자체다. 그렇지만 이사해서 첫날 혼자서 자려니 묘지가 많은 게 썩 유쾌하진 않았다. 혹시라도 뭔 일이 생기면 대비활하려고 출입문 안쪽에 긴 몽둥이를 세워놓고 잤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누군가 들어와서 그 몽둥이를 먼저 잡으면 정말 뭔 일이 생기는 건 나였다. 다음날부터는 왕조현이 나오는 영화 〈천녀유혼〉을 생각하면서 어떠한 유혹이 있더라도 착하게 대하자는 심정으로 살다 보니 금방 익숙해졌다. 


처음엔 밥상이 없어서 바닥에 김치와 장아찌, 밥과 국을 놓고 식사를 했다. 거실에 앉아 저수지와 상서산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는데 이렇게 맛있는 밥이 있을 수 있을까? 밥 한 술 뜨고 저수지 바라보고, 또 밥 한 술 뜨고 상서산 바라보고~ 반찬도 필요 없었다. 이렇게 행복하고 즐겁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고 모든 걸 다 버리고 내려온 게 정말 뿌듯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숨 막히고 차 막히고 복잡한 도시에서 꽉 막힌 상자에 갇힌 듯 일하고 있었는데 이런 눈부신 풍경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고 자유롭게 산책하고 농사일하고 내 영혼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남자들은 군대 제대한 첫날 다시 불려가는 꿈을 많이 꾼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끔찍한 상상이 들어 혹시 뭔 일이 생겨 다시 올라가게 된다면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궁리도 해봤다. 그러면서 밥을 먹다가 혼자서 크게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이게 해방감이구나. 방바닥에 떨어진 밥 한 알까지도 주워 먹으면서 행복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시골살이가 이런 거구나 싶을 만큼 정말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감자 농사를 시작으로 온갖 쌈 채소도 가꾸었고, 벼, 서리태, 들깨, 참깨, 생강, 토란, 수수, 옥수수, 고구마, 참외, 수박, 오이, 가지, 고추 등 온갖 작물을 키우고 수확하고 맛볼 수 있었다. 개나 고양이와 그다지 친분이 없는 편이었는데 뒷집에서 기르던 강아지 봉구와 친해졌고, 역시 뒷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양이와 그 자녀들, 손주들하고도 친해졌다. 지금도 주변을 향해 “가을아~ 까무?” 하고 소리치면 고양이들이 달려오고 반가워한다. 며칠 전 고양이 ‘한비’가 경주에서 태어나 서울을 거쳐 장수로 왔는데 도통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궁금하다.


멧골은 농약을 써서 농사짓는 사람이 없는 편이라서 저수지에는 민물새우가 가득하고,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축제를 한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쏟아질 듯하고 주위엔 반딧불이가 날아다닐 때 마당에 앉아 맥주 한잔 마시면서 노래 한 곡 불러보는 삶을 누가 맛볼 수 있을까? 가을에는 메뚜기가 지천에서 뛰어다녀 그 녀석들을 붙잡아 볶아먹는 재미, 겨울엔 팔뚝만한 칡을 캐서 먹고 그 귀한 OOO도 먹을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쌀을 갖다주면 난 막걸리를 한 달에 두 번씩 담가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마시고 밤새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늦잠을 자기도 했다. 이른 봄엔 머위나물, 광대나물, 냉이, 곰보배추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4월이 되면 두릅과 취나물로 장아찌를 담기도 했다. 목련꽃차, 진달래꽃차, 민들레꽃차, 달맞이꽃차, 칡꽃차, 어린쑥차, 아카시아꽃차, 뽕나무 오디, 다래, 먹감 등도 지천이라 맘만 먹으면 온갖 꽃차와 곶감도 실컷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매동제에 내려가 가만히 낚싯대 던져 놓고 맑은 하늘과 구름, 산들을 바라볼 땐 내가 신선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서 ‘農밀한 시골생활’을 적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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