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vintage

by 센터 posted Dec 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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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jpg동묘 벼룩시장에 가면 명품구제라는 간판을 걸고 누군가 사용하던 것들을 잘 손질해서 판매하는 곳들이 눈에 띈다. 근래엔 빈티지 마니아족까지 등장하면서 빈티지 제품이 유행이다.


빈티지란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처음 그 가치의 몇 배를 채워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오래된 포도주 같은 주류, 청바지 같은 의류, 가구 또는 악기들까지 빈티지를 많이 찾는다. 오래된 빈티지 악기 중 바이올린, 첼로 같은 경우는 수억 원을 웃돈다. 국내에서 어쿠스틱기타(통기타)에 빈티지를 찾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60~70년대 야마하기타 빨강라벨이라는 합판 기타이다. 물론 국내 기타에도 간간히 세고비아나 삼익 같은 오래된 기타들이 있으나 빈티지라고 평하기엔 그렇고 그냥 오래된 악기라 생각한다. 악기는 소리로 평가받는 것이기에 기타 연주자 또는 마니아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가장 많이 찾는 악기가 바로 야마하 빨강라벨 기타이다. 60~70년대 당시 2만 원 정도였을 기타가 현재 50~60만 원에도 없어 못사는 정도니 들어보진 못했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 울림통 소리가 고급 올 솔리드[원목기타] 못지않게 소리가 풍부하고 빵빵하다 하니 현 명품 기타의 가격에 비하면 현저하게 낮은 가격이면서도 좋은 울림과 세월을 만질 수 있다는 그 느낌만으로도 기타 마니아들은 한번쯤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악기인 것 같다.


음악에 다시 복고 바람이 불어 일렉 또는 전자 악기 중심의 음악 바탕이 현재 어쿠스틱으로 다시 돌아가는 현상이 뚜렷하게 일어나고 있어 전국의 악기 상가에서 어쿠스틱기타가 70~80년대 이후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쿠스틱기타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 90년대까지 몇 만 원이면 샀던 기타가 이젠 기본이 몇십만 원이며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기타들이 즐비하다. 마니아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타로는 ‘마틴’, ‘테일러’, ‘깁슨’, ‘야마하’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름이 많이 있으며 국내 악기로는 ‘지우드’, ‘쟈마’, ‘크래프트’가 외국 기타에 뒤지지 않는 좋은 소리를 내며 마니아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지우드’는 한때 세계 1위 기업인 콜트에서 장인들이 나와서 작은 공방에서 만든 기타인데 그 호평과 국내 악기로서는 가격이 놀랍다.


오래전 국내에는 세고비아나 삼익 기타 정도면 최고로 알았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 ‘콜트’라는 악기 회사가 생겼다. 이 회사 기타의 질이 상당히 좋으면서도 소리도 뛰어나 세계 기타 마니아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국내 시장 1위는 물론 중저가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세계 1위라 해도 이후 백년이 지난 후라도 사람들은 콜트 콜텍 악기를 빈티지 명품에 올려놓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이 장인[기타 만드는 노동자]의 혼을 넣어 만든 기타가 아니고 돈만 생각하며 노동자의 피와 땀을 짜내 만든 기타라는 것을 알기에···. 명품에는 피 냄새가 아닌 땀 냄새가 나야 한다.


오래전에 국립오페라합창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분들이 거리로 쫓겨나 투쟁하기 시작한 지 6개월가량 되었을 때다. 그 동지들이야 노래가 전문이고 노래를 위해서 대학, 아니 유학까지 다녀올 정도이며 국립오페라 가수라 하니 노래에 대해서 뭔 말이 필요할까. 오페라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자신들이 집회하면 직접 노래하는 것을 두어 번 집회에 참여하며 보았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들 집회에 자기들만 노래하나 했는데, 후에 안 것은 오히려 민중가수들이 그 자리에 서는 것을 더 부담스러워해 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럼 ‘내가 한번 해보자’ 하고 집회 투쟁 때 내가 함께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국립오페라합창단 동지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얼마 전 집회에서 노래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오페라 동지들이 자신들의 집회로 시작한 이래 다른 가수는 처음이란다. 노래하러 가기 전날 몇몇 동지들에게 “내가 내일 오페라합창단지부 집회에서 공연해요” 하니 다들 말을 더듬는다. 내가 봐도 우습다. 공연을 마친 다음날 이랜드 해고자 집회에 가서 “내가 어제 오페라합창단지부 투쟁에서 공연했다”고 하자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인데, 오페라 동지들도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노래하는 가수 중 유일하게 시창이 안 되는 가수, 노래를 쓰는 작곡자 중에서 유일하게 청음이 안 되는 창작자, 그게 바로 ‘나’다. 나는 오페라 노동자들 보다 더 빛나고 더 값진 명품은 아닐지라도 버릴 만큼 가치가 없는 그런 노동자도 아니며 때론 어디선가 내 소리의 가치를 빛나게 평가하는 동지들이 있고, 오래된 내 노래가 빵빵하고 때론 풍성하게 울림으로 받아 안아주는 동지들에게 ‘오래된 빈티지 정도의 가치는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페라 동지들이 내 공연을 보고 들으며 “한쪽 가슴이 먹먹하다”며 얘기해주었다. 그 감동이 아직도 가슴에 그대로 살아있다.


나는 80년대 운동을 처음 만나서 배웠던 당시의 노래들을 다시 부르고 있다. ‘어머니’, ‘의연한 산하’, ‘전진하는 새벽’, ‘선봉에 서서’. 빈티지한 노래들이 다시 내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전태일 열사 45주기, 다시 되돌아보라 한다.  


 글 | 김성만 문화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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